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5분짜리 사랑

남편의 5분짜리 사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By:  지온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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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년. 신지훈과의 밤은 단 한 번도 5분을 넘긴 적이 없었다. 벗지 않는 흰 셔츠, 배란일에만 치르는 의무적인 잠자리. 끝나면 어김없이 시계를 확인하며 던지는 한마디. “이번엔 잘됐으면 좋겠는데.” 이설은 그렇게 또 남편의 차가운 등만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제 침실에서 전혀 다른 남편을 보았다. 자신에게는 입맞춤조차 아끼던 남자가 이복동생을 뜨겁게 끌어안고 있었다. 동생이 걸친 검은 레이스는 바로 어제,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며 이설에게 보낸 것이었다. “형부가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언니한테만 그랬던 거야.” 그날 이설은 결혼반지를 버렸다. 남편도, 함께 꿈꿨던 미래도 더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정작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신지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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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키스는 됐어.”

설이 고개를 들자 지훈이 먼저 얼굴을 돌렸다. 입술은 그의 턱 아래에 닿았다가 미끄러졌다. 목에 두르려던 손까지 밀려나자 설은 어쩔 줄 모르고 베개 끝을 움켜쥐었다. 침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남편은 입을 맞추는 것만 거절했을 뿐, 하던 일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냥, 잠깐만…….”

“왜. 어디 아파?”

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고 하면 그가 그만둘 것 같았다. 그만두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더 서러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꺼내면 기념일을 핑계로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매달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지훈의 흰 셔츠 소매가 뺨을 스쳤다. 커프스까지 그대로였다. 설은 저만 벗고 있는 게 새삼 견딜 수 없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그는 손목을 잡아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옷 구겨져. 가만히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가 조용해졌다. 지훈은 이불 밖으로 나가 물티슈를 뽑았다. 설이 옆으로 조금 비켜 주기도 전에 그가 몸을 닦기 시작했다. 다 쓴 것을 휴지통에 버린 뒤에야 설 쪽으로 상자를 밀었다.

“너도 쓸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은 벨트를 채우며 시계를 보았다. 방에 들어올 때 설이 확인한 시간에서 겨우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식탁에는 아직 자르지 않은 케이크가 있었다.

“오늘이 배란일 맞지?”

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됐으면 좋겠네. 매달 이렇게 날짜 맞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지훈은 피곤하다는 듯 목 뒤를 문질렀다. 설은 이불 아래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렸다. 지난 삼 년 동안 임신에 좋다는 말만 들으면 입에도 대지 않던 한약까지 삼켰다. 약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도 참았고, 병원 예약이 바뀔 때마다 제 일정부터 옮겼다. 오늘도 그렇게 겨우 맞춘 날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피곤한 얼굴을 하자,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

“미안해.”

말하고 나니 서러웠다. 두 사람의 아이를 기다리는 일인데, 남편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할 때마다 자신만 무언가를 구걸하는 기분이었다.

함께 기다려 주면 안 되느냐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도 전처럼 안아 주면 안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훈은 대꾸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설은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불을 고쳐 덮었다. 더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대신 내일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제주도 가. 투자사랑 만나기로 했어.”

“갑자기?”

“지난주에… 말했었는데.”

지훈은 화면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몸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 무리하지 마.”

그 말에 잠깐 기대가 생겼다. 걱정하는 걸까 싶어 그를 보았지만, 다음 말은 달랐다.

“괜히 컨디션 망쳐 놓고 또 한 달 미루지 말고.”

설은 서류 가방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 석 달 동안 수정한 제안서보다 병원에 제출한 기록이 더 두꺼워졌다. 그래도 내일만은 자기 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훈의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어. 끝났어.”

설은 이불 위에 내려놓았던 손을 움켜쥐었다.

“지금 갈게.”

통화가 끝나자 그가 재킷을 들었다. 설은 이번에는 돌아서기 전에 붙잡았다.

“오늘 꼭 나가야 해?”

“회사 일이야.”

“잠깐만 있다 가면 안 돼? 오늘은…….”

지훈이 식탁 쪽을 보았다. 설도 따라 보았다. 상자에서 반쯤 꺼낸 케이크 위에 작은 숫자 초가 놓여 있었다. 3이었다.

그가 말했다.

“기념일이라고 일을 안 할 수는 없잖아.”

설은 그제야 알았다. 잊은 게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 침실이 갑자기 넓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을 밀어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 밤이 헛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결혼 전, 딸이 생기면 설을 닮았으면 좋겠다며 배에 손을 얹던 사람이니 한 번쯤은 돌아올 것 같았다.

침대 아래에 떨어진 리본을 발견한 건 물을 마시러 일어났을 때였다. 낮에 회사로 찾아온 유리가 두고 간 선물이었다.

‘언니, 오늘 꼭 열어 봐. 형부 있을 때.’

그때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레이스와 끈이 손끝에 걸렸다. 속옷이었다. 그 아래 카드가 놓여 있었다.

「결혼 3주년 축하해! 형부도 가끔은 눈이 즐거워야지. 언니가 조금만 신경 써 봐!」

설은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동생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더 부끄러웠다. 혹시 지훈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했을까. 키스를 피하는 남편 앞에서 이런 것까지 입고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속옷을 접지도 못하고 상자를 닫았다.

그 시각, 유리의 아파트 현관문이 열렸다. 지훈이 들어서자 유리가 그의 재킷을 받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설이 잡았을 때 구겨진다던 셔츠를 이번에는 그가 먼저 벗어 소파에 던졌다.

“형부, 언니 선물은 봤어?”

유리가 가운을 벌렸다. 조금 전 설이 상자에 도로 넣은 것과 같은 레이스였다.

지훈의 시선이 내려갔다.

“왜. 언니한테는 별로였어?”

그는 대답 대신 유리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내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입맞춤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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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키스는 됐어.”설이 고개를 들자 지훈이 먼저 얼굴을 돌렸다. 입술은 그의 턱 아래에 닿았다가 미끄러졌다. 목에 두르려던 손까지 밀려나자 설은 어쩔 줄 모르고 베개 끝을 움켜쥐었다. 침대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남편은 입을 맞추는 것만 거절했을 뿐, 하던 일을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다.“그냥, 잠깐만…….”“왜. 어디 아파?”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프다고 하면 그가 그만둘 것 같았다. 그만두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더 서러워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꺼내면 기념일을 핑계로 다정하게 대해 달라고 매달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지훈의 흰 셔츠 소매가 뺨을 스쳤다. 커프스까지 그대로였다. 설은 저만 벗고 있는 게 새삼 견딜 수 없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그는 손목을 잡아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옷 구겨져. 가만히 있어.”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가 조용해졌다. 지훈은 이불 밖으로 나가 물티슈를 뽑았다. 설이 옆으로 조금 비켜 주기도 전에 그가 몸을 닦기 시작했다. 다 쓴 것을 휴지통에 버린 뒤에야 설 쪽으로 상자를 밀었다.“너도 쓸래?”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은 벨트를 채우며 시계를 보았다. 방에 들어올 때 설이 확인한 시간에서 겨우 오 분이 지나 있었다. 식탁에는 아직 자르지 않은 케이크가 있었다.“오늘이 배란일 맞지?”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엔 됐으면 좋겠네. 매달 이렇게 날짜 맞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지훈은 피곤하다는 듯 목 뒤를 문질렀다. 설은 이불 아래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오므렸다. 지난 삼 년 동안 임신에 좋다는 말만 들으면 입에도 대지 않던 한약까지 삼켰다. 약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도 참았고, 병원 예약이 바뀔 때마다 제 일정부터 옮겼다. 오늘도 그렇게 겨우 맞춘 날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피곤한 얼굴을 하자,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나왔다.“미안해.”말하고 나니 서러웠다. 두 사람의 아이를 기다리는 일인데, 남편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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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유리는 지훈이 풀어 놓은 시계를 제 손목에 차 보았다. 손을 내리자 헐거운 시계가 손등 쪽으로 흘러내렸다.“재밌냐.”지훈은 베개에 기대 눈을 감은 채 물었다.“응. 아까 전화할 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전화 너머로 언니 신음이라도 들리면, 나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나 했지.”“쓸데없는 소리 마. 여기까지 와서 네 언니 얘기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지훈은 유리의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협탁에 놓았다. 유리는 그 손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언니는 형부 얘기밖에 안 하던데. 오늘도 백화점에서 넥타이 사진 보내 놓고 계속 휴대전화만 보더라. 답 안 오니까 세 개 다 샀어. 하나쯤은 마음에 들겠지, 그러면서.”지훈의 시선이 의자에 걸린 넥타이로 향했다. 그것도 설이 사 준 것이었다. 유리가 일어나 집어 들더니 손가락에 느슨하게 감았다.“그거 고를 때는 몰랐겠지. 형부가 이거 하고 나한테 올 줄은.”지훈이 넥타이 끝을 잡자 유리는 두 손목을 나란히 내밀었다.“언니는 이런 데 쓰라고 산 게 아닐 텐데.”그는 대답 없이 손목에 천을 둘러 느슨하게 묶었다. 유리가 손을 움직여 보며 웃었다. 지훈은 매듭 끝을 당겨 그녀를 가까이 끌었다.두 사람이 따로 만난 지는 반년이었다. 유리는 유학을 마치고 라엘뷰티 해외사업부에 들어오자마자 태성호텔 협업을 자청했다. 지훈과 직접 상의하겠다며 비서를 거치지 않았고, 늦은 회의 뒤에는 설의 안부를 핑계로 남았다. 설을 기다리던 차 안에서 먼저 입을 맞춘 날에도 지훈은 잠깐 굳었을 뿐 밀어내지 않았다. 다음 약속은 그가 잡았다.설과 유리는 아버지만 같았다. 혼외자로 태어난 유리는 설의 어머니가 죽은 뒤 제 어머니와 함께 집에 들어왔다. 설은 그래도 유리를 동생이라 불렀다. 남편에게 일을 부탁하면서도 잘 챙겨 달라고 했다. “언니 요즘 프로젝트 한다고 바쁘더라. 점심 먹으면서도 자료만 보고. 형부한테는 보여 줬어?”“내일 미팅 있다던데.”“집에서는 형부 기다리고, 회사에서는 예전 사람들 붙잡고. 언니도 참 힘들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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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욕실 안은 따뜻했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은 이 안에서 웃고 있었다.문이 열리자 유리가 지훈에게서 떨어졌다. 놀란 얼굴로 설을 보더니 어깨 너머를 살폈다.“언니…… 혼자 왔어?”미안하다는 말보다 그것부터 나왔다. 설의 입 안에 신물이 고였다. 유리의 뺨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지훈이 유리를 붙들었다. 맞은 사람보다 그 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설이 남편의 손을 뿌리치고 뺨을 때릴 때까지 그는 자신도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일단 나가서 얘기해.”“어디로 나가? 내 집인데.”목소리가 갈라졌다. 더 크게 말하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설은 두 사람을 지나 침실로 나왔다. 바닥에 벗어 놓은 옷들이 있었다.옷을 한꺼번에 집어 들었다. 창문이 열리자 빗소리가 들이쳤고, 옷들이 창밖으로 쏟아졌다. “그만하고 내 말 좀 들어.”지훈의 말에 설은 반지를 잡았다. 살에 걸린 테두리를 비틀어 빼는 동안 그가 두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손가락이 쓸려 쓰라렸지만, 반지가 빠지자 그것보다 빈자리가 더 아팠다. 설은 남편을 보며 손을 창밖으로 내밀었다.설은 가방을 들고 나왔다. 두 사람 앞에서는 끝내 울지 않았다.차 문이 닫힌 뒤에야 숨이 무너졌다. 운전대에 얼굴을 묻자 참았던 울음이 새어 나왔다. 등을 펴려고 해도 구역질 때문에 다시 몸을 숙여야 했다. 남편의 전화는 울리다 끊기고, 또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건 한참 뒤였다. 부재중 전화 아래 미팅 안내와 제안서 파일이 남아 있었다. 오늘 새벽에 보낸 최종본이었다. 설은 파일을 열어 페이지를 넘겼다. 고친 곳마다 남아 있는 자신의 메모를 읽었다. 내용은 이미 외우고 있었지만 끝까지 보았다.미팅 취소 문장을 지웠다. 오늘 잃은 것들 사이에 이것까지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약속 장소가 보일 무렵 차가 멈췄다. 경고등이 켜진 계기판 앞에서 몇 번을 시도해도 엔진은 응답하지 않았다. 설은 보험사에 연락하고 위치를 설명하려 차에서 내렸다. 빗물에 눈물이 씻겼다. 건물 이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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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 말을 듣고서야 설은 눈앞의 남자와 오래전 식탁을 함께 떠올렸다. 넓은 창 옆의 자리, 거의 손대지 못한 음식,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부터 꺼냈던 자신까지.“그때는 제가…….”“실례했다고 하시려고요?”권혁의 말투에 웃음이 조금 묻어 있었다.“덕분에 저도 어려운 얘기 안 해도 됐는데.”설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웃음이 스쳤다. 외조부와 서원금융 집안의 오랜 인연으로 마련된 자리였다. 설은 어른들의 체면 때문에 나갔지만, 이미 지훈과 결혼하고 싶었다. 지훈의 다리가 낫기를 기다리던 때였다.그가 다친 날의 기억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어머니의 장례가 끝났고, 차를 기다려야 했고, 누군가 뒤에서 설의 이름을 불렀다. 도로로 발을 내디딘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경적이 너무 가까이서 울렸다는 것과, 몸이 지훈의 품으로 끌려갔다는 것만 남아 있었다.설 대신 차에 부딪친 지훈은 다리뼈가 부러졌다. 석 달을 침대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설은 병실 문밖에서부터 울었다.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를 보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정하게 될 것 같았다.결국 문을 열었을 때, 지훈이 먼저 웃었다.“왜 거기 서 있어. 이리 와.”침대 옆에 서자 그가 설의 얼굴을 살폈다. 다친 데가 없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설이 대답도 못 하고 울기만 하자 손을 뻗었다.“나 다리만 다쳤어. 안아 주는 건 할 수 있어.”그 말에 설은 침대 옆으로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죽은 뒤로 누구 앞에서도 그렇게 울지 못했다. 아버지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고, 조문객들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지훈은 그만 울라는 말도,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 시절에는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면 잠들 수 있었다.오늘 설은 그 사람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다.테이블 위에는 자신이 만든 제품 사진이 있었다. 설은 사진 귀퉁이를 보다가 말했다.“그때는 그 사람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권혁은 지나간 선택을 평가하지 않았다.“그랬겠죠. 오늘 제안 설명하실 때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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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아침에는 열이 내렸다. 거실로 나온 설은 소파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한쪽 쿠션이 깊게 눌려 있었고, 접힌 담요 옆에는 정장 상의가 걸쳐져 있었다. 권혁에게는 몸을 펴고 눕기에도 좁았을 소파였다.“몸은 좀 어떻습니까?”“많이 나아졌어요. 이제 가 보려고요.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권혁이 차 열쇠를 집었다.“어디로 가세요? 제가 데려다드릴게요.”설이 괜찮다고 하려 하자 그가 먼저 현관 쪽으로 걸었다.“차도 아직 없으시잖아요.”“그럼…… 부탁드릴게요.”집 앞에 차가 멈췄을 때 지훈이 현관을 나왔다. 설을 향해 걸어오던 그가 운전석에서 내리는 남자를 보고 멈췄다.“권 대표님?”호텔 투자 건으로 비서실에 몇 번이나 연락을 넣어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가, 설과 권혁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권혁은 가볍게 목례하고 차 문을 닫았다. 방문 이유를 설명하거나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어디 있었어?”“밖에.”“밤새 이분이랑?”설이 대답하지 않자 지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너희 잤어?”“당신은 어제 내 동생이랑 잤잖아.”“그래서 너도 받아 줄 남자는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지훈이 팔을 잡으려 하자 권혁이 한 걸음 다가섰다. 뻗어 오던 손은 두 사람 사이에서 멈췄다.“지금은 손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지훈이 손을 내렸다. 설에게 향해 있던 기세가 권혁 앞에서는 그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대표님, 저희 부부끼리 할 얘기가 있습니다.”“그 전에 방금 말씀부터 사과하시죠.”“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오해가 좀 있어서…….”“그럼 이설 씨에게 설명하시면 되겠네요. 저 말고.”권혁은 물러나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지만, 지훈이 설을 데리고 들어가 이 일을 끝내도록 두지도 않았다.지훈은 아내를 보았다. 조금 전에는 망설임 없이 쏟아 냈던 말을 이제는 고쳐 꺼내야 했다. 설은 그가 무슨 말을 찾고 있는지 지켜보다가 지훈의 조급한 시선을 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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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당분간 연락하지 마.”유리가 목걸이를 내려놓다 말고 지훈을 보았다.“언니 물건 좀 만졌다고 이래? 형부가 풀라고 해서 풀었잖아.”“목걸이 얘기 아니야.”지훈은 설이 열어 두고 간 서랍을 닫았다.“집에도 오지 말고.”“그럼 나는? 언니한테 그렇게 맞고도 사과 한마디 못 받았는데, 형부까지 나한테 이러면…….”“유리야. 지금 네 기분까지 달래 줄 여유 없어.”그가 침실을 나갔다. 유리는 따라가려다 멈췄다. 침대 위에는 언니가 버리고 간 결혼사진이 놓여 있었다. 가져가지도 않은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여전히 부부였다.유리는 액자를 엎어 버렸다.***보행 신호가 바뀌었다. 설은 길 건너 빵집으로 향했다.그날 이후 연구소 근처에 작은 집을 얻었다. 친정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남편의 외도를 말하면, 옆에 앉은 여자는 제 딸을 감싸기 전에 설부터 달랠 것이다. 남자들 다 그렇다고, 네가 조금만 참으라고.어머니가 떠난 뒤 그 집에서 배운 말들이었다.설은 빵 두 개를 고르다 하나를 내려놓았다. 지훈이 좋아하는 빵이었다. 계산대 앞에서야 알아차린 것이 우스워 잠깐 입술을 눌렀다.집으로 돌아와 봉투를 여니 하나뿐인 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그래도 먹었다. 창가에 앉아 다음 주 샘플 테스트 일정을 확인하면서, 부스러기가 자료에 떨어지지 않게 접시를 당겼다. 혼자 사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순간에 연습이 필요했다.밤에는 현관 밖에서 발소리가 나면 읽던 줄을 놓쳤다. 그러고는 아무도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설이 집을 비운 지 일주일째, 비서가 지훈에게 태성호텔 창립 행사 자료를 가져왔다.“사모님께 확인할 사항이 남아 있습니다.”비서가 세 번째 같은 말을 하자 지훈은 결재하던 펜을 놓았다.“행사 준비를…… 왜 다 그 사람한테 물어?”“선물이나 가족분들 의전은 매년 사모님께서 맡으셔서요. 저희가 받은 자료에는 업체명만 있습니다.”지훈은 비서가 내민 목록을 읽었다. 몇 달 전 설이 저녁 식탁에서 묻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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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눈 감지 마세요. 들리세요?”설은 눈을 뜨려고 했다. 누군가 배를 누를 때마다 몸이 안쪽부터 찢기는 것 같았다.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죽기 전에는 지나온 날들이 보인다던가.흰 불빛 사이로 지훈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불과 몇 주 전, 설은 병원에서 돌아온 채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어머니 생신에 왜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어?”그날 설은 사진을 여덟 번 찍었다. 시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휴대전화를 돌려줄 때마다 다시 웃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겨 웃을 때도 아팠다.“몸이 좀 안 좋았어.”“그럼 오지 말든가. 와서 그러고 있으니까 어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하시잖아.”오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어머니 생신보다 중요한 게 있느냐고 했다.그 말을 꺼내려는데 지훈이 넥타이를 풀며 돌아섰다.“하나하나 따지지 좀 말자. 나도 오늘 피곤해.”그보다 전에는 주말 아침이 있었다.결혼하고 일 년 반쯤 지났을 때였다. 지훈이 늦잠을 자는 동안 설은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 토요일에는 남편들과 함께 온 부부가 많았다.설이 돌아왔을 때 지훈은 막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밥 먹었어?”설은 고개부터 저었다. 병원 얘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잘됐네. 나도 아직이야. 간단히 뭐 좀 해 줘.”설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나니 준비했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그래도 그날 밤에는 말했다.“당신도 검사 한 번 받아 보면 안 돼?”“나는 문제없다니까.”“나도 처음에는 특별한 문제 없다고 했잖아. 그래도 계속…….”“그래서 내 탓이라는 거야?”설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지훈은 알았으니까 그만하자고 했고,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 뒤로 설은 병원에 남편이 바빠서 못 온다고 설명했다.기억은 한 번 더 뒤집혔다.결혼한 첫겨울, 둘이 장을 보고 돌아오던 밤이었다. 주차장에서 설의 종이봉투가 터졌다. 귤이 차 밑으로 굴러 들어가자 지훈이 코트까지 벗어 던지고 쪼그려 앉았다.집에 가면 더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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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출근한 설에게 한서연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예전에 함께 제품을 개발했던 연구원이었다.“내일 제품 출시 준비회의인데, 팀장님한테는 일정도 안 갔죠?”화면에는 유리가 개인 계정에 올린 글이 떠 있었다. 설이 개발한 민감 피부용 크림의 샘플 사진이었다.「신제품 개발부터 출시 준비까지. 처음부터 제 손으로 해 보려니 배울 게 많네요.」댓글에는 벌써 축하가 달리고 있었다. 유리는 제품을 개발했느냐는 질문에 웃는 얼굴까지 붙여 답했다.「네, 오래 준비했어요. 곧 보여 드릴게요.」설은 마지막 답글에서 손을 멈췄다.“이것도 보세요.”서연이 홍보팀에 공유된 소개 문안을 열었다. 이유리의 이름 옆에 신제품 개발 총괄이라고 적혀 있었다.「언니가 결혼 후 가정에 전념하게 되면서 제가 프로젝트를 이어받았어요.」“아직 내부 검토용이에요. 그런데 유리 씨가 이 내용으로 매체에도 미리 얘기를 해 놔서요.”“개발팀에 확인도 안 하고?”“네. 효능 표현도 고쳐 달라고 했더니, 문제 생기면 언니가 설명하면 된다고요. 언니 제품이니까.”설은 태블릿을 탁자에 내려놓았다.“홍보팀 회의 지금이지?”“네.”“같이 가 줄래?”회의실에는 유리와 홍보 담당자들, 새어머니가 앉아 있었다.“언니?”유리가 먼저 일어났다.“몸도 안 좋다면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쉬어.”설은 유리의 게시물과 소개 문안을 나란히 놓았다.“뭘 알아서 하려고 했는데? 나 대신 개발한 사람이 되는 거?”“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출시 준비 맡았다는 뜻이잖아.”“개발했냐고 묻는 말에 네가 그렇다고 답했어.”새어머니가 출력물을 당겨 갔다.“소개 글은 내가 좀 봐줬어. 네 동생도 회사에서 자리 잡아야지. 넌 결혼도 했고, 애도 가지려면…….”“제가 그만둔다고 했어요?”“누가 그만두래? 자매끼리 조금 나누면 어떠냐는 거지.”“제 이름은 빼고, 제가 한 일은 유리한테 주는 걸 나눈다고 하세요?”유리가 홍보 담당자들을 살피며 웃었다.“언니 이름도 넣으면 되잖아. 내가 빼라고 한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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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처방이 바뀌어 설명을 더 듣느라 병원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졌다. 퇴원한 지 겨우 며칠 만에 다시 찾은 흰 복도는 여전히 차갑고 생경했다.설은 수납을 기다리며 휴대전화로 서연의 메시지를 읽었다. 답을 쓰는데 맞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나 뭐라도 먹고 싶은데. 끝나면 같이 먹자.”유리였다.지훈이 옆에 있었다. 유리는 그의 소매를 붙든 채 진료실 앞 의자에 앉았고, 지훈은 접수대에서 받아 온 종이를 펴 보고 있었다.오래 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혼자 외롭게 주사를 맞고 통증을 견디던 그 병원에서, 저 둘은 다정하게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지훈이 함께 와 주기를 바라던 마음은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먼저 닳아 버린 모양이었다.대신 다른 생각이 들었다. 유리가 왜 이곳에 왔을까.남편이 동생의 진료에 따라온 일을 단순한 친절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이름이 불리자 유리가 지훈을 끌고 들어갔다. 진료실 문이 닫혔다.“검사 결과는 임신으로 나왔습니다.”의사의 설명에 유리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진짜요?”“네. 아직 초기니까 앞으로 경과를 확인해야 하고요.”유리는 지훈을 돌아보며 웃었다.“어떡해.”지훈은 의사가 말한 검사 이름을 다시 물었다. 설명을 듣고도 잠깐 결과지를 돌려주지 않았다.“다른 사람 결과가 섞일 가능성은 없습니까?”유리가 웃음을 멈췄다.“형부.”의사는 환자 이름과 확인 절차를 다시 짚어 주었다. 지훈은 멈칫하더니 조용히 결과지를 내려놓았다.“……알겠습니다.”그 말 뒤로 유리의 질문이 이어졌다. 무엇을 먹으면 좋은지, 비행기를 타도 되는지. 지훈은 옆에 앉아 있었지만, 아까 유리가 잡았던 손을 선뜻 마주 쥐지는 않았다. 어딘가 닿지 않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설이 두 사람을 다시 본 것은 약국으로 내려가는 복도에서였다.“임신했는데 축하도 안 해 줘?”유리가 지훈을 붙잡고 서 있었다.“여기 사람 많아.”“그래서 뭐. 형부 아이잖아.”설은 약 봉투를 받으려 내밀었던 손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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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남자 모델분 오셨어요.”진행요원이 데려온 사람을 보고 설은 들고 있던 샘플을 내려놓았다.권혁이었다.짙은 회색 니트에 밝은 바지를 입은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조금 내려온 머리카락 아래로, 설을 발견한 눈에 웃음이 번졌다.“이쪽에 앉으시면 돼요. 담당자분이 발라 주실 거예요.”권혁이 입을 열기 전에 설이 먼저 물었다.“정말 앉으시게요?”“이설 씨가 곤란해하실 줄 알았는데.”“저는 반가운데요.”그가 웃으며 의자를 당겼다. 제품을 보러 왔다가 시연까지 돕게 됐지만, 싫은 기색은 없었다.“볼 한쪽에만 발라 볼게요.”설이 크림을 덜자 권혁이 얼굴을 조금 돌렸다. 그녀가 왼손으로 그의 턱을 가볍게 받치는 동안, 빈 약지가 두 사람 사이에 드러났다.“반지는 빼셨네요.”가까이 있는 설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 설은 손을 거두지 않고 그의 볼에 크림을 펴 발랐다.“네. 빼고 나니까 편하네요. 이혼 절차가 끝나려면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요.”권혁은 더 묻지 않았다. 설이 코 가까이에 남은 크림까지 고르게 펴 바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향은 거의 안 느껴지고요.”“향이 있는 쪽을 좋아하세요?”“평소에는 별로 신경 안 썼습니다. 오늘은 평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설이 웃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의식됐다.“반대쪽도 발라 드릴까요?”“제가 눈을 감으면 좀 낫겠습니까?”“그러셔도 돼요.”그가 눈을 감았다.설은 그제야 마음 놓고 얼굴을 보았다. 감긴 눈 위로 드리운 속눈썹과 뚜렷한 콧날, 손끝을 따라 조금 움직이는 볼.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낯설었다.턱 쪽으로 크림을 펴다 손을 멈췄다. 손가락을 조금만 옮기면 입술 끝에 닿을 거리였다.“이쪽은 다 됐어요.”권혁이 눈을 떴다.설은 아직 몸을 물리지 않은 채였다. 그의 눈에 자기 얼굴이 작게 비쳤다. 권혁도 그녀를 보았다. 고정해 두었던 머리카락 한 가닥이 뺨으로 내려와 있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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