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화 비에 젖은 여자축 늘어진 설화를 품에 안은 채, 강현은 빗속을 가로질렀다.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의식 없는 몸 하나쯤 옮기는 일에 버거움을 느낄 남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품 안에 닿은 체온이 신경을 거슬렀다. 그런데도 그 작고 힘없는 무게가 불쾌할 만큼 선명하게 남았다.강현은 설화를 조수석에 눕힌 뒤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가 가느다란 몸 위로 걸리는 순간,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마치 그 멈칫거림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그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뒷좌석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상체 위로 재킷을 덮어 주는 손길에는 다정함보다 짜증에 가까운 조심성이 배어 있었다. 공조를 켜자 미지근한 바람이 차 안을 채웠다. 그 바람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조금씩 풀리고, 물기 어린 속눈썹 끝이 잘게 흔들렸다.강현은 가죽 핸들을 강하게 쥔 채 한동안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격렬하게 긁어대는 소리만이 차 안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유설화.그 이름 석 자가 자꾸만 단단하게 닫혀 있던 그의 의식 가장자리를 날카롭게 긁어대고 있었다. 강현은 낮게 혀를 차고는 신경질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검은색 세단이 빗길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저택의 외등이 쏟아지는 여름비로 얼룩진 마당 위로 희미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강현은 차에서 설화를 다시 안아 들고 현관문을 지나 넓은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 위에 눕히는 순간, 흠뻑 젖은 설화의 머리카락 끝에서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뚝, 뚝 소리를 내며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강현은 바닥에 번지는 물 자국을 한 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욕실로 향했다. 두껍고 마른 수건을 몇 장 들고 돌아온 그는 낮게 가라앉은 소파 곁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설화의 머리카락에 남은 차가운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
Last Updated: 2026-06-05
Chapter: 7화 비 속으로 걸어온 남자설화는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목덜미아래로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끝은 점점 차가워지고, 온몸이 젖어들수록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거센 빗속에서 흐릿하게 번져 눈앞을 어지럽혔다.그 순간, 머리 위로 툭— 소리와 함께 암전처럼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그래서… 여기서 끝낼 생각이야?"낯설지만 낮고 묵직하게 깔리는 남자의 목소리. 설화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천천히 남자를 응시했다.우산 아래 서 있는 남자는 빗물에 젖은 검은 셔츠 사이로 단단한 어깨를 드러낸 채 설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 위로 빗물이 천천히 흐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눈빛만은 장대비 속에서도 유난히 또렷했다."나는 빚 안 갚고, 죽음으로 퉁 치려는 인간들을 제일 경멸해."'빚'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때리자, 설화는 떨리는 입술을 짓이기듯 꾹 다물었다. 아빠가 남긴 굴레가 결국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절망감과 함께, 이 지독한 채권자들이 결국 사람을 붙여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설화는 빗물을 삼키며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안 죽어요."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엉망으로 들러붙고 턱 끝을 타고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남자는 그런 설화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비웃음처럼 번진 입가. 하지만 그 냉정함 이면에는 자신조차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잠깐 스쳤다."그래? 약하지 않다며 호기를 부리는 것치고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니네." "신경 쓰지 마세요."잘게 떨리면서도 묘한 독기가 서린 설화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했다. 두 사람 사이를 세차게 메우는 빗소리 탓에, 순간적으로 세상의 모든 소음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남자는 우산을 살짝 기울이며 설
Last Updated: 2026-06-03
Chapter: 6화 그가 보고 있었다밖으로 나오자 낮의 열기는 간데없이 습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따라 유독 부치는 몸에 남은 것은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와 공허함뿐이었다.‘조금만 더. 진짜 조금만 어떻게 버티면…….’그렇게 되뇌면서도, 정작 버티고 난 끝에 자신에게 뭐가 남아 있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텅 빈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툭 꺼져 내리듯 아팠다.가방끈이 젖은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무게보다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이 더 무겁고 저릿하게 가라앉았다.어느새 멈추었던 비가 다시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어졌다. 설화는 낡은 우산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걸었다. 빗속을 헤치던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결국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다리 위에 멈춰 섰다.설화는 젖은 손으로 가방을 뒤적여 낮에 편의점에서 받았던 내용증명 서류를 꺼냈다. 지독한 채무의 굴레. 설화는 이를 악물고 종이를 갈가리 찢어 다리 아래로 던져버렸다. 조각난 하얀 종이들은 빗물에 무겁게 젖어들며 시커먼 강물 위로 휩쓸려 흔적도 없이 떠내려갔다."아빠 거니까, 가져가."목구멍을 찢고 나온 나지막한 속삭임은 거센 빗소리에 묻혀 금세 흩어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숨이 막힐 듯한 회색빛이었다. 강물도, 도로도,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속에 자신만 남겨둔 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세상 전체가 저 멀리 밀려나는 듯한 고립감 속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뺨을 적시는 것이 차가운 빗물인지, 속에서 터져 나온 감정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거긴 어때, 아빠? 그렇게 다 던지고 떠나버리니까, 속이 후련해?"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질문이 허공에 맴돌았다. 세상에 철저히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과 끝없는 불안이 칠흑 같은 밤어둠 속으로 깊게 스며들었다. ***어둠이 짙게 내
Last Updated: 2026-06-01
Chapter: 5화 오늘도 버티는 밤비 오는 거리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설화는 낡아빠진 우산을 접고, 눅눅해진 옷을 추슬렀다. 기름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고기 냄새, 연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다.사장님이 설화를 보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고, 빈 테이블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굳은 고기와 빈 소주병, 흩어진 쌈 채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판을 들고 움직이던 지원 언니가 설화를 보자 장난스럽게 볼을 한 번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왔어? 오늘따라 손님 오지게 많다. 각오해.""새삼스럽게요.""설화, 왔나? 비 한번 징그럽게 온다.“주방 이모가 고무장갑 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설화는 조금 전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을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입가를 끌어올렸다."네, 이모. 우산을 써도 소용없네요.""맞다. 빨리 빠진 테이블부터 정리 해줘.“검은 앞치마를 허리에 단단히 둘러매고 손님이 빠진테이블부터 돌기 시작했다. 빈 접시와 널브러진 쌈 채소를 쟁반에 담고, 소주병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손안에 빈 병 세 개가 가볍게 잡혔다.이마저도 익숙한 일이었지만, 편의점에서 받았던 그 기분 나쁜 시선이 아직 가시지 않아 몸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그때 취기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최 사장이 설화의 손목을 낚아채고 히죽거렸다. 근처에서나름 큰 규모의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이쁜아, 여기 물 좀 줘." "네, 알겠습니다." 설화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손목을 빼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가져다주었다. 이내 몸을 돌려 다른 테이블을 정리했다. 주방 쪽에서는 설거지 소리가 더 빨라졌고, 계속해서 손님이 밀려들었다. 좁은 테이블 사이를 설화는 곡예를 하듯 오가며 저녁 피크타임을 버텼다.쌓여 있는 그릇을 주방으로 옮기고, 테이블에 흘린 소스를 행주로 닦았다. 홀 구석에는 설화의 손목을낚아챘던 최 사장이 같이 온 직원들과 소곤거리며
Last Updated: 2026-05-30
Chapter: 4화 미래드림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 정중한 척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허리를 들고 돌아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슈트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얼굴이었다."네, 맞는데요."남자는 설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안 볼을 혀로 밀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설화 앞으로 내밀었다."내용증명입니다. 확인해 보시죠."흰 종이 위에는 채무자 유설화라는 이름이 박혔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찍힌 주식회사 미래드림이라는 네 글자가 유난히 눈에 남았다. 남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렇게 전화랑 문자를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거 아실 텐데, 왜 자꾸 이러실까?"아빠가 남긴 빚 때문이었다. 이들이 징그럽게 찾아오는 이유가 매번 같았다.'또 왔네. 진짜 지겹다. 내가 그 빚을 만든 것도 아닌데, 왜 전부 나한테 오는 거야.’설화는 남자가 내민 종이를 받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손끝에는 방금 전까지 만지던 삼각김밥 비닐의 감촉은 차갑게 남아있었지만, 매장 안 공기는 탁하고 숨이 막혔다."그렇다고 이렇게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시면……."설화가 말을 잇기도 전에 헛웃음 소리와 한껏 높아진 고압적인 음색이 설화의 말허리를 툭 끊어냈다."저도 한가한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보낼 때 바로바로 받으시던가. 쯧."남자는 서류를 내려놓듯 건네고는 가방을 덮었다. 설화를 경멸이 섞인 눈빛으로 한 번 더 훑어본 뒤,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고 남자가 나갔다. 설화는 손에 든 서류를 움켜쥐었다. 바스러지는 종이. 구겨진 인생….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빚은 늘 숨바꼭질하듯 설화의 일터를 찾아왔다. 숨으면 더 깊이 쫓아오고, 버티면 더 거칠게 들이밀었다. 남자의 경멸
Last Updated: 2026-05-29
Chapter: 3화 빚만 남기고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그렇게 옥죄었을까.목울대까지 삿된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빈소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 앞에서산 사람이 더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모두가 침묵했다. 그 순간이 더욱 미치도록 숨이막혀왔다.그렇게 아버지는 끝내 가장이라는 자리마저 자신의 방식대로 정리하고 말았다.하지만 진짜 지옥은 그 뒤에 찾아왔다. 집 앞으로 낯선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다음에는 문을 두드리고 소리가 거칠어졌다. 나중에는 초인종을 누르다 못해 현관문을 주먹으로 쳤다.쾅. 쾅!!"안에 있는 거 압니다.""유병호 씨 가족 맞죠?""돈 갚으셔야죠. 죽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엄마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밥을 하지 않았고, 설화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마저 지워버렸다.작은 가방 하나만 들고, 밤도망치듯 집을 떠났다.설화 하나만 이 지옥 같은 집에 남겨둔 채.그날 밤 설화는 차가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래 참았던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숨이 모자라 몸이 들썩였고, 목 안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진짜 거지 같다.나만 버려졌어.이 춥고 외로운 곳에, 나만.온몸을 작게 웅크린 채 오래 울었다. 울다 지치면 숨을 몰아쉬었고, 다시 울음이 터졌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등을 두드려 주는 손도, 괜찮다
Last Updated: 2026-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