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성루에 사흘 밤낮을 매달린 뒤, 나윤서는 마침내 마음을 비웠다. 이헌이 누구를 총애하든 더는 밤잠을 설쳐 가며 마음 쓰지 않았고,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애써 헤아리지도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의심과 오해도 더는 풀어 보려 하지 않았다. 나윤서는 날마다 봉의궁(鳳儀宮)에 조용히 머물렀다. 책을 읽거나 꽃을 돌보았고, 때로는 창밖을 바라본 채 반나절을 꼬박 보내기도 했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곳을 떠날 생각뿐이었다. 한 달 넘도록 신분을 숨기고 남쪽 지방을 순행하던 이헌이 마침내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그는 각지에서 구해 온 진귀한 물건들로 상자를 가득 채워 봉의궁으로 향했다. 내시들이 상자를 차례로 열었다. 그 안에는 강남의 섬세한 자수품과 이국적인 보석 장신구, 노래하는 정교한 기계 새 등 온갖 진귀한 물건이 가득했다. 예전 같았으면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을 나윤서였지만, 지금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한때는 서로에게 못 할 말이 없던 두 사람 사이에 이제는 침묵만 감돌뿐이었다.
view more구한결은 휠체어를 타야 할 만큼 늙었지만, 나윤서의 침대 곁을 지키며 앙상해진 손을 꼭 붙든 채 흐릿해진 눈으로 쉼 없이 눈물을 흘렸다.“윤서야... 무서워하지 마. 나 여기 있어...”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나윤서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평생을 함께한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고는, 입술을 달싹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한결 씨... 이번 생에... 당신을 만나... 참 행복했어...”구한결은 나윤서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다음 생에도... 우리 꼭 함께하자. 다시 내 아내가 되어 줘....”나윤서는 세월의 풍파를 겪고도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심장 모니터의 파형이 차갑고 곧은 선으로 멈췄다.“엄마!”“할머니!”병실 안은 가족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구한결은 나윤서의 손을 꼭 쥔 채 그 위에 이마를 대고,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그때, 수십 년 동안 나윤서의 곁을 지켜 온 이헌은 나윤서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한 번 더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나윤서는 다시,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하지만 이번에 나윤서의 시선은 침대 곁에 모인 그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았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돌려 침대 발치 쪽을 바라보았다.수십 년 동안 이헌이 꼼짝 않고 서 있던,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흐릿하던 나윤서의 눈동자에 잠시 초점이 돌아오며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해진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젊은 이헌이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오랜 세월 가시지 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 이헌은 천 년의 후회와 끝없는 사랑, 깊은 슬픔을 담은 눈빛으로 나윤서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헌의 혼령이 크게 흔들렸다.‘혹... 내가 보이는 걸까?’‘윤서가 정녕 내가 보이는 걸까?’나윤서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달싹였다.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이헌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천 년
현대 의학의 힘인지, 의료진의 필사적인 응급 처치 덕분인지, 아니면 시공을 넘어 전해진 간절한 기도가 조금이나마 통했는지. 나윤서의 심장 모니터에 마침내 안정적인 파형이 돌아왔고, 출혈도 멎어 위기를 넘겼다. 몇 시간 뒤 우렁찬 아기 울음이 분만실을 울렸다.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했다.나윤서는 탈진한 채 분만실에서 나왔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구한결은 침대 곁으로 달려와 나윤서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윤서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살아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며칠 뒤 나윤서의 상태가 안정되자,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구한결은 포근한 속싸개에 싸인 아들을 안아 조심스레 나윤서의 품에 안겨 주었다.“윤서야, 우리 아들이야. 코는 널 닮고 입은 나를 닮았어.”처음 아빠가 된 기쁨과 조심스러움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윤서는 고개를 돌려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얼굴이 발갛게 물든 아기는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감정이 나윤서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고통과 두려움, 죽을 고비를 넘긴 순간도 이 작은 생명 앞에서는 견딜 만한 듯했다. 나윤서의 창백하고 지친 얼굴에 행복한 엄마의 미소가 번졌다.이헌은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나윤서의 지친 얼굴과 아기를 향한 다정한 눈빛, 두 사람의 베개를 조심스레 고쳐 주는 구한결. 평범하지만 생기 넘치는 행복이었다.이헌도 천천히 미소 지었다. 눈물과 아픔, 끝없는 후회가 어린 일그러진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나윤서는 살아 있었다. 건강했고, 행복했다. 설령 그 행복이 더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더라도, 나윤서가 살아서 잘 지내고, 웃고,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세월은 소리 없이 흘렀다. 이헌의 혼령은 반경 백 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줄곧 나윤서의 곁을 맴돌았다.그는 작은 아기가 옹알
찰나의 순간, 그 형체는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나윤서는 자신이 놀란 나머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윤서야? 윤서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다급히 부르는 구한결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구한결은 나윤서를 꼭 끌어안고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정신을 차린 나윤서는 세차게 뛰는 심장과 등에 밴 식은땀을 느끼며 구한결의 품에 기댔다.“괜찮아.”나윤서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구석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그저 어지럽게 널린 잔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방금 그거... 정말 환상일까?’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은 너무도 생생했다....결혼식은 장소를 바꿔 무사히 치러졌고, 나윤서와 구한결은 정성껏 꾸민 새집에 들어가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나윤서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 왔고, 입덧과 잦은 졸음에 시달렸으며 입맛도 자주 바뀌었다. 구한결은 산부인과 검진에 동행하고 부은 발을 주물러 주었으며, 한밤중에도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만들어 주며 정성껏 보살폈다.이헌은 줄곧 나윤서 곁을 지키며 임신으로 힘들어하는 모습과 어머니가 되어 가며 얼굴에 깃드는 다정한 기색을 지켜보았다.그러다 문득 예전 나윤서가 두 사람의 아이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나윤서는 아직 불룩해지지 않은 배를 어루만지며 기대에 찬 미소를 짓곤 했다. 이헌은 정사를 다지고 정적을 제거하느라 곁을 자주 비웠지만, 궁에 돌아와 그 미소를 볼 때면 지친 마음이 풀리곤 했다.그러나 그 아이는 이헌의 무관심과 끊이지 않는 암투 속에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이제 나윤서는 다른 남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었다.출산은 순조롭지 않았다.태위가 좋지 않아 진통이 길어졌고, 막바지에는 양수 색전증으로 대량 출혈이 일어났다. 의사는 분만실에서 급히 나와 기다리던 구한결과 양가 부모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상황이 매우 위급합니다. 산모의 출혈이 심하고, 심장도 몇 차례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나윤서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소식을 들은 구한결은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윤서를 번쩍 들어 올려 거실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그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내가 아빠가 된다니! 윤서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구한결은 나윤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직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녀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설렘이 가득했다.나윤서는 고개를 숙여 그런 구한결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배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에는 이제 막 어머니가 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낯설고도 따스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이헌은 두 사람의 곁에 떠서 나윤서의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지금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그 순간, 이헌은 문득 떠올렸다.자신과 나윤서에게도 한때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당시 그는 막 황위에 올랐다. 아직 황권이 굳건하지 못한 틈을 타 적국의 자객이 궁중 연회에 숨어들어 그를 습격했다.그 순간, 나윤서는 망설일 새도 없이 달려들어 이헌 대신 독이 묻은 칼을 맞았다.자객은 처단했지만, 나윤서는 끝내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꼬박 한 달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그런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폐하, 괜찮습니까?”뒷이어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윤서는 오랫동안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오를 만큼 울고도, 애써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리고는 그를 향해 괜찮다고, 우리에겐 또 아이가 생길 거라고 말했다.그는 나윤서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귓가에 몇 번이고 약속했다.“윤서야, 우리에겐 또 아이가 생길 것이다. 앞으로 많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자꾸나. 짐이 너와 아이들을 반드시 지켜 주마. 다시는 털끝 하나 다치는 일조차 없도록 하겠노라.”하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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