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그 말로 힘을 모두 소진한 듯했다.나도 침상 위에 힘없이 주저앉았다.방 안의 촛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우리는 서로의 눈에 제 모습이 비칠 만큼 가까이서 마주 보았다.틀린 말이 아니었다.사실 처음부터 연정헌이 미친 척한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와 형을 따라 전장에 나갔다.훨씬 참혹한 광경도 겪어 본 사람이었다.열 살 때 적들이 눈앞에서 아버지와 형의 목을 베었다.그런데도 이튿날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적의 군량고를 불태웠다.그런 참상을 겪은 사람이, 고작 류지란에게 속았다고 제정신을 잃을 리 없었다.어린 나이에 이름을 떨치기까지, 남들은 겪어 보지 못할 고난을 수없이 견뎠다.돌아보면 나는 그 반생을 지켜본 사람이었다.어쩌면 우리는 자신보다 서로를 더 잘 알았다.연정헌이 웃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웃음이었다."이제 돌아갈 수 없는 거요?""당신을 지키지 못해서, 혹은 지란을 데려와서 떠난 거라고 수없이 나를 달랬소.""다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소. 당신을 고문한 자들도 죽였고 지란도 죽였소. 그런데 당신 눈에서 나를 향한 마음이 보이지 않소."잠긴 목소리에는 끝없는 고통이 배어 있었다."처음 보았을 때부터 미친 척하는 줄 알면서도, 내 곁에 남아 주었구려.""어릴 적부터 쌓아 온 정마저 내가 다 써 버린 셈이오?"그의 흐느낌은 변방의 바람처럼 울었다.어린 나와 어린 그는 자라는 동안 서로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해 버렸다."말해 주시오. 언제부터 떠날 생각을 했소?"먹구름이 달을 가렸다.고개를 돌리자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 있었다."나리께서는 전생과 현생을 믿으십니까?"잠시 방 안이 고요해졌다.그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어릴 때부터 우리를 알던 이들은 천생연분이라고 했습니다.""그 뒤 나리 집안에 변고가 닥쳐, 제가 시신 더미에서 나리를 끌어냈을 때 두 눈이 새빨갰습니다.""다들 심지가 굳어 큰일을 맡을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날 밤 나리께서는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사람들은 모두 연정헌이 제정신을 잃었다고 했다.황제가 보낸 어의도 몇 번이나 살피러 왔다.지금은 자극을 주면 안 되며, 가까운 사람과 지내면 나아질 여지가 있다고 했다.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형은 그가 어릴 때 이미 전장에서 죽었다.그의 어머니마저 도관인 청허관에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은 뒤였다.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뿐이었다.황제는 연씨 가문이 나라에 바친 공을 늘 잊지 않았고, 이제는 내게 연정헌 곁을 지키라고 했다.돌고 돌아도 도성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다.다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소식을 들은 동생과 어머니가 당장 도성으로 오겠다고 했다.나는 말리지 않았다.연정헌은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 곁에서 떨어지지 못했다.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주위에 다른 사내가 나타날 때마다 크게 성을 냈다.우현을 볼 때는 특히 심했다.나는 받아 주지 않았다. 소란을 피우든 말든 내버려 두었다.우현은 오라버니가 보낸 사람이었다. 내가 누군가 따라다니는 것을 싫어하자, 갖은 방법으로 내 일상에 스며들었던 것이다.그날은 다른 관원 부인들의 잔치에서 술을 많이 마셔, 우현의 부축을 받고 돌아왔다.연정헌은 뜰에 앉아 있었다.희디흰 장포 차림의 연정헌은 얼굴빛이 옥처럼 맑고 온화했다.하지만 나와 우현이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보자 불같이 성을 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무슨 짓이냐?"우현이 재빨리 나를 제 뒤로 옮겼다."아씨를 방으로 모셔다 드리는 중입니다."두 사람은 날카롭게 맞서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그 사이에 낀 나는 머리가 깨질 듯했다."나리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돌아가십시오!"연정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서운함이 어렸다."어찌 내게 이러오?"나는 대꾸하지 않고 우현에게 부축해 들어가 달라고 했다.휘장을 내리고 나니 가슴에 무언가 걸린 듯 답답했다.한밤중, 잠결에 누군가 침상으로 기어오르는 듯했다.눈을 번쩍 뜨자 정신
연정헌이 깨어난 것은 한밤중이었다.곁에 심단희가 없어 어리둥절했다.분명 심단희를 안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잠시 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이었다.후회에 짓눌려 참지 못하고 제 뺨을 후려쳤다.그러다 류지란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그녀를 찾으려고 몸을 일으켰다.뜰에 나서자 구석에 서 있는 류지란이 보였다.부르기도 전에 그늘 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확실히 알아봤어? 단희가 정말 돌아왔어?"밝은 달빛에 류지란의 얼굴 절반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 어딘가 섬뜩해 보였다."돌아온 지가 언젠데. 일을 어떻게 한 거야?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멀쩡히 돌아온 건데?"그늘 속 인물이 목소리를 낮췄지만 짜증은 감추지 못했다."그렇게 명줄이 길 줄 누가 알았겠어. 더 오래 괴롭히고 싶다던 건 너잖아. 내 말대로 그날 정헌의 부하들을 속여 내보낸 뒤 바로 죽였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야? 단희를 죽여!"연정헌은 그 뒤의 말은 듣지 않았다.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도 몰랐다.머릿속이 윙윙 울리며 수많은 목소리가 뒤엉켰다.그날 부하들은 그가 떠난 뒤 곧장 철수했다고 말했다.분을 이기지 못해 단옥원으로 쳐들어가 몇 사람을 죽였다. 깨어난 뒤 다시 조사에 나섰지만, 몇 년을 함께한 호위 하나가 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죽기 전에 편지도 남겼다.그날 술을 조금 마시고 다른 이의 돈을 받아, 동료들을 전부 철수시켰다고 했다.큰 죄를 지었으니 죽음으로 갚는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그저 뜻밖에 벌어진 일이라 믿고 있었다.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심단희를 해친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그 모든 고통을 제 손으로 심단희 앞에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어둠 속에서 연정헌이 손을 들자, 몇 사람이 소리 없이 내려섰다."오늘 밤은 파리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옷을 걸친 채 조심스레 돌아온 류지란은 유난히 고요한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웃었다."누군가 떠났다고 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 삼 년이 그 증거 아닙니까?"연정헌이 굳었다."제가 없으면 안 되는 건 그토록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이제 제가 나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제게도, 지란에게도 그러셨습니다."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처음에는 저만 사랑하겠다고 하셨습니다.""그러다 남녘에서 지란을 데려오셨습니다. 그때 나리 눈에는 그 사람을 향한 사랑도 있었습니다. 둘 다 눈앞에 있는데도 나리 마음은 언제나 그쪽으로 기울었습니다.""저를 옥에 가두실 때 정말 사심이 없으셨습니까? 제가 굽히고 잘못을 빌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일로 목숨을 잃을 뻔할 줄은 모르셨을 겁니다."연정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지금 이리 매달리시는 것도 제가 먼저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게 익숙하지 않으신 겁니다.""처음부터 지란을 쫓아내고 평생 억지로 곁에 붙들어 두었다면 저를 원망하고 미워하셨을 겁니다. 그랬다면 지금 그리워하는 사람도 제가 아니었을 겁니다."그 순간 연정헌의 큰 몸이 조금씩 굽었다.몽롱한 가운데, 자신이 꾼 꿈이 떠올랐다.'정말 그런 사람이었던가. 가질 수 없는 것만을 늘 원했던가.'나는 두어 걸음 물러서서 몸을 낮추어 예를 갖추었다."나리, 그 아씨를 첩으로 들이셨으니 잘해 주십시오.""우리 사이에는 어린 시절의 정만 남아 있어도 충분합니다. 이제 저를 찾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바람이 불어 비단 치맛자락이 나부꼈다.어릴 적 연정헌이 만들어 준 백옥 비녀가 어찌 된 일인지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나는 돌아서서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다만 바람을 타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채령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나를 보았다."아씨?"나는 고개를 저었다.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었다.누군가 눈물을 조금 흘린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튿날 연씨 저택에 큰
짙푸른 장포를 걸친 연정헌은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나를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떠난 뒤 연정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정나경에게 들었다. 누구에게도 살갑게 대하지 않아 몇 년 새 미움을 많이 샀다고 했다.들킨 마당에 숨길 것도 없었다.눈을 마주하며 나직이 인사했다."오랜만입니다."연정헌은 감격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살아 있을 줄 알았소. 미안하오. 그때 당신을 오해했소. 옥패만 보고 성급히 결정해서는 안 됐소.""아직도 내가 밉소? 그자들이 멋대로 당신을 고문할 줄은 정말 몰랐소."나도 연정헌을 미워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밉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두 번의 생에 걸쳐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시간은 상처를 아물게 했다. 막상 마주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담담했다."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입니다."내 목소리는 평온했다.그런데 연정헌은 불쑥 언성을 높였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아니오. 지나가지 않았소. 그동안 내내 조사했소. 다들 내가 조정에서 원한을 사서, 누군가 본때를 보여 주려 한 일이라고 하더구려.""어찌 그 답을 받아들이겠소?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 때문에 그토록 고초를 겪었잖소.""이번에는 내 손으로 해칠 기회까지 내주었소."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나 자신을 죽이고 싶었소. 하지만 아직 당신을 찾지도 못했는데..."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연정헌이 불쑥 한 걸음 다가와 손을 잡으려 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갚으리다."손이 닿기도 전에 채령이 내 앞을 막아섰다. 위축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나리, 언행을 삼가 주십시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러시면 저희 아씨의 명예에 누가 됩니다."연정헌이 곧장 성을 냈다."삼 년을 못 보았어도 단희는 정식으로 혼례를 치른 내 아내다."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채령이 분을 참으며 입을 열려 했다.피로가 밀려왔다.앞으로 또 이 일로 다
몸을 완전히 추스른 뒤, 나는 동생의 장사를 돕기 시작했다.변방은 서쪽 이역과 가까웠고, 그곳 사람들은 향료를 좋아했다.심승규는 어려서부터 칼과 창을 다루는 일에는 흥미가 없고 오로지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집안에서도 사내라면 모두 전장에 나가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았기에, 장사를 제법 크게 벌이고 있었다.하지만 내가 동생의 일을 돕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완강히 반대하셨다.먼 곳까지 두루 다녀야 하는 장사라 내 몸이 걱정되셨던 것이다.오라버니와 심승규가 거듭 설득하고서야 마지못해 허락하셨다.떠나는 날, 어머니는 내게 붉고 두툼한 겉옷을 걸쳐 주며 눈물을 글썽였다."단희야, 힘들면 편지를 보내거라. 오라버니를 보내 데려오마."어머니가 다시 울려 하자, 심승규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머니, 제게는 그런 다정한 말씀 한 번도 안 해 주셨습니다.""이 능청스러운 녀석아. 너와 네 누이가 같으냐?"어머니가 동생을 흘겨보자 무거웠던 분위기가 단숨에 풀렸다.긴 행렬이 길을 나섰다.기대와 걱정이 함께 일었다.'지난 생과는 전혀 다른 이 길 끝에, 내가 바라는 삶이 있을까?'북풍이 울고 낙타 방울 소리가 울렸다. 누구도 그 답을 줄 수는 없었다.그렇게 어느덧 삼 년이 흘렀다.나를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힌 정나경이, 한참 뒤 불쑥 내 몸을 툭 쳤다."바보야, 도성에 오면서 어째 말도 안 했어? 아무것도 준비 못 했잖아.""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탔어?""그래도 안색이 좋아졌으니 더 따지지는 않을게."눈빛에는 반가움 섞인 투정이 어렸다. 어느새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조금 살이 오른 모습만 보아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원래는 올 생각이 없었어."나는 정나경의 손을 잡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이번 물건은 동생이 가져오기로 했는데, 서쪽 이역에 일이 생겨 당장 돌아올 수가 없대. 여기서는 급히 보내 달라고 성화라 내가 왔어.""그런데 내가 여기 온 걸..."망설이자 정나경이 곧장 알아들었다.제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