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원수의 집의 며느리로 위장취업: Capítulo 21 - Capítulo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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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방화

공항을 떠난 지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때였다. 본사에 도착한 우리는 직원들이 대피한 뒤쪽 출입구로 들어갔다. 도진은 이동 수단을 구하지 못해 한동안 지체했다.우리가 로비 라운지에 들어섰을 때, 바깥에서 그의 고함이 들렸다.쾅-!문이 거칠게 밀려 열리며, 피비린내와 독한 시너 냄새를 풍기는 한 마리의 미친 짐승이 들이닥쳤다. 박도진이었다. 그의 몰골은 이미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정릉동 단칸방 시멘트벽에 스스로 찧어 찢어진 이마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뺨에 흉측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깁스를 한 오른팔은 흙탕물에 절어 덜렁거렸다. 그리고 그는 시너가 절반쯤 든 20리터짜리 플라스틱 통 두 개를 성한 손으로 번갈아 옮겨 문 안에 밀어 넣었다."강은서! 강은서 어디 있어?! 당장 기어 나와!"도진이 핏대를 세우며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초점을 잃은 채 살기와 원초적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시너통 뚜껑을 거칠게 비틀어 열더니, 로비의 최고급 수입 대리석 바닥과 제 머리 위로 아낌없이 들이붓기 시작했다.콸콸콸-!코를 찌르는 역겨운 시너 냄새가 순식간에 웅장한 로비 전체를 메스껍게 집어삼켰다. 로비에 있던 남아 있던 보안 요원들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도진은 시너에 흠뻑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주머니에서 은색 지포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챙-!치익!작은 부싯돌 마찰음과 함께 손가락만 한 오렌지빛 불꽃이 어둠 속에서 피어올랐다. 도진이 흔들리는 불꽃을 허공에 휘두르며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나와, 강은서! 내 집안을 도륙 내고 서린이까지 감옥에 처넣은 악마 같은 년!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다 같이 타 죽자고!"도진은 보안 요원이 다가오자 라이터를 높이 들었다. 나는 라운지 문가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진이 고개를 돌린 사이 민혁이 뒤쪽 통로에 남은 사람들을 내보냈다.나는 그가 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섰다."은서…… 강은서……!"도진이 불붙은 라이터를 내 쪽으로 치켜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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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제압

테헤란로 블랙스톤 파트너스 본사 사옥 1층 로비. 대리석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시너 웅덩이 위로, 도진의 손에 쥐인 지포 라이터 불꽃이 사시나무 떨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시너 냄새가 코를 찔렀다.입으로 숨을 쉬어도 목 안쪽이 따끔했다. 도진이 한 번만 손을 놓으면 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어깨가 굳지 않도록 손가락을 폈다.또각. 또각.내 명품 스틸레토 힐이 시너를 튀기며 한 걸음씩 도진을 향해 나아갔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찰랑이는 파문이 일었고, 도진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떨렸다. 로비에 가득 찬 차가운 긴장감 속에서, 보안 요원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오, 오지 마……! 나 진짜 던진다고! 다 타 죽는다고!"도진은 계속 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라이터를 던지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신발 밑창이 젖은 바닥에서 미끄러졌다.나는 그가 중심을 잡으려고 손을 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나는 도진의 가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태연히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시너에 젖어 덜덜 떨리는 왼쪽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히익……!"도진이 손을 빼려 했다. 나는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라이터를 받아 들었다. 뒤쪽에서 보안 요원이 한 걸음 다가왔고, 도진은 그쪽을 보느라 내 손을 놓쳤다.챙-!경쾌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라이터 덮개를 닫았다. 도진의 유일한 무기이자 마지막 구명줄이었던 오렌지빛 불꽃이, 허무하게 꺼져버렸다.툭.나는 불 꺼진 라이터를 시너가 닿지 않은 옆쪽 바닥으로 가볍게 떨어뜨렸다. 그리고 뾰족한 하이힐 굽으로 그것을 지그시 짓밟았다.딱-!구두 굽 아래에서 라이터 덮개가 비뚤어졌다. 도진이 그것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나는 발을 치우지 않았다.짝-!지체 없는 내 손바닥이 도진의 뺨을 거세게 후려갈겼다. 파열음과 함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간 도진이 시너가 고인 대리석 바닥으로 처참하게 고꾸라졌다. 시너 냄새와 피 냄새가 왈칵 튀며 그의 찢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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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해임

2주 뒤, 오전 10시 정각. 여의도 태성그룹 본사 지하 1층 대강당은 수백 명의 주주들과 취재진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는 단상 중앙에는, 구속 수감된 박도진 대신 휠체어를 탄 시모 배옥순이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머리는 하얗게 세어 산발이 되었고, 얼굴은 흙빛으로 썩어 들어간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도진의 편에 섰던 몇몇 잔여 이사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주, 주주 여러분……! 저 사기꾼들에게 속으시면 안 됩니다!"배옥순이 마이크를 붙잡고 갈라진 쇳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틀니가 덜그럭거리며 침이 사방으로 튀었다."블랙스톤이라는 악덕 사모펀드가 우리 정통 가문을 도륙 내려는 음모입니다! 우리 도진이는 무죄예요! 10년 동안 공짜 밥 처먹던 며느리 년이 가문을 집어삼키려고 사기를 친 거라고요!"시모의 천박한 선동에 객석 곳곳에서 거친 야유와 날 선 고함이 터져 나왔다.● 헛소리 집어치워! 주가가 바닥을 기는데 무슨 헛소리야!● 횡령범 아들 둔 주제에 낯짝도 두껍다! 당장 내려와라!주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물병과 서류가 날아들기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쿵-!굳게 닫혀 있던 대강당 중앙 육중한 양개형 원목 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문가로 쏠렸다.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방향을 틀며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또각, 또각.완벽하게 재단된 순백의 명품 수트를 입은 내가 레드카펫 위로 당당히 걸음을 내딛었다. 10년간 낡은 고무장갑을 끼고 시댁 변기를 닦으며 조아리던 며느리. 그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태성그룹의 숨통을 쥔 절대 권력자가 되어 나타난 내 모습에 객석 전체가 숨을 삼켰다."어…… 어억……!"배옥순의 목구멍에서 숨이 턱 막히는 괴성이 새어 나왔다. 휠체어 손잡이를 쥔 시모의 앙상한 손가락이 부러질 듯 파르르 떨렸다. 나는 수백 명의 시선을 서늘하게 가르며 단상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의장석 마이크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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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폭로

해임 뒤에는 새 이사진 선임과 한양건설로의 상호 변경 안건이 차례로 의결됐다. 새 이사회가 내게 대표이사를 맡겼다. 주주총회가 끝난 직후, 대강당은 순식간에 전국 생중계 긴급 기자회견장으로 전환되었다.구급대원들의 들것에 실려 나가는 시모 배옥순의 비명 소리가 복도 너머로 멀어지자마자, 수십 개 언론사의 방송용 마이크와 카메라 렌즈 백여 대가 일제히 나를 향해 쏟아졌다. 뜨거운 조명 열기와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서, 나는 단상 중앙 마이크 앞에 섰다.순백의 수트 깃에 달린 핀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자, 웅성거리던 강당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강은서 대표님! 10년간 헌신했던 시댁 가문을 몰락시키고 경영권을 강탈했다는 세간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한 경제 일간지 기자의 날 선 질문이 마이크를 타고 사납게 날아들었다. 나는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뒤편의 대형 메인 스크린을 향해 손짓했다."패륜? 강탈? 기자님, 주어를 완전히 잘못 짚으셨군요."나는 질문한 기자를 바라본 채 스크린의 첫 페이지가 뜨기를 기다렸다."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경영권 분쟁의 자리가 아닙니다. 10년 전, 한 의로운 기업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워 목숨을 앗아가고, 평생의 기술을 통째로 도둑질했던 파렴치한 산업스파이 범죄를 단죄하는 자리입니다."지잉-!스크린에 10년 전 흑백 비밀문서와 선명한 기술 도면들이 차례로 투사되었다. 객석 곳곳에서 기자들의 숨죽인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화면에 띄운 것은 10년 전, 제 친정아버지인 故 강창수 회장님이 피와 땀으로 완성하셨던 한양건설의 독점 특허, '초고층 내진 신공법'의 원본 설계도입니다."한민혁 변호사가 기자들에게 원본 대조와 음성 분석 결과가 첨부된 증거 책자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바스락거리며 적막을 갈랐다."태성그룹은 이 신기술 하나로 지난 10년간 수천억 원대의 관급 공사를 독점 수주하며 중견 건설사로 급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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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심판

밤 10시 정각. 블랙스톤 파트너스 50층 집무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스크린에, 지상파 방송사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오프닝 시그널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특별기획 100분 추적: 10년을 바쳐 원수를 갚은 딸, 한양건설의 부활]방송 화면 아래로 제보 전화와 관련 자료 안내가 흘렀다. 생중계 댓글은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올라갔다. 민혁이 내 앞에 홍차를 놓았지만, 나는 첫 잔이 식는 동안 손을 대지 못했다."몇 달 동안 취재한 자료입니다. 방송사에서도 법률 검토를 마쳤다고 합니다."방송은 겨울의 장례식 사진으로 시작했다. 도진 일가가 내민 채무 서류, 빼돌린 설계도, 연구소장에게 흘러간 돈의 순서로 화면이 바뀌었다. 아버지와 일했던 현장 소장이 카메라 앞에 앉았다.나는 그가 말을 시작하기 전 두 손을 비비는 모습을 지켜봤다."강 회장님은 노동자들 밥부터 챙기던 천사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의 기술을 도둑질해 호의호식하던 박씨 일가는 천벌을 받아 마땅합니다!"화면이 내 가계부로 바뀌었다. 카메라는 생활비가 적힌 칸 옆의 작은 글씨를 확대했다. 맞은 날짜와 시간을 써두고도, 들킬까 봐 그 위에 장보기 목록을 덧쓴 페이지였다.원본을 넘길 때 손이 자꾸 그 부분을 가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10년의 기록. 내가 원수의 집안에 며느리로 잠입해 10년 동안 피눈물로 작성해 온 비밀 다이어리와 가계부 원본이 화면에 선명하게 클로즈업되었다.시모 배옥순의 각질투성이 발을 주무르며 견뎌야 했던 폭언의 음성 녹취. 새벽마다 만취해 들어온 박도진의 구타와 모욕 속에서 터져 나온 핏자국 현장 사진들.- [너 같은 불임 거지년은 우리 집안에 발 들인 순간부터 공짜 식모였어.]도진의 생생하고 비열한 육성이 전국에 울려 퍼지는 순간, 댓글이 화면을 덮었다. 나는 그 문장들보다 녹음 속 내 대답을 기다렸다. 도진이 욕을 하고 난 뒤, 내가 "밥 데워줄게"라고 말하는 소리가 작게 남아 있었다.민혁이 음량을 줄이려 하자 나는 손을 들어 말렸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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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선고

그해 가을, 오전 10시. 수사와 공판이 이어지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검찰은 결심공판에서 도진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고, 오늘은 1심 선고일이었다.서울중앙지방법원 제310호 대법정의 육중한 방음문이 닫히며, 납덩이 같은 무거운 정적이 실내를 짓눌렀다. 방청석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방송 취재진과 옛 한양건설의 백발이 성성한 해고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했다.나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명품 정장 수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방청석 맨 앞줄 중앙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 내 곁을 든든하게 지키는 한민혁 변호사의 서늘한 무테안경 너머 시선이 피고인 대기석 문을 향했다.철컥-!무거운 쇠창살 문이 열리며, 교도관들의 인솔 아래 포승줄에 꽁꽁 묶인 두 마리의 죄수가 비틀거리며 법정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피고인 박도진과 신서린. 반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굴지의 건설사 후계자라며 오만방자하게 굴던 도진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참혹했다.푸른색 수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박힌 붉은 수인 번호 [4208]. 이마에 남은 자해 흉터가 법정 조명 아래 드러났다. 깁스는 풀었지만 오른쪽 손목을 자꾸 감싸 쥐었다.포승줄에 닿은 손등이 가늘게 떨렸다. 그 옆에 선 신서린 역시 화려했던 명품 드레스 대신 죄수복을 걸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방청석 한구석.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법정 경위들의 손에 실려 온 시모 배옥순의 꼴이 눈에 들어왔다. 뇌출혈 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시모는, 반쯤 풀린 동공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왼손으로 제 가슴팍을 사정없이 쥐어뜯고 있었다."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법원 경위의 엄숙한 구령과 함께 재판관 세 명이 높은 법대에 올랐다. 부장판사가 마이크를 조정하고 두툼한 최종 판결문을 펼쳐 들었다. 차가운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판결 이유가 대법정의 숨 막히는 공기를 서릿발처럼 얼어붙게 만들었다."피고인 박도진은 태성그룹 대표이사라는 우월적 지위를 악용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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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기록

서울구치소 일반 접견실. 차가운 아크릴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쇠창살 너머의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교도관의 거친 손길에 이끌려 들어온 사내의 가슴팍에는, 붉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각인된 수인 번호 [4208]이 박혀 있었다.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기다리는 미결수 박도진이었다. 반년 전만 해도 한남동 대저택의 침대 위를 뒹굴던 재벌 2세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파란색 수의는 때에 절어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풍겼고,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퀭하게 꺼진 눈동자에는 피폐한 광기만이 서려 있었다.손목에 감긴 쇠사슬이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진이 플라스틱 수화기를 낚아채며 유리창에 이마를 쾅 내리찧었다.- [은서야……! 은서야, 와줬구나! 날 버리지 않은 거지?!]도진의 쉰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피를 토하듯 터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절망 끝에 매달린 추악한 기대가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항소심에서 선처 탄원서만 써줘! 네가 피해자 합의서만 써주면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어! 내가 나가면 300억 빚도 노가다를 뛰어서라도 다 갚을게! 제발 살려줘, 은서야……!]나는 의자에 등을 붙이고 도진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수화기를 쥔 손에는 힘을 주지 않았다. 말이 끊기자 유리창 아래로 그의 시선이 떨어졌다."박도진, 넌 아직도 네가 어떤 덫에 걸려 있는지 모르는구나."도진의 입술이 떨렸다. 나는 서류철에 끼운 일기 사본을 칸막이 너머로 보여주었다. 원본은 내 가방에 있었다.사본을 넘기기 전, 표지의 글자부터 읽게 했다.[3,650일의 기록: 며느리의 가면을 쓴 사신의 일기장].- [이, 이게 뭐야……?]"봐. 내가 지난 10년 동안 네 곁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나는 첫 장을 펼쳤다. 혼인신고를 마친 날 눌러쓴 글씨가 종이를 채웠다. 도진이 고개를 가까이 댔다.'2016년 3월 14일. 친정아버지를 죽인 원수 박태식의 아들, 박도진과 혼인신고를 마쳤다. 이자가 술에 취해 내 손을 잡을 때마다 온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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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단절

수화기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등 뒤로, 유리창을 깨부술 듯한 굉음이 접견실을 뒤흔들었다.쾅! 쾅!쾅!도진이 수갑 찬 양손으로 방탄 유리창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피와 눈물, 침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투명한 유리창에 흉측하게 짓이겨졌다. 교도관 둘이 달려들어 그의 팔을 꺾었지만, 도진은 짐승처럼 포효하며 유리창 마이크를 향해 악을 썼다.- [은서야……! 제발 한마디만 해줘! 딱 한 번만 내 말 좀 들어줘!]마이크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도진의 쉰 목소리는 처절하게 갈라져 있었다. 나는 문턱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어 유리창에 매달린 박도진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눈동자에는 12년 형을 선고받은 죄수의 공포보다 더 지독한, 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재벌 2세라며 거들먹거리던 남자가, 10년간 종년 취급하던 아내에게 매달려 제 존재의 가치를 구걸하고 있었다.나는 다시 걸어와 수화기를 천천히 귀에 가져다 댔다. 도진이 숨을 헐떡이며 수화기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10년이야…… 강은서, 우리가 함께 산 세월이 10년이라고……!]도진의 턱이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넌 항상 따뜻한 꿀물을 타줬잖아. 발을 씻겨주고, 내 옷을 다려주고, 내 투정을 다 받아줬잖아……! 그 다정했던 눈빛까지 전부 가짜였어?! 넌…… 넌 단 하루라도, 단 1초라도 날 사랑한 적이 없었던 거야?!]도진은 내 입술만 봤다. 부정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듯 다음 말을 서둘러 붙이려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나는 그 추악한 미련을 마주하며, 10년 만에 가장 투명하고 잔혹하게 미소 지었다. 얼음장 같은 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도진의 고막으로 파고들었다."박도진, 넌 참 마지막까지 네 보고 싶은 것만 보는구나."- [……뭐?]"꿀물 한 잔에 네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했어? 네가 그걸 마시고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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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재건

오전 10시 정각. 여의도 본사 사옥 앞 광장은 수천 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메워져 있었다. 가을의 쾌청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광장 한가운데에는, 옛 한양건설의 복직 노동자들과 백발이 성성한 협력업체 임원들, 그리고 전국 방송사 중계차 수십 대가 도열해 있었다.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 속에 싱그러운 국화꽃 향기와 축제의 열기가 은은하게 번져나갔다. 나는 짙은 네이비색 최고급 명품 수트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 단상 중앙에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가슴팍 위에는 스무 살 생일에 아버지가 직접 목에 걸어주셨던 작은 백금 열쇠 펜던트가 가을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내 곁에 선 한민혁 변호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다.위이이잉-!육중한 유압 크레인의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사옥 최상층 외벽에 흉측하게 박혀 있던 거대한 청동 간판이 거칠게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10년 전, 내 아버지의 피눈물과 특허 기술을 도둑질해 올려두었던 그 오만방자한 이름.[태성그룹 (TAESUNG GROUP)]크레인이 간판의 무게를 받았다. 고정 부위가 풀리자 태성이라는 글자가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작업자들은 통제선 안쪽으로 간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간판이 바닥에 닿는 둔한 소리가 났다. 늘 고개를 들어야 보이던 이름이 이제 사람들의 발보다 낮은 곳에 있었다. 객석에서 누군가 박수를 치자, 옆줄의 사람들이 따라 손뼉을 쳤다.그리고 잠시 후. 붉은 비단천에 싸인 새로운 황금빛 현판이 와이어를 타고 사옥 정중앙을 향해 서서히 올라갔다. 나는 단상에 놓인 제막식 리모컨 버튼을 천천히 눌렀다.촤르륵-!붉은 비단이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벗겨지며,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순금 글씨가 그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다.[주식회사 한양건설 (HANYANG E&C)]도둑맞았던 10년의 암흑을 뚫고,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아버지의 이름. 나는 몇 달째 서류에서만 보던 이름을 건물 위에서 올려다봤다. 이사회가 승인하고 등기부에 오르기까지 민혁과 고쳐 읽었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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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새출발

경기도 북부의 양지바른 추모공원.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로 서늘하고 맑은 솔바람이 불어와, 품에 안은 새하얀 국화꽃 다발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꽃집에서 뿌린 물방울이 꽃잎 사이에 남아 있었다.나는 줄기를 감싼 종이를 다시 여몄다. 10년 전, 피눈물을 삼키며 아버지의 장례를 홀로 치러야 했던 그 혹독하고 시리던 겨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평생을 바쳐 일군 한양건설을 원수 박태식에게 도둑맞고, 수백억의 부도 어음과 억울한 누명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내 아버지.장례식장에서 상복을 입은 나를 조롱하던 원수들의 비열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음을 삼키고 스스로 독사를 품었다. 그날 이후 시작된 10년간의 처절했던 위장 잠입. 시어머니의 각질투성이 발을 주무르고, 남편의 손에 뺨을 맞으며, 화장실 변기를 닦으면서도 결코 칼날을 거두지 않았던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또각. 또각.내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고요한 추모관 복도를 울렸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은, 따스한 오후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부드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故 강창수 회장의 유골함 앞이었다. 유리벽 너머, 생전의 모습 그대로 인자하고 따뜻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의 흑백 영정 사진.나는 가슴에 품고 온 가죽 서류철을 꺼내 선반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었다.[주식회사 한양건설 법인 등기사항전부증명서 (대표이사 강은서)][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판결문: 피고인 박도진 징역 12년, 피고인 신서린 징역 5년][태성그룹 상호 변경 및 한남동 대저택 인도 집행 완료 확인서]그리고 지난 10년간 내 살갗을 찢어가며 피눈물로 기록했던 낡은 검은색 복수 일기장. 가문을 공중분해시키고 원수들을 모조리 지옥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내 20대를 송두리째 바쳐 완성한 피 묻은 장부들이었다."아버지."마침내 내 입술 사이로 메마른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목덜미에 10년간 걸려 있던 작은 백금 열쇠 펜던트를 풀어, 아버지의 영정 사진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약속 지켰어요. 아버지의 한양건설도, 도둑맞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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