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Chapter 31 - Chapter 40

50 Chapters

31화. 지옥(15)

“그래도 기사는 나갈 겁니다. 윤채원 씨는 정인 재단의 숨겨진 딸로 금방 소문이 나겠죠. 모든 신문의 1면은 나랑 윤채원 씨 얘기로 도배될 겁니다.”“…….”“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그거 그렇게 좋은 경험은 못 됩니다.”태건의 말에 채원은 조용히 손끝을 말았다. 강유건이 사생아라는 게 폭로되었을 때를 얘기하는 듯했다.“근데 나는 마침 적당한 결혼 상대가 필요하거든요.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이왕 비즈니스로 할 거면, 그나마 안면 있는 상대랑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채원은 태건의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결국 태건은 마침 필요한 순간에 이 결혼을 이용하겠다는 것이었다.아무 감정도, 사적인 이유도 없는 그저 필요에 의한 결혼이었다.결국 강태건도 아무 감정이 없다면, 괜찮지 않을까.채원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숨을 내뱉었다. “…… 알겠어요.”태건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채원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해요, 결혼.”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그나마 강태건이 아무 감정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럼에도 자신은 이 남자를 속이며 백재연이 짠 판에 끌고 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차마 말할 수 없는, 버려야 하는 감정은 그녀를 또 바닥으로 끌고 내려왔다.태건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빨라서 좋네. 결혼도 빠르게 진행될 것 같은데, 이참에 말이나 놓죠?”“…… 아뇨. 저는 이게 편해요. 강태건 씨도 편한 대로 해도 돼요.”태건의 말에 채원은 고개를 저었다. 감정 따윈 없어야 하는 일에, 굳이 불필요한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태건은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지, 뭐.”그러면서 시간을 확인한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 주름을 정리했다.“결혼 기사 나가면 한동안 시끄러울 거야. 최대한 네 사진은 막겠다만…… 한동안은 집에 그냥 있는 게 좋을걸.”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말을 놓는 태건에 채원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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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흔들리는 마음(1)

희뿌연 형광등 아래로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그 어여쁜 얼굴은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그녀의 주위엔 낯선 기계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온몸엔 기계와 연결된 줄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채원은 그 앞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삐, 삐, 삐. 일정한 박자의 기계음 소리가 병실 안에 울려 퍼졌다.“…….”겁먹은 얼굴로 병실을 바라보던 채원이 고개를 돌렸다.이대로 몸을 돌려 나가고 싶었지만, 등 뒤엔 그녀의 몇 배나 되는 남자들이 문을 막고 서 있었다.바로 뒤에 있던 남 비서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가까이 다가가십시오.”남 비서의 말에 채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떨리는 손을 꽉 말아쥔 그녀가, 아까부터 바닥에 붙어있던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천천히 한 발짝 다가간 그녀가 마침내 침대 앞에 걸음을 멈췄다.“…… 언니.”조심스럽게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미동도 없는 몸에 채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불렀다.“유연 언니…….”이번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채원은 불안한 눈으로 유연을 바라봤다.계속 이름을 부르면 반응해 주지 않을까? 혼수상태면 의식은 있는 거 아닐까?기대와 두려움을 안고 유연을 계속 바라보던 그때였다.“윤채원.”병실에 들어온 백재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자신도 모르게 움찔한 채원이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문 앞에 서 있던 백재연은 싸늘한 눈으로 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얼른 뽑아.”“하, 하지만…….”순간 백재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백재연이 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뒤늦게 죄송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백재연의 손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누가 너한테 말대꾸하라고 가르치던?”맞은 부위가 얼얼해지면서 동시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백재연은 들고 있던 손을 내리고 미간을 구기며 채원을 노려봤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빨리 뽑아.”백재연의 말에 채원은 다급하게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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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흔들리는 마음(2)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일정한 속도의 기계음이 뒤섞여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속이 뒤틀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소리에 채원은 제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채원이 눈을 번쩍 떴다.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어둠이 내려앉은 침실이었다.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이었고, 방 안은 고요했다.채원은 상체를 일으킨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가 욱신거렸다. 이마와 목덜미는 식은땀이 가득 맺히고, 입고 있는 파자마는 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하아…….”채원은 떨리는 손으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꿈이었다. 그저 꿈이었다.그렇게 되뇌었지만, 손끝에 남아 있는 차가운 감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던 기계음도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채원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바닥을 밟는 발이 제대로 힘을 받지 못했다. 휘청거리면서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는 곧바로 변기 앞에 주저앉았다.“우욱…….”속이 뒤집혔다.허리를 숙이고 몇 번이나 속을 게워 냈지만 나오는 건 쓰디쓴 위액뿐이었다.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었다.“하…….”채원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옆 벽에 기대앉았다.입안이 쓰고 목이 따가웠다.물기가 가득 맺힌 눈을 감자, 꿈 속에서 보았던 얼굴이 떠올랐다.창백한 얼굴, 일정한 기계음, 자신을 바라보던 백재연의 눈빛.채원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 견디면서…….”작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텅 빈 화장실에 부딪혀 돌아왔다.이미 몇 년이 지난 일인데, 언제까지 과거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걸까.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봐도 과거는 계속 꿈속에 나와 그녀를 흔들었다. 마치 잊지 말라는 듯, 경고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흔들리는지 아닌지 시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하지만 채원은 늘 꿈에서 깨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늘 뒤집힌 속을 게우며 괴로워했다.채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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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흔들리는 마음(3)

유리창에 비친 그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지훈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깊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며칠 전, 본부장실에서 태건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미친놈 맞고, 맞아 죽을 새끼도 맞아. 그러니까 내 부탁 좀 들어줘.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그냥 나가 죽어.’‘그게 네가 원하는 거면, 기꺼이 그럴게. 근데 대신에 일이 다 끝나고 나서. 그 전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어서.’자신을 보며 말하는 입가엔 미소가 그려져 있었지만,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슬퍼 보였다.결국에는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아들이긴 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애초에 성공 가능성도 희박했다.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태블릿 화면에 비친 제 얼굴이 보였다.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던 지훈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이마를 박았다.“그냥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태건은 그런 지훈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훈의 자기 비하는 채원이 차에 탈 때까지 계속됐다.* * *행사장 입구에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먼저 차에서 내린 태건이 몸을 돌려 채원에게 손을 내밀었다.채원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었다.그녀가 차에서 내리고 다정하게 팔짱을 낀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두 사람을 향한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결혼 이후 좀처럼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두 사람이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기자들은 둘의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담기 위해 바쁘게 셔터를 눌렀다.태건과 채원은 자신을 향한 카메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거나,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함께 발맞춰 걷는 모습을 보였다.“둘이 같이 왔네.”“둘이 별거 중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그건 아닌가 봐?”낮게 낮춘 목소리였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였다.채원은 애써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녀의 입가엔 계속 미소가 그려져 있었고, 태건의 팔에 팔짱을 낀 손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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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흔들리는 마음(4)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채원은 곧장 비어 있는 칸으로 달려갔다.쓰러지듯 주저앉은 그녀는 변기를 부여잡고 속을 게워 냈다.“우욱…….”오늘도 제대로 먹은 게 없어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한참을 게워 낸 채원은 칸막이에 머리를 툭 기댔다.숨을 깊게 들이마셔 보려 했지만, 목 안쪽이 꽉 막힌 것처럼 공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채원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창백하다는 말 한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희뿌연 형광등 아래 누워 있던 유연의 얼굴과 길게 늘어지던 기계음이 겹쳐 떠올랐다.“그만…….”채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두 귀를 막았다.이대로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 숨어, 행사가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하면 좋겠다고 바랐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혼자 자리를 비우면 오늘 이후 또 어떤 소문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채원은 깊은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세면대 앞으로 다가온 그녀가 수도를 틀었다.차가운 물을 손에 받아 볼과 목덜미를 적셨다. 찬물이 피부에 닿자 달아올랐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물기를 닦은 채원은 파우치에서 화장품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쿠션을 덧바르고, 지워진 입술 위에 립스틱을 덧발랐지만, 아무리 덧칠해도 퀭한 몰골은 가려지지 않았다.채원은 거울 속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괜찮아.”거울 속 어색한 미소를 확인한 그녀가 입꼬리를 더 올렸다.“하던 대로 해.”속이 무너져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철저하게 감정을 죽이는 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깟 꿈이 뭐가 대수라고.채원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화장실을 나섰다.* * *행사장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과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채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태건을 찾아다녔다.인파도 많지만 행사장 자체도 규모가 커서 태건을 바로 찾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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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흔들리는 마음(5)

굳이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왜 하필 윤채원이냐는 말이었다.채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도망치고 싶었다. 이들의 대화를 듣지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돌아가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겨우 주먹을 세게 쥐며 한 발짝 떼었을 때였다.“나도 궁금하네.”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낯익은 목소리에 채원이 고개를 돌렸다.언제부터 있었는지, 태건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평소처럼 얼굴은 무심했지만, 남자들을 노려보는 두 눈엔 살기가 드리워 있었다.태건의 등장에 남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가, 강태건 본부장…….”태건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어디서 자꾸 쥐새끼 소리가 나길래 와 봤더니만. 쥐새끼가 아니라 사람이었네.”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한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아하하……. 그, 우, 우리는, 뭐야. 아, 그냥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나 좀…….”“아아, 옛날이야기. 나도 옛날이야기 참 좋아하는데.”작게 탄식하던 그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자신들을 향한 서늘한 기운에, 남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마침 오늘 관객도 많겠다, 오늘 한 번 다 얘기해 볼까? 니네가 유학 시절에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태건의 말에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가 발끈했다.“혀, 협박하냐? 우리가 뭘 했다고……!”“협박?”남자의 말에 태건이 짧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머리가 나쁜가. 좋게 말하면 못 알아처먹네.”“뭐……?”작게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 그가 정색하며 그를 노려봤다.“협박이 뭔지도 모르는 새끼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네.”“…… 뭐?”“어디 한 번 제대로 협박해줘? 너 그럼 제정신으로 못 살아. 매 순간 숨 쉬는 것조차 괴롭게 느껴질 테니까.”“…….”태건의 낮은 목소리에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그의 옆에 서 있던 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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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흔들리는 마음(6)

강태건은 아무것도 모른다.윤채원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도, 이 모든 일은 다 백재연이 계획한 일이었다는 것도, 그리고 이제 그에게서 모든 걸 다 빼앗고 떠나야 하는 것도,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입술을 꽉 물던 채원이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 멋대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채원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다, 깊은숨을 내뱉으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연신 숨을 내뱉으며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윤채원?”그때 머리 위에서 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채원이 고개를 들자,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진 태건의 얼굴이 보였다.태건은 채원의 얼굴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뱉다가, 곧바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더니 눈썹이 꿈틀거렸다.“…… 울었어?”“아, 아니…….”안 울었다고 말하려 했지만, 방금 전의 감정 탓인지 목소리엔 떨림이 묻어 있었다.순간 미간을 좁힌 그가 곧바로 그녀의 앞에 다가와 몸을 낮췄다.가까이 다가온 그가 얼굴을 꾹 누르던 손목을 덥석 잡고 채원과 눈을 맞췄다.“왜 울어? 어떤 새끼야?”조금 격양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당황스러운 물음에 채원은 물기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태건을 바라봤다.태건은 여전히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굳이 따지면, 당신 때문인데…….’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던 채원은 결국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안 울었는데…….”“…….”채원의 말에도 태건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계속 살폈다.“그럼 여긴 왜 빨개?”태건이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가리키며 물었다.채원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볼 수 없었기에 눈만 데구르르 굴리다가, 이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아까 눈을 좀 비볐는데, 팔찌에 쓸렸나 봐요.”채원의 말에 태건의 시선이 손목에 걸린 팔찌로 향했다. 팔찌에는 그녀가 눈가에 바른 아이섀도우의 펄이 묻어 있었다.굳은 얼굴로 팔찌를 확인하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하아, 난 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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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흔들리는 마음(7)

둘 사이에 잠시 고요가 내려앉았다.행사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채원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붙잡힌 제 손목을 바라봤다.“언제까지 잡을 거예요?”채원의 물음에 태건은 어깨를 으쓱였다.“몰라.”“모른다는 말이 어디 있어요.”타박하듯 말하는 채원에 태건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옛날에 들었는데. 모르는 건 창피한 게 아니라고 했어.”“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 거 알잖아요.”채원의 말에 태건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였다.이제는 아예 대놓고 모르는 척을 하시네. 채원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태건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뱉었다.“어디 안 갈 테니까 이제 그만 놔줘요. 안 그래도 여기 이러고 있는 것도 이상한데, 이러고 있으니까 더 이상하잖아요.”채원의 말에 태건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무도 안 보는데 뭐가 이상해.”“꼭 누가 봐야 한다는 게 아니라…….”태건의 말에 반박하던 채원은 결국 한숨으로 말을 끝냈다.어째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는 기분이 들었다.결국 포기한 듯한 모습에 태건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자신을 놀리는 듯한 모습에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채원이 고개를 돌렸다.“근데 안 들어가 봐도 돼요?”“어딜?”“어디긴요. 행사장이죠. 시상식도 참석해야 한다고 하던데.”채원의 말에 태건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귀찮은 건지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잠시 생각하던 그가 손목시계를 흘깃 확인했다.“아직 시간 있어.”“이러다 늦으면 어쩌려고 그래요.”“그럼 늦는 거지, 뭐.”태연한 대답에 채원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그게 말이 돼요? 회장님 대신해서 상도 받아야 하잖아요.”“없으면 알아서 건너뛰지 않을까.”태건의 대답은 한없이 태평했다.그를 바라보는 채원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대건 그룹을 대표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그러나 태건은 여전히 태평하게,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나 상 받으러 온 거 아닌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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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흔들리는 마음(8)

그 말에 채원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아무도 없는 곳에서 채원의 작은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태건은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렸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가가 붉게 젖어 있던 얼굴에 이제야 희미하게 생기가 돌았다.“좀 낫네.”“뭐가요?”채원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태건은 채원을 가만히 바라보다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얼굴.”“…… 얼굴?”“아깐 별로였어.”망설임 없는 대답에 채원이 인상을 찌푸렸다.“남의 얼굴 보고 별로라니.”“아파 보였다는 뜻이야.”태건의 말에 채원은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그런 그녀를 보며 태건은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아까도 얘기했지만, 몸 안 좋으면 말해. 장 비서한테 시켜서 집에 먼저 보낼 테니까.”“…… 하지만…….”“윤채원이 먼저 집에 갔다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태건의 말에 채원은 입술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복도에서 자신에 대해 험담하던 남자들을 향해 경고하던 모습이 떠올랐다.채원을 바라보는 태건의 표정은 늘 그렇듯 무심했다.그 무심한 얼굴로 혼자 있는 채원에게 다가오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흔들리는 눈으로 태건을 바라보던 채원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괜히 신경 쓰지 말자, 요즘 들어 이상해진 태건을 의식할수록 더 힘든 건 채원 쪽이었다.그냥 그 자리에서 그 남자들에게 경고한 건, 채원을 욕하면 자신은 물론 대건 그룹에도 먹칠하는 거니까. 혼자 있는 채원을 찾아낸 건, 행사장에서 혼자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테니까.그런 이유라고 생각하면서 채원은 작게 주먹을 말아쥐었다.바로 그때, 두 사람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찾았다.”살벌한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들자, 머리가 흐트러진 채 살벌하게 웃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아, 장 비서.”당황스러울 정도로 섬뜩한 비주얼에 채원은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지만, 옆에 있는 태건은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며 불렀다.태연한 태도가 익숙한 듯 지훈은 숨을 몰아쉬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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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전야(1)

희미한 소독약 냄새와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북적거리는 복도를 따라 쭉 걷던 지훈은 가장 안쪽에 자리한 진료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금일 외래 진료가 종료되었습니다.산부인과 전문의 서인호’문 옆에 붙은 스크린에는 안내 문구와 담당 교수 이름이 나와 있었다.지훈은 스크린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훈이 문을 열었다.넓지 않은 진료실 안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남자가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서 교수는 안경 너머로 지훈을 한 번 훑어본 뒤,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앉으시죠.”“실례하겠습니다.”지훈이 자리에 앉자, 서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저 내렸다.향긋한 원두 냄새가 진료실 안에 은은하게 풍겼다.“커피 한 잔 드릴까요?”서 교수의 물음에 지훈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뇨, 괜찮습니다.”지훈의 대답에 서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의 것만 잔에 옮겨 담은 그가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그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어디 보자…….”모니터를 확인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던 그가 지훈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다 좋네요. 태아도 잘 자리 잡았고. 임신 5주 정도 됐네요. 축하드립니다.”지훈은 서 교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정색하며 말했다.“제 앞에서까지 그런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지훈의 말에 서 교수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아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서 교수의 웃음에 지훈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처음에는 그렇게 정색하며 자신을 내쫓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서 교수는 그런 지훈을 보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장 비서는 볼 때마다 재미있네요. 왜 강 본부장이 옆에 두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그거 전혀 칭찬 아닙니다, 교수님.”지훈의 정색에 서 교수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미안합니다. 근데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겁니까?”서 교수의 물음에 지훈은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하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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