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죽인 당신이 무너졌다: Chapter 11 - Chapter 20

20 Chapters

11화

침대 하나, 벽에 고정된 작은 책상 하나, 그리고 손바닥만 한 창문이 전부였다. 천장 모서리에는 오래된 습기가 검은 얼룩으로 남아 있었고, 바닥에서는 물기가 제대로 마르지 않은 듯 눅눅한 냄새가 올라왔다.“여기서 삼 년을 지냈습니까?”“계속 이 방에 계셨던 건 아닙니다.”“얼마나 있었는지 물었습니다.”최명석은 뒤따라온 직원에게 기록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도혁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철제 프레임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매트리스에는 누군가 오래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침구는 이미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그는 침대 머리맡의 벽을 바라보았다.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자리에 가느다란 긁힌 자국이 있었다. 손톱으로 여러 차례 긁은 듯 일정하지 않은 선들이 낮은 곳에서 위쪽으로 이어져 있었다.“이건 누가 그랬습니까?”최명석이 다가와 벽을 확인했다.“오래된 병실이라 여러 환자가 사용했습니다. 특정 환자의 흔적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도혁은 더 묻지 않았다.그러나 눈길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삼 년 전 하윤이 병원에 끌려 들어가던 날, 그녀는 문을 붙잡으려다 손톱이 부러졌었다. 도혁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직원들이 빨리 데려가지 못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그 기억이 떠오르자 턱 근육이 굳어졌다.그때 하윤이 조금만 얌전히 굴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도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그때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습니까?”최명석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어떤 일을 말씀하시는지…….”“상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묻는 겁니다.”원장은 서류철을 가슴 앞에 붙잡았다.“연락은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다만 보호자께서 직접 통화를 원하지 않으셨고, 이후에는 지정된 연락 담당자를 통해 전달했습니다.”“지정된 연락 담당자?”“윤세아 씨입니다.”도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복도 끝에서 운반대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가 그 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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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그날은 자신의 생일이었다.세아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있었던 날이었다. 저녁에는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그런데 기록에는 그날 오후 세아가 병원에 들른 것으로 적혀 있었다.도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시간에는 분명 다른 곳에 있었는데.”“방문 기록 자체는 병원 전산에 남아 있습니다.”도혁은 화면을 껐다.“출입 기록과 차량 기록까지 확인해.”승재가 고개를 숙였다.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청소 도구를 밀고 오던 중년 여성이 걸음을 멈췄다. 여자는 도혁과 최명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최명석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박 여사님, 지금은 이쪽 청소하실 필요 없습니다.”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쥔 걸레가 조금씩 젖어 바닥에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도혁의 손에 들린 사진을 본 뒤, 오래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그 여자분…… 가족이세요?”최명석이 곧바로 말을 막았다.“박 여사님.”도혁은 원장을 돌아보지 않았다.“아내였습니다.”중년 여성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그녀는 하윤의 사진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사진 속 얼굴을 확인한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걸레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그분이…… 남편분을 많이 찾으셨어요.”도혁의 시선이 여자에게 고정되었다.“무슨 말입니까?”“밤에도 찾고, 밥 먹다가도 찾고…… 전화 한 번만 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어요.”박순자는 복도 끝을 살폈다. 누군가 듣고 있을까 두려운 듯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한번 시작한 말은 쉽게 멈추지 못했다.“처음에는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했어요. 억울하다고, 남편만 만나면 다 설명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런 말도 안 하더라고요.”그녀는 입술을 떨며 숨을 골랐다.“나중에는 그냥 잘못했다고만 했어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요.”도혁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박순자는 사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편분이 화나셨으면 자기가 사과하겠다고, 집에 안 보내 줘도 좋으니 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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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왜 이런 이야기를 이제야 합니까?”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박순자가 어깨를 움츠렸다.도혁은 곧바로 최명석을 돌아보았다.“당신들은 환자가 저렇게 매달리는데도 보호자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까?”원장의 얼굴이 붉어졌다.“보호자께서 연락을 제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그건 불필요한 연락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지!”도혁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박순자는 놀라 한 걸음 물러났고, 승재는 주위 직원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문을 닫았다.도혁은 원장을 노려보았다.“아내가 죽어 가는데도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습니까?”최명석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도혁의 분노는 더욱 거칠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했고, 어떤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박순자가 돌아가려던 순간, 도혁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윤세아가 왔던 날에는 어땠습니까?”여자의 발걸음이 멈췄다.최명석이 재빨리 끼어들었다.“그 부분은 환자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라…….”“당신한테 묻지 않았습니다.”도혁은 박순자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도 벽에 걸린 시계가 초침을 움직이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그분이 다녀가시면…… 환자분이 많이 힘들어했어요.”“어떻게?”“처음에는 울었어요. 나중에는 울지도 못하더라고요.”박순자는 손바닥으로 젖은 앞치마를 쓸었다.“어느 날은 병실에서 나오다가 저를 붙잡았어요. 그 여자분이 또 오면 자기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고…… 자기가 없는 척해 달라고 부탁했어요.”도혁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세아를 무서워했다고요?”“네.”“왜?”박순자는 고개를 저었다.“이유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오는 날이면 꼭 무슨 일이 있었어요. 밤에 직원들이 뛰어가고, 문이 잠기고…….”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한동안 잊으려 애썼던 어느 날의 일을 떠올렸다.그날도 세아가 병원을 다녀간 뒤였다.박순자는 야간 청소를 위해 복도 끝으로 향하다가 하윤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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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최명석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해당 날짜의 기록을 확인해야 합니다. 환자분이 스스로 물을 쏟았을 가능성도 있고…….”“물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중요합니까?”도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젖은 옷을 입고 밤새 있었다는 게 사실인지 묻고 있습니다.”최명석은 대답하지 못했다.도혁은 턱을 세게 문질렀다.하윤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다. 겨울이면 집 안에서도 두꺼운 양말을 신었고, 침대에 누우면 차가운 발을 자신의 종아리에 가져다 대곤 했다. 도혁은 그때마다 귀찮다는 듯 밀어 냈지만, 하윤은 웃으며 다시 발끝을 가져왔다.그 기억이 떠오르자 도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러나 그는 그 장면을 오래 떠올리지 않았다.“윤세아가 방문한 날의 처치 기록을 전부 가져오세요.”최명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당시에는 환자분이 치료에 협조하지 않는 일이 많았습니다.”“그건 나도 압니다.”도혁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하윤이 고집이 얼마나 센 여자인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병원에서 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하윤을 이곳에 가둔 사람은 자신이었고, 그녀가 아무리 울고 매달려도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 역시 자신이었다.하지만 도혁은 여전히 그 일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았다.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문제는 자신이 맡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병원과,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윤세아에게 있었다.원장실로 돌아왔을 때 승재가 작은 봉투 하나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대표님, 개인 물품 인계 기록을 확인했습니다.”도혁은 젖은 코트 소매를 털어 내며 자리에 앉았다.“어디 있습니까?”“일부는 병원에서 폐기했고, 나머지는 보호자 측 대리인이 수령했습니다.”“누가 가져갔는데?”승재는 대답하기 전에 봉투에서 사본을 꺼냈다.인계서 아래쪽에는 윤세아의 서명이 있었다.도혁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목록은 짧았다.낡은 가디건 한 벌, 작은 머리끈, 사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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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한 통도 빠뜨리지 말고.”잠시 후 세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세요? 하윤 씨는 이미…….”“죽었지.”도혁은 그 말을 내뱉고도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죽었다고 해서 네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은 아니야.”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혁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하윤이는 내 아내였어.”전화를 끊은 뒤에도 그는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그 말이 세아에게 어떤 의미로 들렸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혁에게 하윤은 여전히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지고, 자신이 끝낼 수 있다고 믿었던 관계 안에 있는 여자였다.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허락 없이 그 관계의 마지막 흔적까지 가져갔다.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그 시각, 최명석은 원장실 안쪽의 잠긴 서랍을 열고 있었다.서류철 맨 아래에는 공식 기록에 첨부되지 않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었다.그는 사진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병실 침대에 앉아 있는 하윤이 보였다.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었고, 양손은 무릎 위에서 서로를 세게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그러나 사진 오른쪽, 벽에 걸린 작은 거울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윤세아였다.그녀는 하윤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최명석은 사진을 뒤집었다.뒷면에는 날짜와 짧은 메모가 남아 있었다.그날은 하윤이 처음으로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지 못한 날이었다.최명석은 메모를 손가락으로 가렸다.사진이 촬영된 날의 기록에는 하윤이 심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최명석이 기억하는 하윤은 그날 유난히 조용했다.윤세아가 병실에서 나간 뒤에도 그녀는 한동안 침대에 앉아 있었다.누군가 말을 걸어도 고개를 들지 않았고, 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그날 밤, 간호사가 그녀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었을 때 하윤은 한참 동안 빈 종이만 내려다보았다.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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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결혼기념일 밤, 서하윤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호텔 침실의 문을 열었다.객실 안에는 달콤한 향수와 와인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반쯤 닫힌 커튼 사이로 스며든 도시의 불빛이 흐트러진 침구 위에 희미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는 입술 자국이 남은 와인잔 두 개가 놓여 있었으며, 바닥에는 남자의 넥타이와 검은색 스타킹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하윤은 문턱에 선 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서도혁의 셔츠는 가슴께까지 풀려 있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윤세아는 인기척을 느끼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윤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서둘러 몸을 가리기는커녕, 도혁의 가슴 위에 얹혀 있던 손을 느긋하게 거두며 침대 끝에 걸쳐 둔 가운을 집어 들었다.그 순간 하윤의 시선이 세아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멈췄다.지난달 도혁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보석상 영수증이 떠올랐다. 남편은 거래처에 보낼 선물이라고 했고, 하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포장지 색상까지 골라 주었다. 그때 자신이 선택한 짙은 남색 포장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그 목걸이가 지금 다른 여자의 목에서 빛나고 있었다.“하윤아.”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의 얼굴에는 당황이나 미안함보다 불쾌감이 먼저 떠올랐다. 하윤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내려다보던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고,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주워 들면서도 아내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호텔에 오기 전까지 그녀는 남편을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오늘은 결혼 삼 주년이었다.도혁은 아침부터 지방 일정이 있다며 저녁 식사 약속을 미뤘다. 하윤은 실망한 내색을 하지 않은 채, 몇 달 동안 모아 둔 돈으로 남편이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던 시계를 샀다.처음 그 시계를 보았을 때 도혁은 가격표만 확인하고 돌아섰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라는 이유였다. 하윤은 그런 남편에게 처음으로 쓸모없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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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결혼한 뒤 삼 년 동안 하윤은 남편이 싫어하는 일을 피하려 애썼다.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의 회사에 함부로 찾아가지도 않았다. 시댁 어른들이 그녀를 못마땅해할 때도 도혁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봐 되도록 참았다.그러나 지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나한테 설명해 줘. 이 여자가 왜 여기 있는지, 당신이 왜…….”“하윤 씨.”세아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의 허리끈을 느슨하게 묶었다. 맨발로 카펫을 밟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하윤에게 다가오면서도 도혁의 곁에서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제가 설명할게요. 도혁 씨한테 화내지 마세요.”세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도혁 씨가 요즘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집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회사에서도 하루 종일 시달리는데…….”그녀는 말을 멈추고 도혁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오늘은 그냥 제가 곁에 있어 드리고 싶었어요.”하윤은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이 여자는 변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아내 앞에서 자신이 그를 위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그만해요.”하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내 남편이 힘든 걸 당신이 왜 위로해요?”세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상처받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하윤 씨, 그런 뜻이 아니라…….”“그리고 당신.”하윤은 도혁을 바라보았다.“이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도혁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네가 이러는 게 더 피곤하다는 생각은 안 드나?”그 말에 하윤은 입을 다물었다.세아는 도혁의 뒤편으로 살짝 몸을 물리면서, 하윤에게만 보일 만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하윤은 손에 들고 있던 선물 봉투를 객실 입구의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침대 위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흔적이 자꾸 눈에 들어왔고, 도혁이 세아를 가리지도 않은 채 자신을 나무라는 모습은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면 남편은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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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하윤 씨, 제발 진정하세요.”“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하윤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세아가 협탁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기 때문이다.유리잔을 쥔 그녀의 손이 하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세아는 도혁을 힐끗 바라본 뒤, 마치 겁에 질려 몸을 피하려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저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아요.”다음 순간 세아의 손목이 미세하게 돌아갔다.유리잔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쨍그랑!날카로운 파열음이 객실에 울렸다.깨진 유리 조각이 카펫 위로 튀었고, 세아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움켜쥐었다. 잔이 깨지는 순간 다른 손을 뻗어 유리 조각을 건드린 탓에 손바닥 가장자리에 가느다란 상처가 생겼다.“아악!”도혁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세아야!”세아는 손바닥을 감싼 채 뒤로 비틀거렸다. 가운 소매 아래로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도혁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상처를 살폈다.“괜찮아? 손 보여 줘.”하윤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자신은 세아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지만 유리잔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세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하윤을 바라보고 있었다.“하윤 씨……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 마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렸지만, 정작 하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하윤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뭘……?”세아는 대답하지 않은 채 도혁의 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도혁 씨, 저 정말 괜찮아요. 하윤 씨도 화가 나셨으니까…….”그 순간 도혁이 고개를 들었다.하윤은 남편의 눈빛을 보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깨달았다.“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하윤은 고개를 저었다.“나 아무것도 안 했어.”“세아 손에서 피 나는 거 안 보여?”“저 여자가 혼자 잔을 떨어뜨린 거야.”도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만해.”“정말이야. 내가 만지지도 않았어.”그녀가 한 걸음 다가가자 도혁은 세아를 자신의 등 뒤로 물렸다.“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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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세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하윤은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상처는 손바닥 가장자리에 있었고, 잔을 떨어뜨리는 순간 세아가 다른 손을 뻗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우연히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다.하윤이 그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도혁이 직원에게 먼저 지시했다.“필요한 처치만 하고 나가 주세요. 오늘 일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부탁합니다.”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잠시 뒤 객실 문이 닫히자 도혁은 하윤을 돌아보았다.“세아한테 사과해.”하윤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는 세아의 어깨에 자신의 재킷을 걸쳐 주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하윤은 자신이 모르는 동안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못 들었어?”“내가 왜 사과해야 해?”도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네가 다치게 했잖아.”“안 했어.”“서하윤.”하윤은 두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당신이 저 여자랑 잤어. 그걸 내 눈으로 봤는데, 지금 나보고 저 여자한테 사과하라는 거야?”“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세아가 다친 건 별개의 문제야.”“그럼 당신 잘못은?”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윤은 한 걸음 다가갔다.“당신이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랑 호텔에 있으면서…….”“그만하라고 했어.”도혁은 그녀의 말을 끊고 탁자 위에 놓인 선물 봉투를 집어 들었다.그리고 하윤의 손에 밀어 넣었다.“이거 가지고 집에 가.”하윤은 구겨진 리본을 내려다보았다.몇 달 동안 준비한 선물이었다. 남편이 웃는 얼굴로 받아 줄 거라 생각하며 포장지까지 골랐던 물건을, 도혁은 아무렇게나 돌려주었다.“내가 나중에 이야기할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돌아가.”하윤은 봉투를 붙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도혁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사과부터 하라고.”세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았다.“도혁 씨, 괜찮아요. 저 정말 사과 안 받아도 돼요.”그녀는 하윤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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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비켜요.”“그런데 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세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도혁 씨가 하윤 씨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하윤의 손끝이 굳었다.세아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사랑하는 여자라면 그렇게 울게 두지는 않을 텐데. 아까 도혁 씨가 누구부터 챙겼는지 보셨잖아요.”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당신이 일부러 잔을 깨뜨렸다는 거, 나 봤어요.”세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그래요?”그녀는 붕대 감긴 손을 내려다보았다.“그런데 도혁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데요.”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세아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하윤 씨가 아무리 설명해도 도혁 씨는 제 말을 믿을 거예요. 오늘 보셨으니까 아시겠죠?”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하윤은 움직이지 않았다.세아는 그녀의 손에 들린 선물 봉투를 바라보았다.“아, 그리고 결혼기념일 축하드려요.”그녀가 웃었다.“하윤 씨한테는 별로 좋은 날이 아니었겠지만요.”하윤의 손이 떨렸다.세아는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다가 객실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고개를 돌렸다.“참, 한 가지 더요.”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다음에는 도혁 씨 앞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세요. 그 사람, 감정적으로 구는 여자 정말 싫어하거든요.”세아는 잠시 하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낮게 덧붙였다.“오늘도 하윤 씨가 조금만 참으셨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요.”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다시 객실로 돌아갔다.하윤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세아는 자신이 남편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하윤이 그것을 목격하고 화를 냈다는 사실을 더 큰 잘못으로 만들고 있었다.그리고 도혁은 이미 그 판단을 받아들였다.***하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한 시가 넘었다.현관에 들어서자 익숙한 집 안 풍경이 보였다. 거실에는 그녀가 아침에 꽂아 둔 꽃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식탁 위에는 두 사람의 결혼사진이 담긴 작은 액자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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