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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올가미: Chapter 21 - Chapter 29

29 Chapters

21화. 시작된 침묵

태건은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말만 골라 뱉더니, 다음 날부터 입을 닥쳐 버렸다. 전날 밤 설주는 빈 컵을 쥐고 부엌에 서 있었다. 태건이 “나도 미치겠어, 너 때문에 좆이 서서 잠을 못 자겠다”고 털어놓은 직후였다. 그 말이 끝났는데도 냉장고 옆 작은 시계만 초침을 움직였고,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둔 채 누구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설주는 욕이라도 해야 했다. 평소처럼 저 개새끼를 밀어내야 했다. 그런데 목까지 치밀었던 말들은 어머니가 2층에서 뒤척이는 소리에 모조리 삼켜졌다. “헛소리하지 마, 새끼야.”겨우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계단 손잡이를 잡은 손이 땀에 젖었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방에 들어와 문을 걸고서야 자기가 달아났다는 걸 인정했다. 물컵을 부엌에 두고 왔다는 사소한 사실까지 기억나서 더 열이 받았다. 속이 부글거렸고, 동시에 다리 사이가 후끈거렸다.일요일 아침, 여관 식탁에는 전날 남은 콩나물국과 달걀찜이 올랐다. 승표는 공사 일정표를 펼쳐 놓고 이번 주 객실 보수 얘기를 했고, 정옥은 설주의 소개팅을 위해 머리핀까지 찾아 놨다며 들떠 있었다.설주는 국을 뜨는 척 숟가락만 움직였다. 태건은 맞은편에 앉아 휴대전화도 꺼내지 않고 밥을 먹었다. 평소 같으면 그가 한 번쯤 시비를 걸었을 자리였다. 밥을 왜 그렇게 느리게 먹느냐거나, 또 잠을 설쳤느냐거나. 오늘은 계란 접시를 설주 쪽으로 밀어 주지도 않았다.설주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모든 신경을 빼앗겼다. 며칠 동안 귀가 시간부터 통화 상대까지 들쑤시던 놈이 마침내 포기한 건가 싶어 목이 뻣뻣해졌다. 먼저 그만두겠다고 한 적도 없으면서 버림받은 사람처럼 구는 꼴이었다. 수저를 놓을 때마다 그쪽에서 고개를 들까 살폈고, 끝내 마주치는 시선이 없자 제 밥맛까지 사라졌다. 대신 다리 사이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저 새끼가 진짜 손을 놓은 건가.“너희 둘 싸웠니?”정옥이 먼저 이상을 알아챘다. 예전에는 말만 붙으면 욕부터 튀어나와 식탁이 시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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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먼저 찾는 사람

“미친 새끼가 가족방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설주는 시동도 걸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쥐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대신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라는 안내가 남았고, 읽지 않은 사람은 아직 2명이었다. 정옥과 승표가 보기 전에 지웠다는 뜻이었다. 안심해야 하는데 손끝이 식었다. 부모가 아침마다 들여다보는 대화방에서 태건은 선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었다가, 자기가 넘었다는 흔적만 남겨 놓았다.주차장 맞은편 작업차에 그가 있었다. 설주가 쳐다보자 태건은 창문을 올렸다. 저 개새끼는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여야 속이 풀리는 걸까. 지금 내려가 따지면 정옥이 현관에서 손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소개팅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또 받을 것이다. 설주는 차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검은 원피스 자락이 안전벨트 고리에 끼어 구겨졌다.그때 여관 안에서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설주야! 잠깐 와 봐!”정옥이었다. 설주는 구두 뒤축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현관으로 뛰었다. 세탁실 앞 복도에 물이 흥건했다. 오래된 세탁기 배수 호스가 빠져 회색 거품이 바닥을 가로질렀고, 빨랫감 바구니는 넘어져 수건을 쏟아 놓았다. 정옥은 맨발로 바구니를 세우려다 미끄러질 뻔했다.“엄마, 거기 서 있지 마. 넘어져!”설주는 어머니의 팔을 잡아 마른 곳으로 끌어냈다. 세탁기 전원을 끄고 배수구 앞에 수건을 밀어 넣었으나 바닥의 물은 계속 번졌다. 새 원피스 밑단에 회색 물이 튀었다. 내일 세탁하면 될 옷이었다. 그런데 지금 일요일 약속부터 떠올린 자신이 역겨웠다.호스가 세탁기 뒤에 끼어 있었다. 설주는 무릎을 꿇고 팔을 뻗었지만 좁은 틈에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님용 수건이 젖는 사이 승표는 외부 일을 나가 없었다. 누군가 커다란 세탁기를 밀어 줘야 했다.“태건아! 야, 기태건!”이름이 먼저 튀어나왔다.설주는 입술을 다물었다. 전화기를 찾아 번호를 누를 필요도 없었다. 태건은 유리문 너머 작업차 옆에 서 있었다. 부른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는 거리였다. 그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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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도망갈 구실

“그땐 네 좆부터 차단하지, 이 개새끼야.”설주는 태건의 질문에 침을 튀기며 그렇게 내뱉고 세탁실 문을 거칠게 밀었다. 발치에는 아직 물을 잔뜩 먹은 수건들이 질척하게 쌓여 있었고, 정옥이 던져놓은 밀대에서는 회색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태건은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호스 연결부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설주는 젖은 원피스를 무릎에서 떼어내며 다리를 꼬았다. 치마 밑으로 스며든 물기가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일요일 오후 3시까지 역 앞 카페에 가려면 이미 늦었다.늦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차에 올랐으나, 룸미러부터 들여다봤다. 빗물에 뭉친 머리카락, 물 얼룩이 번진 치맛단. 모르는 남자에게 이런 꼴을 보여주는 게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태건이 다시 불러대면 또 다리를 벌리고 돌아갈 것 같아서 창문 밖을 확인하는 자신이 더 쪽팔렸다. 운전대 아래로 손을 내리자 이미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카페에는 20분 늦게 도착했다. 남자는 이미 식은 커피를 앞에 놓고 있었고, 설주의 젖은 치맛단을 보고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일은 힘들지 않으냐고, 여관을 운영하는 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설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은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이미 태건의 좆을 만지작거리는 상상이 스치고 있었다.“죄송해요. 지금 누굴 만날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남자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설주는 그 예의까지 미안해져 계산대에서 두 사람의 커피값을 치렀다.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강변 도로를 탔다. 집에 늦게 들어가면 누가 자신을 찾았는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람을 시험하는 짓거리만 배웠다. 그것도 그 새끼한테. 이미 운전석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로 팬티를 살짝 내리고 싶을 정도로.월요일부터 매물을 뒤졌다.출퇴근할 회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멀리 갈 이유는 없었지만, 설주는 여관에서 버스로 한 번에 닿지 않는 동네를 골랐다. 수건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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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대답하지 않는 번호

24화. 대답하지 않는 번호“그러니까 전기 나간 게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네 말에 기어오는지 시험한 거야?”설주는 계약서를 움켜쥔 채 카운터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이 끝이 손바닥을 베었지만, 그보다 더 따가운 건 태건이 던진 말이었다. 복구된 천장등 아래로 환불 영수증과 카드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님들의 짜증도, 정옥이 허리를 굽혀 사과하던 일도 다 실제였다. 그런데 태건은 그 난리판에서 설주가 집을 떠날 수 있는지만 궁금했다는 거다.“전기는 진짜 나갔어. 손님들 줄 서 있던 것도 봤잖아.”“그러니까 더 좆같다는 거지. 엄마 힘든 거까지 이용해서 날 불러낸 거냐?”태건이 장갑을 벗다 말고 멈췄다. 설주는 그가 뭐라 변명하기 전에 계약서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정옥이 부엌에서 그릇 긁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고함을 지르면 어머니는 전기 때문에 예민해졌다고 믿을 테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릴 수 있는 일이 또 하나 늘었다는 생각에 속이 뒤집혔다.“잘 봤냐? 네가 부르면 내가 기어오는 꼴.”그 말만 남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태건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게 더 얄미웠다. 붙잡아서 욕이라도 퍼부을 작정이었는데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설주는 문을 쾅 닫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팬티 안이 후끈거렸다.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태건이 장갑 벗는 순간 드러난 팔뚝 근육과, 그 좆이 바지 안에서 꿈틀거릴 것 같은 상상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밤에 부동산으로 전화했을 때 중개사는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했다. 계약금을 먼저 넣은 사람이 생겨서 그 빌라 3층은 나갔다는 것이다. 같은 금액대의 방을 더 보여 주겠다는 말에 설주는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책상에 펼쳐 놓은 계약서가 우스웠다. 현관의 희미한 신발 자국과, 맞은편 벽만 보이던 부엌 창이 아깝다고 느껴질 줄 몰랐다. 도장을 찍기 1분 전에 돌아섰던 자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태건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정말 계약했을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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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착각이라고 해

“기태건.”제 방에서 혼자 그 이름을 뱉었는데, 문밖에서 대답이 돌아왔다.“불렀어?”설주는 휴대전화를 침대 위로 던졌다. 도경이 보낸 ‘네가 못 떠나는 이유, 진짜 집 때문이야?’라는 문장이 아직 화면에 떠 있었다. 문 아래에는 태건의 그림자가 걸려 있었고, 복도 창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까지 선명했다. 제 머릿속에서만 맴돌아야 할 이름이 벽을 뚫고 나간 것이다.“안 불렀거든. 남의 방 앞에서 뭘 엿들어?”“객실 장부 갖다주러 왔어. 문 열어.”설주는 옷깃을 여미고 잠금쇠를 풀었다. 태건은 수리비 영수증을 끼운 파일을 들고 있었다. 문턱 안쪽을 넘겨다보지도 않았는데 설주는 그가 침대 위의 휴대전화까지 봤다고 느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자기 가슴을 스치듯 지나가는 게 느껴져, 유두가 스르르 서는 게 싫었다.일부러 문을 좁게 열자 파일 모서리가 문틀에 걸렸다. 복도 벽지는 오래된 습기 때문에 아래쪽이 들떠 있었고, 수납장 위에는 정옥이 접어 둔 객실용 수건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집에 붙은 사소한 흔적 하나까지 자기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특히 태건의 체온이 복도 공기를 타고 밀려오는 게, 보지 사이가 이미 미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여기 놔. 내일 보면 되잖아.”“내일 아침에 아버지 결재받아야 해.”영수증을 받아드는 사이 도경의 메시지가 다시 울렸다. 설주는 반사적으로 화면을 뒤집었다. 태건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왔고, 그녀는 별것 아닌 행동 하나에도 변명을 준비하는 자신에게 욕이 나왔다. 속옷이 이미 젖어서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뭘 봐, 씨발.”“아무것도.”그가 돌아서자 설주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런데 정작 손은 문고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지면 오늘도 혼자 남아 태건이 한 말과 하지 않은 말까지 뒤집어 볼 터였다. 좆이라도 한 번 박히면 이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부동산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한 까닭을 누구에게라도 뒤집어씌우고 싶었다. 다시 계약할 기회가 생기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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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태건의 여자

“말해 보라고? 씨발, 엄마 앞에서도 똑같이 물을 수 있으면 해 봐.”설주가 이를 악물고 내뱉는 순간, 계단참에서 정옥의 발이 멈췄다.태건은 그녀의 방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채 돌아섰다. 설주는 파일을 품에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나타나자 제일 먼저 그에게서 거리를 벌리는 자신이 지긋지긋했다.“이 시간에 둘이 왜 안 자니?”“내일 결재받을 장부 줬어요.”태건이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옥은 수납장에서 여분의 베갯잇을 꺼내며 설주에게도 일찍 자라고 했다.설주는 엄마가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문을 붙들고 있었고, 태건은 그런 그녀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사소한 일 하나를 들고 밤늦게 제 방 앞까지 온 이유를 생각하다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다음 날 아침, 정옥의 휴대전화가 식탁 위에서 두 번 울렸다.설주는 계란국에 뜬 파를 걷어 내고 있었다. 승표는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태건은 고장 난 객실 도어록 부품을 봉투에 담고 있었다.“태건아, 너 지난번 소개팅 싫다고 했지?”그릇을 잡은 설주의 손이 멈췄다.전에 정옥이 소개해 주겠다고 했을 때 설주는 가족방에 없던 여자친구까지 만들어 일을 망쳤다. 이번에는 제법 마음에 드는 상대가 생긴 모양이었다.“우리 단골 손님 조카래. 서른이고, 여기서 멀지 않은 데서 일한대. 사진도 보내 주셨네.”정옥이 화면을 태건 쪽으로 돌렸다.설주는 보지 않으려고 국에 밥을 말았다.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는 동안 화면의 빛이 맞은편 남자의 턱을 비췄다.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벌써 이 식탁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옥의 기대까지 갖춘 여자였다.“한 번 만나 봐. 이번엔 누나가 괜한 소리 안 하겠지?”정옥이 웃으며 설주를 돌아봤다.설주는 뜨거운 밥알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한 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난번 거짓말을 또 들먹이고 싶지 않았다. 태건 앞에서 화내는 이유도 설명할 수 없었다.“만나 봐. 나이 먹었으면 여자도 만나고 그래야지, 씨발.”승표가 신문을 내리며 말버릇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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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말을 주워 담다

“그 여자한테 전화하지 마, 씨발.”설주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이었다. 본인도 놀랐다. 태건이 다른 년한테 전화하려던 순간, 벽시계는 11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에 쥔 수리 내역서는 이미 구겨져 있었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수화기 너머로 태건의 숨소리가 멎었다.“뭐라고?”태건은 웃지 않았다. 설주는 목소리를 낮췄다.“아니… 그냥. 엄마가 붙여준 년한테 밤늦게 전화하지 말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그냥 나가지 마.”설주는 자신이 한 말을 되돌리기는커녕 더 깊게 박아버린 걸 깨달았다. 통화를 끊자마자 태건의 이름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프런트 냉장고 소음마저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설주는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발소리를 죽였다. 부모님 방 앞을 지날 때는 이유도 없이 숨을 참았다. 언제부터 남의 소개팅을 막는 일이 어머니에게 들키면 안 될 비밀이 된 걸까.방에 들어가자마자 이불을 확 잡아당겼다. 자기 입에서 나온 한 마디가 계속 귓속을 맴돌았다. 누가 들으면 애인 잡는 소리처럼 들릴 텐데. 정작 둘은 가족사진 속에서 나란히 서 있는 사이였다. 그 사진 아래에서 혼자 질투로 발광하는 년이 자기라는 게 숨통을 조였다. 속옷 사이로 이미 축축하게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태건의 좆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씹이 간질거렸다.다음 날 아침, 정옥이 수건 수량을 적고 있을 때 설주는 식탁 앞으로 반찬 접시를 바짝 끌어당겼다.“쟤 어디 갔어?”“일찍 나가서 자재 정리한다던데. 왜?”“어제 보내라는 내역서가 틀려서.”거짓말이었다. 태건은 이미 다 보냈고, 설주는 그 서류를 어젯밤에 움켜쥐고 있었다. 어머니 앞에서조차 본능적으로 거짓말이 나왔다.창고에 들어서자 페인트 냄새와 축축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주는 수건을 풀면서도 계속 태건의 작업화 소리를 기다렸다. 아홉 개, 열 개… 숫자를 세면서도 머릿속은 태건의 손이 자기 가슴을 움켜쥐는 상상으로 가득했다. 보지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태건의 작업화가 창고 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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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경계가 어디야

“중요하니까.”그 말이 끝나자마자 설주는 창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건 실은 카트가 복도를 지나가고, 정옥이 납품업자랑 수량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 밖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는데, 태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네 말이 중요하다”고 했다.“씨발, 중요하면 뭐 해. 내 말이라면 다 들을 거야?”태건은 대답 대신 비뚤어진 수건 상자를 똑바로 세웠다. 조금 전 그가 다가왔을 때 설주는 물러서지 못했다. 선반 끝이 등을 찌른 것도 아닌데 발을 떼지 않았다. 그걸 스스로 깨닫자 괜히 상자 모서리를 잡아뜯었다. 종이 가루가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소개팅 안 나간 건 내 결정이야. 누나가 책임질 일 없다고.”“그래 놓고 왜 내 말이 중요하다고 지랄이야.”“그건 누나가 먼저 물었잖아.”설주는 잘린 포장 끈을 바닥에 내던졌다. 정옥이 문 앞에서 이름을 부르자 둘은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태건은 납품서에 숫자를 적고, 설주는 수건 묶음을 다시 세었다.어머니가 203호 욕실 바닥에 물이 번졌다며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귀까지 달아오르던 설주는 그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할 일이 생기면 저 새끼의 말이 잠시라도 잊힐 것 같았다.하지만 계단을 올라가면서부터 또 계산이 시작됐다. 태건이 따라올까. 혼자 가겠다고 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배관 하나 확인하는 일에도 자기 마음이 먼저 들통 나는 게 이제는 버릇처럼 느껴졌다.난간에 물걸레 자국이 길게 나 있었고, 아래층에서 정옥이 식사 준비하는 소리가 났다. 설주는 매일 오르던 계단을 오늘은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걸었다. 그게 더럽게 겁이 났다.203호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객실에는 투숙객 흔적 대신 새 침구에서 나는 세제 냄새가 남아 있었고, 작은 냉장고가 불규칙하게 웅웅거렸다. 창문 없는 복도에서 들어온 불빛이 욕실 문턱까지만 닿았다.설주는 문을 열어 둔 채 바닥의 물 자국을 살폈다. 타일과 세면대 받침 사이에 얇게 물기가 번져 있었다.태건은 작업 가방에서 마른 휴지를 꺼내 연결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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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밖으로 나갔는데

“그래, 나간다. 나가면 될 거 아니야, 이 개자식아.”설주는 203호 문턱을 넘어선 뒤에야 자신이 정말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복도는 여전했다. 문마다 번호판이 붙어 있고, 멀리서 청소 카트 바퀴가 타일 틈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등 뒤가 계속 따가웠다. 태건이 따라 나올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적어도 이름이라도 부르지 않을까.그 생각 자체가 역겨워서 설주는 구두 뒤축으로 바닥을 세게 찍었다. 방 안에서는 공구 부딪히는 소리만 나더니, 이내 203호 문이 닫혔다.그게 끝이었다.설주는 멈춰 서서 203호 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나가라 해놓고는 정말로 자기가 떠난 자리를 확인하러 오지도 않는 놈이었다. 가서 따질까 싶었지만, 곧 몸을 돌렸다.“허, 지랄하고 있네.”붙잡지 말라고 한 건 자기였다. 가족이라는 선을 넘지 말자고 먼저 떠든 것도 자기고, 태건이 길을 막지 않은 걸 안도해야 하는 것도 자기였다. 그런데 그 새끼는 그대로 해 줬고, 설주는 입안에 씹어 뱉을 욕부터 찾았다.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일부러 발걸음을 늦췄다. 난간에 말라붙은 걸레 자국이 손에 묻었고, 1층에서는 정옥이 손님에게 체크아웃 시간을 설명하고 있었다. 태건의 작업화 소리가 계단을 밟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날에도, 새벽에 화장실 내려갈 때에도 익숙했던 그 발소리.그런데 끝내 들리지 않았다.설주는 프런트를 지나 세탁실로 들어갔다. 빨랫감 바구니를 발로 밀어 문을 가렸지만,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누가 지나가면 알 수 있게 틈을 남겨 뒀다. 그 짓을 하고 나서야 자기가 얼마나 구차한지 깨달았다.세탁기 두 대가 번갈아 돌아가며 바닥을 울렸다. 벽에 붙은 종이에는 세제 비율이 적혀 있었고, 바구니마다 객실 번호가 달려 있었다. 설주는 분류 끝난 수건을 다시 펼쳐 길이를 맞췄다. 접었다 펴고, 또 접었다. 손으로 일을 하면 머리가 조용해질 줄 알았다.수건 다섯 장을 정돈하고 여섯 번째를 집어 들었을 때, 그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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