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떠나려는 그대를 위해: Chapter 21 - Chapter 30

50 Chapters

21화. 지옥(5)

채원의 학교생활은 조용하게 흘러갔다.백재연과 남 비서가 경고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죽였다. 수업 시간에는 질문 받았을 때만 대답했고, 쉬는 시간이 되면 혼자 책을 펼쳤다. 점심시간에도 누군가의 옆자리를 찾는 대신 가장 구석진 자리를 골랐다.성적은 늘 상위권이었지만, 정인고에는 그녀만큼 우수한 성적을 가진 유명한 자제들이 많았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집안이다 보니, 선생들도 채원보단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공부는 잘하지만 사회성은 부족한 아이. 채원은 딱 그런 학생이 되었다.그렇다고 그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진 않았다. 학교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오는 곳이었다. 누군가와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도, 혼자 있는 것이 외롭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구석에서 조용히 있으며 거리를 두니, 자연스럽게 다른 학생들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다가오지 않았다.딱 한 번, 첫 시험에서 1등을 받은 채원에게 학생회 가입 권유가 있었지만, 그녀가 딱 잘라 거절한 뒤로 같은 권유는 다시 받지 않았다.그렇게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은 흘렀다.그러던 중, 성적이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늘 유지하던 등수에서 한 단계 밀려난 것뿐이었다.하지만 하필 그날, 유연의 상태에 백재연은 한층 예민한 상태였다.성적표를 확인한 백재연은 들고 있던 종이를 그대로 채원의 얼굴에 던졌다.“내가 이것밖에 못 하라고 했니?”날카로운 목소리에 채원은 고개를 숙였다.“죄송해요.”“그놈의 죄송. 너는 죄송하다는 말 말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점점 백재연의 언성이 높아졌다.채원은 두 손을 꼭 모으고 입술을 달싹였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에는 더 잘하겠습니다.”“…… 다음?”순간 백재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채원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커다란 손이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채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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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지옥(6)

계절은 초여름이었지만 그날따라 유독 때 이른 더위가 찾아왔다.반 학생들은 더위를 호소하며 자유 시간을 바랐지만, 체육 교사는 단칼에 거절하며 수업을 강행했다.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그는 얼른 준비하고 나오라는 말만 남기고 반을 나갔다.뜨거운 햇볕이 운동장 위로 쏟아졌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이마에 땀이 맺혔다.이런 날씨에 운동이라며 여학생들은 불만을 터트렸고, 남학생들은 축구가 아니라 피구를 한다는 거에 불만을 가졌다.아이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고 피구공을 꺼낸 체육 교사는 한 명씩 호명하며 팀을 만들었다.“윤채원.”채원의 이름이 나오고 그녀가 손을 들자, 체육 교사는 뒤늦게 깁스를 한 그녀의 팔을 바라봤다.“뭐야. 너 팔 다쳤어?”체육 교사의 물음에 채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에 체육 교사는 귀찮은 듯 한숨을 내뱉으며 미리 정리했던 명단을 수정했다.“그런 건 좀 일찍 말해라. 너는 피구 못 하니까 저기 벤치 가서 앉아 있어.”채원은 대답 없이 운동장 가장자리에 놓인 벤치로 향했다.“아 뭐예요, 쌤! 저도 오늘 몸 안 좋은데!”등 뒤로 다른 여학생의 원성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원만 홀로 그늘 아래에서 쉬는 게 불만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체육 교사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다른 아이들도 마저 호명했다.두 명씩 짝을 이룬 아이들은 총 네 팀으로 나뉘어 뛰기 시작했다. 시작 전까지 불만이 가득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웃음과 환호 소리로 바뀌었다.채원은 혼자 그늘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된 게임은 팽팽한 대결 끝에 최종적으로 순위가 매겨지며 끝이 났다. 체육 교사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가 끝나자, 한쪽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체육 교사는 그 모습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수업 종료까지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자자, 열심히 운동하니까 좋지? 그런 의미로 꼴찌 팀이 공이랑 조끼까지 다 정리하고 들어가자.”“그런 게 어디 있어요!”“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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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지옥(7)

뭐 하는 건가 싶던 찰나, 그가 보관함을 번쩍 들고 채원을 바라봤다.“창고에 넣으면 되는 거지?”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채원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그거 제 거예요.”“알아.”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뭘 안다는 거야? 채원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그러는 동안 남학생은 그녀의 손에 있던 공까지 빼앗아 보관함에 집어넣었다.“창고에 넣냐니까.”“네……?”순식간에 들고 있던 공까지 빼앗겼다.당황스러운 상황에 말문이 막히고 채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되물었다.남학생은 채원을 바라보더니 개의치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창고겠지, 뭐.”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채원을 지나쳐 창고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 채원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뭐야, 저 사람……?”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채원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서둘러 그를 쫓았다.뒤늦게 창고로 들어갔지만 이미 남학생이 정리를 막 끝낸 뒤였다. 손을 툭툭 털던 그가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 채원을 바라봤다.“왜?”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채원에 남학생이 물었다.채원은 당황한 눈으로 창고 안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 감사합니다.”떨떠름한 표정을 하며 그녀가 말했다.남학생은 대답 대신 채원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그녀의 깁스로 향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근데 팔은 왜 그래?”남학생의 물음에 채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그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던 제 깁스를 처음으로 물어봤다. 채원은 순간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됐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채원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친 손을 등 뒤로 슬쩍 감췄다.“…… 실수로 넘어졌어요.”“실수…….”남학생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등 뒤로 감춘 손을 바라봤다.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채원은 지금 이 순간이 부담스러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마주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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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지옥(8)

집무실로 돌아온 백재연은 한동안 창밖만 바라봤다. 그녀의 책상 위엔 오늘 아침 유연의 상태가 적힌 보고서가 놓여있었다. 몇 년을 매달렸지만, 유연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유연의 치료는 극비로 진행되어 병원에서 이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워낙 들어가는 비용이 많다 보니 이를 아는 이들 중 일부는 그녀의 치료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재연이 딸이 쓰러져서 점점 미쳐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윤 원장 또한 백재연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딸이라면 채원도 있는데, 왜 가망도 없는 유연에게 왜 그리 집착하는 것이냐며 묻기도 했다.그의 질문에 백재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채원은 유연이처럼 쓸모 있는 애가 아니에요.”그 표정과 목소리에 윤 원장은 더 이상 유연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하지만 확실히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결국 문제가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치료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백재연은 투자자가 필요했다.한숨을 내뱉은 백재연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남 비서가 추려온 국내 대기업 현황 자료를 펼쳤다.한 장, 한 장 넘기던 손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대건그룹. 최근 바이오 산업에 관심을 가지며 국내 여러 제약사에 투자 규모를 늘리고 있는 기업이었다.백재연은 유심히 서류를 바라보더니, 해당 페이지를 빼며 남 비서를 불렀다.곧바로 문이 열리고,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숙였다.“부르셨습니까.”백재연은 대건그룹이 적힌 페이지를 그에게 건넸다.“여기, 좀 더 알아봐.”그녀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은 남 비서는 시선을 내려 대건그룹의 이름을 확인했다.“어디까지 알아볼까요?”남 비서의 물음에 백재연은 나머지 종이들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뭐든 다. 가족 관계, 주변 인물, 집안 배경 다. 쓸만한 정보는 다 알아봐.”“네, 알겠습니다.”남 비서는 종이를 곱게 접어 재킷 안 주머니에 넣고 허리를 숙였다. 그가 서둘러 방을 나가고, 백재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어쩌면 채원을 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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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지옥(9)

잠시 후, 부드러운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들어와.”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채원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어요.”백재연은 대답 없이 들고 있던 사진을 그녀의 앞에 툭 던졌다.채원은 허리를 숙여 발 앞에 떨어진 사진들을 주웠다. 사진 속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확인한 채원이 고개를 들어 백재연을 바라봤다.백재연은 의자에 앉아, 들고 있던 술을 한 모금 마셨다.“이름 강태건. 대건그룹 장남이고, 나이는 너보다 두 살 많다더라.”“…….”“얘도 정인고 나왔던데. 뭐, 네가 직접 만난 적은 없겠지만.”채원은 말없이 백재연을 바라봤다.그녀가 왜 갑자기 태건의 사진들을 수집하고 자신에게 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눈만 깜빡이며 다음 말을 기다리던 그때, 백재연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얘랑 결혼해.”순간 채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결혼?’ 채원의 시선이 사진 속 태건에게 향했다. 당황한 얼굴로 사진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요?”“그러면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백재연의 시선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그녀의 말에 채원은 입을 꾹 닫았다. 맞는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통보는 의문을 낳았지만, 채원은 굳게 닫은 입을 다시 열지 않았다. 그녀에게 의문이나 감정은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통보받고, 묵묵히 따라야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백재연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남 비서를 불렀다.“남 비서.”곧이어 문이 열리고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파일이 들려 있었다.채원이 시선을 돌리자, 남 비서가 들고 있던 파일을 그녀에게 건넸다. 채원이 조용히 그것을 받아들자, 백재연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부터 외워.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채원은 묵직한 파일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언제까지 외우면 될까요?”“다음 달 자선 행사 전까지.”자선 행사? 백재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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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지옥(10)

자선 행사가 열리는 날, 채원은 평소보다 일찍 준비를 마쳤다.머리부터 발끝까지 백재연이 정해 준 모습이었다.몸의 선을 따라 단정하게 떨어지는 드레스와 높지 않은 구두.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리했고, 화장 역시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도록 했다.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선 채원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어깨는 펴고, 턱은 조금 당기고. 시선은 피하지 않되 오래 마주치지 않는다.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했던 것들이었다.“준비 다 하셨습니까?”등 뒤에서 들리는 남 비서의 목소리에, 채원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네.”채원의 대답에 남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가시죠.”그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는 차 앞에서 기다리는 백재연의 모습이 보였다.백재연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훑었다. 유연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 그나마 봐줄 만한 정도였다.“기억하지? 먼저 나서지 말고. 기다리고 있다가 강태건 눈에 네 얼굴만 확실하게 익혀 놔.” “네.”“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네, 알겠어요.”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재연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경고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실수는 절대 없어야 해.”“…… 네.”짧은 대답을 끝으로 백재연은 남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곧바로 다가온 그가 뒷문을 열어주고, 채원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이윽고 그녀를 태운 차가 행사장을 향해 출발했다.백재연은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다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호텔 앞은 이미 수많은 차량으로 붐비고 있었다.검은 세단들이 차례대로 멈춰 섰고,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채원은 사람이 붐비는 틈을 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연회장 내부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반짝이고 있었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넓은 내부에 울려 퍼졌다.곳곳에서는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는 웃으며 악수를 나누고, 서로 명함을 주고받았다.채원은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서 안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파일에서 본 얼굴들이 하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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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지옥(11)

그날 저녁, 채원은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바에 도착했다.은은한 조명 아래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채원은 안으로 들어서며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그리고 어렵지 않게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바 테이블 끝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강태건이었다.채원은 그를 보며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오늘도 우연을 가장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남자를 속여야 한다.채원은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며 주먹을 작게 말아쥐었다.흔들리지 마.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돼.머릿속으로 익숙한 말을 되뇐 뒤, 채원은 발걸음을 옮겼다.구두 굽이 바닥과 부딪히며 작은 소리를 냈다.채원은 일부러 태건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어서 오세요.”바텐더가 그녀를 향해 작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얼떨결에 채원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인사했다.바텐더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 하나를 앞에 내밀었다.“어떤 걸로 드릴까요?”“아…….”채원은 급하게 메뉴판을 훑었다.지금껏 입에 술을 대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게 적당할지 몰랐다.낯선 이름들을 쭉 읽던 그녀가 익숙한 이름에 시선을 멈췄다.네그로니. 백재연이 종종 마시던 술이었다.“네그로니로 주세요.”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주문한 칵테일 제조를 준비했다.칵테일이 준비되는 동안 채원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그녀가 손톱 밑의 여린 살을 뜯었다.태건에게 다가가야 한다. 백재연이 시킨 일이니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술이라도 마시면 좀 괜찮아질까.걱정하던 그때 그녀가 주문한 칵테일이 나왔다.“여기 있습니다.”“아, 감사합니다.”채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채원은 작게 숨을 내뱉으며 잔을 들었다.선뜻 입에 대지 못하고 주춤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향을 맡았다.잔을 가까이하자 오렌지 껍질을 비튼 듯한 향과 씁쓸한 허브 향이 먼저 코끝에 닿았다.낯선 향기에 채원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취향에 안 맞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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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지옥(12)

“술도 처음인데?”채원은 입술을 꾹 닫고 그를 바라봤다.뭐가 이렇게 집요해?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태건은 픽 웃으며 말했다.그 미소에 채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태건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뭐 하는 건가 싶던 찰나, 그가 그녀의 옆자리로 다가왔다.“그럼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오늘은 혼자 마시기엔 좀 우울해서.”채원은 흘깃 그를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덤덤한 척 연기했지만, 속으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걱정하던 찰나였다.옆자리에 앉은 태건이 채원 쪽으로 몸을 숙였다.가까워진 거리에 은은한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순간 채원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가까이 다가온 태건이 처음 그녀가 주문했던 네그로니를 집어 들었다.“이건 내가 마실게요.”태건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며 술잔을 가져갔다.채원은 입술을 달싹이다 긴장을 감추기 위해 술잔을 들었다. 자꾸만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옆자리에 앉은 태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는 조용히 그녀가 주문했던 술을 조금씩 마셨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채원의 손도 술잔으로 향했다.그렇게 반쯤 비워졌을 때, 태건이 입을 열었다.“천천히 마셔요.”멈칫하던 채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태건은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맛있다고 해도, 그것도 엄연히 술이니까. 계속 마시면 취합니다.”“…… 알겠어요.”채원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내려놨다.그 모습에 태건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자신에겐 천천히 마시라 해놓고 태건은 들고 있던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채원은 조용히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사진 속에서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도 그는 늘 무표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태건은 생각보다 자주 웃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표정 변화가 있었다.자신을 향한 시선에 태건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괜찮습니까?”“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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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지옥(13)

강 회장의 손에 들린 사진 가장자리가 조금씩 구겨졌다.한 장, 두 장. 사진을 넘길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은은한 조명이 깔린 고급 바 안, 나란히 앉은 두 사람.서로를 마주 보며 술잔을 나누는 둘의 모습은, 단순한 지인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강 회장은 마지막 사진을 한참 내려다보다 책상 위에 내려놨다.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설명해 봐.”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 울렸다.그의 앞에 서 있던 태건은 무심한 눈으로 사진을 내려다봤다.놀라거나 당황한 기색도 전혀 없는 저 얼굴을 태연하다고 해야 할지, 의젓하다고 해야 할지. 강 회장은 깊은 시름을 앓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요즘 왜 그러는 거냐.”지끈거리는 두통에 그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파혼을 통보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술집에서 여자와 사진이 찍히다니.“뒤늦게 사춘기라도 왔냐?”“그럴 리가요.”태건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태도에 강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그럼 평소에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이딴 사진이나 찍혀!”높아진 언성이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그럼에도 태건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사진을 바라보다, 강 회장의 얼굴을 바라봤다.“부적절한 모습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부적절……!”“그리고 문제 될 게 뭐가 있나요. 저 지금 약혼녀도 없는데.”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멍하니 바라보던 강 회장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지금 그게 할 소리야!”고함을 지른 그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아직 공식 발표 전이야! 세상은 너랑 소율이랑 여전히 약혼 사이인 걸로 안다고!”전 약혼녀이자 세림 그룹의 둘째, 공소율을 언급하는 강 회장에 태건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이미 세림 그룹 쪽에서 파혼을 통보받았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잠시 생각하던 그가 사진을 한 장 들었다.“그럼 결혼하면 되겠네요.”“…… 뭐?”강 회장은 어처구니없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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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지옥(14)

말은 그럴싸했지만, 강 회장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백재연은 그런 그를 보며 개의치 않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작게 숨을 내뱉었다.“회장님도 제 뒷조사를 하셨을 테니, 저희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아셨겠죠.”“…….”백재연의 말에 강 회장은 입을 꾹 닫았다.그의 눈썹이 씰룩이는 걸 확인한 백재연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첫째 딸이 그렇게 되고, 저는 꽤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욕심을 부린 대가를 받은 거겠죠. 우리 유연이가 워낙 잘난 아이였으니.”“…….”“그래서 우리 채원이는 더 꼭꼭 숨겼어요. 하나 남은 자식을 잃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데 용케도 알아냈더라고요.”여유롭게 말을 이어가던 백재연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언니를 가장 좋아하던 아이였어요. 몸이 약해서 밖을 잘 나가지 못했고 그 탓인지 겁도 많지만, 언니 앞에선 어리광도 부리고, 잘 웃었어요. 그런 애가 언니를 잃었으니, 충격이 많이 컸겠죠. 그래서 안 해보던 짓을 한 거 같은데, 그 틈을 노리고 사진을 찍을 줄은…….”“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강 회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말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그를 바라봤다.“그건 제가 회장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인데요?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뭐죠? 이런 사연이나 듣자고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백재연의 말에 강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잠시 망설이던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마침 제 아들, 강태건의 혼인 상대가 필요하던 참입니다.”“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요.”강 회장은 주먹을 살짝 말아쥐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윤채원 양도 적당한 혼인 상대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고요. 언제까지 소중하다고 둥지 안에만 둘 순 없지 않습니까.”“글쎄요. 제 눈엔 아직 아이라서.”백재연이 석연치 않은 얼굴로 말했다.그 모습에 강 회장은 주먹을 더 세게 쥐며 말했다.“원하는 게 뭡니까?”“그렇게 말하니까 꼭 자식 두고 장사하는 기분이네요.”“…… 피차 비슷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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