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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가을바람에 흩어진 약속: Chapter 1 - Chapter 10

17 Chapters

제1화

회랑에 바람이 일었다.아직 앳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남녘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류지란이 어떻게 보살펴 주었는지, 연정헌은 그 일들을 조곤조곤 들려주었다.전생에는 그 눈에 어린 다정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하지만 이번 생에는 기대가 가득한 그 눈을 마주하자, 좀처럼 꺾이지 않던 오기가 문득 사그라들었다.나는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 아씨는 심성이 참 고우니, 곁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십시오."...잠시 뜰 안이 고요해졌다.연정헌은 웃음을 거두고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한참 뒤, 품에서 불쑥 백옥 비녀를 꺼냈다.어릴 적 봉록을 모아 내게 만들어 준 사랑의 징표였다."부인, 그 여인을 아내로 맞으려는 게 아니오. 잊었소? 한 사람만 사랑하며 평생 함께하겠다고 했잖소."'한 사람만 사랑하겠다고...'눈을 내리깔고 희미하게 웃었다.가슴에 맺힌 쓰라림이 온몸으로 퍼졌다.지난 생에 목숨으로 협박해 류지란을 쫓아낸 뒤, 연정헌은 달라졌다.말수가 부쩍 줄었다.낮에는 정무에 매달리고 밤에는 서재에 틀어박혔다.툭하면 이런저런 핑계로 먼 곳에 다녀오기도 했다.그럴 때마다 까닭을 물으면 나랏일이 바쁘다는 대답뿐이었다.연회에 나설 때면 명문가의 부인들이 부군께서 나라를 위해 그토록 애쓰시니 앞날이 창창하시겠다며 내게 축하를 건넸다.그때는 어리석었다.정말로 집안과 나라밖에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그 치하 뒤에 숨은 동정과 안타까움은 알아보지 못했다.그러다 두툼한 편지 뭉치를 끝까지 읽고, 류지란과 수년 동안 끊임없이 마음을 주고받았다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한 사람만 사랑하려던 게 아니었다.그저 타협하고 체념했을 뿐이었다.가슴 깊이 품은 사람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다.울고불고 목숨까지 걸고 떼를 쓰는 사이, 나만을 향하던 마음은 이미 닳아 없어져 있었다.고집스러운 나를 이기지도, 어린 시절 맺은 부부의 정을 버리지도 못했기에 류지란을 향한 마음을 억누른 채 내 곁에 남았던 것이다.나는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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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채령은 멍하니 나를 보더니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마님?"나는 눈을 감았다."어서 가."그날 밤, 잠자리에 들 채비를 마쳤을 때였다.연정헌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애써 감추려 해도 얼굴에 어린 들뜬 기색은 내 눈을 피하지 못했다."오늘 밤은 그 아씨와 함께 계시지 않고 어쩐 일이십니까?""아직 정식으로 맞아들인 게 아니지 않소."나는 짧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려 누웠다."내일 집사에게 일러 우선 첩을 들이는 예에 맞춰 준비하게 하겠습니다.""그리하시오."침상 곁에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연정헌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웠다.팔이 내 허리 위에 얹혔다."부인."몸이 굳었다.어둠 속이라 서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고맙소.""예."얼마 지나지 않아 관아에서 이혼 문서가 왔다.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 몇 장이 떨어졌다. 벌써 가을 기운이 도는 듯했다.집사가 장부를 건넸다.혼례 잔치에 쓸 물품이 적혀 있었다.채령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마님, 어찌 굳이 그 아씨를 나리 곁에 두려 하십니까?""나리께서 마님을 그리 아끼시는데, 반대하셨다면 그 아씨도 이 집에 발을 들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장부를 내려놓으며 한숨처럼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마음은 이미 내게서 떠났는데, 사람만 억지로 붙잡아 두면 무슨 소용이겠어?"첩을 들이는 데 이토록 번거로운 예식은 필요하지 않았다.하지만 류지란은 달랐다.오후 내내 장부를 들여다보고서야 쓸 물품을 겨우 정했다.막 찻잔을 들었을 때 하인이 소식을 전했다."마님, 나리께서 폐하를 모시고 나가셨다가 습격을 당하셨습니다."너무 급하게 벌떡 일어선 탓에 갓 우린 차가 담긴 주전자가 그만 넘어졌다.뜨거운 찻물이 온몸에 쏟아졌다.특히 두 다리가 불에 덴 듯 쓰라렸다.채령이 의원을 부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쳐 내고, 아픔을 무릅쓰고 대문으로 달렸다.마침 바람이 한 차례 불어왔다.오후 내내 내릴 듯 말 듯하던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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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튿날 아침, 의원이 연정헌의 상처가 어떤지 알려 주었다."나리께서는 본래 기골이 장대하십니다. 어제 기력이 빠지셨던 건 그자들이 검에 몸의 힘을 빼는 약을 발라 두었기 때문입니다.""이제 큰 탈은 없으니 며칠만 더 쉬시면 곧 기운을 차리실 겁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례를 했다.그런데 돌아가려던 의원이 내 안색을 보고는 몸을 잘 돌보시라는 말을 덧붙였다.채령은 여전히 나를 대신해 분을 삭이지 못했다."남도 마님의 안색이 이리 나쁜 걸 알아보는데, 나리께서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괜찮으신지 한마디도 안 물으셨지 않습니까?""새로 온 그 요사스러운 여자에게 단단히 홀리신 게 틀림없습니다.""전에는 분명...""채령아, 말조심해라."내 말이 떨어지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류지란, 부인께 문안드립니다.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나서야 인사를 올리니, 부디 꾸짖어 주십시오."뜰에서 몸을 낮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지난 생에는 잠깐 보았을 뿐이라, 수수한 얼굴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지금 보니 뺨에는 혈색이 돌고, 눈길을 돌릴 때마다 생기가 넘쳤다.전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예는 그만 올려도 되니 일어나라고 했다.채령에게는 화장함에서 백옥 팔찌 한 쌍을 꺼내 오라 일렀다.첫인사로 주는 선물이었다.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려는데 류지란이 불쑥 나를 불렀다."부인, 잠시 둘이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우리는 지붕이 있는 다리 앞에 나란히 섰다."남녘에서 석 달 동안 나리를 돌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목숨을 구해 드린 보답을 돈으로 하려 하셨습니다."류지란은 고개를 돌려 내 낯빛을 살폈다.내가 대답하지 않자 다시 말을 이었다."그 뒤에 습격을 받았을 때는 제가 대신 막아섰습니다.""그날 밤 내내 제 곁을 지키시더니, 다음 날 저를 댁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셨습니다."잠시 말이 끊겼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소. 여기서 좀 더 지낸 뒤에, 정실과 동등한 지위의 아내로 맞으라 하겠소."그때 류지란이 불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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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저택이 분주해졌다.며칠 뒤 치를 혼례 준비에 모두가 바빴다.그러던 중, 초대장이 도착했다.가깝게 지내는 부인의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을 기념하는 잔치였다.거절하기 어려워 가겠다고 답했다.이튿날 아침, 축하 선물을 챙겨 정나경의 저택으로 갔다.벗인 정나경은 나를 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안색이 어쩌다 이리 나빠졌어?"나는 옅게 웃었다."며칠 전 감기에 걸렸는데, 이제는 다 나았어."정나경은 믿지 않았다.나처럼 변방에서 자랐고, 성미는 나보다도 조금 더 불같았다."남녘에서 여인을 데려와 첩으로 들인다면서? 걱정 마. 네 대신 이 분은 꼭 풀어 줄 테니까."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마, 마님. 큰일 났습니다.""사냥개가 갑자기 날뛰더니 묶어 둔 데서 빠져나가 달아났습니다."정나경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겁만 좀 주라고 했다. 어쩌다 놓친 것이냐?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데려와라!"정나경은 변방에 있을 때부터 사냥개 기르기를 무척 좋아했다.개들은 순했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면 다 큰 사람만큼 키가 컸다.류지란처럼 가냘픈 여인이 그런 개와 마주치면 어찌 될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정나경은 겁에 질려 창백해졌다."단희야, 원래 순한 녀석이야. 조금 겁만 주려던 건데, 멀쩡하던 개가 어쩌다 갑자기 날뛰었을까?"나는 정나경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나 역시 안심할 수 없었다.그저 놀란 것만으로 끝나기를 바랐다.그때 문간이 소란스러워졌다.창을 든 관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흥겹던 잔칫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앞장선 이가 체포 명령서를 꺼내더니 내가 개를 풀어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했다.폐하의 명으로 나를 잡아 관아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다.정나경이 나서서 해명하려 하자 곧장 막았다.오늘은 정나경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잔치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금방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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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검은 관복을 차려입은 연정헌은 훤칠했다.일렁이는 촛불 아래, 늘 온화하던 얼굴은 속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심해 보였다.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도성에 처음 왔던 무렵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나를 못마땅해하던 명문가 여인들이 연회에서 물건을 훔쳤다며 누명을 씌웠다.몰아붙이는 기세에 하마터면 옷까지 벗겨질 뻔했다.자리를 가득 메운 권세가들은 냉담하게 지켜보기만 했다.그때 칼을 들고 내 곁을 지켜 준 사람이 연정헌이었다. 여러 명문가의 미움을 사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그가 사람을 보내 나를 감옥에 가두었다.목이 메어 왔지만 얼굴에는 냉기만 남았다."부군께서도 제가 한 짓이라 여기십니까?"연정헌의 고요한 눈에서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부인, 폐하께서 보내신 이들이 당신의 옥패를 찾아냈소. 오래전에 나경에게 준 물건인 건 알고 있소.""하지만 나경이 이 큰일을 벌인 건 결국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오? 폐하께서도 노하셨으니, 나로서는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야 하오.""걱정은 마시오. 이곳에는 다 일러두었으니, 아무도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요.""불편하더라도 며칠만 여기 계시오. 일이 잠잠해지면 내가 집으로 데려가리다."목소리는 차갑고도 서먹했다.마치 내게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듯했다.그 무심한 눈에서 어떤 감정이라도 찾으려 빤히 바라보았지만, 제 처사가 당연하다는 태도뿐이었다.남아 있던 마지막 정도 그 순간 끊어졌다.떠나기 전, 연정헌은 또다시 나를 가르치려 드는 말투로 말했다."부인, 억울한 건 아오. 하지만 지란은 더더욱 아무 죄가 없소. 나름대로 따져 보고 당신에게 가장 가벼운 벌을 내린 거요.""그만 심통 부리시오. 며칠 뒤에 데리러 오리다."그 뒤로 연정헌이 무슨 말을 더 했는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가슴이 꽉 막힌 듯하고 코끝만 시큰거렸다.감방 문이 다시 닫히자,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웃으려 했지만, 웃음을 짓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한밤중에 감방 문이 거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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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악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갑작스러운 소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연정헌의 얼굴에서 웃음이 굳었다.미간을 바짝 좁힌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대체 무슨 짓이오?""나리께 축하를 드리러 왔소. 왜, 달갑지 않으시오?"좀처럼 볼 수 없는 구경거리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저분, 나경 부인 아니오? 이 집 정실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더니, 대신 따지러 오셨구려.""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경사스러운 날에 관을 들이밀면 어쩌자는 거요. 저리 재수 없는 짓을.""그러게 말이오. 사내가 여러 아내와 첩을 두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그저 첩 하나 들이는 일인데. 저렇게 소란을 피우고 어찌 수습하려는지."...사방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귀에 박힐수록, 연정헌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이제 어머니가 된 사람이니 이번 일은 묻어 두겠소.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꺼지시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행렬에서 칼을 찬 호위들이 나섰다.정나경이 손에 든 바구니를 내던졌다. 바닥에 흩어진 종이돈이 경사스러운 자리에 유난히 거슬렸다."이 신의도 없는 자식. 단희에게 무슨 약속을 했는지 기억은 하시오?""한 사람만 사랑하며 평생 함께하겠다고 했잖소.""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오? 첩을 들이면서 이토록 성대한 잔치를 벌이다니.""단희에게 부끄럽지도 않소?""그 사람이 죽어 가는 건 알고 있소?"주위가 잠깐 조용해졌다.연정헌의 얼굴에서 순간 표정이 사라졌다.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알아들은 듯, 연정헌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한마디만 더 허튼소리를 하면 그간의 정이고 뭐고 없을 줄 아시오."연정헌은 상석에서 정나경을 내려다보았다.새빨간 혼례복에 얼굴은 더욱 희게 보였다.정나경은 기가 막혔다."허튼소리인지 아닌지는 단옥원에 사람을 보내 보면 알 것 아니오? 온 바닥에 흘린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았소."말을 마치자 정나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연정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입을 다물었다.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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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정나경은 연정헌이 정말 관 속을 확인하려 들 줄은 몰랐다. 심단희가 당한 일이 억울하고 분해 찾아왔을 뿐이었다."단희는 이미 죽었소. 시신마저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오?"정나경이 두 팔을 벌려 관 앞을 막아섰다.류지란이 몇 차례 기침하고는 입을 열었다."살아 계시면 직접 뵙고, 돌아가셨다면 시신이라도 확인해야겠습니다. 나리의 경사에 이토록 소란을 피우시니, 저희도 까닭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그분께서 돌아가셨다고 거듭 말씀하시니, 관을 여는 것도 그분을 위해서입니다."류지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정나경을 바라보았다. 눈길에 도발하는 기색이 어렸다."그토록 두려워하시는 걸 보니, 혹시 관 속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닙니까?"사람들의 시선이 정나경 뒤에 놓인 관으로 향했다.군중 속에서 다시 수군거림이 일었다."정말 잔치를 망치러 온 건 아니겠소?""그 부군이 단옥원 부수장인데, 감옥에서 사람 하나 빼내는 게 뭐 그리 어렵겠소?""맞소. 이 집 부인도 엄연히 관원의 가족인데, 감옥에 갔다고 누가 감히 손을 대겠소? 갑자기 죽었다는 것도 이상하오."...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연정헌의 흔들리던 마음이 금세 굳어졌다.직접 검을 뽑아 들고 한 걸음씩 관으로 다가갔다."감히..."정나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 굉음과 함께 관 뚜껑이 날아갔다.그러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옷가지 몇 벌만 남아 있었다.놀아났다는 생각에 연정헌의 눈이 분노로 붉어졌다.손을 내젓자 저택의 호위들이 곧바로 나타났다."저 여인을 쫓아내라."정나경은 비웃음을 흘리며 호위의 손을 뿌리쳤다."밀어낼 것 없소. 내 발로 나갈 테니.""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할 거요.""그때 가서 내 앞에 무릎 꿇고 빌 생각은 마시오."마지막 두 마디에 연정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까닭 모를 짜증이 일었다.'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이지?'예전의 심단희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수해를 다스리러 도성을 비운 사이, 저런 질 나쁜 자들과 어울리다 물이 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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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머리를 문지르던 연정헌의 손이 멎었다."떠나다니 무슨 말이냐? 언제 떠났느냐? 이 처소에 있던 다른 이들은 어디 있느냐?"말을 이을수록 연정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린 시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더듬더듬 대답했다."저, 저는 모릅니다. 며칠 전에 채령 언니가 다른 이들의 몸이 매인 신분을 증명하는 문서를 들고는, 떠나고 싶은 사람은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 다들 떠났습니다.""그런데 너는 왜 남아 있느냐?"연정헌이 매서운 눈으로 시녀를 쏘아보았다.더는 버티지 못한 시녀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소리 높여 빌었다."살려 주십시오, 나리! 아씨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연정헌의 시선이 멎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로 이리 노하셨습니까?""부인의 처소에 사람이 적기에 며칠 일하라고 보냈더니, 어쩌다 이런 소란을 일으킨 것이냐?""나리께서 어젯밤 여기서 주무셨으면 알렸어야 했다.""또 게으름을 피운 것이냐?"나직이 꾸짖은 류지란이 연정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나리, 제 잘못입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지금은 좀 어떠십니까? 아직도 편찮으십니까?""시녀에게 술기운을 풀 국을 끓이라 했습니다. 방 안에 있으니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연정헌이 고개를 저었다."단희의 처소에 있던 시녀들은 다 어디로 갔지? 너는 알고 있느냐?"류지란의 얼굴에 잠시 묘한 기색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부인의 처소에서 일어난 일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나리께 심통이 나신 건지도 모릅니다.""차라리 사람을 보내 부인을 모셔 오시면 어떻겠습니까?""감옥에서 몹시 고생하고 계실 겁니다."그 말을 듣자 겨우 가라앉혔던 연정헌의 화가 다시 치밀었다."고생이라. 과연 그럴까?""나경 부인이 그토록 살뜰히 챙기니, 돌아올 생각도 없을 만큼 편히 지내겠지.""조금도 뉘우칠 마음이 없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감옥에 남겨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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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순간 연정헌은 제 귀를 의심했다."며칠 전이라니? 오늘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느냐?"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달은 하인들은 그저 머리를 조아렸다.뜰에는 살려 달라는 소리만 끊임없이 울렸다.연정헌은 눈앞이 캄캄해져 두어 걸음 비틀거렸다.그가 떠난 날부터 지키라고 남겨 둔 이들도 모두 철수했던 것이다.그동안 심단희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정나경의 말이 불현듯 떠오르자 연정헌의 눈빛이 변했다.더는 생각을 이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다급해진 그는 하인을 걷어차 넘어뜨리고는 말에 올라 단옥원으로 내달렸다.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치어 넘어뜨렸는지도 몰랐다.검을 든 채 심단희가 갇혀 있던 감방에 도착했지만, 안에는 그림자 하나 없었다.옅은 피비린내만 떠돌았다."어디 있느냐?"연정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검은 장포 차림에 손에 든 검이 서늘하게 빛나, 마치 지옥에서 빚을 받으러 온 악귀 같았다."나, 나리께서 명을 내리신 것 아닙니까?"그날 고문을 가했던 관리가 두 다리를 떨며 말했다."나, 나리 댁의 귀한 분께 무례를 저질러 갇힌 자라고, 고생을 좀 시키라 하셔서..."관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연정헌의 얼굴이 악귀보다도 무서웠다.주위가 일순 고요해졌다.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도 흔들렸다.한참 뒤, 그가 낮게 웃은 듯했다."그래서 고문을 했다는 말이냐?"그날 도성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황제의 총애를 받던 연정헌이 무슨 까닭인지 단옥원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을 베었다는 것이었다.황제는 크게 노하여 곤장 서른 대를 내렸다.연정헌은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 왔다.연씨 저택에는 의원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류지란은 손수건을 비틀어 쥔 채 눈시울을 붉혔다.한밤중에는 다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연정헌은 줄곧 한 사람의 이름만 불렀다.이튿날 눈을 뜬 그는 곧장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했다."제정신이십니까?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십니다."부축하려 다가간 류지란은 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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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정나경의 저택에서 하인들이 몇 차례나 나왔지만, 연정헌의 얼굴은 내내 새파랗게 굳어 있었다.한낮이 지나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몸을 때리는 빗줄기를 따라, 뒤로 붉은 핏물이 길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대문이 다시 열렸다.우산을 받쳐 든 정나경이 연정헌을 내려다보았다."단희는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요.""이미 죽었소."연정헌이 얼어붙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나를 미워하는 건 아오. 하지만 그런 일로 농을 해서는 안 되오.""멀쩡하던 단희가 어찌 죽었단 말이오? 부탁이오.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시오.""내 잘못인 줄 아오. 그 사람을 믿었어야 했소.""나는..."정나경이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멀쩡하다고 했소? 감옥에 처넣고도 멀쩡할 줄 알았소?""그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오? 이틀 밤낮을 모진 고문에 시달렸는데 어찌 멀쩡하겠소?"연정헌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했소?"정나경의 눈이 온통 붉어졌다."시치미 떼지 마시오. 뒤에서 은밀히 일러둔 건 당신 아니오? 그래도 옛정을 조금은 생각할 줄 알았소.""내가 어리석었소. 조금만 더 일찍 갔더라면 그토록 고초를 겪지는 않았을 거요.""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건 당신이오. 그런데 그동안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아시오?""칙명을 받고 남녘으로 수해를 다스리러 갔다가 연락이 끊겼을 때, 단희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시오?""조정에서 사사건건 맞서며 명문가들을 죄다 적으로 돌려놓았으니, 다들 당신이 웃음거리가 되기만을 바랐소. 당신이 사라지자 그 화살이 전부 단희에게 향했소.""연회에서 그 집 여인들은 대놓고, 때로는 뒤에서 비웃고 깎아내렸소. 음식에 손을 대거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문까지 퍼뜨렸소.""집안 좋다는 사내들은 날마다 주위를 맴돌며 희롱하기까지 했소.""한번은 물에 밀어 넣기까지 했소. 내가 마침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거요.""그런 일을 당하고도 당신 소식을 조금이라도 안다는 이가 있으면, 참인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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