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대일 로맨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30 챕터

제1화

“하룻밤만 함께하는 관계, 괜찮아?”늦은 밤, 특급호텔의 로얄 스위트룸.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에는 차마 그냥 흘릴 수 없는 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강도희의 손이 흠칫하면서 멈췄다.야근을 너무 오래 한 탓에 헛소리라도 들은 줄 알았다.도희는 서둘러 손에 든 서류를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 지금은 그저 얼른 퇴근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푹 자고 싶을 뿐이었다.“강도희 씨. 지금 도희 씨한테 하는 말이야.”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깊고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눈동자 속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욕망이 담겨 있었다.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도희의 상사, 하시경이었다.젊은 나이에 상장기업을 이끄는 대표.젊고 돈 많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외모까지도 지나치게 잘난 남자였다.정교하게 빚어 놓은 듯한 이목구비에 188센티미터에 달하는 훤칠한 키. 넓게 벌어진 어깨 아래로는 군살 하나 없이 날렵한 허리선이 이어졌다.어릴 적부터 귀하게 자란 엄친아 특유의 품위와 여유가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오죽하면 J시 여자들이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남자 부동의 1위로 꼽힐 정도였다.반면 도희는 달랐다.기댈 집안도, 내세울 배경도, 변변한 돈도 없는 평범한 대학 졸업반 인턴이었다.이 깊은 밤, 도희가 대표의 객실에 남아 있는 건 지방 출장 때문이었다.무려 6시간이나 이어진 프로젝트 회의가 조금 전 끝났다. 도희는 회의에 사용된 초안 서류를 정리해서 파쇄하는 일을 맡았다.그렇게 자연스럽게 객실을 나서는 마지막 사람이 된 것이었다.입사한 뒤로 도희는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묵묵히 해냈다.업무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바라는 건 오직 하나.하루라도 빨리 정규직 전환 확정을 받는 것이었다.회사에서 이렇다고 할 존재감조차 없는 신입 인턴에게, 여직원들이 하나같이 눈독을 들이는 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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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시경은 마치 이제야 자신의 몸을 제대로 쓰는 법을 알게 된 사람 같았다.밤새 거칠게 치솟는 욕망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가엾은 ‘인턴’이 그만해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계속 몰아붙였다.심지어 그렇게 애원하는 모습마저 마음에 들었다.그러더니 기어이 객실에 비치된 콘돔 두 상자를 모조리 다 써 버렸다.도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드디어 ‘퇴근’이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경이 객실 전화로 프런트에 연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콘돔 몇 상자 더 올려 주세요.”도희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대표님... 이제 그만해요.”시경은 도희를 품에 안고서 욕실로 향했다.“욕조에서도 재밌을 것 같은데. 해 볼래?”이미 진작에 기력이 다한 도희는 힘없이 두 팔을 시경의 목에 둘렀다.“대표님은 무슨 일이든 왜 이렇게 끝까지 하세요?”‘평소에 야근을 시킬 때도 지독하더니...’...밤이 지나고, 시경은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깼다.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0시 45분이었다.상체를 일으켜 보니 넓은 침대에는 자기 혼자뿐이었다.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간밤의 흔적도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여 있던 것들마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마치 지난밤의 그 치열했던 일이 애초에 없었던 것만 같았다.시경은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밖에 서 있던 수행비서 주민호는 아직 나갈 채비조차 하지 않은 시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오늘 소 대표님과 점심 약속이 있으신데, 아직 준비 안 하셨습니까?”“응. 30분만 늦춰.”시경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갈라져 있었다.“강도희 씨도 불러 주고.”“강도희 씨요?”민호는 굳이 도희를 찾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벌써 배 이사님하고 차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시경의 눈썹이 저절로 치켜 올라갔다.뜻밖이었다.‘아침 7시가 돼서야 끝났는데, 잠도 안 자고 나갔어?’시경은 면도를 하고 머리를 단정히 정돈한 뒤, 드레스룸에서 깨끗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밤새 짐승 같던 남자는 다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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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지윤은 그제서야 기분이 좀 풀렸다. 도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하시경’이라는 남자와 잤다면 누구라도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릴 텐데, 저렇게 숨길 리 없었다.“가방에 벌레 물린 데 뿌리는 약 있어. 이거 써.” 지윤이 샤넬 가방에서 예쁜 작은 병을 꺼내서 내밀었다.도희가 손을 저었다. “괜찮아. 벌써 발랐어.”지윤의 ‘호의’는 무엇이든 하나도 받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도희가 공짜를 탐내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지윤의 물건 중에는 싼 게 하나도 없었다.아무 생각도 없는 나연은 꼭 끝까지 한마디 더 해야 직성이 풀렸다. 도희를 비웃으며 말했다. “하긴. 대표님이 직원이랑 자더라도 집안 좋고 교양 있는 우리 지윤이를 고르겠지. 촌에서 올라온 너한테까지 차례가 오겠어?”“너한테는 더 안 오겠네. 교양 없는 건 네가 제일이잖아.” 도희가 받아쳤다.“한판 하자는 거야? 학교 다닐 때도 나한테 이긴 적도 없으면서!”그때 배수진이 뒤돌아보면서 두 사람을 노려봤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아침부터 대표님 두고 그런 얘기나 하고. 정규직 전환 안 하고 싶어?”세 여자는 바로 날을 거두고 입을 닫았다.“출장은 배우러 온 거야! 대표님이랑 자러 온 게 아니라! 아직 어린 애들이, 경울대에서 공부까지 잘했다는 애들이 입만 열면 그런 소리야.”“대체 뭘 배운 거야? 기본적인 윤리의식은 있는 거니?”지윤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기숙사에서 편하게 얘기하던 버릇이 나왔어요. 회사에서는 조심해야 하는데 깜빡했네요.”“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앞으로 셋이 서로 주의하면서 이사님께 폐 끼치지 않겠습니다.”나연도 거들었다. “네, 맞아요, 이사님. 화 푸세요. 앞으로 말조심하겠습니다!”도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회사 분위기에서는 별수 없었다. “저도 앞으로 언행에 주의하겠습니다, 이사님.”수진이 고개를 젓더니 다시 당부했다. “이따 식사 자리에서는 잘 듣기만 하고 끼어들지 마. 음식도 적당히 먹어. 굶고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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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35분 뒤, 일행을 태운 차가 H시 중심가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원형 식탁에 자리를 잡을 때, 도희는 시경의 정면에서 한참 비껴난 자리를 골라 앉았다.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이 직접 마주칠 일은 없는 자리였다.도희는 간밤에 가까워졌다는 이유만으로 시경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무슨 역병이라도 피하듯 자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는 도희를 보자, 시경은 아직 어리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다른 여자였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눈앞에 머물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했을 텐데... 도희는 정반대였다. 간밤의 일을 빌미로 출세할 생각도, 무슨 이득을 챙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리숙한 게 아니었다.오히려 현명한 처신이었다.이번 자리는 출장의 마지막 식사이자 발주처인 소영남 대표와의 만남이었다.소영남이 도착하자, 시경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나눴다.술잔이 몇 차례 오간 뒤, 본격적인 협업 이야기가 시작됐다.프로젝트 담당자인 수진 역시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소영남의 얼굴에도 슬슬 취기가 올랐다.소영남이 혀가 살짝 꼬인 목소리로 말했다.“좋습니다. 다음 주에 팀을 데리고 J시로 가서 계약하죠. 제안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업계에서 손꼽히는 하양그룹 아닙니까? 걱정할 게 없죠.”“좋은 협업을 기대하겠습니다, 소 대표님.”“그럼요. 잘해 봅시다, 잘해 봐요!”...한편, 인턴 세 사람은 술 대신 과육이 들어 있는 오렌지 주스를 여러 잔이나 마셨다.이제는 배가 빵빵할 지경이었다.소영남이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지윤과 나연도 화장실로 향했다.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다들 술 진짜 잘 마신다. 배 이사님은 소주만 두 잔에 맥주도 한 네 병은 마셨지? 난 주스만 마셨는데도 토할 것 같던데.”지윤은 화장품을 꺼내 들고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배경도 지위도 없는 배 이사님 같은 사람은 몸이라도 갈아 넣어야 계약을 따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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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식사는 이미 끝난 뒤였다.수진은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어서 마신 술을 억지로 토해 낸 뒤, 세수까지 마친 참이었다.몸을 돌려 나가려던 순간, 어둑한 계단실 입구에서 도희와 시경이 차례로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수진은 얼른 뒷걸음질을 치면서 다시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직장 생활만 10년이었다.그동안 이런 일은 숱하게 봐 왔다.하지만 시경을 둘러싼 남녀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수진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기로 했다.식사와 함께 보름 간의 출장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H시에서 J시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반 거리였다.도희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수진을 따라 비행기에 올랐다.두 사람이 비즈니스석으로 향하려던 찰나, 뒤따라오던 지윤이 수진을 붙잡았다.“이사님, 제가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 드렸어요.”수진은 순간 멈칫했다.사양하고 싶었지만, 곧 이륙할 예정이라 이제 와서 취소하기도 어려웠다.결국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 다음부터는 이런 데 돈 쓰지 마.”그러자 옆에 있던 나연이 냉큼 물었다.“나는? 나는?”“당연히 너도 했지. 너만 두고 가겠어?”“야, 신난다! 사랑해, 윤지윤!”지윤은 들뜬 나연을 보다가 조용히 서 있는 도희에게 시선을 돌렸다.“미안, 도희야. 일등석이 꽉 차서. 자리만 있었으면 너도 해 줬을 텐데.”도희는 오히려 안도했다.괜히 원치 않는 호의를 억지로 받고 신세를 지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도희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괜찮아. 난 자리 찾으러 갈게.”수진은 혼자 자리를 찾아 떠나는 도희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쓰였다.아무런 배경도 없이 J시에 올라와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롯이 제 힘으로 올라가야 하는 처지가 꼭 과거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그래서인지 수진은 유독 도희에게 동질감을 느꼈다.그때 지윤이 옆에서 재촉했다.“가요, 이사님. 아까 술도 많이 드셨는데 얼른 가서 푹 주무셔야죠.”일등석에 들어선 수진은 빈자리가 여러 개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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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맛있는 음식과 매력적인 사람에게 끌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도희도 상사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긴 했지만, 그동안 줄곧 반듯하게 처신했다. 단 한 번도 선을 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도희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먼저 이뤄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직장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는 것.시경과의 작은 일탈은 출장 중 우연히 벌어진 하룻밤의 에피소드로 남겨 두면 그만이었다.밤이 지나고 나면 도희는 도희, 시경은 시경으로 돌아갈 테니까.도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밀린 잠부터 청했다.간밤에 정신없이 밤을 보낸 만큼, 오늘은 세상모르게 깊이 잠들었다.저녁 8시가 넘어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달콤한 꿈을 깨웠다.정확히는 야릇한 꿈이었다.꿈속에서 도희는 간밤의 일을 다시 겪고 있었다.덕분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목소리마저 잔뜩 잠겨 있었다.“여보세요?”수화기 너머에서 절친한 친구 이수아가 헛기침을 했다.[뭐야? 뭘 했길래 목소리가 그렇게 야해?]도희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방금 일어났어.”[출장 끝나고 돌아왔다며. 밥은 먹었어? 샤부샤부 먹으러 갈래?]“못 움직이겠어. 너무 피곤해.”[그럼 집에서 해 먹자. 내가 장 봐서 갈게. 오늘 저녁에 비 온다니까 네 집 테라스에서 샤부샤부 먹고, 수박까지 한 통 끌어안고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도희는 넓은 테라스가 딸린 2층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방은 두 개였고, 총면적은 약 20평이었다.월세는 90만 원.처음부터 이렇게 넉넉한 집에 살았던 건 아니었다.처음에는 월세가 더 저렴한 쪽방에서도 지냈다.그런데 외모가 눈에 띄어서인지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일이 자꾸만 생겼다.방음도 정말 형편없었다.옆방에서 일부러 볼륨을 높여 틀어 놓은 성인 영상 소리가 밤마다 고스란히 들려올 정도였다.결국 도희는 마음 편히 혼자 생활할 수 있는 지금의 집을 구했다.낡은 아파트 단지에 자리한 집이었지만, 지하철역이 가까워서 회사까지는 50분 조금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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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희는 가슴이 꽉 조여드는 듯했다.“지훈 오빠가 너한테 연락했어?”“응. 네 근황을 묻더라. 왜 직접 안 물어보냐고 했더니 연락할 방법이 없대.”도희는 10년 넘게 자신을 키워 준 오빠와의 연락을 차단한 상태였다.부모님은 이혼한 뒤 각자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그 사이에서 버려진 건 다름 아닌 도희였다.신지훈은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오빠였다.도희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부모는 도희를 원하지 않았고, 친조부모마저 짐짝 취급을 했다. 외조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도희가 8살이 되던 해, 지훈은 그런 도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지훈의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지훈은 도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책임지고 돌보겠다는 뜻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그래서 뭐라고 했어?”도희는 유리창에 부딪히는 굵은 빗방울을 바라봤다.탁- 탁-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치 자신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잘 지낸다고 했어. 좋은 회사도 다니고, 즐겁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수아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니까 더는 안 묻더라. 너한테 몸 잘 챙기라고 전해 달래. 그러면서 200만 원도 보내면서 너한테 전해 달라는데, 안 받았어. 네가 안 받을 거 아니까.”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선택은, Z시를 떠나서 J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거야. 이제 새로 시작하려고.”“응. 넌 앞으로 더 잘될 거야, 도희야.”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수아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정말 지훈 오빠랑 이대로 안 보고 살 거야? 적어도 한 번쯤은 제대로 얘기해 봐야 하지 않을까?”도희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비 진짜 많이 온다.”그날 밤, 수아는 도희의 집에서 자고 갔다.비는 밤새도록 내렸다....다음 날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햇살이 쏟아졌다.밤새 내린 비가 세상을 깨끗이 씻어 낸 덕분인지, 모든 것이 한결 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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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막 풀 밖으로 올라온 시경은 수면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등이 훤히 드러나는 흰색 수영복.군살 하나 없이 가느다란 몸매였다.어깨와 등에는 탄탄한 근육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긴 두 다리는 곧게 쭉 뻗어 있었다.접영 자세는 선수 못지않게 정확했다.움직일 때마다 유연한 허리선이 물 위로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아름다우면서도 힘이 넘치는 움직임이었다.시경도 수영을 즐기는 여자들을 몇 명 알고 있었지만, 저토록 아름다운 자세로 헤엄치는 모습은 처음 봤다.마치 인어와도 같았다.시경은 커다란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의자에 앉았다.잠시 쉬었다가 한 차례 더 수영할 생각이었다.물을 몇 모금 마신 뒤, 시경은 핸드폰을 꺼내 수영장 회원 단톡방을 열었다.새로 들어온 회원은 없었다.평소라면 들여다보지도 않을 대화방이었다.굳이 확인해 본 건 조금 전 물속에서 본 여자의 몸매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강도희...’도희 역시 몸매가 저렇게 아름다웠다.키가 크고 날씬했지만, 그렇다고 마르기만 한 몸은 아니었다.다만 도희가 수영장 회원권 하나에 4천만 원씩이나 쓸 사람은 아니었다.명문대 출신이라고 해도 인턴 월급은 240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시경은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물속의 여자에게도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하 대표님, 오늘 수온은 괜찮으십니까?”그때 수영장 매니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네. 그런데 다른 회원과 같이 쓰지 않아도 되는 개인 풀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추가 비용은 상관없고요.”시경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수영에만 몰입하는 것을 좋아했다.매니저는 잠시 말을 멈췄다.사실 도희를 이 풀에 배정한 건 의도적인 조치였다.도희는 충분히 아름다운 여자였고, 시경은 이 수영장에서 재력이 가장 탄탄한 회원이었다.그런데 시경이 개인 풀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알겠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별도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네. 그런데 새 회원인가요?”시경의 시선이 다시 풀 쪽으로 향했다.“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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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겨우 숨을 고른 참이었는데, 시경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도희는 시경도 그날 밤의 일은 굳이 입에 올리지 않을 줄 알았다.그런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다니.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은근슬쩍 놀리기까지 했다.평소에는 그렇게 점잖아 보이더니, 의외로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었다.도희가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그럼 대표님 체력은 어디까지예요?”“한계까지 해 본 적이 없어서.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끝도 없는 거지.”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회의 때마다 시경이 입버릇처럼 하던 소리였다.전에는 그저 정신교육처럼 들렸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은 다시 각자 수영을 시작했다.그렇게 40분쯤 지났을 무렵, 도희는 더 이상 헤엄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도희가 물 밖으로 올라왔을 때도 시경은 여전히 수영에 열중하고 있었다.그냥 돌아가려던 도희는 저도 모르게 몇 번이나 더 그쪽을 바라봤다.시경의 몸이 물속에서 유연하게 오르내렸다.군살 없이 탄탄하고 날렵한 허리와 골반이 힘차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였다.다리 근육까지 빈틈없이 사용하고 있었다.그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그날 밤 침대에서 무릎을 짚고 거칠게 움직이던 모습이 겹쳐 떠오르면서 순간 숨이 탁 막혔다.접영하는 남자의 허리는 사람 잡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어쩐지 전보다 시경의 몸이 더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도희는 원래 뭔가를 잘하는 사람에게 약했다.하물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그 때문일까...?’문득 그와 한 번 더 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지만.도희는 지켜야 할 선을 아는 사람이었다.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남자를 섣불리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한편 시경이 수영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왔을 때, 도희는 이미 떠난 뒤였다.수영은 체력 소모가 상당한 운동이었다.그럼에도 시경은 수영을 할 때마다 남들보다 오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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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 남자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지나치게 능숙했다.도희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시경이 입을 열었다.“지도 보면서 길 좀 미리 알려 줘.”도희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더는 시경에게 놀림거리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앞에 있는 신호등에서 우회전하시면 돼요.”“회사랑 꽤 먼 데 사네.”“네. 그래도 지하철역에서 가깝고 환승 없이 한 번에 갈 수 있어서 다닐 만해요.”“그렇구나.”시경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운전에 집중했다.도희는 곁눈질로 시경을 힐끔 바라봤다.긴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또렷했다.운전대를 잡은 손이 참 예뻤다.그런데 잠깐 훔쳐보는 것만으로는 어쩐지 성에 차지 않았다.도희는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여서 시경의 평상복 차림을 찬찬히 살폈다.회사에서 시경은 늘 몸에 꼭 맞는 맞춤 정장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기고 다녔다.그 때문에 평소에는 날카롭고 빈틈없는 분위기가 강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검은색 캐주얼 재킷을 걸친 데다, 반쯤 마른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갈라져서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평소보다 한결 풋풋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생각해 보니 시경은 아직 만으로 28살이었다.‘정말 잘생겼다.’도희는 어느새 넋을 놓고 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빨간불에 걸린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시경이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도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깜짝 놀란 도희는 얼른 고개를 돌리면서 앞만 바라봤다.“남들은 몰래 훔쳐보던데, 도희 씨는 거리낌도 없네.”도희가 멋쩍게 코끝을 만지작거렸다.“평소엔 정장만 입으시잖아요. 사복 입으신 모습이 신기해서 좀 봤어요.”“그럼 내가 아무것도 안 입었을 땐 왜 눈을 감고 있었어?”“네?”겨우 가라앉았던 귓불의 열기가 다시 확 올라왔다.‘왜 툭하면 그날 밤 얘기야?’‘하룻밤이라고 해놓고서. 서로 알아서 없던 일처럼 넘어가면 안 되나?’슬슬 약이 올랐다.‘본인만 여유가 있다, 이거지?’“저... 전 대표님처럼 그런 일에 능숙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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