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화 Noir Lounge유월이 지나고 칠월로 접어들자, 대지는 한층 더 눅눅하고 뜨겁게 달아올랐다.어느덧 한 달 동안 익숙해져 버린 배달 업무를 마친 뒤, 설화는 고깃집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문 너머로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이 길게 번져 왔다. 차창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 얼굴이 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변해 있는 것 같았다.그때, 주머니 속에서 잔잔한 진동이 일었다. 액정 위로는 언제부터인지 저장돼 있던 서강현 대표의 이름과 메시지가 나란히 떠올랐다.[오늘 8시. L호텔 1층. Noir Lounge.] 참으로 그 사람다웠다. 차갑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고급 호텔 이름이 화면에 떠 있는 게 어색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설화는 화면을 한 번 더 내려다본 뒤, 잠시 망설이며 아르바이트하는 고깃집 번호를 눌렀다.“사장님, 죄송한데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출근이 어려울 것 같아요.” 설화는 괜히 말이 길어지지 않게 염치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덧붙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했다. 분명 그 사람에 초대였지만,그녀는 그것이 초대라는 형식을 빌린 다른 무엇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위험한 불빛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마음 한쪽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액정 위 숫자를 확인했다. 오후 4시 24분. 설화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집에 도착한 설화는 문을 닫자마자 현관에 등을 기대고 멈춰 섰다. 좁은 복도 안의 공기는 덥고 눅눅했다. 그런데 숨을 막는 건 더위가 아니었다. 가슴 안쪽이 이상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설화는 천천히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손잡이를 돌리자, 물줄기가 등을 타고 내려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였다. 몸이 조금씩 현실을 따라오기 시작했다.그냥 또 한 번 넘어가는 거야.설화는 눈을 감았다. 물소리만 좁은 욕실을 가득 채웠다. 얼
Last Updated: 2026-07-20
Chapter: 27화 익숙해지는 무게설화는 강현이 건네준 작은 상자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은 채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초여름의 열기가 아스팔트 위에서 일렁였다. 목덜미로 땀이 흘렀고, 차창에 부딪힌 햇살이 눈앞을 자꾸 흔들었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자, 바깥의 더위가 순식간에 차가운 공기로 바뀌었다. 철로를 스치는 기계음, 안내방송 사이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툭.누군가 설화의 어깨를 사정없이 치고 지나갔다. 중심을 잃고 빗겨 서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날아와 꽂혔다. “눈은 어디 두고 다녀요, 조심 안 해?”설화는 멍하니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먼저 밀치고 간 것은 저쪽이었다. 하지만 억울함을 따지기도 전에, 메마른 입술이 반사적으로 열렸다.“……죄송합니다.”비굴하리만큼 빠른 사과가 허공에 흩어졌다. 상대는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차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지만, 설화는 한동안 멈춰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가방을 쥔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녀는 주머니 속 주소지를 꺼내 들었다. 강남역 구역의 고층 빌딩 숲. 자신이 사는 지저분한 골목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주소였다.스마트폰 지도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강남역 출구를 나오자,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거대한 빌딩들이 시야를 가로막았다.잘 정돈된 카페테리아에서 번지는 향긋한 원두 냄새, 꽃집 진열대에 비현실적으로 화사하게 피어 있는 수국과 장미. 빈틈없이 재단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익숙하다는 듯 빠른 보폭으로 건물 유리문을 드나들었다.설화는 그 화려한 흐름에 섞이지 못한 채 가방끈을 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이 번듯한 자본의 한복판에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빌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인공적인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대리석 로비는 넓고 고요했지만, 그 정돈된 침묵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다. 사원증을 목에 건 남녀들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고, 엘리베이터 앞의 한 남자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낮게 욕설을 뱉었다.“씨발, 때려치
Last Updated: 2026-07-17
Chapter: 25화 그의 세계다음 날, 설화는 메시지에 적힌 주소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막연히 떠올렸던 음침한 지하 사무실이나 낡은 회색 빌딩과는 전혀 달랐다. 대치동 한복판에 자리한 건물 입구에는 ‘미래드림’이라는 로고가 정갈하게 새겨져 있었다.외벽은 유리와 짙은 석재가 섞인 구조였다. 번쩍이지는 않았지만 단단하고 비싼 느낌이 났다. 1층 로비는 지나치게 깔끔했다. 은은한 커피 냄새가 풍기는 카페에서는 익숙한 음악이 흘렀고,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오갔다. 설화는 그 사이에 서 있는 자신이 유난히 초라하게 느껴졌다.엘리베이터에 올라 13층 버튼을 눌렀다. 층층이 올라가는 동안 뒤로 비치는 서울의 풍경은 설화의 기분과는 다르게 맑고 아름다웠다. 문이 열리자, 반투명 유리문 너머로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보였다. 키보드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고,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닫히며 서류가 오갔다. 누구도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공간 전체에 잘 정돈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유설화 씨?”등 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성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설화는 안내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대표실 문 앞에 서자 숨이 짧아졌다. 문이 열리자 넓은 창가에 서강현이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빛이 그의 실루엣을 길게 드리웠다. 한 손에는 서류철을 든 채, 다른 손으론 검은색 전화기를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며칠 전 자신을 몰아붙이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흐트러짐 없는 셔츠, 단정한 머리, 서류를 넘기는 손끝까지 군더더기가 없었다. 차갑고 세련된 이 공간은 전부 그의 일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설화는 문턱에서 멈춰 섰다.정말 같은 사람일까.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강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예의 바른 미소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가 있었다.설화는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
Last Updated: 2026-07-15
Chapter: 24화 멈춰 있던 시간24화 멈춰 있는 시간며칠이 지났다.신기할 정도로 조용한 나날이었다. 매일 같이 고성을 지르며 가게 안까지 따라붙던 채권자들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끔 오는 스팸 문자만이 전부인 일상이었다.독촉이 멈추자, 설화의 일상도 조금씩 얼굴색을 찾기 시작했다. 고깃집 문을 열 때 풍겨오는 기름 냄새, 동료들의 푸근한 인사, 주방에서 터지는 짧은 웃음소리까지. 예전 같으면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하루가, 요즘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예전 같으면 온몸이 힘겹게 버티던 하루였지만, 요즘은 일 끝나고 동료들과 나누는 짧은 농담 한마디에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설화 씨, 요즘 얼굴이 진짜 좋아졌어요!”동료 알바생의 장난스러운 말에 설화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덜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진심이었다. 밤에 잠드는 것도, 새벽에 눈을 뜨는 것도 전보다 훨씬 쉬워졌다. 동료들과 주고받는 소소한 농담들. 설화는 이런 평범한 하루가 이토록 소중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진상 손님 몇 명쯤은 그냥 흘려보낼 수 있을 만큼, 마음에도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설화는 주방과 홀을 오가며 작은 일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후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평소보다 때 이른 마감을 지시하며, 사장님이 직원들을 불러 세웠다.“오늘 고생했지? 맥주나 한잔들 하고 가자.” “좋죠, 사장님. 어차피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뭐.”주방 이모가 안주를 만들어 들고나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마감을 정리하던 지원 언니도 앞치마를 벗으며 툴툴거렸다.“오늘도 손님 많아서 설화가 제일 고생했어. 진짜 열일했잖아.” “맞아. 최 사장 그 인간 주접을 버텨낸 게 너뿐이야.” “아뇨…… 그냥 평소처럼 한 건데요, 뭘.” “봐라, 겸손까지 하네.”설화는 쑥스럽게 웃으며 지원 언니가 빼준 자리에 앉았다. 원형 테이블 위에 삼겹살 두부김치 안주와 소주, 맥주가 소소하게 차려졌다. 종이컵에 소주를 반쯤 탄 맥주를 들며 사장님이 말했다.“한 잔씩들 하자. 다들 수고
Last Updated: 2026-07-13
Chapter: 23화 다시 일상으로어느새 오렌지색 노을이 골목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설화는 일어섰다.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오자, 번화가 거리의 간판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네온사인 아래, 사람들 틈에 섞여 걸으면서도 설화는 어딘가 제 몸이 투명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예전엔 평범하게 지나쳤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보이는 것이 낯설고 멀었다. 빚은 조금 줄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하게 더 비어 있었다. 주머니 속 명함이 손끝에 닿자, 설화는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깃집 문을 열자 익숙한 열기가 먼저 밀려왔다. 철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 가는 소리, 술기운 섞인 웃음소리, 바쁘게 오가는 직원들의 발소리가 한꺼번에 뒤엉켜 있었다. 사장의 시선이 설화를 훑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왔어? 얼굴이 많이 안 좋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설화는 더 설명하지 않고 앞치마를 꺼내 허리에 둘렀다. 테이블 사이를 걷기 시작하자, 주방 이모가 찌개 냄비를 내려놓고 슬쩍 다가왔다.“밥은 챙겨 먹었고?”“네. 대충 먹었어요.”“그라면, 안 된다. 얼굴이 반쪽이네.”설화는 희미하게 웃는 척만 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물수건을 들고 테이블 사이를 돌고, 빈 접시를 치우고, 불판을 갈았다. 계속 이렇게 움직이다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빚은 줄었고, 나는 다시 여기에 왔다.그게 지금의 전부였다.홀 안은 평소보다 더 붐볐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 불판 위로 튀는 기름, 어지러운 열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진상 손님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공기였다. 시끄러운 농담과 끈적한 시선, 불쾌한 손짓이 뒤섞인 공간.“이쁜 알바생이 소맥 좀 말아봐요.”무리 중 하나가 히죽 웃으며 손짓했다. 설화는 아무 말 없이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었다.“야, 적당히 해라. 애 주눅 들겠다.”“팁 주면 좋아해, 임마.”이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설화는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22화 돌아온 자리서강현.처음 알게 된 이름이 두껍고 고급스러운 명함 위에 정갈하게 박혀 있었다. 칼로 자른 듯 반듯한 서체와 여백. 지독하리만큼 그 사람을 닮은 종이였다.검은 세단이 골목 끝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설화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명함이 서서히 구겨졌다. 매끄러운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깊게 눌렀다. 아팠다. 그런데도 손을 펴서 놓을 수가 없었다.유월의 오후 햇살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빛바랜 빌라 외벽에도, 전봇대에 겹겹이 붙은 전단지에도, 골목 바닥에 말라 가는 물 자국에도 똑같은 흰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했고, 설화는 그 속에 혼자만 잘못 놓인 사람처럼 서 있었다.그래도. 이걸로 빚은 조금이라도 줄었을까.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라는 사실에 설화는 눈을 감았다. 웃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불과 조금 전까지 제 몸에서 벌어진 일보다 먼저 숫자를 떠올린 자신이 우스웠다. 몸은 이미 더럽혀졌는데, 머릿속은 여전히 빚의 액수를 먼저 셈하고 있었다. 그런 삶에 익숙해진 스스로가, 그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이 비참했다.이런 식으로 조금씩 갚아 나가면 언젠가는 끝이 날까.그때가 되면 조금은 숨 쉬며 살 수 있을까.설화는 구겨진 명함을 더 깊이 말아 쥐고 겨우 발을 뗐다. 낡은 빌라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발끝이 몇 번이나 헛디뎠다. 다리가 아픈 건지, 힘이 빠진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도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차가운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숨을 골랐다.문을 열자 익숙한 집 냄새가 먼저 밀려왔다. 오래된 신발장, 작은 식탁, 벽에 비스듬히 걸린 액자. 모든 건 어제와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멀었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집만 세상의 시간에서 비켜나 있는 것 같았다.설화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이 작게 삐걱거렸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돌아왔다는 현실감이 뒤늦게 밀려왔다.돌아온 자리였다. 그런데 돌아온 느낌은 아니었다.그녀는 낡은
Last Updated: 2026-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