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결혼 3년. 신지훈과의 밤은 단 한 번도 5분을 넘긴 적이 없었다. 벗지 않는 흰 셔츠, 배란일에만 치르는 의무적인 잠자리. 끝나면 어김없이 시계를 확인하며 던지는 한마디. “이번엔 잘됐으면 좋겠는데.” 이설은 그렇게 또 남편의 차가운 등만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제 침실에서 전혀 다른 남편을 보았다. 자신에게는 입맞춤조차 아끼던 남자가 이복동생을 뜨겁게 끌어안고 있었다. 동생이 걸친 검은 레이스는 바로 어제,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며 이설에게 보낸 것이었다. “형부가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언니한테만 그랬던 거야.” 그날 이설은 결혼반지를 버렸다. 남편도, 함께 꿈꿨던 미래도 더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정작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신지훈이었다.
View More“키스는 됐어.”
설이 고개를 들자 지훈이 먼저 얼굴을 돌렸다. 입술은 그의 턱 아래에 닿았다가 미끄러졌다. 목에 두르려던 손까지 밀려나자 설은 어쩔 줄 모르고 베개 끝을 움켜쥐었다. 침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남편은 입을 맞추는 것만 거절했을 뿐, 하던 일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냥, 잠깐만…….”
“왜. 어디 아파?”
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고 하면 그가 그만둘 것 같았다. 그만두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더 서러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꺼내면 기념일을 핑계로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매달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지훈의 흰 셔츠 소매가 뺨을 스쳤다. 커프스까지 그대로였다. 설은 저만 벗고 있는 게 새삼 견딜 수 없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그는 손목을 잡아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옷 구겨져. 가만히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가 조용해졌다. 지훈은 이불 밖으로 나가 물티슈를 뽑았다. 설이 옆으로 조금 비켜 주기도 전에 그가 몸을 닦기 시작했다. 다 쓴 것을 휴지통에 버린 뒤에야 설 쪽으로 상자를 밀었다.
“너도 쓸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은 벨트를 채우며 시계를 보았다. 방에 들어올 때 설이 확인한 시간에서 겨우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식탁에는 아직 자르지 않은 케이크가 있었다.
“오늘이 배란일 맞지?”
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됐으면 좋겠네. 매달 이렇게 날짜 맞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지훈은 피곤하다는 듯 목 뒤를 문질렀다. 설은 이불 아래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렸다. 지난 삼 년 동안 임신에 좋다는 말만 들으면 입에도 대지 않던 한약까지 삼켰다. 약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도 참았고, 병원 예약이 바뀔 때마다 제 일정부터 옮겼다. 오늘도 그렇게 겨우 맞춘 날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피곤한 얼굴을 하자,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미안해.”
말하고 나니 서러웠다. 두 사람의 아이를 기다리는 일인데, 남편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할 때마다 자신만 무언가를 구걸하는 기분이었다.
함께 기다려 주면 안 되느냐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전처럼 안아 주면 안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훈은 대꾸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설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불을 고쳐 덮었다. 더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대신 내일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제주도 가. 투자사랑 만나기로 했어.”
“갑자기?”
“지난주에… 말했었는데.”
지훈은 화면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몸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 무리하지 마.”
그 말에 잠깐 기대가 생겼다. 걱정하는 걸까 싶어 그를 보았지만, 다음 말은 달랐다.
“괜히 컨디션 망쳐 놓고 또 한 달 미루지 말고.”
설은 서류 가방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 석 달 동안 수정한 제안서보다 병원에 제출한 기록이 더 두꺼워졌다. 그래도 내일만은 자기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훈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어. 끝났어.”
설은 이불 위에 내려놓았던 손을 움켜쥐었다.
“지금 갈게.”
통화가 끝나자 그가 재킷을 들었다. 설은 이번에는 돌아서기 전에 붙잡았다.
“오늘 꼭 나가야 해?”
“회사 일이야.”
“잠깐만 있다 가면 안 돼? 오늘은…….”
지훈이 식탁 쪽을 보았다. 설도 따라 보았다. 상자에서 반쯤 꺼낸 케이크 위에 작은 숫자 초가 놓여 있었다. 3이었다.
그가 말했다.
“기념일이라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아.”
설은 그제야 알았다. 잊은 게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 침실이 갑자기 넓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을 밀어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 밤이 헛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결혼 전, 딸이 생기면 설을 닮았으면 좋겠다며 배에 손을 얹던 사람이니 한 번쯤은 돌아올 것 같았다.
침대 아래에 떨어진 리본을 발견한 건 물을 마시러 일어났을 때였다. 낮에 회사로 찾아온 유리가 두고 간 선물이었다.
‘언니, 오늘 꼭 열어 봐. 형부 있을 때.’
그때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레이스와 끈이 손끝에 걸렸다. 속옷이었다. 그 아래 카드가 놓여 있었다.
「결혼 3주년 축하해! 형부도 가끔은 눈이 즐거워야지. 언니가 조금만 신경 써 봐!」
설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동생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더 부끄러웠다. 혹시 지훈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했을까. 키스를 피하는 남편 앞에서 이런 것까지 입고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속옷을 접지도 못하고 상자를 닫았다.
그 시각, 유리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렸다. 지훈이 들어서자 유리가 그의 재킷을 받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설이 잡았을 때 구겨진다던 셔츠를 이번에는 그가 먼저 벗어 소파에 던졌다.
“형부, 언니 선물은 봤어?”
유리가 가운을 벌렸다. 조금 전 설이 상자에 도로 넣은 것과 같은 레이스였다.
지훈의 시선이 내려갔다.
“왜. 언니한테는 별로였어?”
그는 대답 대신 유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내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입맞춤은 길었다.
유리는 거실 사진을 세 번 찍었다.첫 번째에는 창밖의 낮은 산이 너무 많이 나왔다. 두 번째에는 아직 뜯지 않은 상자가 찍혔다. 마지막 사진에는 대리석 탁자와 꽃, 소파 끝에 걸친 자신의 실크 잠옷 소매만 남았다.「당분간은 푹 쉬기로. 새로운 시작.」누구의 집인지 쓰지 않아도 댓글은 원하는 방향으로 달렸다.좋은 소식 있느냐는 질문에는 하트만 눌렀다. 결혼하는 것이냐는 질문도 지우지 않았다.“유리 아가씨, 점심 준비됐습니다.”유리는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아가씨 말고 다른 호칭 없어요?”직원은 식기를 놓고 물러났다. 알아들었다는 대답은 없었다.그날 오후, 유리는 거실 커튼을 바꾸겠다고 했다. 직원은 샘플을 가져오는 대신 관리 담당자에게 문의하겠다고 했다. 저녁이 되자 가구와 시설은 그대로 사용해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다음 날에는 친구 둘을 부르려 했다.“성함과 방문 시간을 알려 주시면 사모님께 확인받겠습니다.”“내 친구가 오는데 왜 허락을 받아요?”“방문객은 미리 보고드리도록 돼 있습니다.”유리는 친구에게 날짜를 다시 잡자고 보냈다. 괜히 설명이 길어지면 이 좋은 집이 자기 집이 아니라는 것부터 들킬 것 같았다.사흘째 아침, 회사에 가겠다고 하자 기사가 병원 예약을 확인했다.“병원 말고 회사요.”“사모님께서는 당분간 자택에서 업무 보시는 것으로 알고 계십니다.”“누가 그래요? 나 휴가 안 냈는데.”관리 담당자가 회사와 이미 얘기가 됐다고 했다. 필요한 일은 메일로 받아도 된다는 설명까지 붙었다.유리는 노트북을 열었다. 내일 회의가 달력에서 사라져 있었다. 담당자에게 물으니 몸조리 잘하라는 답이 왔다.보낼 업무는 없었다.지훈에게 건 전화도 받지 않았다. 메시지에는 한참 뒤 짧은 답만 왔다.「회의 중이야.」퇴근하고 오느냐고 물은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유리는 식탁 위에 놓인 두 사람 몫의 식기를 치우라고 했다.“앞으로 한 벌만 놓아요.”직원이 접시를 들어 올리는 동안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 라엘뷰티와 서원금융
“검사 결과는 다 통과했습니다.”생산매니저가 보고서를 펼쳤다. 연구개발실장은 그 옆에 승인 견본과 첫 생산품을 놓았다.설은 두 제품을 차례로 발랐다.펴지는 순간의 차이는 작았다. 몇 번 더 문지르면 거의 같아졌지만, 처음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달랐다. 향도 마찬가지였다. 승인 견본에는 없던 끝향이 희미하게 남았다.“한 통만 이래요?”연구개발실장이 출고 번호가 다른 제품들을 내놓았다.“생산량을 올린 구간에서 비슷한 편차가 있습니다.”설은 세 번째 용기까지 확인했다.한쪽에서 출시 일정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공장은 이미 다음 업체 생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 일정도 잡혔고, 외부에 보낸 안내도 있었다.“일반 소비자가 구분할 정도는 아니에요.”해외사업부와 함께 일하던 직원이 말했다.“저희가 설명 안 하면 모릅니다. 안전한 제품인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설명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문제예요?”“팀장님, 모든 걸 그렇게 따지면 출시 못 합니다. 조금씩 넘어가면서 하는 거죠.”설은 손등에 남은 크림을 닦았다.예전에도 넘어가자는 말에는 이상하게 자신이 포기할 것만 붙었다.결혼 전 청첩장에 어머니 이름을 넣고 싶었을 때도 그랬다. 지훈은 설이 왜 마음에 걸리는지 묻지 않았다. 새어머니도 참석하는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고 했다.결혼하는 건 우리 둘이잖아. 이런 것까지 다 네 뜻대로 할 수는 없어.설은 그 말을 믿고 한발 물러났다. 둘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 뒤에도 둘을 위한 양보는 대개 설의 몫이었다.“일정은 제가 설명할게요.”“비용도 제가 확인하고요. 대신 이 제품은 출고하지 마세요.”생산매니저가 물었다.“전량 보류입니까?”“폐기요. 승인 견본과 다른 걸 같은 제품으로 팔지는 않겠습니다.”“차라리 할인 구성으로 돌리면…….”“그 방법도 검토하지 마세요. 가격을 낮춘다고 제가 확인한 차이가 없어지지는 않으니까요.”설은 보고서의 적합 판정 옆에 출고 불가 사유를 적었다. 서명을
지훈이 본가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서재에 있었다.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보고서야 그가 물었다.“이것 때문에 부르셨어요?”“앉아.”그가 소파에 앉기도 전에 보고서가 앞에 떨어졌다. 가족 자금과 태성 계열사 일부를 대상으로 한 감사 표본조사 자료였다. 몇 군데 표시된 숫자는 지훈에게 낯설지 않았다.“네가 따로 넣은 돈, 언제 회수되니?”“일정이 조금 밀린 겁니다. 손실로 확정된 건 아니고요.”“누가 손실이라고 했니. 나는 언제 돌려받느냐고 물었어.”“조정 중입니다.”어머니는 다음 장을 넘기게 했다.태성호텔에서 집행된 선급금이었다. 정상적인 계약이었고, 필요한 승인도 받았다. 다만 돈이 건너간 회사와 지훈의 개인 투자처 사이에 관계가 있었다.그는 그 정도 연결은 문제 삼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계약상 하자 없습니다.”“돈 나간 순서는?”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오래된 주주들이 몰라서 입 다물고 있는 줄 아니. 네가 어디까지 가나 보는 사람도 있어.”“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서원까지 네 사정을 알게 했어?”그 말에는 즉시 대꾸가 나왔다.“누가 흘린 게 아닙니다. 그쪽에서 확인한 거예요.”“남이 확인할 수 있는 일을 너만 잘 감췄다고 생각한 거네.”지훈은 보고서를 덮었다.리셉션에서 돌아온 뒤로 같은 말을 다른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는 이미 독립적으로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전히 설명이 부족한 아들에 불과했다.“핵심 자금에는 손 안 댔습니다.”“그 말, 다음 달에도 할 수 있어야 할 거야. 네가 맡은 자리라고 네 돈은 아니니까.”어머니는 보고서를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치워 주는 것이 아니라 보관하는 모양새였다.“이건 내가 확인하고 있는 거다. 네가 먼저 정리해. 다른 사람 손에서 나한테 돌아오게 만들지 말고.”지훈은 그제야 어머니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았다. 경고할 수 있을 때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도 자신을 감싸 주겠다는 약속은 없었다.“그리고 이유리가 다녀갔다.”그
지훈은 리셉션장을 나오면서도 인사하러 다가온 사람들에게 평소와 같은 말을 했다. 다음에 식사하자는 약속까지 잡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뒤에야 휴대전화를 꺼냈다.“서원금융에 누가 우리 얘기 했어요?”재무 책임자는 질문을 되물었다. 지훈은 권혁이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겼다. 자금 흐름, 주주들의 이견, 다음 분기 전망.“그 내용은 대표님께서 검토 요청하신 자료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주주들이 어떤 반응인지까지요?”“그쪽과 거래하는 주주들도 있습니다. 내부에서 자료를 빼낸 건 아닌 것 같습니다.”지훈은 답하지 않았다.자기가 열어 달라고 두드리던 문 안에서, 그들은 이미 자기 사정을 읽고 있었다.그는 보좌역에게 자료 발송 이력과 외부 접촉 내역을 모두 확인하라고 했다. 찾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면, 오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만 잘못 읽은 셈이었다.***유리는 예약도 없이 태성가의 대문 앞에 섰다.인터폰 너머로 이름과 용건을 묻는 말이 돌아왔다. 설의 동생이라고 하려다, 지훈에게 급한 일이 있다고 답했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응접실에 들어서자 지훈의 어머니가 말했다.“지훈이는 여기 없어.”“알아요. 어머님을 뵈러 왔어요.”“나는 네 어머니가 아닌데.”유리는 걸음을 멈췄다.부인은 앉으라는 말만 덧붙였다. 유리가 소파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설이한테 무슨 일이 있니?”“언니 일은 아니고요. 저한테…… 아이가 생겼어요.”부인은 유리의 배를 보지 않았다.“누구 아이인지도 말해야지.”“지훈 씨요.”이번에는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의심하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검사받은 것도 가져왔어요. 지훈 씨도 같이 갔고요.”봉투가 탁자 위에 놓였다. 부인은 필요한 날짜와 병원 이름을 확인했다. 몇 가지를 더 물었지만 목소리에는 놀람도 분노도 없었다.유리는 차라리 화를 내 주었으면 했다. 그래야 울면서 부탁이라도 할 수 있었다.“제가 뭘 바라고 온 건 아니에요. 그런데 지훈 씨가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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