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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올가미: Chapter 11 - Chapter 20

29 Chapters

11화. 저 새끼 때문에

호두과자 봉투에서 제 이름을 확인한 순간, 설주는 그 종이를 씹어 삼키고 싶었다. 윤설주. 세 글자가 주문표 받는 사람 칸에 또박또박 박혀 있었다. 태건은 분명 어머니에게 줄 거라고 했으면서, 선물이 자기 것이라는 걸 눈치챌 만큼 가까이 다가가 놓고 마지막에 슬쩍 발을 빼 버린 새끼였다. 얄미운 건 그런 걸 알아채고도 ‘내 생각을 했구나’ 하는 기쁨이 몇 초 동안이나 스멀스멀 피어올랐다는 사실이었다. 그 짧은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설주는 제 뺨을 후려치고 싶어졌다. 설주는 봉투를 탁자에 내려놨다. 식어 딱딱해진 과자에서 단내가 났고, 카운터 밖 복도에서는 정옥이 바닥을 끄는 슬리퍼 소리가 들렸다. “뭐 먹어? 태건이가 사 왔니?” “몰라. 쓰레기겠지.” 설주는 급하게 주문표를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정옥은 봉투를 들여다보다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딸이 이를 악물고 있다는 건 전혀 모르는 얼굴로. “얘는 출장 갔다 와서도 먹을 걸 챙겨 오네. 너도 하나 먹어.” “안 먹어. 입맛 없어.”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설주는 과자 하나를 손에 쥐었다. 버리려다 결국 반으로 갈라 입에 넣었다. 속은 아직 촉촉했다. 작은 조각을 씹으면서도 그녀는 태건을 욕했다. ‘엿 먹으라고 준 걸 왜 처먹고 있냐’는 생각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다리 사이가 미세하게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날 밤 그녀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복도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나면 태건이 샤워를 마쳤는지 귀를 기울였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어느 방인지 구분하려고 숨을 죽였다. 자기가 이 집에 돌아온 뒤 가장 많이 익힌 게 그의 발소리라는 사실이 끔찍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 주머니에서 구겨진 주문표를 꺼냈다. 태건이 자기 이름을 적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종이 모서리가 헤지도록 문지르고 있었다. 호두과자 한 봉지에 의미를 붙이는 서른셋 먹은 년. 설주는 종이를 찢으려다 손을 멈췄다. 대신 침대 밑 서랍에 밀어 넣었다. 버리는 것조차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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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네가 골라 준 남자

설주는 장부를 가슴에 붙인 채 한 걸음 물러났다. 창고 입구에 선 태건은 시선을 거두었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손님이 프런트 벨을 두드렸다. 설주는 그 소리가 고마워 문을 밀치고 나왔다. 카운터로 돌아가는 몇 걸음 동안 장부 속 주문표가 팔꿈치에 쓸렸다. 종이 한 장을 들켰을 뿐인데, 그가 제 속까지 뒤져 본 것 같았다.객실 열쇠를 건네고 잔돈을 세는 동안에도 태건의 말이 귓가에 남았다. 일부러 이름을 남겼다고. 그렇다면 엄마에게 주려고 샀다는 소리는 뭘까. 좋아하는 과자를 기억했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들킨 뒤에도 태연하게 구는 태도가 더 괘씸했다. 혼자 얼굴 붉히는 쪽은 언제나 자기였다.설주는 그날 밤 방문을 걸어 잠갔다. 괜히 태건이 올라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까 봐 텔레비전을 켰고, 자막도 읽지 못한 채 새벽까지 채널만 바꿨다. 다리 사이가 자꾸만 축축해지는 게 짜증스러웠다. 저 새끼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다음 날 아침에는 그를 피하려고 203호 퇴실 청소를 자청했다. 세탁 바구니를 끌고 계단을 오르다 손잡이에 정강이를 부딪쳤을 때도 욕은 태건에게 돌아갔다.씨발, 저 새끼 때문에 멀쩡한 다리만 성할 날이 없었다. 보지도 간질간질해서 미칠 것 같았다.정오 무렵 정옥이 식구들을 불렀다. 승표가 보일러실에서 올라왔고 태건은 뒷마당 수도를 잠그고 손을 씻었다.설주는 조금 늦게 식탁에 앉았다. 냄비에는 두부를 큼직하게 썬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고, 볶은 멸치와 깻잎절임, 계란말이가 접시마다 나뉘어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빛에 밥그릇 가장자리의 물방울까지 보였다.설주는 태건과 마주 앉지 않으려고 정옥 옆자리를 골랐다. 그러나 태건이 승표에게 작업 내역을 설명하며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 무릎이 닿을 거리도 아닌데 설주는 식탁 아래 발을 의자 안쪽으로 거두었다. 이미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설주 너 어제부터 밥을 왜 이렇게 깨작거려?”정옥은 딸의 밥그릇을 한번 살폈다. 설주는 멸치볶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씹는 동안 작은 가시가 잇몸에 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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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네가 내 남편이라도 돼?

“씨발, 나를 무슨 중고 물건 내놓듯이 소개하고 지랄이야.”설주는 통화를 끊지도 못한 채 태건을 노려봤다. 싱크대에는 덜 씻은 접시가 쌓여 있었고, 행주에서 떨어진 물이 맨발 가까이까지 흘러왔다. 태건은 부엌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정옥이 딸의 대답을 재촉했다.“설주야, 듣고 있어? 태건이가 괜찮은 사람 있대.”설주는 수도를 잠갔다. 물소리가 사라지자 태건의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대화방까지 눈에 들어왔다. 정옥이 보낸 부탁에 그는 짧게 '알아볼게요'라고 답해 놓았다. 제 누나에게 먼저 물어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엄마, 나중에 얘기해. 지금 설거지 중이니까.”“너 33살이야.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세월 다 간다.”어머니는 말끝에 웃음을 섞었다. 늘 딸이 잘되기만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 기대가 설주에게는 가장 잔인한 종류의 호의가 되어 돌아왔다. 아무 죄 없는 어머니를 상대로 소리칠 수 없어 전화를 끊었고, 곧장 태건에게 돌아섰다.“누가 너보고 내 남자 찾아 달랬어?”“엄마가.”“그럼 싫다고 했어야지. 네가 무슨 결혼정보회사 직원이냐?”태건은 대꾸하지 않고 젖은 바닥을 보았다. 설주의 발치로 물이 번지자 선반에서 걸레를 꺼내 던졌다.그 무심한 행동 때문에 설주의 속이 더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은 저 새끼가 다른 년의 좆이라도 빨아대는 상상만 해도 하루 종일 머릿속이 개판이 되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이름 모를 새끼 앞으로 밀어 내고 있었다.“조건은 괜찮아. 현장에서 알게 된 형인데, 일도 성실하고.”“너랑 아는 새끼면 다 괜찮냐?”“사람이 괜찮다니까. 한 번 만나 보고 싫으면 말고.”태건이 정말로 쓰레기 같은 새끼를 소개한다면 욕이라도 실컷 퍼부을 수 있었을 텐데, 일도 성실하고 부모한테 말할 수 있을 만큼 신원이 분명한 놈이라니. 마땅히 거절할 핑계를 찾기 어려웠다.설주는 걸레를 집어 바닥을 닦았다.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어머니가 아까 붙여 둔 밴드가 떠올랐다. 엄마는 손을 베면서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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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 여자한테 왜 웃어

“엄마 올라오신다. 입 좀 닥쳐, 이 개새끼야.”설주는 태건의 어깨를 밀치려다 손을 거뒀다. 손을 댄 순간 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계단에서 빨랫감이 든 바구니가 벽에 부딪혔고, 곧 정옥의 슬리퍼가 복도에 나타났다.설주는 검은 원피스를 등 뒤로 감추었다. 태건은 먼저 문에서 물러났다. 방금까지 설주의 보지를 손가락으로 후벼대며 “누나야, 조용히 해” 하고 속삭이던 놈이 어머니 앞에서는 얌전한 아들이었다.“둘이 여기서 뭐 하니?”“소개팅 옷 골라 주는 중이요.”설주는 태건을 쏘아봤다. 정옥은 딸이 든 원피스를 보고 웃었다. 날짜가 일요일 오후로 잡혔다며, 까다롭게 굴지 말라는 당부까지 남겼다.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설주는 아무 말도 못 했다.당장 취소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태건 앞에서만 더 초라해질 것이었다. 저 새끼한테 보지나 보이고 싶지 않았다.다음 날 오전, 여관 현관에 낯선 여자가 들어왔다.짙은 청바지에 넉넉한 흰 셔츠, 어깨에는 카메라 가방이 걸려 있었다. 여자는 젖은 우산을 털기 전에 신발 밑창부터 닦았다. 비에 젖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명함을 내밀었다.“촬영 때문에 왔어요. 한미주라고 합니다.”설주는 이름을 읽고도 한 번 더 확인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태건을 찾던 바로 그 여자였다.사진으로 본 적도 없으면서 얼굴이 먼저 마음에 안 들었다. 더 엿 같은 건 미주가 예의 바르고 일도 능숙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트집 잡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커피 드려요? 원두 갈아서 내려 드릴게요.”“물만 주셔도 되는데요.”“괜찮아요. 여기 손님한테는 다 그렇게 해요.”거짓말이었다. 촬영 업체 사람에게 직접 커피를 내린 적은 없었다. 설주는 컵을 꺼내면서 미주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살폈다. 장식 없는 은반지 하나. 그걸 보고 기뻐해야 할지 불안해해야 할지도 몰랐다.반지 하나로 저 여자의 연애사를 재단하는 자기 머리가 정말 개판이었다. 태건이 저 년 보지에 좆 박았는지, 아니면 아직 안 박았는지 그것만 궁금했다.미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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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질투할 자격

정옥이 현관문을 밀어젖히는 순간, 설주는 태건의 뺨으로 올라가던 손을 주머니에 처박았다.“너희 둘, 또 무슨 지랄이야?”어머니의 입에서 욕이 나오자 오히려 숨이 턱 막혔다. 정옥은 젖은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주차장을 살폈다. 촬영차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빗물만 남았고, 태건은 렌즈 덮개를 쥔 채 서 있었다. 설주의 얼굴을 보던 정옥이 한숨을 쉬었다.“손님 가시자마자 싸워? 밖에서 다 들려.”“촬영 끝났으면 장비 챙겨서 가야지. 쟤가 그 년이랑 쓸데없이 노닥거리잖아.”변명으로 고른 말이 하필 그 년이었다. 입 밖에 나온 순간 어머니의 시선이 달라졌다. 예약 사이트에 올라갈 사진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야 해서 그렇다고, 계약금이 걸린 일에 사담이 길어지면 곤란하다고. 말할수록 꼭 도둑이 장부를 들고 회계 감사를 하자는 꼴이었다.“그년 일 잘하시던데. 태건이도 도와준 거고.”정옥은 딸의 젖은 소매를 털어 주었다. 설주는 그 손을 떼어 내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자기 팔에 묻은 먼지를 걱정하는 동안, 자신은 어머니의 아들이 다른 년 보지에 자기 좆을 처박는 걸 상상하니 속이 뒤집혔다.“누나가 좀 예민해요. 제가 정리할게요.”태건이 그렇게 말하자 정옥은 일이 끝난 줄 알고 안으로 들어갔다. 설주는 바로 따라가지 않았다. 유리문에 어머니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태건을 돌아봤다.“정리? 뭘 정리해. 내 입부터 처막겠다는 거야? 그 년한테 너 좆 보여주려고?”“누나가 일 때문에 화낸 거면 계약서부터 봐. 미주 씨 오늘 촬영한 것 말고도 보정할 게 많아.”미주 씨. 설주는 그 호칭을 곱씹었다. 이름 뒤에 붙은 두 글자가 유난히 친밀하게 들렸다. 조금 전까지 커피와 우산까지 챙겨 준 년이었다. 돌아서자마자 출입금지를 시키려는 자신이 얼마나 기괴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업무를 붙들었다.“다음 작업은 다른 년 시켜. 업체가 그년 하나뿐이냐?”“멀쩡히 계약한 사람을 왜 바꿔?”“싫으니까. 그 년 보지에 네 좆 박히는 꼴 보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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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203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새끼 번호 좀 안다고 사람 협박해? 너 진짜 좆같다.”설주는 태건의 휴대전화를 손등으로 세게 밀어냈다. 화면에는 정옥이 알려 준 소개팅 장소와 시간이 그대로 떠 있었다. 태건이 아는 남자를 소개해 놓고, 이제는 그 연락처까지 휘두르며 자기를 시험하는 꼴이었다. 기껏 다른 남자를 만나 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태건에게 한 번쯤 엿 먹어 보라는 심보였는데, 그조차 놈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협박한 적 없는데. 누나가 먼저 공평하게 하자며.”“내가 언제 그랬어?”“내 여자한테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 화내고, 누나 일에 끼면 또 지랄하고. 내가 대체 뭘 해야 되는데?”설주는 답 대신 계산대 서랍을 세게 닫았다. 안에 들어 있던 동전들이 요란하게 튀었다. 복도 끝에서 정옥이 나오자 태건은 수리 내역서를 집어 들었고, 설주는 영수증을 뒤집었다.둘은 거짓말을 맞춰 본 적도 없으면서 부모 앞에서만큼은 기가 막히게 손발이 맞았다. 정옥은 그걸 사이좋은 남매의 배려라고 믿었다. 설주는 어머니가 두 사람의 침묵을 얼마나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는지 알았고, 그 신뢰에 기생하는 자신의 꼴이 가장 더러웠다.“203호 커튼 봉이 내려앉았대. 손님 받기 전에 좀 봐.”정옥은 열쇠를 태건에게 건넸다. 내일 오후 예약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서둘러 달라는 말을 덧붙이고 부엌으로 돌아갔다.설주는 카운터에 남으려 했으나 태건이 수리 사진을 같이 확인해야 한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업무상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엿 같았다.203호는 빈방이었다.촬영 때문에 새로 갈아 끼운 흰 침구는 손때 하나 묻지 않았고, 창문 아래 벽지에는 며칠 전 비가 스며든 자국이 누렇게 남아 있었다.설주는 커튼을 젖혀 얼룩의 끝을 확인했다. 태건은 공구 가방을 바닥에 펼친 뒤 나사를 골랐다. 방 안에는 냉장고 모터가 켜졌다 꺼지는 소리와 복도에서 밀려오는 청소용 소독약 냄새가 남았다.태건이 의자를 창가로 옮겼다. 설주는 넘어질까 싶어 등받이를 붙잡았다. 그러다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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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취소는 누가 했는데

“그 말 다시 해 봐. 이번엔 문 열어 놓고 해, 이 개새끼야.”설주는 203호 침대 끝에서 손을 뗐다. 태건이 던진 질문이 입에 올리는 순간부터 더러웠다. 그 자리에 앉을 남자가 자신이 아니어서 싫으냐고. 하필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친 객실 한가운데서, 아래층엔 숙박료 받는 어머니가 있는데, 그는 설주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너무 쉽게 건드렸다.복도에서 청소 카트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설주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바깥의 일상이 코앞에 있었다. 저쪽으로 한 발만 나가면 다시 프런트 직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태건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발끝이 바닥에 붙었다.“누나가 싫으면 취소한다니까.”“네가 소개한 놈을 네가 취소하면, 엄마한테는 뭐라고 할 건데?”“사정 생겼다고 하지.”그렇게 간단했다. 태건에게는 사람을 붙였다 떼는 일이 문자 한 통이면 끝나는 모양이었다. 설주는 소개팅 상대가 보낸 정중한 인사말을 떠올렸다. 그 남자는 지금 어떤 옷을 입고 나올지 고민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방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새끼의 일요일이 장난감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아무것도 하지 마. 나 갈 거니까.”설주가 열쇠를 집자 태건이 비켜섰다. 붙잡지 않는 행동까지 약이 올랐다. 그는 커튼 봉이 제대로 고정됐는지 확인한 뒤 공구함을 들었다. 자기 혼자 사흘 밤을 설친 사람처럼 서 있던 설주와 달리 그에게는 끝내야 할 수리가 남아 있었다. 설주는 그의 손가락 관절이 튀어나온 걸 보면서, 저 손이 자기 보지를 벌려 문지르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라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문을 나설 때 설주는 그가 한 말에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질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태건의 좆이 자기 안에 박혀 있던 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프런트에는 2박 예약한 중년 부부가 서 있었다. 남자는 아내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받아 들었고, 여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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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벨이 울리기도 전에

“내 소개팅을 왜 네가 취소해, 이 개새끼야.”설주는 빈 프런트에서 그 말을 뱉고 나서 계단을 올려다봤다. 위층은 조용했고 복도 끝 태건의 방문 아래로만 불빛이 새어 나왔다. 손에 쥔 휴대전화에는 소개팅 상대가 보낸 질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구 말이 맞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었다.답을 쓰려는데 엄지가 떨렸다. 화가 나서인지, 태건 때문에 자기 속이 이렇게까지 젖어 있는 게 기분 나빠서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설주는 입안의 살을 씹었다. 사람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만들어서 좆을 세우게 하는 재주라면 저 새끼가 진짜 천재였다.제 의사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일요일 오후 3시에 뵙겠습니다. 혼란 드려 죄송합니다.문자를 보내자 상대는 곧 알겠다고 답했다. 설주는 태건에게도 한바탕 퍼부으려고 대화방을 열었다. ‘네가 뭔데’를 썼다가 지우고 ‘취소하지 말랬지’를 썼다가 또 지웠다. 몇 걸음만 올라가 문을 두드리면 될 일인데, 그러다 정옥이 깨면 무슨 이유로 동생 방을 찾아갔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냥 문 열고 들어가서 “야, 너 때문에 내 씹이 이렇게 축축해졌잖아”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그녀는 결국 전화기를 뒤집어 놓았다. 소개팅을 지키려는 건지 태건이 먼저 연락하게 만들려는 건지, 자기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이튿날 정옥은 다림질한 검은 원피스를 설주 방 문고리에 걸어 두었다. 옷자락 아래로 붙은 작은 쪽지에는 ‘내일 잘 다녀와’라고 적혀 있었다.설주는 그 종이를 떼어 손바닥에 쥐었다. 옷에는 다림질할 때 뿌린 섬유 향이 남아 있었다. 제 옷을 개는 손길까지 어머니가 챙겨 준 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딸을 위해 밤새 생각했을 어머니가 떠오르자 속에서 욕이 치밀었다. 미워할 사람은 정옥이 아니었으므로 그 욕은 또 태건을 향했다. 저 새끼가 자기 속옷까지 축축하게 만들어놓고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굴어서.아침 식탁에서 태건은 수저만 챙겨 일어났다. 설주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아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고, 일요일 약속도 언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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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돌아와서 더 좆같은 놈

“개소리 좀 작작해. 너 지금 사람 물바다에 처박아 놓고 농담이 나오냐?”설주는 전화기를 어깨에서 떼어 냈다. 203호 욕실 바닥은 수건으로 막아도 미끄러웠고, 방금 잠근 밸브에서 녹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전화기 너머에서 태건이 무언가 말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더 듣다간 누가 먼저 보고 싶었냐는 말에, ‘야, 지금 당장 와서 내 보지에 좆 박아’ 같은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휴대전화 화면이 꺼지자 방 안의 소음이 도리어 커졌다. 천장 환풍기는 덜컹거리고, 문밖에서는 청소 카트가 삐걱댔다. 설주는 수건을 비틀어 양동이에 처박았다. 소독약과 오래된 배관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뒤섞였고, 무릎에 닿은 타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젖은 면이 손바닥을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건이 오기 전에 다 치워 버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수건 하나 갈 때마다 다른 쪽에서 물이 번졌다.씨발, 누가 오랬어.그 말을 속으로 세 번쯤 되풀이하자 반대로 그가 얼마나 남았을지 궁금해졌다. 계단을 한번 내려가 주차장을 살펴볼까 하다가, 정옥에게 왜 일을 놔두고 밖을 보느냐는 질문을 받을 게 뻔해 포기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마저 숨어서 해야 하는 처지가 한심했다.도로 사정도 모르는 주제에 시계를 보고, 차 소리가 날 때마다 복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재상에서 여관까지 평소보다 오래 걸리면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조금 전에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화를 냈으면서.계단 아래에서 정옥이 물었다.“태건이 온대? 손님 들어오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온대. 걔 없으면 여관 망해? 엄마도 좀 그만 찾아.”정옥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딸을 보았다. 바닥에 쪼그린 설주의 젖은 바짓단을 보고는 수건을 더 가져다줬다. 설주는 어머니 손등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서도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화낸 상대가 어머니가 아니라는 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주차장에서 작업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난 건 그로부터 10분쯤 뒤였다.설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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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첫 번째 질문

설주는 태건의 뺨부터 후려치고 싶었지만, 먼저 확인한 건 복도 끝 정옥의 방문이었다.문틈 아래 불빛은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잠들었다는 보장은 없었다. 바로 옆에서 태건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조금 전 그가 훑어본 자리에 아직도 시선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설주는 잠옷 소매를 끌어내렸다. 손에는 구겼다가 다시 편 203호 수리 내역서가 들려 있었다.“내가 언제 달려 나왔다고 지랄이야. 네가 일을 개판으로 해 놓으니까 확인한 거지.”“출장에서 돌아왔을 때는?”설주는 혀를 깨물었다. 그날은 고장 난 배관도, 손님도 없었다. 현관 앞까지 신발을 구겨 신고 뛰어나간 걸 정옥까지 봤다. 억울한 건 사실관계가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자기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얼마나 보지가 축축해졌는지 태건이 기억한다는 사실이었다.“그거 하나로 평생 우려먹어. 아주 좆같은 재주다.”그가 시선을 거두자 설주는 도리어 얼굴을 들었다. 놀리지 않으면 화가 나고, 쳐다보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대체 어느 쪽을 바라는 건지 자신도 몰랐다. 복도 창문은 비 때문에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들뜬 창틀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젖은 종이의 모서리가 손가락에 붙었다. 속옷 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가, 이미 부풀어 오른 젖꼭지를 더 세게 일으켰다.“내일 그 형 만난다고 했지?”“그래. 만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을 거야. 왜, 일정표라도 제출해?”태건은 어깨를 돌려 길을 비켜 줬다. 설주는 그 행동이 제일 싫었다. 다정한 척 붙잡았다가 막상 나가겠다고 하면 한 발 물러서는 새끼. 내일 다른 남자 앞에 앉겠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그에게서 ‘가지 마’라는 소리가 나올까 봐 귀를 세운 자신은 더 한심했다. 이미 속옷이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태건의 시선이 스친 자리마다 피가 몰려, 보지가 간질거렸다.아래층에서 냉장고 문이 닫혔다. 정옥이 물을 마시러 내려간 모양이었다. 설주는 손잡이를 잡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태건이 먼저 말했다.“하나만 물어보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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