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의 일대일 로맨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제11화

도희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두 눈만 쉴 새 없이 깜빡이면서, 더 캐묻자니 겁이 났다.그렇다고 시경이 사적인 일 때문에 자신을 특별히 배려하는 건 아닌지, 그게 못내 궁금했다.도희의 얼굴에 온갖 표정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니, 또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시경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라서 미리 귀띔해 준 거야. 그날 일과는 상관없어. 정규직이 되는 건 도희 씨 하기 나름이고.” “사적인 일로 밀어줄 생각은 없으니까, 도희 씨도 자기 능력을 부정하지 마.”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마음이 놓이네요.”그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일은 어디까지나 일이니까.도희 역시 일에는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지 않는 편이 좋았다.검은색 부가티가 낡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 멈춰 섰다.도희는 얼른 안전벨트를 풀었다.“집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대표님.”말이 유난히 빨랐다.시경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도희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시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차를 출발시켰다.집에 돌아온 도희는 기분이 한껏 들떴다.눈앞의 집을 바라보니, 머지않아 이런 집을 제 힘으로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올해 하양그룹에서 뽑은 인턴은 모두 50명이 조금 넘었다.그중 프로젝트 부문에 배정된 인턴은 9명이었고, 담당 이사 세 명이 각각 세 명씩 나눠 맡았다.이번 정규직 전환 심사에서는 이사마다 인턴 한 명씩을 선발하게 되어 있었다.그러니 도희의 경쟁자는 지윤과 나연, 단 두 사람뿐이었다.S등급 프로젝트팀은 20억 원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를 전담하는 팀이다.프로젝트 한 건당 팀에 지급되는 성과급만 무려 1억 원이었다.팀에서 가장 막내가 될 도희도 적어도 1천만 원은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보통 프로젝트 하나를 끝내는 데 석 달에서 반년 정도가 걸렸다.하지만 일 중독자인 시경이라면 분명 그 기간을 단축하려 들 터였다.1년에 적어도 3, 4건은 진행할 수 있을 테니,
Read more

제12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배가 차지 않았다.그래서 도희는 캔버스 가방에 늘 간식을 챙겨가지고 다녔다.아직 이른 아침인 8시 20분이었다.도희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반듯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넓은 어깨와 그 아래로 날렵하게 뻗은 허리.단번에 시경임을 알아본 도희가 얼른 웃으며 인사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예전 같았으면 그저 인사만 하고 말았을 것이다.뒤에 질문을 덧붙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터였다.그런데 어제 우연히 마주친 뒤로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를 더 보탰다.시경의 목소리는 아침부터 또렷하고 활기가 넘쳤다.“좋은 아침. 도희 씨도 일찍 왔네.”시경은 차를 타면 멀미를 하는 편이라 출근길 교통 체증을 싫어했다.그래서 평소에도 일찍 출근하는 편이었다.그는 도희에게 잠깐 시선을 머물렀다가 거두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렇게 마주친 게 딱히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도희가 입사한 지 석 달.그동안 사내 출근 기록 시스템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직원이 도희인 날이 적지 않았으니까.도희는 싱긋 웃어 보인 뒤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시경보다 조금 앞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엘리베이터 문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재질이라, 고개를 들면 시경과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는 괜찮았다.하지만 오늘처럼 단둘이 있을 때는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반면 시경에게는 그런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었다.숨을 조금 깊이 들이마시면서, 도희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를 느긋하게 즐겼다.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따뜻한 라테는 시럽을 절반만 넣는 게 더 맛있어. 다음에 그렇게 마셔 봐.”도희는 순간 멈칫했다.무심코 고개를 들자 곧바로 시경과 눈이 마주쳤다.“아, 네.”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도희가 먼저 내렸다.대표실과 프로젝트 부서는 모두 건물 맨 위층에 자리하고 있었다.시경도 도희의 뒤를
Read more

제13화

도희는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서 목을 비춰 봤다.파운데이션으로 꼼꼼하게 가려 놓은 덕분에 키스마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키스마크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넌 피부가 하얘서 평소엔 베이스만 살짝 바르잖아. 그런데 오늘은 목에 파운데이션을 엄청 두껍게 발랐더라고. 뭘 그렇게 열심히 가렸나 싶었지.”“명탐정이네. 그런 것까지 알아채고.”“자, 이실직고해. H시에서 괜찮은 남자라도 만났어? 아니면... 대표님이랑 잤어?”도희는 기겁하며 얼른 하린의 입을 틀어막았다.“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여기 회사잖아. 나 괜히 여직원들 표적이 되기 싫어.”“읍, 으읍...!”하린은 도희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그럼 누군데? 대체 어떤 놈이 우리 여신을 채 간 거야?”하린은 원래 얼굴을 대단히 따지는 사람이었다.남자든 여자든 예쁘고 잘생겼으면 이유 없이 좋아했다.남자 쪽 최애는 시경이었고, 여자 쪽 최애는 도희였다.회사에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며 혼자 열심히 엮어 대는 사람도 하린뿐이었다.남들 눈에는 두 사람의 격차가 워낙 커서 사귈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그래도 하린의 편애는 어디까지나 도희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하지만 도희는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하룻밤으로 끝난 일인데 굳이 남에게 알릴 필요도 없었다.결국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남자친구 있어. 계속 장거리 연애 중이었는데 이번 주에 나 보러 왔어.”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세상에! 너 남자친구 있었구나! 하긴, 그렇게 예쁜데 혼자일 리가 없지. 야, 대체 어떤 남자길래 네 눈에 들었어? 키는? 잘생겼어? 몇 살인데?”그때 수진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도희는 얼른 하린을 밀어냈다.“이사님 오신다. 그만 얘기해.”하린은 발로 바닥을 밀면서 의자째 부드럽게 미끄러져서 제자리로 돌아갔다.“이사님, 안녕하세요!”수진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더니 기운 없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도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이사님, 안색이 안 좋으
Read more

제14화

“네.”정해진 양식에 맞춰서 자료를 취합하고 PPT를 만드는 건 인턴이 맡는 가장 기본적인 업무 중 하나였다.수진은 그 정도로 단순한 일이라면 지윤에게 맡겨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그런데 전날 오후, 지윤이 보내온 파일을 확인한 수진은 너무 화가 나서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누가 봐도 십 분 만에 대충 만든 게 분명했다.빈 양식에 자료를 닥치는 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은 수준이었다.심지어 회의에서 이미 탈락한 안까지 버젓이 들어가 있었다.글꼴과 글자 크기도 제각각인 데다가, 문장 부호도 온통 오류투성이였다.당시 수진은 열이 40도가 넘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수액이라도 맞으려던 참이었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대표가 직접 검토할 자료라는 생각에 해열제 두 알만 삼킨 뒤 이를 악물고 수정 작업에 매달렸다.그러다 결국 약기운에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게다가 PPT마저 결국 끝까지 다 수정하지 못했다.시경에게 보여 줘야 할 자료였다.시경의 시간은 정말 소중했다.그런 시경이 이런 꼴로 만들어진 자료를 본다면 반드시 크게 화를 낼 게 뻔했다.수진은 출근길에 민호에게 카톡을 보내 회의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없겠냐고 물었다.하지만 월요일은 대표의 일정이 가장 빽빽한 날이라 조정하기 어렵다는 답장이 돌아왔다.결국 수진은 이 상태의 PPT를 들고 회의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회의는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었다.그런데 지윤은 9시 오십 분이 되어서야 출근했다.커다란 루이비통 토트백을 들고, 복숭아색 시폰 소재의 투피스를 입은 모습이었다.화장도 공들여 정성껏 마친 데다 표정에는 자신감까지 넘쳐흘렀다.“이사님, 몸은 좀 나아지셨어요?”지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수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회의 준비해.”“네.”...회의실.시경은 오전 10시 10분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회의실에 들어서며 손목시
Read more

제15화

시경은 지윤의 발표를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이내 엄격하고 불쾌감이 서린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잠깐 멈춰 봐. 지금 나랑 소꿉놀이하자는 거야?”“네... 네?”지윤은 시경의 싸늘한 표정에 겁을 먹으면서 말끝을 떨었다.“대체 뭘 만든 거고, 지금 뭘 읽고 있는 거야? 내 시간 낭비하고 있다는 건 알아?”“대표님... 저... 죄송합니다.”“그 사과 한마디가 내 10분만큼의 값어치는 할 것 같아?”지윤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입사한 지 석 달.그동안 지윤은 시경이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지윤이 아는 하시경은 무척 신사적이고 예의 바르며, 여직원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대표였다.오늘도 충분히 예쁜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한편, 민호와 케니, 준석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대표가 화가 났어.’‘오늘은 모두 무사히 넘어가기는 글렀네.’시경이 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그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걸렸다.“배 이사. 내일 소영남 대표가 계약하러 오는데 이런 자료를 가져오신 겁니까?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아니면 소영남 대표랑 장난하자는 겁니까?”“20억 원대 계약을 맡겨 놨더니 결과물이 이 모양입니까? 회사라도 망하게 하실 생각이세요?”수진의 목소리는 이미 주눅이 들어서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에는 기운조차 실리지 않았다.“아닙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오늘 안으로 PPT를 다시 만들겠습니다.”“그럼 여태 뭘 하신 겁니까?”시경은 무작정 화부터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수진이 어쩌다 이런 결과물을 가져오게 됐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형식은 엉망진창이었고, 8페이지에 기재된 수치마저 틀려 있었다.심지어 발표를 맡은 사람은 기획 내용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다.결국 수진이 업무를 잘
Read more

제16화

그러니 수진으로서도 더 이상 지윤을 탓할 수가 없었다.케니와 준석 역시 수진을 더 몰아붙이기가 어려워졌다.케니가 입을 열었다.“배 이사가 애쓰시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런 PPT를 올려서 대표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건 결국 배 이사님 책임이에요.”“팀에 장지윤 씨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강도희 씨도 있고, 박나연 씨도 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수정을 맡길 수도 있었을 텐데요?”케니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본부장님, 수습 방안 좀 마련해 주세요. 내일 소영남 대표님... 계약하러 오시잖아요.”준석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PPT부터 다시 만듭시다. 완성되면 내부 검토부터 거치고, 그런 다음에 대표님과 회의 일정 잡으세요. 오늘 안으로 끝내야 합니다.”회의가 끝나고 도희가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하린에게서 톡이 왔다.[대표님 화내셨다며?]소문이 벌써 이렇게 쫙 퍼졌을 줄은 몰랐다.도희가 답장을 보냈다.[어디서 들었어?][누가 회의실 앞을 지나가다가 들었대. 지금 소문방이 난리가 났어. 권 이사님 밑에 있는 인턴들이 우리 C팀을 비웃더라. 대표님한테 쓰레기 같은 PPT 올렸다고...]도희는 바로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잠시 후 하린에게서 메시지가 또 도착했다.[지윤이 만든 PPT 보면 하늘도 울겠다. 대표님이 그 자리에서 안 자르신 것만 해도 엄청 봐주신 거야.][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 문제잖아. 큰 프로젝트라 대표님도 H시에 보름이나 계셨고, 시간이며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데...][그렇게 공들여서 성사시킨 계약이잖아. 누구도 지윤이 장난을 받아 줄 의무는 없어.]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회사는 어디까지나 회사였다.시경도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다.하린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너 PPT 잘 만들잖아. 그런데 이사님은 왜 너한테 발표를 안 맡기셨대?][나도 모르겠어.]지윤이 일을 망친 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도희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수진이 왜 하필 지윤에게
Read more

제17화

PPT를 수정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수진은 도희에게 점심을 포장해서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이사님, 해열제 좀 더 드세요.”“안 먹으려고. 먹으면 졸려서. 진한 아메리카노나 한 잔 타 줄래?”카페인이 들어가면 몸도 조금은 덜 힘들고, 쏟아지는 졸음도 쫓을 수 있을 터였다.도희는 컵을 챙겨서 탕비실로 향했다.그런데 거기서 지윤과 나연이 소파에 앉아 한가롭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도희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뒤 커피 두 잔을 타서 돌아왔다.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사님, 그런데 왜 장지윤한테 수정하라고 안 하세요? 원래 장지윤이 맡았던 일이잖아요.”“이제는 못 맡기겠어. 또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오늘은 아무도 퇴근 못 할 테니까.”“그렇군요.”그날 오후 내내 수진은 PPT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준석과 마주 앉아서 자료를 하나하나 검토한 뒤에야 민호에게 회의 시간을 문의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호가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오늘 대표님 일정이 무척 바쁘십니다. 밤 10시가 넘어야 마무리될 것 같아 회의는 10시 15분으로 잡겠습니다.]수진이 답장을 보냈다.[알겠습니다.]도희는 수진이 단톡방에 올린 PPT 파일을 열어 보았다.깔끔하면서도 시원시원한 구성이 한눈에 들어왔다.확실히 전문가의 솜씨가 단번에 드러났다.복잡하기만 하고 핵심도 없었던 21페이지짜리 자료가 12페이지로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각 슬라이드에는 꼭 필요한 요점과 결론만 간결하게 담겨 있었다.실행해야 할 사항과 예상 결과는 붉은색으로 강조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도희는 하린이 만든 PPT를 보고도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수진의 자료는 그보다도 한 수 위였다.흠잡을 데가 전혀 없었다.도희는 조용히 파일을 내려받았다.시간을 내서 꼼꼼히 살펴보고 제대로 익혀 둘 생각이었다.퇴근 시간이 되자, 수진은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고 회의 전에 돌아오기로 했다.지윤과 나연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다른 직원들 역시 하나둘 퇴근했고,
Read more

제18화

“20억 원짜리 프로젝트 하나 망치는 건 일도 아니던데. 100억 원으론 모자라겠네.”케니가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막 사회생활 시작한 어린 친구잖아. 말을 꼭 그렇게 매섭게 해야겠어?”“사실대로 말한 거야. 여직원이라고 일일이 다 봐주면 회사를 어떻게 굴려?”“그래, 그래. 네 말이 맞지. 그래도 한 번 실수했다고 모든 면을 나쁘게 평가할 순 없잖아. 여러모로 살펴봐야지.”“인턴 한 명 한 명을 깊이 살피고 있을 여력은 없어. 종합적인 평가는 인사팀에서 할 일이고.”“그럼 특별히 눈여겨보고 있는 인턴은 없어?”시경은 케니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지 않았다.“그렇게 슬쩍 떠보지 마. 난 원래 인턴 정규직 전환 평가에는 관여하지 않잖아.”“올해는 한 번 해 보지 그래? 사람 보는 눈도 날카롭잖아.”“시간 없어.”단호한 거절이었다.케니가 어깨를 으쓱했다.“곧 프로젝트 조직도 대대적으로 개편되는데, 쓸 만한 신입 몇 명 뽑는 것도 중요하잖아. 정말 전혀 관여 안 할 거야?”시경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대신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퇴근할 생각이었다.“나 먼저 갈게.”“술 마셨잖아. 내 차 타고 가.”“괜찮아. 주 비서가 운전할 거야.”두 사람은 대표실을 나와서 사무 공간을 지나갔다.그러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진과 도희를 발견했다.케니가 미간을 찌푸렸다.“어? 인턴이 셋 아니었어? 왜 강도희 씨만 남아 있지?”시경도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도희는 비스킷 하나를 입에 문 채, 미간을 찌푸리면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그러면서도 손가락은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묵묵하고 성실했다.회사의 대표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직원이었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 케니가 한숨을 내쉬었다.“강도희 씨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너무 조용해. 늘 구석에 숨어 있으려고 하잖아. 실무자로서는 괜찮을지 몰라도, 그 이상 올라가기는 힘들겠어.”훌륭한 팀원은 될 수 있어도 조직을 이끄는
Read more

제19화

수진이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역시 젊으니까 다르네. 이 시간까지 일하고도 그렇게 기운이 넘쳐?”35살인 수진은 고열까지 앓은 탓에 몹시 초췌해진 상태였다.“젊고 성공하신 건 이사님이시죠. 이사님이 제 인생의 롤 모델이세요!”“성공은 무슨. 그냥 회사에서 오래 구른 직장인이지.”“35살에 J시에 집도 사셨잖아요. 그것도 넓은 아파트로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도희의 꿈 역시 J시에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하양그룹처럼 큰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다 보면 언젠가는 살 수 있어. 임원이 되면 주거 지원도 받을 수 있고. 너도 열심히 해.”“그렇게 높은 자리까지는 아직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지금은 이사님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우고 싶어요.” “오늘 만드신 PPT도 정말 전문적이었어요. 문 대표님 제안서도 그 양식 참고해서 만들려고요!”곧고 맑은 도희의 얼굴을 바라보던 수진은 문득 오래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수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회사에서 자기 길을 개척하기란 정말 쉽지 않아.”“그래도... 처음에 품었던 마음만큼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흔들리지 말고.”“네! 초심을 잃지 않을게요.”일을 마친 두 사람은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내내 도희의 머릿속에는 수진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처음 품었던 마음을 잃지 말 것.’도희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살다 보면 수많은 유혹과 지름길을 마주하게 된다.그때마다 자신이 정한 선을 지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수진은 그 선을 지켜 냈다.도희 역시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도희는 진심으로 수진을 존경했다.수진도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수진은 경울대를 졸업한 뒤 홀로 J시에 올라와서 버텼다.기댈 만한 인맥도 없었고, 남자에게 의지하지도 않았다.오직 자신의 끈기 하나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다.도희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Read more

제20화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꿈속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가슴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두근거렸다.‘그런... 야한 꿈을 꾸다니!’꿈속에서 시경이 ‘좋아?’ 하고 물었던 것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그때 도희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좋아요...’분명 그렇게 대답했다.“강도희, 이 음흉한 인간아!”도희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입술을 찰싹 때렸다.물론 아주 살짝만 힘을 줘서.‘꿈속에서 하시경에게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해 달라고 조르다니.’마치 자신이 무슨 악마라도 된 기분이었다.‘대표님이잖아! 그것도 상장사 대표!’‘상사를 멋대로 상상 속에 끌어들여서 그런 짓을 시키면 어떡해!’도희는 속으로 자신을 한바탕 나무란 뒤 서둘러 옷을 갖춰 입고 집을 나섰다.오늘은 소영남이 계약을 체결하러 오는 날이었다.절대 늦어서는 안 됐다.도희는 오늘도 회사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에서 또 시경과 마주쳤다.참 신기한 노릇이었다.입사한 지 석 달이 되도록 아침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데.‘어쩌다 이틀 연속으로 마주치게 된 거지?’도희는 차마 시경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대표님, 안녕하세요.”그리고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시경은 도희의 발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바라봤다.이어 그녀의 손에 들린, 시럽을 절반만 넣은 라테로 시선을 옮겼다.남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좋아?”“네?”‘뭐가 좋으냐고요?!’도희는 깜짝 놀랐다.‘설마 꿈까지 똑같이 꾼 거야?’황급히 고개를 들자, 시경의 시선이 자신이 들고 있는 커피에 머물러 있었다.그제서야 자기 혼자 엉뚱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강도희, 혼자 찔려서는!’“좋아요... 시럽을 30%만 넣을 때보다 절반 넣으니까 더 맛있네요.”“그래... 좋다니 다행이네.”도희는 귀가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시경은 긴
Read more
PREV
123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