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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세월을 건너

천년의 세월을 건너

By:  월이Kumpleto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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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루에 사흘 밤낮을 매달린 뒤, 나윤서는 마침내 마음을 비웠다. 이헌이 누구를 총애하든 더는 밤잠을 설쳐 가며 마음 쓰지 않았고,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애써 헤아리지도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의심과 오해도 더는 풀어 보려 하지 않았다. 나윤서는 날마다 봉의궁(鳳儀宮)에 조용히 머물렀다. 책을 읽거나 꽃을 돌보았고, 때로는 창밖을 바라본 채 반나절을 꼬박 보내기도 했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곳을 떠날 생각뿐이었다. 한 달 넘도록 신분을 숨기고 남쪽 지방을 순행하던 이헌이 마침내 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그는 각지에서 구해 온 진귀한 물건들로 상자를 가득 채워 봉의궁으로 향했다. 내시들이 상자를 차례로 열었다. 그 안에는 강남의 섬세한 자수품과 이국적인 보석 장신구, 노래하는 정교한 기계 새 등 온갖 진귀한 물건이 가득했다. 예전 같았으면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을 나윤서였지만, 지금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한때는 서로에게 못 할 말이 없던 두 사람 사이에 이제는 침묵만 감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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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anata 1

제1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헌이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들은 짐이 오는 길에 모은 것이다. 네 생각이 나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윤서가 돌아서며 이헌의 말을 끊었다.

“폐하께서 일부러 이 물건들을 사 오신 것은 신첩더러 귀비에게 전하고, 쓰고 즐기는 법까지 가르쳐 주라는 뜻이옵니까? 알겠사옵니다. 내일 사람을 시켜 물건들을 전하고, 다루는 법도 자세히 일러 두겠습니다.”

순간 이헌의 표정이 굳었다.

“귀비에게 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보면 모르겠느냐? 이 물건들은 짐이...”

이헌은 무언가에 찔린 듯 말을 뚝 멈추더니,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방금 짐을 뭐라 부른 것이냐? 폐하라니? 어찌하여 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냐?”

예전에는 둘만 있을 때면 나윤서는 늘 눈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었다.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만 오가던 애틋한 호칭이었다.

나윤서는 무릎을 살짝 굽혀 정중히 예를 갖췄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였지만, 그만큼 냉랭한 거리감이 배어 있었다.

“예전에는 신첩이 철이 없어 법도를 가벼이 여겼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천하를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신첩 또한 중궁의 자리에 있는 몸이니 마땅히 분수를 지켜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예전처럼 사사로운 호칭을 함부로 올리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옵니다.”

나윤서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 물건들은 신첩이 잘 챙겨 귀비에게 보내겠사옵니다. 쓰는 법도 함께 일러 두겠사오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먼 길을 다녀오셨으니 폐하께서도 피곤하실 터이옵니다. 귀비가 요 며칠 폐하를 몹시 기다렸다 하오니, 오늘은 금슬궁(錦瑟宮)에 드시어 쉬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나윤서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담담했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헌을 자신의 곁에서 밀어내 다른 여인에게 보내려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억눌러 두었던 울화가, 무슨 말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끝내 터져 나왔다.

“황후!”

이헌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안에는 황제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짐이 그토록 오랫동안 궁을 비웠건만,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른 여인에게 가라 하는 것이냐? 황후는 정녕... 짐이 조금도 그립지 않은 것이냐?”

나윤서는 시선을 내린 채 조용히 답했다.

“신첩이 어찌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폐하께서도 일찍이 귀비는 마음씨가 곱고 성품이 온순하여 폐하의 마음에 더 든다고 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신첩은 황후로서 마땅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마음 편히 지내시도록 해야 하지요. 신첩은... 그저 폐하의 뜻을 따랐을 뿐이옵니다.”

“그래 ! 참으로 짐의 뜻을 잘도 따랐구나!”

이헌은 분노에 차 코웃음을 치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황후가 그토록 어질고 도량이 넓으니, 짐 또한 황후가 바라는 대로 해주마!”

이헌은 나윤서를 한참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분노와 실망, 그리고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아픔이 어려 있었다.

이내 소매를 떨치며 돌아서 봉의궁을 성큼성큼 나섰다.

“마마...”

줄곧 곁을 지키던 궁녀 가을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다가왔다. 눈에는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가득했다.

“대체 어찌하여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귀비마마의 위세가 날로 높아져 이제는 마마의 자리마저 넘볼 기세이옵니다. 폐하께서 모처럼 봉의궁을 찾으셨는데, 어찌...”

“가을아.”

나윤서가 나지막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차분한 목소리에는 더는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난 떠날 것이다. 폐하가 무얼 하든 이제 상관없다.”

가을이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마마께서는 황후마마이시자 후궁의 주인이시옵니다. 평생 이 궁궐에서 지내셔야 할 분인데... 떠나시겠다니요? 대체 어디로 가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나윤서는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향로 앞으로 다가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향 조각 하나를 집어 넣었다.

‘어디로 갈 거냐고?’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해졌다.

가늘게 피어오르는 향 연기를 따라 생각은 어느덧 7년 전으로 흘러갔다.

그때의 그녀는 황후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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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Kabanata
제1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이헌이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것들은 짐이 오는 길에 모은 것이다. 네 생각이 나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윤서가 돌아서며 이헌의 말을 끊었다.“폐하께서 일부러 이 물건들을 사 오신 것은 신첩더러 귀비에게 전하고, 쓰고 즐기는 법까지 가르쳐 주라는 뜻이옵니까? 알겠사옵니다. 내일 사람을 시켜 물건들을 전하고, 다루는 법도 자세히 일러 두겠습니다.”순간 이헌의 표정이 굳었다.“귀비에게 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보면 모르겠느냐? 이 물건들은 짐이...”이헌은 무언가에 찔린 듯 말을 뚝 멈추더니,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방금 짐을 뭐라 부른 것이냐? 폐하라니? 어찌하여 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냐?”예전에는 둘만 있을 때면 나윤서는 늘 눈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었다.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만 오가던 애틋한 호칭이었다.나윤서는 무릎을 살짝 굽혀 정중히 예를 갖췄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였지만, 그만큼 냉랭한 거리감이 배어 있었다. “예전에는 신첩이 철이 없어 법도를 가벼이 여겼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천하를 다스리시는 분이시고, 신첩 또한 중궁의 자리에 있는 몸이니 마땅히 분수를 지켜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예전처럼 사사로운 호칭을 함부로 올리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옵니다.”나윤서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이 물건들은 신첩이 잘 챙겨 귀비에게 보내겠사옵니다. 쓰는 법도 함께 일러 두겠사오니 염려하지 마시옵소서.”“먼 길을 다녀오셨으니 폐하께서도 피곤하실 터이옵니다. 귀비가 요 며칠 폐하를 몹시 기다렸다 하오니, 오늘은 금슬궁(錦瑟宮)에 드시어 쉬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나윤서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담담했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헌을 자신의 곁에서 밀어내 다른 여인에게 보내려는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억눌러 두었던 울화가, 무슨 말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끝내 터져 나왔다.“황후!”이헌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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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나윤서는 천 년 뒤의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시스템에 의해 낯선 고대 왕조로 오게 된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당시 가장 총애받지 못하던 칠황자 이헌을 도와 황제의 자리에 올리는 것이었다.그녀는 책사의 신분으로 이헌에게 접근했고, 그와 함께 피비린내 나는 황위 쟁탈전을 헤쳐 나갔다.그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때로는 그에게 닥친 온갖 위험을 몸소 막아 내기도 했다.두 사람은 허물어진 사당에 숨어 차갑게 굳은 찐빵 하나를 나눠 먹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온기를 나누었다.수많은 시신이 쌓이고 피가 흥건한 전장에 나란히 서서, 마침내 손에 넣은 옥새를 올려다보던 날도 있었다.언제부터였을까. 차갑고 도도한 데다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어린 황자가 어느새 나윤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처음에는 그녀를 경계하고 이용하려는 속셈이 가득했던 눈빛에도 차츰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마침내 뜨거운 애정으로 가득 찼다.즉위식 날, 조정 대신들이 일제히 엎드려 만세를 외쳤다.이헌은 나윤서의 손을 굳게 잡고,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예부의 원로 대신들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끝내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그녀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만백성 앞에서 평생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윤서야, 짐은 그대 없이는 아니 되오. 그대가 곁에 없다면 이 드넓은 강산도 짐에게는 황량한 황무지에 지나지 않소.”나윤서 역시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헌을 사랑하게 되었다.시스템은 임무가 끝났으니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나윤서는 용상에 앉아 자신을 향해 다정히 웃는 이헌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시스템을 거슬러 이곳에 남기로 마음먹었다.나윤서는 그것이 두 사람의 결말이라 생각했다.하지만 황위 다툼에서 패한 폐태자 이찬이 결사대를 이끌고 돌연 궁궐에 쳐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반란은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중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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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가을이의 다급한 외침이 나윤서의 회상을 끊었다. 뒤이어 이헌을 곁에서 모시는 고무성이 황급히 봉의궁 안으로 들어섰다. 잔뜩 굳은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황후마마, 폐하께서 지금 당장 금슬궁으로 오시랍니다!”나윤서는 손에 들고 있던 향 조각을 내려놓고 태연히 물었다.“무슨 일이냐?”고무성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귀비마마께서... 그게... 폐하께서 방금 금슬궁에 가셨다가 낯선 사내가 귀비마마를 침상에 짓누르고 있는 걸 보셨답니다! 옷도... 흐트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귀비마마께서는 대성통곡하시며,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하셨사옵니다. 죽음으로 맞선 끝에 간신히 몸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하시더이다. 이에 크게 노하신 폐하께서 그 사내를 붙잡아 모진 고문을 가하셨는데,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내가 그만... 마마께서 자신을 시켜 귀비마마를 겁탈하게 하셨다고 자백했사옵니다!”고무성은 숨을 고른 뒤 다급히 덧붙였다.“마마! 소인은 마마께서 결코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분명 누군가 마마께 누명을 씌운 것이옵니다! 어서 폐하께 가셔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시옵소서. 폐하께서는 아직도 마마를 마음에 두고 계시니, 분명 마마의 말씀을 들어 주실 것이옵니다!”고무성의 말이 끝나자, 나윤서의 마음은 그저 차갑게 식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해명이라? 정말 믿는다면 해명이 필요할까?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설명해도 무슨 소용인가?’나윤서는 아무 말 없이 소매를 여미고 고무성에게 말했다.“가자.”금슬궁 안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숨 막히도록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강설희는 찢어진 잠옷 한 벌만 걸친 채 흐트러진 머리로 이헌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있었다.가녀린 어깨가 연신 들썩이는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듯, 보는 이마저 안쓰러워할 만큼 애처로웠다.이헌은 굳은 얼굴로 강설희를 한 팔로 감싸 안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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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하지만 이내 나윤서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럴 리가.’ 자신을 목숨보다 아끼던 이헌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거듭된 의심과 상처 속에서, 한때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사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의심이 많고 새로운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황제일 뿐이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나윤서는 익숙한 봉의궁 침상에 누워 있었다. 등과 엉덩이는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것이, 조금만 움직여도 상처가 당겨 절로 숨을 들이켰다.“마마! 정신이 드셨습니까?”곁을 지키던 가을이가 곧장 침상으로 달려왔다. 가을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몸은 어떠십니까? 아직도 많이 아프십니까? 태의께서 방금 다녀가셨는데, 상처가 깊으니, 잘 돌보며 휴식을 취하라 하셨습니다...”나윤서는 가을이를 보며 안심시키려 웃어 보였지만, 입꼬리를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가을이는 조심스레 물을 먹이다가 끝내 울먹였다.“마마, 어찌하여 폐하께 해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폐하께 해명 한마디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폐하께서 냉궁에서 벗어나실 때 마마께서 얼마나 애쓰셨사옵니까. 폐하를 지키려고 칼날도 대신 막으시고, 독이 들었는지 몸소 시험하기까지 하셨지요. 눈보라 치던 밤에는 폐하를 업고 수십 리 길을 걸어 의원을 찾아가시지 않았사옵니까...”가을이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그 모든 일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궁에 숱하게 남아 있사옵니다. 누구라도 마마께서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아실 텐데... 어찌하여 억울하다는 말씀 한마디 없이 모든 죄를 인정하셨사옵니까?”나윤서는 따뜻한 물을 삼켰다. 목구멍은 불에 타는 듯 쓰라렸다.‘해명한들 뭐가 달라질까?’이찬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가시로 박혔다.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이헌의 마음에 자리 잡은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이제 와서 해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는 입을 열 필요조차 없었다.어차피 머지않아 이 세계를 떠날 것이니까.그렇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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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백야를 샅샅이 살핀 금군 수장이 이상이 없다고 아뢴 뒤에야 이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설희에게 다정히 말했다.“타 보거라. 조심하고.”강설희는 기뻐하며 말에 올라 조련사가 이끄는 대로 한 바퀴 돌았다. 돌아온 강설희는 뺨이 발그레해 한층 더 어여뻤다. 이내 저편 무기걸이에 놓인 보석 박힌 활을 가리키며 감탄했다.“폐하, 저 활도 참 아름답네요!”나윤서의 시선도 곧장 활로 향했다. 그것은 이헌이 손수 만든 활인데, 단단한 자단목으로 활대를 만들고, 손잡이에는 나윤서가 좋아하는 보석을 박아 넣었다.활시위 또한 이헌이 직접 고른 교룡의 힘줄로 만든 것이었다.예전에 이헌은 나윤서의 손을 감싸 쥐고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우리 윤서는 계책을 세우는 데만 능해서는 아니 된다. 활도 쏠 줄 알아야지. 그래야 이 험한 세상에서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일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그 활도 마음에 드니냐?”나윤서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허면 그것도 가져가거라. 가을아, 활을 가져오너라.”가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호한 표정에 결국 눈시울을 붉힌 채 활을 가져와 강설희에게 건넸다.나윤서의 무심한 태도에 이헌은 알 수 없는 짜증과 분노가 다시 치밀어 미간을 좁혔다.“황후가 요즘 들어 아주 딴사람이 되었구나. 이토록 너그러워지다니... 짐이 새삼 놀랄 지경이오.”나윤서는 고개를 들어 이헌의 눈을 마주했다. 맑은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신첩은 그저...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원하는 대로라니.’ 이헌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문득 강설희를 처음 궁으로 데려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그날 밤, 나윤서는 양심전으로 뛰어들어 와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의 맹세를 따져 물었다. 평생 자신만을 연모하겠다던 약조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강설희 곁에서만 편히 잠들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윤서의 눈빛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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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다시 눈을 떴을 때 오른손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오른손은 이제 못 쓰게 되었다.침상 곁에는 이헌이 보낸 귀한 약재와 보약이 한가득 쌓여 있었지만, 나윤서는 그저 한 번 바라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다음 날, 강설희의 탄일이었다.이헌은 사람을 보내 나윤서를 금슬궁으로 불렀다. 강설희의 탄일연을 준비하라는 명이었다.나윤서는 군말 없이 금슬궁으로 향했다.금슬궁은 등불을 환히 밝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강설희는 아직 창백한 얼굴로 얇은 이불을 덮은 채 이헌의 품에 기대 있었고, 이헌은 다정하게 탄일 선물로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다.강설희는 나윤서를 힐끗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 연회는 열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물이라면... 태의가 요 며칠 몸을 잘 추스른 덕에 지금이 회임하기 가장 좋은 때라고 했습니다. 신첩은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이헌은 몸을 굳힌 채 무심코 나윤서를 바라봤지만, 나윤서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못 들은 듯한 모습에 이헌은 시선을 거두고 강설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좋다. 네 뜻대로 하마.”그러고는 강설희를 안아 들고 내전으로 향했다. 문턱을 넘기 전 걸음을 멈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황후는 여기서 기다리다가 귀비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즉시 시중을 들도록 하라.”전각 문이 천천히 닫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로 여인의 나른한 신음과 사내의 억눌린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간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그 소리는 문밖에 선 나윤서의 귀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나윤서는 생기 잃은 꼭두각시처럼 문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문득 오래전 옥사에서 보냈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당시 이헌은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나윤서는 갖은 고생 끝에 옥졸을 매수해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차마 믿기 어려웠다.피투성이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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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양심전에는 숨 막힐 듯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용상에 앉은 이헌은 어두운 얼굴로 나윤서를 향해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황후... 짐에게 할 말이 더 있느냐?”목소리는 지칠 대로 지친 듯 갈라져 있었다.차가운 금벽돌 바닥에 무릎 꿇은 나윤서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느끼며 용상에 앉은 이헌을 올려다봤다.익숙하면서도 낯선 그의 눈에는 의심과 증오가 역력했다. 더는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헌은 이미 결론을 내린 뒤였다.“신첩은 할 말이 없사옵니다.”“할 말이 없다?”이헌은 용상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 다가와 나윤서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네가 정녕 이찬의 사람이었구나! 허면 지난 세월 동안 짐을 단 한 번도 연모하지 않았느냐? 짐에게 잘해 준 것도 모두 거짓이고, 곁에 머문 것도 이찬의 복수를 위해서였느냐? 나윤서, 짐을 똑바로 보고 대답하거라!”이헌의 차가운 손아귀가 목을 조였다. 숨이 막혀 오는 가운데 가슴에도 뒤늦은 통증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이런 말은 오히려 나윤서가 이헌에게 해야 했다.그토록 오랜 세월 생사를 함께하며 곁을 지켰건만, 고작 남의 모함 몇 마디에 그 모든 믿음이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정녕 이헌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나윤서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아, 입술만 헛되이 달싹였다.이헌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창백하게 질린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고통과 갈등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지만, 이내 그 모든 감정은 절망에 가까운 냉혹함에 묻혀 버렸다.그는 갑자기 손을 놓더니 나윤서를 헝겊 인형처럼 바닥에 내던졌다.“여봐라!”이헌은 등을 돌린 채 차갑게 명했다.“죄인 나씨를 옥에 가두고 내일 정오에 참수하라!”이윽고 나윤서는 금군에게 거칠게 끌려가 음습한 옥사에 갇혔다. 특별한 지시를 받은 옥졸들은 차가운 쇠사슬로 그녀의 양쪽 어깨뼈를 꿰뚫어 형틀에 매달았다.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채찍질에 인두질, 소금물까지... 온갖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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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사람들을 물리고 홀로 들어온 강설희는 만신창이가 된 나윤서를 보자, 얼굴에 원한이 번졌다.“황후마마께 역당과 내통해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면, 폐하께서 진노하시어 그 자리에서 처형하실 줄 알았습니다. 헌데 막상 때가 되니 차마 마마를 죽이지 못하시겠던 모양입니다. 결국 다른 사형수를 대신 처형하려 하시더군요.”강설희는 몸을 굽혀 붉게 물들인 손톱 끝으로 나윤서의 턱을 들어 올렸다.“안타깝게도 폐하께서는 차마 못 하시겠지만, 저는 다릅니다. 해서 이번엔 제가 직접 마마를 형장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나윤서는 담담한 눈으로 강설희를 바라봤다.“겉으로는 폐하의 뜻을 따르는 척하면서 뒤로는 이리도 대담한 짓을 벌이다니. 훗날 이헌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토록 어렵게 얻은 총애와 지위가 하루아침에 잃게 될 터인데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하루아침에 잃는다?”강설희는 우스운 소리라도 들은 듯 깔깔 웃었다.“황후마마께서는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여기시는 것 아니옵니까? 지금 폐하께서는 저를 끔찍이 연모하시옵니다. 마마를 죽여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다 한들, 폐하께서는 신첩을 탓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허니 이제 죽어 주시지요. 마마께서 죽으셔야 비로소 제 마음도 놓일 테니까요. 폐하의 마음은 오직 저 하나만의 것이어야 하옵니다.”강설희는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손뼉을 두어 번 쳤다.그러자 건장한 상궁 둘이 곧장 들어왔다. 그들은 나윤서에게 검은 두건을 뒤집어씌워 얼굴까지 가린 뒤, 거칠게 붙잡아 옥사 밖으로 끌고 나갔다.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채, 덜컹거리는 흔들림과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만이 전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나윤서를 거칠게 끌어당기더니 단단한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귀가 먹먹할 만큼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백성들은 저마다 욕설을 퍼부으며 나윤서를 향해 썩은 채소와 곯은 달걀을 던졌다. “역적! 독한 계집! 천벌을 받아라!”“죽여라! 폐하를 위해 저 화근을 없애라!”나윤서는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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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헌은 미친 듯이 궁을 뛰쳐나왔다. 정오의 하늘에 푸른 신호탄이 굉음을 내며 터지는 것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나올 듯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저 신호탄은... 윤서의 것이야!’‘내가 직접 그 아이에게 건네준 것이야!’오래전 그가 그녀에게 신호탄을 건네면서, 자신이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고 있든 이 불꽃만 보이면 지체 없이 그녀에게 달려가겠다고 약속했었다!이헌은 금군을 소집할 겨를조차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검은 말 한 필을 붙잡아 올라타더니, 푸른 불꽃이 터진 곳을 향해 미친 듯이 형장을 향해 내달렸다.마침내 형장에 도착한 이헌은 혼란에 빠진 군중을 헤치고,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금군들까지 밀쳐 내며 처형대 앞으로 달려갔다.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광경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금방이라도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처형대 위에서는 망나니가 막 칼을 거두고 있었다. 번뜩이는 칼날에서는 아직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죄수복을 입은 시신이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었다. 목이 잘린 자리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고, 그곳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피가 시신 아래의 나무판자를 흥건히 적셨다.조금 떨어진 곳에는 검은 두건을 쓴 머리가 굴러가 있었다.구경하던 백성들은 저마다 목청을 높여 환호했다. 귀를 찌르는 듯한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역적이 죽었다! 저 악독한 계집이 마침내 죗값을 치렀구나! 폐하 만세!”그 순간 세상의 소리와 빛깔이 모두 사라지며 눈앞이 캄캄해지고 천지가 빙글 돌았다. 이헌은 달리던 말에서 곧장 떨어져 차가운 돌바닥에 세차게 내동댕이쳐졌다.“안 돼...!”목이 찢어질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이헌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두 손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으며 기다시피 처형대에 올랐다.시신 곁으로 달려든 그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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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슴을 찢는 듯한 통증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이헌은 혀끝을 세게 깨물며 억지로 의식을 붙잡았다.‘전부 다 내 탓이야!’‘내가 강설희에게 옥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일부 수하들까지 부릴 수 있는 영패를 내줬기 때문이야!’‘습격을 당해 놀란 그녀를 달래 주고, 다시는 춤을 추지 못하게 된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지나친 믿음과 권한을 내줬기 때문이야!’‘내가 나윤서를 죽음으로 내몬 칼을 강설희의 손에 쥐여 줬기 때문이야!’“궁으로 돌아가자!”이헌의 목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목소리는 이미 쉴 대로 쉬어 있었다.그는 피로 얼룩진 겉옷을 벗어 나윤서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러고는 그녀를 두 팔로 받쳐 안아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부서질세라 애지중지하는 손길이었다.이헌은 누구도 나윤서에게 손대지 못하게 했다. 가마조차 마다한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궁궐을 향해 걸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의아함,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이헌의 걸음은 휘청거렸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칼날을 밟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가슴의 상처는 이미 다시 벌어져 피가 옷깃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그 피에 나윤서의 잘린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까지 뒤섞여, 그가 지나온 길에는 길게 핏자국이 이어졌다.이헌은 곧장 봉의궁으로 돌아와 두 사람이 함께 잠들던 침상에 나윤서를 조심스레 눕혔다. 궁녀들이 따뜻한 물을 들고 다가와 나윤서를 씻기려 하자, 이헌이 버럭 호통쳤다.“썩 물러가라! 모두 짐 앞에서 물러가란 말이다!”그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보낸 뒤 전각의 문을 굳게 닫았다.이헌은 떨리는 손으로 피에 젖은 옷을 풀었다. 물에 적신 부드러운 천으로 나윤서의 얼굴과 몸에 묻은 피와 오물을 조금씩 닦아 냈다.혹여 그녀가 아프기라도 할까 봐 손길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대야의 물이 식으면 새 물로 갈았다. 그렇게 몇 번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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