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의 5분짜리 사랑: Chapter 11 - Chapter 20

21 Chapters

11화

“그럼 오늘은 뭘 알게 되셨어요?”“제가 생각한 것보다 짓궂으시다는 거요.”“그건 모델 일을 너무 잘하셔서.”“잘하면 그렇게 됩니까?”설은 대답 대신 포크로 파스타를 감았다. 입가에 남은 기색 때문에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식당 안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한산했다. 창가 테이블 너머로 강변 도로의 불빛이 이어졌고, 맞은편 벽에는 푸른색이 짙게 겹쳐진 그림이 걸려 있었다.설이 식사 중 몇 번이나 그쪽을 보자 권혁이 작품 이름을 알려 주었다.“아시는 그림이에요?”“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작가입니다.”그는 해외에서 열린 전시와 이 그림이 레스토랑에 들어온 경위까지 알고 있었다. 설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듣다가 말했다.“저는 물인 줄 알았어요.”“물을 그린 건 아닐 겁니다.”“네. 방금 설명 들으니까 그런 것 같네요.”그래도 설은 다시 그림을 보았다. 권혁은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았다.그녀는 작가의 의도를 맞히려던 것이 아니었다.“그냥 멀리서 보면 밤바다 같아서 좋았어요. 가까이 가면 또 다를 것 같고요.”“관심 있으시면 지금 열리는 전시도 괜찮습니다. 사람 없는 시간에 설명을 들으실 수 있게…….”거기까지 말했을 때 설이 그를 보았다.“대표님은 쉬는 시간도 굉장히 알차게 쓰실 것 같아요.”“저는 그냥 보고 싶은 날 가서, 마음에 드는 것만 오래 보다 나오거든요. 설명까지 듣고 나면 좋아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아서.”권혁은 이번에는 작품에 관한 다른 지식을 보태지 않았다.권가에서는 사적인 선택도 집안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들인 그림 한 점은 재단의 소장품이 되었고, 가족의 휴가지에서는 거래처 인사와의 만찬이 잡히곤 했다.취향은 존중받았지만, 그것만으로 결정되는 일은 드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질문 뒤에는 대개 그 선택이 가져올 이익과 부담이 따라붙었다. 권혁은 부족함 없이 자랐으나, 그저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선택을 끝내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직접 투자 결정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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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이 있었다.회와 샐러드, 거의 손대지 않은 파스타. 어떤 것을 먹고 싶었는지 알 수 없게 종류가 많았다. 거실 소파에는 아직 포장지도 뜯지 않은 쇼핑백이 쌓여 있었다.유리는 맨발로 나왔다.“늦었네.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너무 배고파서.”“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적 없는데.”“꼭 말해야 와? 언니도 없고, 나도 혼자 있기 싫고.”그녀는 그의 팔에 매달린 채 안으로 들어갔다.“며칠만 있자. 나 요즘 혼자 자다가도 깨. 병원에서는 마음 편하게 있으라는데, 형부가 연락도 잘 안 하니까.”지훈은 유리의 짐이 놓인 쪽을 보았다. 잠깐 들른 사람의 짐은 아니었다.“옷까지 가져왔어?”“갈아입을 건 있어야지. 형부 것도 사 왔어.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쇼핑백 하나가 그의 앞으로 밀려왔다. 지훈은 열어 보지 않았다.유리는 곧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나 아까 재미있는 거 봤어.”그녀가 리모컨을 누르자 멈춰 두었던 영상이 이어졌다.결혼식장 문이 열렸다.설이 그의 팔을 잡고 들어오고 있었다.지훈은 리모컨부터 보았다.“그걸 어디서 찾았어?”“텔레비전에 연결돼 있던데. 언니가 가끔 봤나 봐.”유리는 소파에 앉아 무릎 위로 쿠션을 끌어당겼다.“이런 거 보면 아기도 기분 좋아진대. 행복한 결혼식이잖아.”화면 속 지훈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평소의 걸음으로는 신부가 따라오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보폭을 줄였다. 설이 그를 올려다보자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촬영기사가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지훈은 카메라보다 먼저 설의 얼굴 가까이에 붙은 베일을 걷어 주었다. 머리카락이 함께 딸려 나오자 그것도 제자리로 넣었다.유리가 고개를 기울였다.“언니한테 저렇게 해 줬었구나.”지훈은 서서 화면을 보았다.장면은 짧게 이어 붙여져 있었다. 신부 대기실에서 한 번, 예식 도중에 한 번. 하객들이 입맞춤을 요구하자 지훈이 설을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끌어당기는 장면까지 나왔다.설은 놀란 얼굴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가 곧 눈을 감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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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사진 속 설은 권혁에게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결혼 뒤 지훈이 잘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유리는 그가 사진을 오래 보도록 옆에서 기다렸다.“형부한테는 연락도 안 한다면서 저러고 있더라.”지훈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설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넘어갈 만했다. 하지만 그는 삼 년을 함께 살았다. 설은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친밀하게 굴 여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아직 자기 아내였다.그러니 저 행동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권혁까지 끌어들여서 뭘 하겠다는 건지.”“끌어들인 건지, 원래 친한 건지 어떻게 알아?”“네 언니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유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언니를 깎아내리려고 보여 준 사진이, 오히려 언니를 변호하는 말을 끌어냈다.지훈은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그가 찾아와 질투하고,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설은 비로소 자기 말을 들어 달라고 할 것이다. 그 순서가 뻔히 보였다.이번에는 따라가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다음 날, 지훈은 비서에게 꽃을 주문하게 했다.사과의 꽃도, 돌아오라는 꽃도 아니었다. 받는 사람보다 보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 꽃이었다.라엘 로비에 커다란 꽃 장식이 들어섰다. 직원들이 배송처를 확인하는 사이 태성의 이름이 먼저 읽혔다.카드에는 회사 직인과 함께 수신인의 호칭이 정중하게 박혀 있었다.「태성호텔 대표이사 부인 이설 여사께.」그 아래 짧은 문장이 이어졌다.「바깥일도 좋지만, 당신의 자리를 잊지는 말기를.」설은 카드에서 지훈의 목소리를 들었다.꽃까지 보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확인시켰다. 정작 자신이 왜 나왔는지는 여전히 묻지 않았다.“집무실로 옮길까요?”“아니요. 공용 접견실에 두세요.”“이 정도 크기면 앞쪽이…….”“안쪽이면 돼요.”설은 카드도 꽃에 꽂아 돌려주었다.꽃은 그날 오후 내내 회사 복도 한구석을 지켰다. 오가는 직원들의 시선이 몇 번이고 닿았으나, 설은 퇴근할 때까지 그쪽으로 다시 눈길을 주지 않았다.***리셉션은 저녁 일곱 시를 넘겨 시작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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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지훈은 리셉션장을 나오면서도 인사하러 다가온 사람들에게 평소와 같은 말을 했다. 다음에 식사하자는 약속까지 잡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야 휴대전화를 꺼냈다.“서원금융에 누가 우리 얘기 했어요?”재무 책임자는 질문을 되물었다. 지훈은 권혁이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겼다. 자금 흐름, 주주들의 이견, 다음 분기 전망.“그 내용은 대표님께서 검토 요청하신 자료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주주들이 어떤 반응인지까지요?”“그쪽과 거래하는 주주들도 있습니다. 내부에서 자료를 빼낸 건 아닌 것 같습니다.”지훈은 답하지 않았다.자기가 열어 달라고 두드리던 문 안에서, 그들은 이미 자기 사정을 읽고 있었다.그는 보좌역에게 자료 발송 이력과 외부 접촉 내역을 모두 확인하라고 했다. 찾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면, 오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만 잘못 읽은 셈이었다.***유리는 예약도 없이 태성가의 대문 앞에 섰다.인터폰 너머로 이름과 용건을 묻는 말이 돌아왔다. 설의 동생이라고 하려다, 지훈에게 급한 일이 있다고 답했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응접실에 들어서자 지훈의 어머니가 말했다.“지훈이는 여기 없어.”“알아요. 어머님을 뵈러 왔어요.”“나는 네 어머니가 아닌데.”유리는 걸음을 멈췄다.부인은 앉으라는 말만 덧붙였다. 유리가 소파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설이한테 무슨 일이 있니?”“언니 일은 아니고요. 저한테…… 아이가 생겼어요.”부인은 유리의 배를 보지 않았다.“누구 아이인지도 말해야지.”“지훈 씨요.”이번에는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의심하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검사받은 것도 가져왔어요. 지훈 씨도 같이 갔고요.”봉투가 탁자 위에 놓였다. 부인은 필요한 날짜와 병원 이름을 확인했다. 몇 가지를 더 물었지만 목소리에는 놀람도 분노도 없었다.유리는 차라리 화를 내 주었으면 했다. 그래야 울면서 부탁이라도 할 수 있었다.“제가 뭘 바라고 온 건 아니에요. 그런데 지훈 씨가 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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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지훈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서재에 있었다.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보고서야 그가 물었다.“이것 때문에 부르셨어요?”“앉아.”그가 소파에 앉기도 전에 보고서가 앞에 떨어졌다. 가족 자금과 태성 계열사 일부를 대상으로 한 감사 표본조사 자료였다. 몇 군데 표시된 숫자는 지훈에게 낯설지 않았다.“네가 따로 넣은 돈, 언제 회수되니?”“일정이 조금 밀린 겁니다. 손실로 확정된 건 아니고요.”“누가 손실이라고 했니. 나는 언제 돌려받느냐고 물었어.”“조정 중입니다.”어머니는 다음 장을 넘기게 했다.태성호텔에서 집행된 선급금이었다. 정상적인 계약이었고, 필요한 승인도 받았다. 다만 돈이 건너간 회사와 지훈의 개인 투자처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그는 그 정도 연결은 문제 삼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계약상 하자 없습니다.”“돈 나간 순서는?”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오래된 주주들이 몰라서 입 다물고 있는 줄 아니. 네가 어디까지 가나 보는 사람도 있어.”“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서원까지 네 사정을 알게 했어?”그 말에는 즉시 대꾸가 나왔다.“누가 흘린 게 아닙니다. 그쪽에서 확인한 거예요.”“남이 확인할 수 있는 일을 너만 잘 감췄다고 생각한 거네.”지훈은 보고서를 덮었다.리셉션에서 돌아온 뒤로 같은 말을 다른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는 이미 독립적으로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전히 설명이 부족한 아들에 불과했다.“핵심 자금에는 손 안 댔습니다.”“그 말, 다음 달에도 할 수 있어야 할 거야. 네가 맡은 자리라고 네 돈은 아니니까.”어머니는 보고서를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치워 주는 것이 아니라 보관하는 모양새였다.“이건 내가 확인하고 있는 거다. 네가 먼저 정리해. 다른 사람 손에서 나한테 돌아오게 만들지 말고.”지훈은 그제야 어머니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았다. 경고할 수 있을 때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도 자신을 감싸 주겠다는 약속은 없었다.“그리고 이유리가 다녀갔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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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검사 결과는 다 통과했습니다.”생산매니저가 보고서를 펼쳤다. 연구개발실장은 그 옆에 승인 견본과 첫 생산품을 놓았다.설은 두 제품을 차례로 발랐다.펴지는 순간의 차이는 작았다. 몇 번 더 문지르면 거의 같아졌지만, 처음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달랐다. 향도 마찬가지였다. 승인 견본에는 없던 끝향이 희미하게 남았다.“한 통만 이래요?”연구개발실장이 출고 번호가 다른 제품들을 내놓았다.“생산량을 올린 구간에서 비슷한 편차가 있습니다.”설은 세 번째 용기까지 확인했다.한쪽에서 출시 일정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공장은 이미 다음 업체 생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 일정도 잡혔고, 외부에 보낸 안내도 있었다.“일반 소비자가 구분할 정도는 아니에요.”해외사업부와 함께 일하던 직원이 말했다.“저희가 설명 안 하면 모릅니다. 안전한 제품인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설명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문제예요?”“팀장님, 모든 걸 그렇게 따지면 출시 못 합니다. 조금씩 넘어가면서 하는 거죠.”설은 손등에 남은 크림을 닦았다.예전에도 넘어가자는 말에는 이상하게 자신이 포기할 것만 붙었다.결혼 전 청첩장에 어머니 이름을 넣고 싶었을 때도 그랬다. 지훈은 설이 왜 마음에 걸리는지 묻지 않았다. 새어머니도 참석하는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고 했다.결혼하는 건 우리 둘이잖아. 이런 것까지 다 네 뜻대로 할 수는 없어.설은 그 말을 믿고 한발 물러났다. 둘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 뒤에도 둘을 위한 양보는 대개 설의 몫이었다.“일정은 제가 설명할게요.”“비용도 제가 확인하고요. 대신 이 제품은 출고하지 마세요.”생산매니저가 물었다.“전량 보류입니까?”“폐기요. 승인 견본과 다른 걸 같은 제품으로 팔지는 않겠습니다.”“차라리 할인 구성으로 돌리면…….”“그 방법도 검토하지 마세요. 가격을 낮춘다고 제가 확인한 차이가 없어지지는 않으니까요.”설은 보고서의 적합 판정 옆에 출고 불가 사유를 적었다. 서명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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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유리는 거실 사진을 세 번 찍었다.첫 번째에는 창밖의 낮은 산이 너무 많이 나왔다. 두 번째에는 아직 뜯지 않은 상자가 찍혔다. 마지막 사진에는 대리석 탁자와 꽃, 소파 끝에 걸친 자신의 실크 잠옷 소매만 남았다.「당분간은 푹 쉬기로. 새로운 시작.」누구의 집인지 쓰지 않아도 댓글은 원하는 방향으로 달렸다.좋은 소식 있느냐는 질문에는 하트만 눌렀다. 결혼하는 것이냐는 질문도 지우지 않았다.“유리 아가씨, 점심 준비됐습니다.”유리는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아가씨 말고 다른 호칭 없어요?”직원은 식기를 놓고 물러났다. 알아들었다는 대답은 없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거실 커튼을 바꾸겠다고 했다. 직원은 샘플을 가져오는 대신 관리 담당자에게 문의하겠다고 했다. 저녁이 되자 가구와 시설은 그대로 사용해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다음 날에는 친구 둘을 부르려 했다.“성함과 방문 시간을 알려 주시면 사모님께 확인받겠습니다.”“내 친구가 오는데 왜 허락을 받아요?”“방문객은 미리 보고드리도록 돼 있습니다.”유리는 친구에게 날짜를 다시 잡자고 보냈다. 괜히 설명이 길어지면 이 좋은 집이 자기 집이 아니라는 것부터 들킬 것 같았다.사흘째 아침, 회사에 가겠다고 하자 기사가 병원 예약을 확인했다.“병원 말고 회사요.”“사모님께서는 당분간 자택에서 업무 보시는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누가 그래요? 나 휴가 안 냈는데.”관리 담당자가 회사와 이미 얘기가 됐다고 했다. 필요한 일은 메일로 받아도 된다는 설명까지 붙었다.유리는 노트북을 열었다. 내일 회의가 달력에서 사라져 있었다. 담당자에게 물으니 몸조리 잘하라는 답이 왔다.보낼 업무는 없었다.지훈에게 건 전화도 받지 않았다. 메시지에는 한참 뒤 짧은 답만 왔다.「회의 중이야.」퇴근하고 오느냐고 물은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유리는 식탁 위에 놓인 두 사람 몫의 식기를 치우라고 했다.“앞으로 한 벌만 놓아요.”직원이 접시를 들어 올리는 동안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라엘뷰티와 서원금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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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설이가 태성에 협력 중단을 통보했다면서요.”차혜경은 이명준의 집무실에 들어와 앉자마자 말했다.“개인적인 감정을 회사 일에 섞으면 안 되는데, 요즘 그 애가 좀 예민합니다.”명준은 비서에게 문을 닫게 했다. 딸이 왜 그런 통보를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태성 측 사람이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부터 수습해야 했다.차혜경은 서류 봉투를 탁자에 놓았다.“그보다 먼저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명준은 유리의 이름이 적힌 병원 자료를 읽었다.한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도 없었다.“이걸 왜 저한테 이제 말씀하십니까?”“저도 며칠 전에 알았습니다. 유리가 직접 찾아왔어요.”“그 아이가 혼자 얼마나 불안했으면…….”“그러게요. 언니 남편 아이를 가졌는데 찾아갈 데가 마땅치 않았겠죠.”명준은 입을 다물었다.차혜경은 그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저희가 거처를 마련했고 비용도 대고 있습니다. 당장은 밖에 알려지지 않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유리를 숨겨 두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그럼 공개할까요?”짧은 질문이었다.공개되는 순간 작은딸은 언니의 가정을 깨뜨린 여자가 됐다. 명준이 오래전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딸이라는 사실까지 다시 따라붙을 것이다.그는 그 시선이 무엇인지 알았다.설의 외가가 자신을 사위로 받아들였을 때, 주변에서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명준은 그 말이 싫었다. 아내보다 더 오래 회사에 남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자기 몫을 증명했다고 여겼다.그 과정에 다른 여자와 아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늘 사생활로 덮었다.이번에도 그렇게 덮을 수 있어야 했다.“아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태성의 아이로 키울 겁니다.”차혜경은 ‘유리의 아이’라고 하지 않았다.“지훈이 집으로 데려가면 돼요. 설이가 키우고.”명준은 그녀를 보았다.“큰애한테 작은애 아이를 맡기자는 겁니까?”“아이를 남의 집으로 보낼 수는 없잖아요. 설이는 아이를 원했고요.”“그 애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그래서 아버님을 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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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회의실에는 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설의 자리는 맞은편이었다. 계약서와 펜까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설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야기를 나눈 듯 찻잔이 반쯤 비어 있었다.“앉아라. 오래 걸릴 일 아니다.”이명준은 딸보다 계약서를 먼저 보았다.설은 앉아서 첫 장부터 읽었다. 태성이 가져갈 권리는 넓었고, 라엘에 남을 몫은 작았다. 자신의 개인 특허는 아직 확보되지 않은 권리로 적혀 있었다.“서원에는 아버지가 중단하라고 하셨어요?”“회사에서 결정했다.”“저한테는 말씀도 안 하시고요.”“회사 일을 언제부터 네 허락받고 했니.”명준은 펜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그동안 애쓴 건 안다. 그래서 네가 계속 개발 맡게 해 놨어. 태성이 판로도 열어 준다니까 네 입장에서도 나쁠 것 없어.”차혜경이 말을 받았다.“밖에서 투자받느라 번거롭게 다닐 필요 없잖니. 집안끼리 도우면 될 일을.”설은 서원과 협의하며 고쳤던 예산표를 떠올렸다. 출시를 미루기로 한 뒤에도 권혁은 날짜보다 제품을 먼저 보겠다고 했다.여기서는 이미 날짜와 돈, 자신이 할 일까지 정해져 있었다.“이 금액에는 동의 못 합니다.”“네가 돈 넣었니?”아버지의 말이 곧바로 돌아왔다.“회사 시설 쓰고 직원들 데리고 개발했어. 네 이름 붙었다고 전부 네 것은 아니야.”설은 개인 특허가 적힌 페이지를 펼쳐 놓았다. 명준은 그것을 보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그러니까 네 동의가 필요한 부분만 하자는 거잖아.”시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사업 얘기만 하다 끝낼 수는 없겠구나. 유리 일도 알아야 할 테니.”“아이 가졌다.”짧은 말이었다. 잠시 뒤 날씨 이야기를 덧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평탄했다.명준은 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지훈이 아이란다. 병원에서 확인했고.”“놀랐겠지만 지금은 애부터 조심해야 해. 유리는 내가 따로 지내게 했어.”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함께 병원에 가던 남편과 동생을 봤을 때보다, 지금 이 방의 광경이 더 낯설었다. 아버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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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엄마 계실 때 라엘은 태성 눈치 보면서 돈 받는 회사 아니었어요.”명준이 주위를 확인했다. 복도 저편에 직원이 있었다.“목소리 낮춰.”“아버지가 오래 무릎 꿇고 사셨다고, 저까지 그게 편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그녀는 승강기에 탔다.설은 층수가 바뀌는 숫자를 보았다.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아파할 곳을 정확히 찔렀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 사람을 다치게 해야 잠깐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지쳤다.차에 올라 목적지를 입력하지 않았다. 회사 주차장을 빠져나와 한동안 익숙한 길을 달렸다.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차선을 바꿨다.바다가 있는 쪽이었다.***서울을 벗어나자 건물이 낮아졌다. 해안도로에 접어들었을 때는 오후의 빛이 길게 기울어 있었다.별원으로 향하는 길은 마지막에 좁아졌다. 오래된 소나무 사이로 돌담이 이어졌고, 그 너머로 바다를 마주한 낮은 집이 보였다.어머니가 생전에 별도로 마련한 개인 기금으로 사 두었던 곳이었다. 설이 어렸을 때 이곳에 오면 어머니는 도착한 날의 저녁 약속을 잡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 짐을 두고,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문을 열어 준 사람은 오정섭이었다.“오셨네요.”그는 차 안에 짐이 많은지부터 살폈다. 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지도, 미리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방은 늘 쓰시던 데로 준비할까요?”“네. 오늘 자고 가려고요.”“그럼 준비하겠습니다. 해 지면 금방 추워져요.”현관 안쪽에서 윤복희가 나왔다. 정섭의 아내였다. 어머니가 이 집을 마련했을 때부터 두 사람이 함께 지켰다. 설이 학교 가방을 메던 때에도, 결혼을 앞두고 잠깐 들렀을 때에도 같은 부엌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밥은 먹었어요?”그 질문에 설은 오늘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해야 했다.“제대로는 못 먹었어요.”“잘됐네. 바지락 빼 놓은 거 있어요. 국수 삶으면 돼.”복희는 남편에게 테라스 문부터 닫으라고 했다. 바람 들어오면 국수가 금방 식는다는 이유였다.설은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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