Alle Kapitel von 재발가 막내 아가씨의 첫 한마디: Kapitel 1 – Kapitel 10

13 Kapitel

제1화

고연준의 목소리는 봄물처럼 부드러웠다.고연준은 재단이 잘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고, 금테 안경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심지어 살뜰하게 미지근한 물까지 한 잔 따라서 아빠 손정욱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그룹 최상층의 회의실 전체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공기에는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나는 구석 소파에 앉아서 손에 든 큐브를 기계적으로 돌리고 있었다.딸깍, 딸깍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그 사람들의 눈에 나는 그저 머릿수를 채우는 용도이자, 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였기 때문이었다.내 맞은편에 앉은 유태오는 커피잔을 들어서 한 모금 홀짝였다.오늘 이 자리를 밀어붙인 장본인이었다.동시에 재계에서는 사람을 잡아먹고도 뼈 하나 남기지 않는 웃는 얼굴의 늑대로 악명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손 회장님,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아요.”“오늘 밤 12시가 지나고 내일 아침 장이 열리면, SS그룹의 주가는 바닥을 뚫고 곤두박질칠 거예요.”“그때가 되면 이 몇천억 원조차 손에 넣지 못하실 거고요.”유태오의 나른한 말투는 마치 내일의 날씨라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아빠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고 이마에는 핏줄이 불거졌다.아빠는 탁자 위에 놓인 두툼한 인수합병 계약서를 마치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라도 되는 것처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한쪽에 서 있는 오빠 손재우는 밤을 새운 탓에 눈이 새빨갰다.만 18살에 월가를 휩쓴, 손씨 집안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업의 천재였다.그런데 지금은 만년필을 꽉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계약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샅샅이 훑었지만 그 어떤 빈틈도 찾아내지 못했다.“오빠, 다시 한번 봐.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언니 손시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늘 차갑고 도도하던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눈시울마저 붉어져 있었다.오빠가 맥없이 손을 풀자, 만년필이 매끈한 탁자 위를 굴러가며 맑은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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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저 계약서에 무슨 수작이 숨어 있는지는 목차만 훑어봐도 훤히 보였지만, 내가 굳이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전생에서는 사건 때문에 밤을 새우다 과로사를 했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조용한 벙어리로 살고 싶었다.집안이 망하면 망하는 거고, 정 안 되면 신탁기금이나 좀 챙겨서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 그만이었다.나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큐브를 돌렸다.딸깍, 실수로 한 칸을 잘못 돌리는 바람에 큐브가 캐시미어 카펫 위로 떨어졌다.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한 회의실에서는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쏠렸고, 아빠의 눈에는 짙은 짜증과 실망이 스쳤다.오빠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언니는 허리를 굽히고 큐브를 주워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채윤아, 착하지? 밖에 휴게실에 가서 놀래?”말투는 아주 부드러웠고 나를 나무라지도 않았다.심지어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서 껍질을 벗긴 뒤 내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언니가 여기 일이 있어서 그래. 여기 있으면 아빠한테 방해돼.”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눈빛에는 화 대신 그저 쓸모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한 연민만이 담겨 있었다.이것이 손씨 집안 사람들의 교양이었다.그 사람들은 나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때리거나 함부로 다그치지도 않았다.하지만 가장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이 집안의 중심에서 조금씩 떼어 냈다.이때, 고연준도 다가오더니 몸을 낮추면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흠잡을 데 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막내 아가씨, 말 들으세요.”“밖에 제일 좋아하시는 작은 케이크가 있어요. 비서가 같이 가서 만화도 보여 드릴 거예요. 어때요?”그러면서 문밖을 향해 손짓했다.“이 비서, 막내 아가씨 모시고 나가고 문 잘 닫아.”나는 입에 박하사탕을 물고 있었다. 달면서도 씁쓸한 맛이 입속에 감돌았다.고연준의 그 말은 대놓고 주제넘게 나서는 행동이었다.손씨 집안에서 10년을 일했지만 고연준은 돈을 주고 고용한 개에 지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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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오빠는 글자 카드를 들고 몇 번이고 읽어 주었다.나는 무심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결국 오빠는 카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눈시울을 붉힌 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됐어. 빈둥거리는 사람 하나쯤은 우리가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내가 10살이던 해, 언니가 외국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불러왔다.차가운 기계들이 하나둘 내 머리와 이어졌다.검사 결과, 내 대뇌 피질 활성도는 보통 사람과 달라서, 정상적인 언어 논리를 형성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언니는 결과지를 들고 문밖에서 밤새 울었다. 그 뒤로는 아무도 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말할 필요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이는 내가 가장 원하던 삶이었다.그런데 지금, 이 새장이 남의 손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려고 하고 있었다.“데리고 나가.”아빠가 마침내 사포에 갈린 것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채윤이를 들여보내지 마.”이 비서는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고 문밖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그러나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두 발은 마치 카펫에 뿌리를 내린 것 같았다.이 비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힘껏 나를 잡아당겼다.“막내 아가씨, 떼쓰지 마시고 어서 가시죠.”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저 탁자 위의 계약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고연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 내 곁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아빠를 화나게 해선 안 되시죠.”“지금은 발작할 때가 아니에요. 말 들어요. 이따가 제가 사탕 사 줄게요.”발작.내 가족 앞에서는 막내 아가씨라고 부르더니,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가 발작을 일으킨다고 했다.나는 고개를 들어 안경 뒤의 고연준의 두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고연준은 내 눈길에 등골이 서늘해졌는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마 바보라고 생각한 사람의 눈빛에서 카리스마를 내뿜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자 흠칫했을 것이었다.‘착각이야. 분명 착각이야.’“아직도 안 나가고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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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게 저희의 마지막 마지노선이에요.”유태오가 시원스럽게 손을 내저었다.“물론이죠. 저 유태오는 비즈니스에서 신용을 가장 중하게 여겨요.”참으로 대단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나는 소파에 앉아서 입안의 박하사탕을 잘게 깨물었다.고연준은 지난 10년 동안 손씨 집안 사람들의 성정을 너무나 훤히 꿰뚫고 있었다.아빠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았고, 오빠의 약점이 어디인지 알았다. 어떤 다정한 말로 언니가 저항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고연준은 자신은 할 만큼 했고,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착각을 만들어 냈다.그리고 손씨 집안 사람들 모두가 기꺼이 구렁텅이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했다.이윽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회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그 계약서에 손을 대려고 하자, 이번에는 언니가 나를 붙잡았다.언니의 손은 차가웠지만, 이길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제자리로 끌어당겼다.“채윤아, 떼쓰지 마.”언니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다.“얌전히 앉아 있어. 곧 끝나.”언니는 내 어깨를 눌러서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다들 나를 위협될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판을 망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그저 억지로 달래야 하는 짐이자 위기의 순간에 방해만 되는 장식품이라고 여겼다.고연준은 내가 의자에 눌려 앉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아주 살짝 끌어올렸다.그러고는 다시 만년필을 앞으로 내밀었다.“회장님, 사인하시죠.”아빠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눈에는 이미 절망감이 가득했고 얼굴은 잿빛이었다.만년필을 받아 든 아빠의 손이 심하게 떨리면서, 펜촉이 종이 위에 검은 잉크 자국 하나를 남겼다.“사인하시면, 모든 게 끝날 거예요.”유태오가 한쪽에 서 있었다. 마치 사냥감이 덫에 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냥꾼처럼 입가의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나는 아빠의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머릿속에 전생의 산더미처럼 쌓인 사건 기록들이 떠올고, 법정에서 말재주를 겨루던 날들도 하나둘씩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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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 한마디에 아마 다들 뒤통수를 시원하게 맞은 것처럼, 회의실 전체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아빠 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이 탁 소리를 내며 탁자 위로 떨어졌다.앞으로 달려오던 오빠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언니는 입을 틀어막았고, 눈은 너무 크게 뜬 나머지 마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유태오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굳었다. 마치 값싼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이었다.그리고 고연준의 얼굴에 걸려 있던 온화함과 여유는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정적은 꼬박 10초 동안 이어졌다. 에어컨 송풍구에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바람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채윤아, 너 지금 말을 했어?”아빠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마치 못 볼 꼴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다시 한번 말해 봐.”그러나 나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연준에게 못 박혀 있었다.이윽고 고연준은 침을 한 번 삼켰다.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지만, 오랜 세월 쌓아 온 처세술이 본능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막내 아가씨,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거예요?”“이건 사업상 기밀 계약서예요. 어린 아가씨가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하시는 거죠?”고연준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서 계약서를 가져가려 했다.“회장님, 막내 아가씨의 병세가 악화된 것 같네요. 어서 이 비서에게 병원에 모시고 가라고 하시죠.”고연준은 여전히 병이라는 말로 진실을 덮으려 하고 있자, 나는 차갑게 웃고는 손을 휘둘러 남자의 손을 세게 쳐 냈다.찰싹하는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면서, 고연준의 손등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변호사님, 손이 이렇게 떨리시는 걸 보니,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건가요?”나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계약법의 기본 상식이에요. 계약서와 첨부한 문서의 조항이 충돌할 경우에는 계약서를 우선시하죠.”“이 계약서 제6조에는 모든 분쟁을 해외 케이맨 제도의 중재기관이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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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크게 소리친 아빠는 부들부들 떨면서 일어나서 바닥에 쓰러진 고연준을 가리켰다.“고 변호사, 고 변호사는 나를 10년이나 따랐잖아! 난 자네를 박대한 적이 없는데, 왜 이런 짓을 했어?”고연준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고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사실 고연준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공들여 설계한 데다, 월가 출신인 손재우조차 알아보지 못한 완벽한 함정이었다.‘그런데 어떻게 십수 년 동안 바보 행세를 해 온 막내 아가씨에 의해 한눈에 간파당했단 말이야?’“아니에요... 회장님, 오해세요.”고연준은 아직도 두서없이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나는 이 어릿광대를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고개를 돌려 내내 말이 없던 유태오를 바라보았다. “대표님, 페이퍼 컴퍼니 회사를 이용해서 자산을 빼돌리는 수법은 10년 전에 월가에서 이미 마르고 닳도록 써먹은 거예요.”“그걸 지금 우리 그룹에 들이미는 건 좀 수준 낮은 행위가 아닐까요?”정곡을 찌르는 말에 유태오의 얼굴에서 나른하던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곧 몸을 곧추세운 유태오는 아까까지의 구경꾼 같은 태도를 거두고는 다시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눈빛에 약간의 경계심이 더해졌다.“막내 아가씨, 업계 사람들이 전부 사람을 잘못 봤던 모양이네요.”“바보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만큼 영리하시군요.”유태오는 이런 가벼운 말로 당황함을 감추려고 했지만, 나는 느긋하게 의자를 빼내서 상석 옆에 그대로 앉았다.마치 제 집에서 티타임이라도 가지는 사람처럼 태연한 동작이었다.“과찬이세요, 유 대표님.”나는 열 손가락을 깍지 껴서 탁자 위에 올렸다.“저를 영리하다고 칭찬하실 시간에 대표님 자금줄이나 좀 더 걱정하시는 게 좋겠네요.”이 말이 떨어지자 유태오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아빠와 오빠도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온 회의실은 또다시 숨소리만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대표님께서 말씀하신 20조원짜리 인수 펀드, 그거 빈 껍데기죠?”나는 유태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금씩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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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나는 몸을 숙이면서 그 계약서로 고연준의 뺨을 툭툭 쳤다.“고 변호사님, 해외 계좌에 어제 2천만 달러 막 들어왔죠?”“이 돈은 케이맨 제도의 페이퍼컴퍼니를 거쳐서, 마지막에는 고 변호사님의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로 들어갔을 거고요.”“맞나요?”고연준의 동공이 순식간에 흔들리더니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막내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멘탈이 탈탈 털린 고연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 일은 빈틈없이 처리했고 유태오조차 구체적인 자금 이동 경로는 몰랐다.‘내가 어떻게 알아냈냐고?’사실 나는 제대로 조사한 적은 없었다.전생에 이런 국제 기업 범죄 사건을 너무 많이 다뤄서, 이런 자금 세탁 경로라면 눈을 감고도 그려 낼 수 있었다.나는 그저 가장 확신에 찬 말투로 한번 떠봤을 뿐인데, 고연준이 제 발이 저려서 자백한 것이다.“신의를 저버리고 이런 사기를 저질렀으니, 하, 감옥에서 몇 년을 썩어야 하죠?”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계약서를 그의 몸 위로 던지고는 고개를 돌려서 아빠를 바라보았다.아빠는 이미 완전히 굳어 있었다.바닥에 쓰러진 고연준을 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눈빛에는 충격과 환희, 죄책감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채윤아, 내 딸...”아빠는 눈시울을 붉힌 채 손을 뻗으며 내게 닿으려고 했지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마치 이 믿을 수 없는 꿈이 깰까 두려운 듯했다.나는 그 손을 피하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빠,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아니에요.”나는 맞은편의 유태오를 가리켰다.“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가시려는 유 대표님이죠.”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유태오는, 이미 비서를 데리고 슬금슬금 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리고 내가 한마디로 유태오의 속셈을 들춰내자, 남자는 걸음을 멈추더니 안색이 극도로 굳어졌다.“막내 아가씨,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저희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네요.”“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다고 의리까지 저버릴 필요는 없죠. 오늘은 폐를 많이 끼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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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이 말이 나오자 유태오뿐만 아니라 아빠와 오빠까지 얼어붙었다.남부의 부지는 사실 애물단지였다. 정부가 줄곧 개발 계획 승인을 내주지 않아서, 몇 년째 손에 쥔 채 썩고만 있었다.반면 유태오의 신에너지 회사는 현재 자금 사정이 빠듯할 뿐, 실제로는 핵심 우량 자산이었다.이는 대놓고 강도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꿈도 꾸지 말아요!”유태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2000억짜리 회사를 썩은 땅이랑 바꾸자고요? 막내 아가씨,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나는 서두르지도 화내지도 않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대표님,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네요.”“저는 대표님과 거래하는 게 아니에요. 돈을 써서 목숨을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리는 거죠.”“자금줄이 끊겼다는 소식이 새어 나오는 순간, 대표님의 그 신재생에너지 회사는 채권자들에게 곧바로 뜯겨 나갈 거예요.”“대표님은 그 회사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빼앗기시겠죠.”“지금 제게 넘기시면, 적어도 체면은 지키면서 이 판에서 물러나게 해 드릴게요.”몸을 일으켜서 유태오 앞으로 다가간 나는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대표님, 해외에 있는 그 혼외자, 다음 달에 치료비가 엄청나게 들어가죠? 그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실 건가요?”그 말에 유태오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뒤로 물러서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당신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유태오가 손에 쥔 모든 카드와 비밀이, 십여 년 동안 바보 행세를 해 온 한 여자의 눈에 훤하게 보였다.다시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 물러난 나는 다시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3분 드릴게요. 양도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이 문을 나가지 못할 거예요.”회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고연준의 억눌린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결국 멘탈이 무너진 유태오는 두 손을 떨며 몸에 지니고 다니던 법인 인감을 꺼냈다.“사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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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오늘은 저 변호사가 너무 나빴어요.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잖아요.”“그래서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인 이 핑계가 조금 억지스럽기는 했지만,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부모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내 딸...”아빠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나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내 몸을 부서뜨려 버릴 것처럼 꼭 껴안았다.“아빠가 잘못했어. 내가 눈이 멀었어!”“그동안 네가 그렇게 많은 설움을 겪게 했구나!”언니도 달려와서 나를 끌어안더니 울음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미안해. 채윤아, 언니가 미안해.”“나는 네가 정말... 네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어.”오빠는 한쪽에 서서 말없이 눈물을 훔치더니, 내게 다가와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동작은 부드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존중이 담겨 있었다.“채윤아, 오빠가 앞으로 다시는 너한테 성가시게 굴지 않을게.”“우리 집안일은 앞으로 네가 결정해.”나는 가족들이 안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그러나 마음속에는 그리 큰 파문이 일지 않았다.전생에 고아로 살아온 경험 탓에, 이렇게 뒤늦게 찾아온 혈육의 정에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그렇다고 그것을 이용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아빠, 그만 우세요.”나는 아빠를 살짝 밀어내면서 휴지를 뽑아 건넸다.“고연준 변호사는 잡혀갔지만, 법무팀에는 분명 그 사람의 프락치가 더 있을 거예요. 그룹 내부 정비를 당장 시작해야 해요.”아빠는 눈물을 닦고 곧바로 평소의 단호하고 매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걱정 마라. 아빠가 내일 법무팀을 위에서 아래까지 싹 갈아엎으마. 미꾸라지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을 거야!”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번거롭게 하실 필요 없어요.”나는 아빠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빠, 법무팀 전무 자리는 굳이 밖에서 사람을 뽑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제가 맡을게요.”이 말이 나오자 세 사람이 다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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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 사건은 고 변호사님이 생전에... 아, 아니지. 감옥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계속 맡으셨던 사건이에요. 이제 전무님께서 넘겨받으셨으니 제가 한번 읽어 드릴까요?”문기범은 일부러 ‘읽어 드릴까요’라는 말을 아주 강조하듯 발음했다.내가 법률 문서를 읽지 못할 거라고 대놓고 깔보는 것이었다.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손에 든 자료를 계속 넘겼다.“상무님은 고연준 변호사님을 몇 년이나 따르셨죠?”문기범이 잠시 멈칫했다. 내가 이런 걸 물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5년이요.”“5년이요?”나는 그제야 서류를 덮고 고개를 들면서 문기범을 바라보았다.“5년이나 따라다니면서 뒤처리하는 법도 못 배웠나요?”문기범의 안색이 변하더니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전무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나는 어젯밤 막 정리한 재무제표 한 부를 문기범의 앞에 던졌다.“서부 사업의 최초 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상무님이시죠.”“일부러 위약 조항에 모호한 부분을 남겨서 상대방이 파고들 틈을 만들었고요.”“그 뒤로 상대 회사 재무팀에서 매달 당신 아내의 해외 계좌로 이른바 자문료를 보내 줬고요.”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차갑게 남자를 바라보았다.“다 합치면 거의 40억이더군요.”“상무님, 이 돈이면 안에서 한 10년쯤 지내기에 충분할까요?”문기범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거의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어제 회의실에서 벌어진 일은 단편적으로만 전해 들었다. 그저 회장인 아빠의 배경을 써서 위세를 부린 정도로만 생각했지, 바보라고 소문이 난 나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었다.하지만 이제야 문기범은 당시 고연준이 느꼈던 공포를 똑같이 맛보았다.“전무님, 저는...저는 고연준 변호사님에게 등을 떠밀린 거예요!”문기범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면서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고연준 변호사님이 시킨 거예요. 말을 듣지 않으면 저를 해고하겠다고 했어요!”나는 차갑게 웃었다.“좋아요. 정말 등을 떠밀린 거라면, 고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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