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태겸아, 오늘 아침에 전령이 네 아버지의 서신을 가져왔더구나. 마침 돌아왔으니 와서 어미에게 읽어 주렴.”“예, 어머니.”임태겸은 임하연을 한 번 돌아본 뒤 임씨 부인을 부축해 나갔다.모두 떠나고 나서야 임하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침상 위로 털썩 몸을 던졌다.채의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푹신한 방석을 등 뒤에 받쳐 주었다. 돌아온 지는 조금 되었지만, 안에서 날 선 말들이 오가는 동안에는 감히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아가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부인께서도 마음속으로는 아가씨를 아끼세요. 앞으로는 심청운을 만나러 가지 마시고요. 그분은 정말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아요.”임하연이 잠깐 멈칫했다.“내가 그 인간을 만나러 갔다고 누가 그래?”“그럼 몰래 나가셔서 뭘 하셨어요?”채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돌아왔을 때의 모습이 심청운에게 거절당한 뒤와 꼭 같았으니까.“이 녀석이, 이제 나까지 단속하려 드네.”임하연은 채의의 겨드랑이를 콕 찔렀다.채의는 어려서부터 원래 주인을 모셨다.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충성심만큼은 한결같았다. 원래 주인이 죽은 뒤에는 채의도 목을 매고 뒤를 따랐다.그 마음만 생각해도 잘해 주어야 했다.채의는 금세 조금 전의 질문을 잊고 까르르 웃었다.“아가씨, 그만 간지럽히세요! 앞으로는 저희끼리 잘 지내요. 그런 몹쓸 남자들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임하연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심청운 같은 두꺼비가 나를 넘보다니, 어림도 없지. 이제 그 사람 생각은 안 해. 시집을 가더라도 그보다 백 배는 나은 사람한테 갈 거야.”채의가 반색했다.“그렇게 생각하시니 다행이에요. 도성에 왕족이며 귀족이 얼마나 많은데요. 훌륭한 집안의 공자가 그분 하나뿐인 것도 아니잖아요.”주인과 시녀가 웃고 떠드는 동안, 임서월은 제 방에 앉아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곁에 선 시녀는 공손히 몸을 낮춘 채 숨소리조차 죽였다.날이 어두워질 무렵에야 임서월이 종이와 붓을 꺼냈다. 서신 한 통을 써 내려
Read more

제12화

임하연이 피식 웃었다.“아, 심씨 성을 가진 그 두꺼비?”이 소설 속에 들어온 뒤로 심청운이라는 이름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귓가에서 끊임없이 윙윙대는 파리처럼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그 인간만 아니었어도 도망칠 궁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편안히 부잣집 아가씨로 살면서, 옷도 입혀 주고 밥도 차려 주는 호사를 누리면 얼마나 좋았겠는가.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모녀 사이가 틀어지고 남매 사이에 금이 가다니.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었다.처음에는 만나러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와 확실히 선을 그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얼굴에 꽃이라도 피었나, 보석이라도 박혔나?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원래 주인이 그토록 정신을 못 차렸을까.“가서 전해. 곧 간다고.”시녀가 떠나자 채의가 곧바로 입술을 삐죽였다.“어제 하신 말씀은 다 잊으셨어요? 왜 또 만나러 가세요?”임하연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심청운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데, 욕이라도 실컷 해 줘야 속이 풀리지.”채의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맞는 말씀이에요! 제가 얼른 단장해 드릴게요.”“됐어. 개 한 마리 보러 가는데 뭘 꾸며.”임하연은 치마의 허리띠를 매만지고는 화장기 없는 얼굴 그대로 앞마당의 작은 정자로 향했다.멀리서도 차를 마시는 사내가 보였다. 짙은 자주색 장포가 어찌나 요란한지, 혼자 멋이란 멋은 다 부린 꼴이었다.저놈이구나!소설 속 심청운은 화려한 옷을 좋아했다. 날마다 갖은 방법으로 치장하는 모습이 꼭 발정 난 수탉 같았다.임하연은 책을 읽을 때부터 의아했다. 작가는 왜 이런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 남들과 다른 길을 개척해 보고 싶었던 건가?아무튼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상대를 확인한 임하연은 좁은 길을 따라 돌로 지은 정자에 올랐다.발소리를 들은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임하연은 얼굴을 슬쩍 살폈다. 곱상하게 생겨 제법 잘생기기는 했다. 하지만 임태겸처럼 훤칠하고 늠름하지도, 사황자처럼 멋스럽고
Read more

제13화

심청운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임하연이 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허리에 달린 옥패를 단숨에 잡아 뜯었다.“네가 이걸 차고 다닐 자격이나 있어? 전에 내가 너한테 쓴 돈도 전부 돌려줘. 한 푼도 빼놓지 말고.”사실 임하연도 이 옥패가 정말 원래 주인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소설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황제가 임태겸에게 하사한 옥패였다. 당시에는 임서월이 돌아오기 전이라 임태겸도 원래 주인을 제법 아꼈다.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자 선뜻 내주었는데, 그걸 곧장 심청운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원래 주인이 숱한 착각에 빠진 것도 심청운이 이 옥패를 줄곧 차고 다닌 탓이었다.이제 생각해 보면 심청운은 그저 좋은 옥패를 얻었으니 자랑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심청운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물에 한 번 빠졌을 뿐인데, 어떻게 성정까지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요물이라도 씐 것은 아닐까?“임아연,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어?”그는 속에서 들끓는 당혹감과 분노를 억누르며 애써 점잖은 태도를 유지했다.“입 다물어. 내 이름을 네가 함부로 불러도 되는 줄 알아? 한 번만 더 불러 봐. 이를 몽땅 뽑아 버릴 테니까. 평생 입에서 바람만 새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게 만들어 줄 거야.”임하연이 버럭 쏘아붙이자 심청운은 흠칫했다. 가까스로 세워 보려던 기세도 순식간에 꺾였다.묵은 울분을 쏟아 낸 임하연은 미련 없이 돌아서 정자 아래로 향했다. 그런데 청석이 깔린 길 위에 임태겸이 서 있었다.그는 검푸른 장포를 입고 있었다. 같은 빛깔의 허리띠로 넉넉한 옷자락을 여민 덕에 넓은 어깨와 긴 다리가 한층 돋보였다. 소나무처럼 곧고 대나무처럼 반듯한 자태였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깊은 못과 높은 산처럼 묵직한 위엄이 느껴졌다.임하연은 잠시 걸음을 늦췄다.오늘은 왜 조회에 가지 않았지?그러다 문득, 이곳에 온 뒤로 임서월의 모습이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건 임서월이 파
Read more

제14화

“왜 집에 계세요? 제가 망신당하는 걸 보려고 기다리셨어요?”이불 속에 파묻힌 임하연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임태겸은 손에 조금 힘을 주어 이불을 걷어 냈다.“오늘은 쉬는 날이다. 애초에 나간 적도 없어.”임하연이 얼굴을 돌렸다.“정말요?”“못 믿겠으면 나가서 물어보거라.”임태겸의 시선이 그녀가 꼭 움켜쥔 옥패를 스쳤다. 눈빛이 조금 서늘해졌다.이것까지 심청운에게 주었단 말인가.임하연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못마땅한 듯 볼이 부풀어 있었다.“그렇게 우연이 겹칠 수가 있나요? 나오시자마자 하필 정자로 가셨다고요? 늘 서재에 계시잖아요.”속이 상해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임태겸이 담담히 답했다.“네 목소리가 너무 커서 온 집안에 들렸다.”임하연은 조금 전을 되짚어 보았다. 목소리가 크기는 했던 것 같았다.그녀가 헛기침을 했다.“갑자기 울컥해서…… 조절을 못 했어요.”“앞으로는 조심하거라.”임태겸은 그 몇 마디를 하러 온 사람처럼 곧바로 돌아섰다. 문턱 밖으로 한 발을 내딛던 그가 잠시 멈췄다.“자꾸 이불 속에 숨지 말거라. 어떤 일은 네가 직접 마주해야 한다. 피한다고 해결되지는 않아.”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임하연이 작게 혀를 찼다.그냥 시끄러워서 그런 건데. 피할 게 뭐 있다고.임하연의 짐작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정자 옆 가산 뒤에서는 임서월과 임씨 부인도 조금 전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임서월은 화가 치밀어 또 손등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안도한 듯한 표정을 띠었다.“언니가 정말 마음을 정리했나 봐요. 이제 어머니도 걱정 놓으셔도 되겠어요. 다만 말씀이 너무 거칠어서…… 심청운이 앙심을 품으면 오라버니께까지 해가 되는 건 아닐까요?”임씨 부인도 그 말들이 듣기 민망할 만큼 거칠다고 생각했다. 임아연의 말솜씨가 언제 저렇게 좋아졌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듣는 자신까지 속이 시원했다.하지만 북백후는 일찍부터 외지에서 군사를 이끌며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이
Read more

제15화

“어떤 사내가 그런 미친 여자를 데려가겠느냐.”임서월은 심청운을 슬쩍 살피더니,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흘렸다.“언니 평판이 좋지 않기는 하죠. 그래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나면 더는 소란 피우지 못할 거예요.”심청운이 고개를 들었다.“집안에서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느냐?”“어머니께서는 유 승상의 손자를 마음에 들어 하세요. 승상댁으로 시집가면 언니도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텐데, 정작 본인이 싫다네요. 이러니 저희가 혼인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아요.”심청운은 잠깐 놀라더니 미간을 좁혔다. 유재휘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유재휘는 할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도성 동쪽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예쁜 여자를 보면 집으로 끌고 가 며칠씩 농락했고, 임신한 여자조차 가리지 않았다.임아연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런 자에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유재휘는 확실히 좋지 않은 놈이지. 차라리 임아연이 어울리던 벗들 가운데서 골라 보는 게 낫겠다.”그 말을 듣는 순간 임서월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유 공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다른 혼처를 찾아야겠네요. 언니가 요즘 많이 화나 있으니, 당분간 저희도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요.”임서월은 하늘을 한 번 살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머니께 안마를 해 드려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여봐라, 심 공자를 모셔다드려라.”한편, 임태겸은 서재에 단정히 앉아 왕길에게 붉은꼬리 죽엽청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그 뱀은 남강에 많이 사는 것이 맞습니다. 뱀 시장을 조사했는데, 사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합니다. 산 채로 팔려 나간 놈은 없었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없었습니다.”임태겸의 긴 손가락이 탁자 위를 느리게 두드렸다.“시장에 있던 뱀이 아니라는 말이냐?”왕길이 몸을 굽혔다.“예.”“다른 지방을 오가는 상인들에게도 물었느냐?”“예. 독이 워낙 강해 기르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들여오는 것도 술에 담근 담낭이나 약재로
Read more

제16화

그 생각이 떠오르자 임서월의 눈에 증오와 질투가 뒤엉켰다.임태겸이 어떻게 임아연 같은 여자를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천한 계집이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은 없었다.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명목상으로는 남매였다. 임태겸에게 그런 오점이 생기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임하연이 제 위에 올라서는 꼴 역시 견딜 수 없었다.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온몸이 저절로 떨렸다. 뼛속까지 사무친 증오에, 억누를 수 없는 불안까지 더해졌다.임태겸이 저렇게 말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알아낸 것이다. 그가 이 일을 임씨 부인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안 돼. 먼저 손을 써야 했다.“도련님, 서 의원께서 오셨습니다!”문밖에서 이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청회색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약상자를 메고 빠르게 들어왔다.임서월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서 의원의 소매를 붙잡았다.“어서 어머니를 봐 주세요. 또 쓰러지셨어요. 혹시 잘못되시는 건 아니겠죠?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서 의원과 임서월의 시선이 잠깐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곧바로 약상자를 내려놓았다.“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제가 부인의 맥부터 짚어 보겠습니다.”침상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서 의원이 임씨 부인의 손목에 손가락을 얹었다. 잠시 뒤, 그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아가씨도 도련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께서는 놀란 기운이 지나치셨을 뿐, 크게 탈이 난 것은 아닙니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약을 몇 첩 지어 드리면 좋아지실 겁니다.”임태겸이 낮게 물었다.“지난 일 년 동안 어머니께서 자주 쓰러지셨다. 약도 적잖이 드셨는데 아직 회복하지 못하시는 까닭이 무엇이냐?”서 의원은 도성에서 평판이 좋은 의원이었다. 고관대작들의 집에도 귀한 손님으로 드나들었다. 임태겸 역시 그의 의술을 믿었지만, 어머니의 병세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유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서 의원이 안심시키듯 답했다.“도련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맺힌 병이 풀리지 않아 그
Read more

제17화

마침 문 앞에 이른 임하연은 그 말을 고스란히 들었다. 그녀도 임씨 부인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채의를 데리고 달려온 참이었다.걸음이 멎었다.갑자기 멈출 줄 몰랐던 채의가 그대로 임하연의 등에 부딪쳤다. 들어가지 않고 돌아설 생각이었는데, 떠밀리듯 문턱 안으로 발을 들이고 말았다.임태겸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그녀를 본 뒤였다.임하연은 어쩔 수 없이 몇 걸음 더 다가갔다.“어머니, 좀 괜찮아지셨어요?”임씨 부인의 얼굴을 살피니 입술이 지난번보다 더 짙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곁에 놓인 처방전도 슬쩍 보았다. 평범한 보약 처방뿐이었다. 저런 것으로는 임씨 부인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이제야 어미를 보러 올 생각이 들었느냐?”조금 전 임아연이 쏟아 낸 상스러운 말들을 떠올리자 임씨 부인은 또 속이 답답해졌다. 이내 거세게 기침하기 시작했다.임서월이 서둘러 임씨 부인을 일으켜 부축하고,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여봐라, 어서 어머니께 물을 가져다드리거라.”물을 몇 모금 마시고서야 임씨 부인의 숨이 조금 가라앉았다.임하연은 곁에서 열심히 제 존재를 드러내는 임서월을 한 번 보고는 몸을 숙였다.“저도 방금 소식을 듣고 곧바로 왔어요. 국공부가 워낙 넓잖아요. 어머니께서 저를 외진 운방각에 머물게 하셨으니, 아무래도 소식을 늦게 들을 수밖에 없고요.”임서월이 돌아오기 전에는 원래 주인의 처소가 임씨 부인의 처소 바로 옆에 있었다. 하지만 임서월이 대나무 숲 곁에서 지내기가 무섭다고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거처를 바꾸었다.임하연은 누구를 비꼬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그러나 임씨 부인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지금 나를 원망하는 게냐?”임하연이 고개를 숙였다.“그럴 리가요.”속으로는 자신을 탓했다. 오늘은 오지 말았어야 했다.“심청운에게도 온갖 욕을 퍼붓는 네가, 못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느냐?”임씨 부인이 침상 가장자리를 짚고 몸을 바로 세웠다.임아연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거두지 말았어
Read more

제18화

임서월이 붉어진 눈으로 임하연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언니는 어머니 곁에 조금 더 있고 싶지 않으세요? 모녀 사이에 무슨 감정을 그리 오래 품겠어요. 아까는 어머니도 언니 때문에 놀라셔서 그러신 거예요. 이제 저희 모두 언니를 믿으니, 여전히 한 가족이잖아요.”저 얄미운 계집이 또 이간질을 시작했다.이대로 나갔다가는 어머니를 외면한 매정한 딸이 될 게 뻔했다. 어차피 오늘은 눈물을 짜낼 필요도 없으니, 장단이나 한번 맞춰 줄까.짧은 순간 생각을 정리한 임하연은 침상 곁으로 사뿐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낮춰 임씨 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얼굴에는 서글픈 기색을 드리운 채였다.“저도 당연히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요. 그날 어머니께서 저를 거두어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얼어 죽었을 거예요. 그동안 친딸보다 더 아껴 주셨으니, 저 역시 오래전부터 어머니를 친어머니로 여기고 있었고요. 예전에는 제가 너무 철이 없었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시집도 가지 않고 평생 어머니 곁에서 재롱도 부리고, 정성껏 모시며 살고 싶어요.”물론 진심은 아니었다.임씨 부인의 마음을 얻어 볼 생각도 했지만, 그 지독한 편애를 겪고 나니 마음이 돌아선 지 오래였다.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임서월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서였다. 저쪽에서 제 망신을 보고 싶어 할수록, 순순히 뜻대로 해 줄 수는 없었다.그러나 임씨 부인의 마음은 그 말에 누그러졌다. 아무리 화가 나도 임아연은 어린 시절부터 제 손으로 키운 아이였다. 어릴 적의 천진하고 사랑스럽던 모습이 떠오르자, 절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딸은 자라면 시집을 가야지. 어찌 평생 친정에 머물겠니. 네 동생 말대로, 네가 임씨 성을 쓰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한 가족이란다.”둘 사이의 분위기가 갑자기 부드러워지자 임서월은 파리라도 삼킨 듯 속이 불쾌해졌다.임아연, 저 천한 계집. 연기 하나는 기막히게도 하는구나!슬쩍 눈을 든 임하연은 임서월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발견했다. 꼭 변비로 고생하는
Read more

제19화

임태겸이 곧장 이쪽을 돌아보았다. 깊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임하연은 괜히 찔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임씨 부인은 그 말이 나온 김에 아들의 혼사로 관심을 옮겼다.“태겸아, 네가 벌써 스물넷이다. 다른 집 사내들은 그 나이면 아이에게 아버지 소리를 듣는데, 너는 어찌 그리 태평하니? 혼담을 들고 오는 중매쟁이들이 우리 집 문턱을 닳게 할 지경인데, 도성의 그 많은 처자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이냐?”임태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답했다.“없습니다.”“그럼 어떤 처자가 좋은지라도 생각해 보렴.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 좋으냐, 학식 있고 예의 바른 사람이 좋으냐? 용모가 청초한 쪽이 좋으냐, 화려하게 아름다운 쪽이 좋으냐? 그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니.”“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읽을 책이 남아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임태겸은 그 말만 남기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임하연은 새삼 후회가 밀려왔다.소설에는 임태겸이 오래도록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다고 했던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은 끝내 맺어지지 못했고, 임태겸이 혼인하지 않는 것도 그 여인 때문이었다.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임하연도 몰랐다. 임태겸은 주인공이 아니었고, 자신도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았으니까.몇 화만 더 읽었어도 그가 좋아하는 여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을 텐데.두 사람을 맺어 줄 수만 있다면 더없이 큰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 그러면 나중에 임태겸에게 도움을 청할 때도 당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아깝다. 정말이지 너무 아까웠다!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설을 읽다 말지 말아야겠다.임씨 부인도 아들이 사라진 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맥이 빠진 듯 말했다.“시간도 늦었으니 너희도 이만 쉬거라.”임서월이 곧바로 일어나 임씨 부인의 팔을 살뜰히 부축했다.“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어머니.”임하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편히 쉬세요, 어머니.”그러고는 남은 정과가 담긴 접시를 챙겨 채의
Read more

제20화

임씨 부인은 임서월의 말을 곱씹었다. 듣고 보니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한쪽은 이미 계례를 치렀고, 다른 한쪽도 관례를 치른 지 오래였다. 둘 다 혼인하기에 충분한 나이였다.그러나 입으로는 딸을 타일렀다.“네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게다. 네 오라버니는 아연이가 자라는 모습을 쭉 지켜봤는데, 어찌 다른 마음을 품겠니. 아연이도 아무리 철없이 군다 한들 제 오라버니에게 그런 마음까지 먹지는 않을 게야.”임서월은 침상 곁에 앉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저도 괜한 걱정이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날 밤에는 오라버니께서 언니를 구하시느라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나오셨잖아요.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시는 분이 언제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신 적이 있나요? 더구나 요 며칠은 운방각에도 자주 가시고…….”임서월이 짐짓 말을 흐리자, 임씨 부인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다.그날 임태겸이 겉옷 한 벌만 걸친 채 헛간으로 달려간 것은 사실이었다. 운방각에서 그를 마주친 일도 있었다.거기에 임아연이 심청운을 대하는 태도까지 갑자기 달라졌다는 생각이 미치자, 임씨 부인은 눈앞이 아찔해지며 숨이 가빠졌다.“어머니, 괜찮으세요?”임서월은 얼른 임씨 부인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인중을 눌렀다. 한동안 그렇게 달랜 뒤에야 임씨 부인도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아연이가 감히 태겸이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다면, 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임씨 부인이 이를 악물었다.임하연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겉으로만 그럴듯했던 모녀의 정은 고작 몇 마디에 산산이 부서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임서월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깐, 곧 걱정스러운 표정에 가려졌다.“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도 그저 짐작일 뿐이에요. 다만 우리 집에는 사람이 많으니 말도 많잖아요. 언니를 어머니께서 대문 앞에서 거두셨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고요. 그런 언니가 오라버니와 너무 가까이 지내면, 수다스러운 하인들이 괜한 억측을 늘어놓을까 걱정돼요.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