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천년의 세월을 건너 / Chapter 11 - Chapter 20

All Chapters of 천년의 세월을 건너: Chapter 11 - Chapter 20

21 Chapters

제11화

“짐을 위해서라?”이헌은 기가 막힌다는 듯 낮게 웃었다. 갈라진 웃음소리에 강설희는 등골이 서늘해 졌다.“짐을 위한 일이라니. 참으로 갸륵한 여인이로구나!”이헌은 돌연 검을 거두더니 문밖을 향해 매섭게 호통쳤다.“그자들을 끌고 들어오라!”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군 몇이 두 사람을 끌고 들어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한 사람은 과거 강설희를 능욕했던 사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사냥터에서 말과 활을 관리하던 하급 관리였다.두 사람은 고문을 당해 몰골이 엉망이었고, 이헌을 보자 혼비백산해 머리를 찧으며 살려 달라 빌었다.그들을 알아본 강설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렸다.이헌은 얼음장 같은 눈으로 강설희를 바라봤다.“말하라.”사내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눈물 콧물을 쏟았다.“폐하, 살려 주시옵서서! 귀비마마가 시킨 일입니다! 황금 천 냥을 주며 자신을 겁탈하려는 척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황후마마가 시킨 일이라고 뒤집어씌우라 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궁 밖으로 내보내고, 따로 살림 밑천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폐하, 부디 살펴 주시옵소서!”하급 관리도 울부짖었다.“폐하! 소인 역시 귀비마마의 사주를 받았사옵니다! 그날 사냥터에서 귀비마마를 모시는 상궁이 소인에게 향료 한 봉지를 건네며, 황후마마께서 평소 쓰시던 활의 시위에 몰래 바르라고 하였사옵니다! 황후마마를 폐위시키기만 하면 귀비마마께서 황후의 자리에 오르실 테니, 그때는 소인과 온 식구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고 약조하셨사옵니다! 소인이 잠시 욕심에 눈이 멀어 그만... 폐하,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시옵소서!”“아, 아니옵니다! 폐하, 저자들이 신첩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옵니다! 저자들이 서로 짜고 신첩을 모함하는 것이옵니다!”강설희는 바닥에 엎드려 이헌의 다리를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신첩이 폐하를 향한 마음은 하늘과 땅이 압니다! 그런 신첩이 어찌 황후마마를 해하려 했겠사옵니까? 신첩은...”“모함이라?”이헌은 고개를 숙여 눈
Read more

제12화

이헌은 고개를 숙여 강설희를 내려다보았다. 텅 빈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마치 더럽고 역겨운 오물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짐을 연모한다고?”이헌은 그녀의 말을 되뇌더니 돌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울음보다도 처절한 그 웃음에는 끝없는 비웃음과 비통함이 서려 있었다.그 순간, 이헌이 갑자기 몸을 숙여 강설희의 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느닷없이 발이 허공에 뜬 강설희는 숨이 턱 막히자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떴다. 두 손으로 이헌의 손을 필사적으로 할퀴었지만, 쇠집게처럼 목을 죄는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헌은 숨이 막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설희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그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쉰 목소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증오와 뼈저린 후회가 뒤섞여 있었다.“네가 황후를 모함해 짐이 오해하게 만들고, 뙤약볕 아래 세 시진이나 무릎 꿇렸다!”“황후가 후궁을 다스리는 동안에도 네가 황후에게 지급될 물품을 몰래 줄여, 궁인들 앞에서 망신을 줬다!”“일부러 넘어지고는 황후가 널 해치려 했다며 모함해, 짐이 후궁을 다스릴 권한을 거둬 네게 넘기게 했다!”“신령의 가호를 운운하는 네 말 한마디에 짐은... 짐은 내 손으로 윤서를 성루에 사흘 밤낮이나 매달아 두었다! 수많은 백성에게 손가락질과 욕을 먹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이다!”“활시위에 짐승을 유인하는 향을 발라 늑대 떼에 습격당하게 해 놓고, 되레 황후를 모함했다! 그 때문에 짐은... 황후의 손목 힘줄까지 끊었다!”“옥졸을 매수해 황후를 모진 고문에 시달리게 하고, 끝내 짐의 명을 사칭해 옥에서 끌어내 형장에서 참수했다!”이헌이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강설희의 목을 죄는 손아귀에도 힘이 더해졌다. 강설희의 얼굴은 붉다 못해 시퍼렇게 질렸고, 눈동자가 위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목구멍에서는 숨이 막히는 소리만 거칠게 새어 나왔다. “짐은 순진하고 연약한 너를 지켜 주고, 악독한 마음을 품은 윤서에게 벌을 내리
Read more

제13화

이헌은 주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나윤서의 차가운 시신을 끌어안은 채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않았다. 목이 마르면 침상 곁의 식은 찻물만 조금 마셨고, 배고픔은 느끼지 못했다.가슴의 상처는 벌어졌다가 아물기를 거듭했다. 피가 흘러 옷깃을 흠뻑 적셔도 이헌은 아무런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나윤서의 시신을 지킨 지 이레째 밤, 시신에서 옅은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이헌은 화들짝 나윤서를 끌어안았다.“안 된다! 윤서야, 떠나지 마라! 짐은 네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절대로!”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문밖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태의를 불러라! 어서!”허둥지둥 달려온 태의는 초췌하고 광기 어린 이헌을 보자, 겁에 질려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방법이 없느냐? 시신이 썩지 않게 할 방법 말이다! 짐은 황후가 영원히 곁에 있기를 바란다!”이헌은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잡듯 태의를 노려봤다. 태의는 땅에 엎드린 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폐, 폐하... 죽은 이는 다시 살아날 수 없사옵니다. 시신은 결국...”“쓸모없는 것들! 다 쓸모없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헌은 침상 곁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태의는 비명을 지르며 피바닥에 쓰러졌다.이헌은 쓰러진 태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각을 미친 듯이 뒤졌다. 경대와 탁자, 의자를 모조리 뒤엎은 끝에 나윤서의 화장함 맨 아래 숨겨진 칸에서 작은 도자기 병을 찾아냈다.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맑고 서늘한 약향이 퍼졌다.옥기고(玉肌膏)였다.과거 나윤서는 이헌을 위해 독이 들었는지 시험하다가 여러 차례 중독되어 몸이 크게 상한 적이 있었다.이헌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태의원에 명하여 가장 귀한 약재들로 옥기고를 만들게 했다. 피부를 윤기 있고 곱게 가꾸어 주고, 늙는 것까지 늦춰 준다는 귀한 연고였다.그때 이헌은 나윤서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윤서야, 짐은 네가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고운 모습으로 짐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구나.”그러자 나윤서는
Read more

제14화

어명이 떨어지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폐하께서는 아직 한창이십니다. 어찌 이러실 수 있사옵니까?”“폐하,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시옵서서!”대신들의 애원과 만류가 사방에서 빗발쳤다.그러나 이헌은 지친 듯 눈을 감더니, 성가신 것을 떨쳐 내듯 손을 내저었을 뿐이었다.“짐은 이미 뜻을 정했다. 모두 물러가라.”고무성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감히 명을 거스를 수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명 받들겠사옵니다.”전각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이헌은 나윤서를 품에 안은 채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어느덧 석양이 창살 사이로 스며들어 두 사람을 비추었다. 애달프도록 아름다운 금빛 노을이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이윽고 나윤서를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레 침상에 눕힌 뒤,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궤짝을 열어 맨 아래에서 붉은 혼례복을 꺼냈다. 두 사람의 혼례날 이헌이 입었던 옷으로, 가장 비참했던 시절에도 버리지 않고 간직해 온 것이었다.이헌은 천천히 혼례복을 갖춰 입었다. 선명한 붉은 옷은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과 어우러져 기이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침상 곁에 앉은 이헌은 바싹 말라 엉킨 나윤서의 머리를 빗고, 젖은 수건으로 얼굴의 오물을 닦아 냈다.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연지를 바른 뒤 거울을 보니, 나윤서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했지만 눈매는 잠든 듯 고요했다.“윤서야.”이헌은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사랑과 헤아릴 수 없는 절망이 어려 있었다. “우리가 혼례를 올리던 날, 짐이 약조하지 않았느냐. 살아서는 한 이불을 덮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히자고...”“짐은 지금껏 네게 한 약조를 너무도 많이 저버렸구나. 허나 이번만큼은... 결코 어기지 않으마.”이헌은 소매 속에서 정교하게 만든 옥병 하나를 꺼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것으로, 그 안에는 맹독이 든 술이 담겨 있었다.마개를 열자 술 향기에 섞여 독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이헌은 몸을 숙여 나윤서의 차갑고 창
Read more

제15화

나윤서는 낯선 천이 깔린 하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에는 투명한 관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한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하지만 가슴이 희미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윤서가 살아 있어!’이헌은 기쁨에 겨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서둘러 다가가 안고, 만지고, 온기를 느끼려 했지만 팔은 나윤서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순간 이헌은 얼어붙었다. 나윤서의 뺨을 어루만지려 손을 뻗어도 손끝에는 차가운 공기만 닿았고, 이름을 불러 보려 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이헌은 자신이 아무것도 만질 수도, 말할 수도 없는 혼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기쁨이 클수록 뒤따르는 절망도 깊었다.마침내 나윤서를 찾았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하지만 이헌은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그녀를 두고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그는 나윤서의 침대 곁을 떠나지 못했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과 이따금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바라보며, 정체 모를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삐삐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얼마나 지났을까. 며칠인지, 그보다 더 오래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젊은 사내가 병실로 들어왔다.그는 기계를 살펴본 뒤 나윤서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중년 여인에게 말했다.“어머님, 축하드립니다. 따님의 활력 징후가 모두 안정됐습니다. 조만간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그는 믿기 어렵다는 듯 말을 이었다.“정말 의학적으로도 기적 같은 일입니다. 무려 7년 동안 의식이 없었는데 다시 깨어나다니...”‘칠 년?’허공에 떠 있던 이헌은 멍하니 굳었다. ‘나와 함께한 칠 년이 이곳에서는 그저 윤서가 의식 없이 누워 있던 시간이었단 말인가?’그때 침대에 누워 있던 나윤서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처음에는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서서히 초점을 되찾더니, 이내 침
Read more

제16화

그 순간, 이헌은 혼백마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구한결과 나윤서는 함께 춤을 추러 나섰다.구한결은 여유롭고 우아하게 발을 옮겼다. 나윤서는 처음에는 조금 서툰 듯했지만, 이내 박자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았다. 구한결은 고개를 숙여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향한 눈빛은 한없이 다정하고 진지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헌은 분노와 질투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이헌은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구한결을 나윤서에게서 떼어 놓고 싶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자신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나윤서에게 알리고 싶었다.하지만 몇 번을 달려들어도 그의 몸은 허공을 가르듯 두 사람을 그대로 통과할 뿐이었다.이헌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고 욕설을 퍼부었다. 주변의 물건들에도 미친 듯이 몸을 부딪쳤지만, 아무런 흔적조차 남길 수 없었다.마침내 음악이 끝났다.그러나 구한결은 나윤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는 몸을 살짝 숙여 나윤서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그러자 나윤서의 두 뺨이 눈에 띄게 발그레 물들었다.이헌은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나윤서도 한때는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수줍어하곤 했다.그가 몰래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출 때면,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속삭일 때면 늘 그랬다.그때 나윤서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고, 수줍은 표정에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다른 남자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그날 밤, 구한결은 나윤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집 앞에 도착한 뒤에도 그는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노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구한결이 나윤서의 손을 잡았다.“윤서 씨.”구한결이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윤서 씨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제가 곁에서 아끼고 지켜 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나윤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
Read more

제17화

어쩌면 사무치는 그리움과 후회가 어떤 경계를 넘어선 것인지도 몰랐다.놀랍게도 이헌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눈물은 그의 혼백에서 떨어져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나윤서의 손등 위로 살며시 떨어졌다.갑작스러운 차가운 감촉에 나윤서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손등에는 맑은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이 피부를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나윤서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물방울을 만져 보았다. 그러고는 손끝을 코끝에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물 같았다.나윤서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서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방 안에는 나윤서 혼자뿐이었다. 창문도 굳게 닫혀 있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이헌은 숨을 죽인 채 나윤서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느꼈느냐? 윤서야! 짐이다! 짐이 바로 여기 있단 말이다!’나윤서는 텅 빈 서재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손등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물방울은 어느새 거의 말라 있었다.결국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느꼈나 봐.”나윤서는 휴지 한 장을 뽑아 손등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관자놀이를 잠시 문지른 뒤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일을 계속했다.이헌의 눈에 서렸던 희망의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그는 맥없이 구석으로 물러났다.이윽고 일에 몰두한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에서 서서히 식어 가는 커피 한 잔, 생각에 잠길 때면 미간을 찌푸리고 습관처럼 펜을 깨무는 버릇까지...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했다.그런데도 모든 것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삶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천 년의 세월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무엇보다 이제 나윤서의 마음에는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이헌은
Read more

제18화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나윤서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소식을 들은 구한결은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윤서를 번쩍 들어 올려 거실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그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내가 아빠가 된다니! 윤서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구한결은 나윤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직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녀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설렘이 가득했다.나윤서는 고개를 숙여 그런 구한결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배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에는 이제 막 어머니가 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낯설고도 따스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이헌은 두 사람의 곁에 떠서 나윤서의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지금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그 순간, 이헌은 문득 떠올렸다.자신과 나윤서에게도 한때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당시 그는 막 황위에 올랐다. 아직 황권이 굳건하지 못한 틈을 타 적국의 자객이 궁중 연회에 숨어들어 그를 습격했다.그 순간, 나윤서는 망설일 새도 없이 달려들어 이헌 대신 독이 묻은 칼을 맞았다.자객은 처단했지만, 나윤서는 끝내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꼬박 한 달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그런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폐하, 괜찮습니까?”뒷이어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윤서는 오랫동안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오를 만큼 울고도, 애써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리고는 그를 향해 괜찮다고, 우리에겐 또 아이가 생길 거라고 말했다.그는 나윤서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귓가에 몇 번이고 약속했다.“윤서야, 우리에겐 또 아이가 생길 것이다. 앞으로 많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자꾸나. 짐이 너와 아이들을 반드시 지켜 주마. 다시는 털끝 하나 다치는 일조차 없도록 하겠노라.”하지만 그
Read more

제19화

찰나의 순간, 그 형체는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나윤서는 자신이 놀란 나머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윤서야? 윤서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다급히 부르는 구한결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구한결은 나윤서를 꼭 끌어안고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정신을 차린 나윤서는 세차게 뛰는 심장과 등에 밴 식은땀을 느끼며 구한결의 품에 기댔다.“괜찮아.”나윤서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구석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그저 어지럽게 널린 잔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방금 그거... 정말 환상일까?’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은 너무도 생생했다....결혼식은 장소를 바꿔 무사히 치러졌고, 나윤서와 구한결은 정성껏 꾸민 새집에 들어가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나윤서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 왔고, 입덧과 잦은 졸음에 시달렸으며 입맛도 자주 바뀌었다. 구한결은 산부인과 검진에 동행하고 부은 발을 주물러 주었으며, 한밤중에도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만들어 주며 정성껏 보살폈다.이헌은 줄곧 나윤서 곁을 지키며 임신으로 힘들어하는 모습과 어머니가 되어 가며 얼굴에 깃드는 다정한 기색을 지켜보았다.그러다 문득 예전 나윤서가 두 사람의 아이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나윤서는 아직 불룩해지지 않은 배를 어루만지며 기대에 찬 미소를 짓곤 했다. 이헌은 정사를 다지고 정적을 제거하느라 곁을 자주 비웠지만, 궁에 돌아와 그 미소를 볼 때면 지친 마음이 풀리곤 했다.그러나 그 아이는 이헌의 무관심과 끊이지 않는 암투 속에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이제 나윤서는 다른 남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었다.출산은 순조롭지 않았다.태위가 좋지 않아 진통이 길어졌고, 막바지에는 양수 색전증으로 대량 출혈이 일어났다. 의사는 분만실에서 급히 나와 기다리던 구한결과 양가 부모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상황이 매우 위급합니다. 산모의 출혈이 심하고, 심장도 몇 차례
Read more

제20화

현대 의학의 힘인지, 의료진의 필사적인 응급 처치 덕분인지, 아니면 시공을 넘어 전해진 간절한 기도가 조금이나마 통했는지. 나윤서의 심장 모니터에 마침내 안정적인 파형이 돌아왔고, 출혈도 멎어 위기를 넘겼다. 몇 시간 뒤 우렁찬 아기 울음이 분만실을 울렸다.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했다.나윤서는 탈진한 채 분만실에서 나왔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구한결은 침대 곁으로 달려와 나윤서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윤서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살아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며칠 뒤 나윤서의 상태가 안정되자,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구한결은 포근한 속싸개에 싸인 아들을 안아 조심스레 나윤서의 품에 안겨 주었다.“윤서야, 우리 아들이야. 코는 널 닮고 입은 나를 닮았어.”처음 아빠가 된 기쁨과 조심스러움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윤서는 고개를 돌려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얼굴이 발갛게 물든 아기는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감정이 나윤서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고통과 두려움, 죽을 고비를 넘긴 순간도 이 작은 생명 앞에서는 견딜 만한 듯했다. 나윤서의 창백하고 지친 얼굴에 행복한 엄마의 미소가 번졌다.이헌은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나윤서의 지친 얼굴과 아기를 향한 다정한 눈빛, 두 사람의 베개를 조심스레 고쳐 주는 구한결. 평범하지만 생기 넘치는 행복이었다.이헌도 천천히 미소 지었다. 눈물과 아픔, 끝없는 후회가 어린 일그러진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나윤서는 살아 있었다. 건강했고, 행복했다. 설령 그 행복이 더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더라도, 나윤서가 살아서 잘 지내고, 웃고,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세월은 소리 없이 흘렀다. 이헌의 혼령은 반경 백 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줄곧 나윤서의 곁을 맴돌았다.그는 작은 아기가 옹알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