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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s by 도옌

지점장과 청원경찰의 사랑

지점장과 청원경찰의 사랑

수녀같이 살아온 중년의 은행 지점장이 어느 날 사랑에 빠졌다. 이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상대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은 죄악인가. 사랑에 빠진 상대가 한참 어린 남자라고 해서 이 지점장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가. 일생에 한 번, 다 던진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이들을 비난하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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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1화 목격자
수연과 상철은 한동안 말없이 우동을 먹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갑자기 우스워져서 수연이 후후 웃었다. 따뜻한 음식이 몸에 들어가니 비로소 마음이 조금 풀어졌던 것이다. "왜 웃으세요?"상철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데서 이런 음식 먹는 거 오랜만인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네요.""술 마시고 들어가는 날 포장마차에 들러 우동 한 그릇은 국룰 아닙니까? 안주를 얼마나 먹었든 상관 없이 술자리 후 귀갓길은 허해지기 마련이거든요.""맞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오늘 술자리에도 초대해 주시고 이렇게 좋은 데도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아니에요. 언제든 술 한 잔 하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술친구가 되어 드릴게요.""왜 저한테 이렇게 친절하세요? 저는 좋은 상사가 아닌 것 같은데요.""왜 그렇게 생각하세요?""전 제가 차갑고 냉정하고 칼 같은 성격인 거 잘 알고 있어요. 포용력이 큰 사람은 절대 아니죠.""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죠.""그래도 직장 상사라면 프로페셔널하게 감정도 잘 숨기고 언제나 온화하게 포용력을 보여 줄 줄 아는 자질도 필요하죠.""자기가 아닌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어떻게 항상 그렇게 감정 컨트롤을 잘하면서 살 수가 있겠어요? 오래 그랬다간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은 들을지언정 본인 속은 썩어 문드러지게 돼요."수연은 잠시 젓가락을 멈추고 상철을 바라보았다. 상철은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자 더워졌는지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구겨 넣은 후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풀었다. 수연은 상철의 잔에 소주를 따라 부었다. 그러곤 자기 잔에도 가득 따랐다."자, 한 잔 할까요?"그러곤 상철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상철의 소주 잔에 잔을 가볍게 부딪치더니 그대로 쭉 들이켰다. "오늘 지점장님께서 술을 꽤 드시네요. 이렇게 술을 잘 드시는 분인지 몰랐어요. 저보다 더 잘 드시는 것 같아요.""하하, 그런가요?""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상철
Last Updated: 2026-11-07
Chapter: 제20화 수연과 상철
"지은 씨 집은 우리 동네에서 은행 오는 길인 거 같은데? 내일부터 내 차 타."상철이 난감해 하는 기색을 보이자 박 과장이 재빨리 끼어들었다."박 과장님 차를 어떻게 타요? 거의 매일 술 드시잖아요?"지은은 상철의 대답을 못 듣게 된 것이 은근히 짜증이 났다."내가 뭐 아침에 술을 먹나? 나 술 엄청 빨리 깬다구. 새벽 네다섯 시까지 마셔도 아침 7시 되면 멀쩡하다구.""과장님, 자랑 아닌 거 아시죠? 본인은 술 다 깼다고 생각돼도 음주 측정하면 전날 음주로도 수치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요즘엔 출근 시간 아침에도 음주 측정한다고요.""아이 참, 지은 씨는 나를 완전히 술꾼으로 몰아가네? 나 그렇게 매일 마시지 않아. 지은 씨 오늘 전에 나랑 마지막으로 언제 술 마셨어?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나랑 최근에 술 마신 사람 있어? 나 직장 동료 아니면 술 같이 마실 사람도 없다구.""퇴근길에 매일 혼술하시는 거 다 알아요.""지은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나 스토킹해? 지은 씨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거야?"박 과장은 능글맞게 웃었고 지은은 진절머리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저 새끼가 미쳤나? 내가 아무리 남미새라도 내가 너를 스토킹할까 봐? 착각은 자유라니까, 에휴.'지은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철이 대답을 해야 하는 타이밍에 박 과장이 끼어든 거는 괘씸했다. 대화가 이렇게 흐른 이상 다시 그 주제를 꺼내기도 쉽지 않다. '아이, 박 과장 짜증나 죽겠어.''그러게,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낄 데 안 낄 데 분간을 못 해, 왜?''야, 짜증나는데 우리 그만 일어나자.''어디 가려구? 보아 하니 우리한테까지 술값 내라고 할 분위기도 아니고 부지점장님도 계신데. 부지점장님 볼수록 괜찮은데? 야야 우리 둘 중에 누구랑 엮여도 우리 우정은 포에버다, 알았지?''야, 꿈 깨. 지점장 챙기는 거 봐라. 저 둘이 야시꾸리한데?''뭐가 야시꾸리해? 그냥 지점 내 최고 우두머리 둘이서 서로 챙겨 주고 그러는 거지. 내가
Last Updated: 2026-10-30
Chapter: 제19화 술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
"지점장님, 뭘로 드릴까요? 여기 와인도 파는지 모르겠네. 아님 위스키로 주문해야 되나?"박 과장이 과장되게 한 마디 했다. 금방이라도 큰 소리로 종업원을 불러 와인과 위스키 셀렉션에 대해 질문을 퍼부어댈 기세였다."박 과장님, 저 소주도 마셔요. 그냥 과장님 거랑 같은 걸로 한 잔 주세요."수연은 박 과장을 만류하며 두 손으로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어랏? 이건 서민의 술인데 지점장님께서 이거 마셔도 되시겠어요?"박 과장은 취기가 올라 계속해서 오버스럽게 떠들어댔다. 평소 같으면 벌써 기분 나쁜 티를 냈을 수연이었지만 그 날만큼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응수했다."아이고, 없어서 못 먹지요. 빨리 한 잔 주세요, 팔 아파요."평소답지 않게 서글서글하게 받아치는 수연을 보며 직원들은 모두가 다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금방이라도 냉랭한 분위기가 될까 봐 말은 안 해도 모두가 어느 정도는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된 소주를 한 잔 올리지요."박 과장은 이 때다 싶었는지 평균 소주 도수의 초록색 병 소주들 사이에 한 병 있던 도수가 높은 하얀색 병 소주를 들어 수연에게 한 잔 따라줬다. 알코올 도수가 거의 25도에 육박한 독한 술이었다. 수연은 첫 잔을 한 잔 쭉 들이켰다.다 마시고 잔을 내려 놓으면서도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구석에서 과일 소주만 홀짝이고 있던 지은과 미정은 자기도 모르게 와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지점장님, 술 잘 드시나 봐요?""지은 씨, 몰랐구나? 나 술 세.""와우, 지점장님은 정말 못 하는 게 없으시네요."지은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박수까지 쳐 댔다."그럼 제 잔도 한 잔 받으세요, 지점장님."최 대리가 술병을 들어 기울이는 시늉을 했다."좋죠, 대리님. 한 잔 주세요."수연은 두 손으로 깍듯이 잔을 받았다. 이번에도 한 번에 모두 털어 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잔을 내려 놓았다."대리님도 제 잔 한 잔 받으세요."수연은 최 대리에게도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자,
Last Updated: 2026-10-26
Chapter: 제18화 회식
"우리 오늘 퇴근하고 한 잔 할까?"박 과장은 다섯 시가 가까워오자 새삼스럽게 또 일어나서 제안했다. 대꾸를 하는 직원이 없었다. 박 과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부지점장님, 오늘 딱 한 잔만 하고 가시죠? 집에 꿀단지 묻어 놓은 거 아니면."태희 씨와 미경 씨는 박 과장의 말투에 크크 비웃음을 터트렸다. 말투가 너무 아재 같다고 생각하면서."그래요, 딱 한 잔만 해요."부지점장 상철이 뜻밖에 선선하게 대답했다. 지점장도 참석하는 전체 회식이 아니면 좀처럼 술자리에 동석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 부지점장님이 웬일이세요? 잘됐다. 빨리 빨리 정리하고 땡 되면 바로 나가기로 합시다."박 과장은 신이 나서 말했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상철에게는 항상 깍듯이 대했다. 가끔은 오버스럽다 싶을 정도로. 둘은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박 과장이 선배였다. 학교 후배이지만 직장에서는 상사로 만난 상철에게 박 과장은 상철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깍듯이 대했다. 상철은 은근히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었다. 말이 많지 않았지만 한 번씩 하는 말이 위트 있었다. 항상 테일러가 잘 된 셔츠와 수트를 입고 다녔고 깔끔하게 이발과 면도가 된 상태였다. 사생활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박 과장의 회식 제안에 시큰둥했던 사무실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미묘하게 바뀌었다. 상철은 남자로서도 매력이 있었고 회사 상사로서도 친분을 쌓아 놓으면 어떻게든 플러스가 되는 사람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무실의 직원들은 저마다 박 과장이 한 번만 더 제안하면 못 이기는 척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매력적인 술친구를 찾은 박 과장은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몇몇 여직원들은 조바심이 났다.이윽고 5시가 됐고 박 과장과 상철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넉살 좋은 박 과장은 사무실을 나가면서 지훈에게 다가가,"유 청경, 밤에 대리 운전 한댔지? 명함 한 장 줘 봐."라고 말하고는 명함을 받아 갔다.지은과 미정은
Last Updated: 2026-10-20
Chapter: 제17화 윤희에게 지훈이란
수연의 어머니 윤희가 은행에 들어서자 몇몇 직원이 일어나 맞이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어머 정윤희 고객님, 뭐 잊고 가셨어요?""응, 내가 요새 이렇게 깜빡깜빡하네.""뭐 두고 가셨어요? 찾아 드릴게요.""아니에요, 나 애초에 펀드 하나 새로 들려고 왔었는데 지점장이랑 다른 얘기하다가 깜빡했지 뭐야. 최 대리 어딨어요? 나 최 대리랑 얘기하려구."마침 탕비실에서 커피잔을 들고 나오던 최 대리가 반색을 하며 윤희에게 다가갔다."정윤희 고객님, 잘 오셨어요. 이 쪽으로 앉으실래요?""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저 방으로 들어가서 얘기하고 싶은데."윤희는 따로 문이 달려 있어 외부 소음이 차단되는 상담실을 가리켰다. 유리로 된 정육면체같은 곳이었다. 최 대리의 대답을 기다리기도 전에 윤희가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윤희가 앉은 곳에서 지훈의 자리가 잘 보였다. "고객님, 차 한 잔 드릴까요?""네, 줘요. 녹차가 좋겠어요.""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최 대리는 탕비실로 가는 길에 곁의 직원들에게 펀드 상담 때문에 자리를 비울 거라고 얘기했다. 보고서를 써야 하는 게 있어서 상담 시간이 얼마나 길어지느냐에 따라 퇴근이 조금 늦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최 대리는 신이 났다.녹차를 들고 다시 상담실로 돌아오자 윤희가 다짜고짜 물었다."최 대리, 얼마짜리 정도 들어 줄까?"최 대리는 살짝 당황했지만 비즈니스적 미소를 띄우며 의자에 정자세로 앉았다."이 펀드의 최근 수익률부터 잠깐 말씀드릴까요?""아니, 나도 충분히 알아보고 왔으니 그건 됐어요.""아, 그러세요 고객님. 이 펀드는 수익률이 높은 대신에 리스크도 좀 있긴 해요.""최 대리, 요새 뭐 안 좋은 일 있어?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최 대리는 훅 들어오는 개인적인 질문에 당황했다."아...? 아니요, 일은요. 살이 좀 빠져 보인다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최 대리는 윤희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사무적으로 응대했다.그러나 윤
Last Updated: 2026-10-16
Chapter: 제16화 연애와 결혼
윤희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 둘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야~ 저 아줌마 저거 걸친 게 다 얼마야?""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 하면 우리 집보다 비싸겠는데?""부럽다. 뭘 해야 저렇게 살 수 있을까?""우리 같은 신세가 저러고 돌아다닐 정도 되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아... 진정 이번 생은 글러 먹은 것인가!""응, 글러 먹었어 너도 나도. 요새는 남자들도 약아서 자기랑 사는 수준이 비슷한 여자들만 만난다더라. 예전에는 결혼으로 신분 상승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냥 다 그들만의 리그래.""정말로 부모님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어? 왜 우리 부모님은 재벌이 아니라서 재벌 2세가 장래 희망인 내 꿈을 무참히 짓밟아 놓느냐고!"둘은 장난 치듯 탄식하다가 같이 깔깔거렸다. 그 와중에 한 명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띠리리 하고 났다."야야, 네 백마 탄 왕자님한테서 문자 왔나 보다.""백마 탄 왕자는 무슨... 지난 주에 속초 갔다 온 것도 반반 청구서 보냈더라.""뭐? 진짜? 레알?""그럼 진짜지, 내가 그런 걸 뭐 지어내겠냐? 입 밖에 내기도 쪽팔려 죽겠구만.""헐... 그럼 모텔비랑 밥값, 술값 같은 걸 반반씩 계산해서 너한테 반에 해당하는 돈 부치라고 했단 말이야?""모텔비, 밥값, 술값만 반 달라고 했으면 양반이게? 가다가 휴게소에서 마신 커피 값까지 반 달라고 하더라. 차 기름값도 반 달라고 하고.""야... 대단하네. 너 용진 씨랑 왜 사귀는 거야, 도대체? 자괴감도 안 들어?""들지. 내가 너한테나 이런 얘기하지. 이런 얘기 쪽팔려서 엄마한테도 못해.""헤어지면 안 돼?""내 나이가 스물 아홉인데 이제 와서 남친이랑 헤어지면 어떡해? 나이 많아서 다른 남자 못 사귈지도 모르는데.""그럼 용진 씨랑 결혼할 거야?""하자고 하면 해야지. 난 결혼은 하고 싶어. 결혼 안 한 우리 막내 이모 보니까 혼자 그렇게 늙어가는 거 할 짓이 아니더라.""왜? 그 중학교 선생님이라는
Last Updated: 2026-10-09
그 완벽했던 밤

그 완벽했던 밤

흠잡을 데 없는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 은영의 삶은 겉보기엔 완벽했다. 그러나 완벽함이란, 때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대가로 얻어지는 법.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서 목격한 장면 하나. 유부남 상사와 여직원 사이, 결코 들켜선 안 될 은밀한 순간. 그 짧은 장면이 은영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무언가를 건드린다. 싱글 시절, 그녀를 가장 완전하게 채워주었던 단 한 사람.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되살아나자, 은영은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그를 찾기 시작하는데...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던 그 밤. 두 사람은, 다시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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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4. 섹스 온 더 비치
네온사인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자 거리는 색다른 생동감으로 가득 찼다. 늦은 오후의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새로이 씻고 꾸미고 나온 사람들이 일제히 재잘대며 어디론가 바쁘게 걷는 모습이었다. 신 과장은 성큼성큼 걸어 어느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자 안이 컴컴한 바가 있었다. '아일랜드'라는 간판을 단 바였다. 이제 막 영업을 시작했는지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앳된 남자가 은영과 신 과장을 맞았다. 은영과 신 과장은 창 밖이 보이는 창가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신 과장은 올드 패션드를 주문했다. 은영이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자 신 과장이 말했다."같은 걸로 드실래요?"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웨이터는 말없이 공손하게 그들의 주문을 받고 물러났다."그 날 제가 추천해 드린 향수 사셨어요?"은영은 불현듯 신 과장을 백화점에서 마주쳤던 날을 떠올리며 물었다."아, 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추천 감사했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더군요."은영은 신 과장이 '와이프'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말하는 것이 왠지 근사하다고 생각했다."저도 같은 향수를 샀어요. 오늘도 뿌렸는데... 땀 냄새에 섞여서 이젠 향이 안 나겠지만.""아... 어쩐지 어디서 익숙한 향이 난다 했어요."신 과장은 웃으면서 얘기했다.올드 패션드는 쌉싸름한 위스키에 오렌지 제스트 향이 상큼하게 나는 칵테일이었다. 맛이 깔끔하면서 묵직했고 낮에 마신 소주나 맥주, 막걸리보다는 입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이 술 맛있네요."은영이 말했다. "마음에 드세요? 다행이네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입니다."신 과장은 웨이터에게 눈짓으로 같은 걸 두 잔 더 주문했다."아내분은 어떤 사람이에요? 사무실 책상 위에 두신 사진을 보니 미인이시던데요."신 과장은 잠시 침묵했다."아? 제가 너무 개인적인 걸 물었나요? 그렇다면 실례했습니다."은영이 신 과장의 표정을 살피고 재빨리 사과했다."아, 아니에요. 미인이죠. 어떤 사람이냐
Last Updated: 2026-11-06
Chapter: 23. 삶은 가끔 예기치 않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 안에 앉아 있는 그 상황에서 승희와 신 과장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분위기를 감지한 은영은 혼자 속이 탔다.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됐다. 다행히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이 자리가 파했다. 모두 거나하게 취해 그 식당을 나왔다. 그 식당은 산자락 아래에 있었는데 미니 버스 서비스가 있었다. 사장님이 손님들을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태워 줬다. 등산에 거의 모든 직원이 참여했기 때문에 미니 버스에 모든 인원이 다같이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센터장을 위시한 윗선들이 먼저 내려갔고, 대리나 평사원급들은 식당 마당 평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사장님이 돌아오면 두 번째 라운드에 타서 지하철역까지 가기로 했다. 택시를 부르기도 애매한 위치였고 지하철역까지 내려 가기에는 모두가 술에도 취하고 피곤한 상태였다.신 과장은 첫 번째 라운드 미니 버스에 탈 수도 있었는데 한사코 양보해서 남았다. 승희랑 신 과장은 문자로 싸우고 있는지 승희는 식당 마당의 오른편 끝에, 신 과장은 식당 마당의 왼편 끝에 서서 폭풍 문자짓을 하고 있는 것이 은영의 눈에 보였다.식당 사장이 와서 나머지 인원들을 미니 버스에 태웠다. 신 과장은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고 승희는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았다. 은영은 그 날이 어떻게 끝날까를 상상하며 그 둘을 남몰래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미니 버스 안은 왁자했다. 초저녁밖에 안 된 시각이었기 때문에 다른 약속이 없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2차 갈 계획들을 세우고 있었다."주임님, 저희랑 한 잔 더 하고 가시죠? 아직 시간이 이른데.""그래요 주임님. 남편분한테는 아직 회식 중이라 빠질 수가 없다고 하면 되지 않아요?""모처럼 토요일에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맥주나 한 잔 더 하고 가요.""말은 고마운데 난 그냥 일찍 가서 쉴까 봐. 등산하며 땀을 많이 흘렸는지 몸도 너무 찝찝하고 해서.""에이, 같이 가시지! 저희도 다 땀 많이 흘렸어요.""나한테도 같이 가자 해 줘서 고마워. 근데 오늘은 자기들끼리
Last Updated: 2026-11-02
Chapter: 22. 등산
"주말인데 같이 못 보내서 미안해.""아니야, 회사 행사인데 빠지면 안 되지. 좋은 시간 보내다 와. 승재는 걱정 말고.""에휴... 좋은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등산이래.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토요일에 등산이 웬 말이야?""건강에도 좋고 단합도 하고 좋지 뭐.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녀 와. 올라가다 힘들면 다 올라가지 않아도 되잖아.""자기는 어쩜 그렇게 도덕 선생님같이 말해? 우리 센터장님이 찾고 있는 인재네. 하하""하하, 그런가? 기왕 가는 거 좋은 마음으로 가면 좋지 뭐.""오늘 승재랑 뭐 할 거야?""어? 그건 비밀인데? 오늘은 보이즈 데이라구! 엄마한텐 비밀이야. 그치, 승재야?""네, 맞아요. 비밀이에요.""그래? 엄마 서운한데?""에이, 서운해 하시지 마세요. 사나이끼리는 비밀을 지켜야 된다고 아빠가 그랬어요.""그래? 호호호.""승재는 걱정 말고 회식하면 회식도 갔다가 와.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밥 굶고 있지는 않을 테니.""알았어. 그럼 둘이 재미있는 하루 보내. 저녁에 봐."은영은 등산화를 신고 집에서 나왔다.토요일이었고,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직원 단합대회 날이었다. 도시의 북쪽 끝에 자리한 산을 함께 오를 계획이었다. 회사에서 집합하여 대절 버스를 같이 타고 산 아래까지 같이 가서 등산한 뒤 내려와서 회식을 하고 파하는 일정이었다. 어떤 직원들은 주말에 회사 체육대회, 등산 등을 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은영의 회사 분위기는 보수적인 편이라 그런지 그런 것들도 업무의 연장선상이라는 인식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서 거의 모두가 참여했다. 기혼 직원들은 오히려 기다리기도 했다. 가족들을 돌보느라 주말에는 더 바쁘기 마련인데, 그런 가운데 회사 행사는 좋은 핑곗거리였던 것이다. 직원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그런 날들엔 오후 일찍부터 술자리가 벌어졌다."주임님, 오셨어요? 옷이 너무 화사하네요! 편한 복장 하시니까 대학생 같아요."진경이 싹싹하게 한 마디 했다."어머, 고마워 진경 씨. 립서비스인 줄은 알지만
Last Updated: 2026-10-30
Chapter: 21. 고독
은영은 집에 가는 길에 속옷과 향수와 와인을 사러 백화점에 들렀다. 승재의 학원비가 생각나서 잠깐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언제까지고 아이만 생각하며 자신의 행복을 담보 잡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아이가 소중한 거는 소중한 거고, 나는 늙어간다.하루하루.내 행복을 찾는다고 해서 아이를 내팽개치는 건 아니다.결연한 마음을 먹고 빨간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백화점에 가는데 너무 추레하게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에서 혼자서만 겉돌고 싶지는 않았다. 백화점 직원들은 자기들도 서비스 업종 종사자의 저임금을 받으면서 자기들과 비슷한 임금을 받을 법한 소박한 외양의 고객들을 무시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열과 성을 다해 세일즈를 해도 공짜 기프트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대다수일 확률이 높으니까. 외모와 차림새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득 없는 일에 세일즈와 고객 서비스의 에너지를 다 쏟고 싶지 않다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로이다. 많이 당했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지 않아도 진이 빠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가방이나 구두, 시계나 코트 같은 걸 슬쩍슬쩍 보고 누구한테 아양을 떨고 누구한테는 그저 미소만 띄울지 판단한다. 어찌 보면 직업적 노련함이다. 그 판단이 항상 딱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은영은 향수 코너에서 이것저것 시향해 봤다. 아무래도 달콤한 향이 좋을 것 같았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시향지를 흔들며 향을 느껴보고 있는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뜻밖에도 신 과장이 있었다. "과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어, 배 주임님. 배 주임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아, 그냥 향수 구경하고 있었어요. 과장님 향수 사시는 거예요?""네, 제 건 아니고 아내 하나 사 줄까 해서요.""아, 네. 아내분이 좋아하시겠네요. 향수 사는 남자 새롭네요, 호호."은영은 신 과장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 1층의 환하디 환한 조명 아래 신 과장의 얼굴이 모공 하나하나까지 적나라하게 보
Last Updated: 2026-10-24
Chapter: 20. 포도 봉봉
"어머, 주임님! 머리 하셨네요? 너무 잘 어울려요.""주희 씨가 역시 눈썰미가 있네. 살짝만 다듬은 건데 알아보겠어?""알아보다 마다요. 완전 상큼한데요? 꽤 자르신 거 같은데요?""고마워.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어려 보여요!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하하, 그런 건 없고 그냥 기분 전환차."은영은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냥 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월요일의 사무실은 활기가 넘쳤다."다들 주말 잘 보냈어? 주말에 뭐 했어?"젊은 여자가 많은 사무실이라 화제는 자연스레 주말에 한 데이트 이야기, 클럽에 가서 부킹한 이야기, 소개팅한 이야기로 모아졌다. 마흔 초반이었을 뿐이지만 은영은 어느 정도 소외감을 느꼈다. 물론, 기혼 직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혼 직원들은 기혼 직원들끼리 모여 주말에 시댁에 호출되어 간 이야기, 시어머니가 냉장고 속 간섭한 이야기, 자녀들의 친구 부모들과의 트러블,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공동 복도에 내어 놓은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은영은 문득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젊은 미혼 직원들의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지도 못 했고, 그렇다고 나이가 좀 있는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도 썩 공감이 안 됐다. 아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이 든 기혼 직원들간의 대화에 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 험담이거나 체념이거나 울분이거나 박탈감이거나 후회로 수렴되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저 재미로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진심이 아니면서도. 사실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한 사람과 결혼까지 가서 자녀를 낳고 사회에서 말하는 완벽하게 제도권 안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데에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가끔 사람들은 거짓으로 불행을 지어낸다. 이유는 다양하다. 그렇게 해야 집단 생활 내에서 미움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불행을 이야기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다. 은영은 속 없는 사람처
Last Updated: 2026-10-19
Chapter: 19. 일상의 섹스
"승재 이제 아빠랑 자러 갈까?"저녁 식사 후 아이와 한참 퍼즐을 같이 해 주던 은영의 남편 태형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이거 조금만 더 하고 싶어요.""우리 승재 눈에 잠이 그렁그렁한데?""아니에요! 잠 없어요. 눈에 잠 없단 말이에요."승재는 돌연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태형은 승재가 귀여워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내일 일어나서 축구 교실 가려면 이제 자러 가야 돼. 일찍 자야 우리 승재 아빠만큼 키 큰다. 일찍 자야 키 요정이 승재한테 오는 거야. 자, 우리 이거 정리할까?"태형은 '장난감을 정리하자'라는 문장을 마음대로 음을 넣어 노래를 부르며 나서서 치우기 시작했다. 태형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노래에 승재는 웃음을 터트렸다. 승재도 이내 태형을 따라 고사리손으로 바닥에 흐트러져 있던 퍼즐 조각과 듀플로 더미들, 장난감 자동차들을 하나 하나 주워 각각 알맞은 상자에 넣기 시작했다. 은영은 둘의 말소리, 노랫소리를 건너 들으며 행복한 마음이 됐다.이윽고 태형은 승재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는 승재의 방으로 향했다. 승재 방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은은한 빛의 램프를 켜고 승재를 침대에 내려 눕혔다. 태형은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동화책을 펼쳐 승재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다.은영은 태형의 기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화장실에 갔었기 때문에 다시 아래를 깨끗이 씻고 싶었던 것이다. 은영은 꼼꼼하게 세정제를 발라 따뜻한 물로 씻고 보송한 수건으로 세심하게 닦았다. 몸에 바디로션을 바르고 향수도 뿌렸다. 야한 팬티를 입고 슬립 드레스 란제리를 입은 뒤 램프의 조도를 낮췄다.은영은 티브이를 켜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았다.태형의 잠자리 동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은영은 조바심이 났다.티브이의 볼륨을 줄여 승재 방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형은 사자도 되었다가 선생님도 되었다가 코알라도 되었다가 개구쟁이 소년이 되기도 하면서 열성적으로 동화 구연을 해 주고
Last Updated: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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