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완벽했던 밤

그 완벽했던 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6
By:  도옌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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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잡을 데 없는 남편, 사랑스러운 아이. 은영의 삶은 겉보기엔 완벽했다. 그러나 완벽함이란, 때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대가로 얻어지는 법.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서 목격한 장면 하나. 유부남 상사와 여직원 사이, 결코 들켜선 안 될 은밀한 순간. 그 짧은 장면이 은영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무언가를 건드린다. 싱글 시절, 그녀를 가장 완전하게 채워주었던 단 한 사람.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되살아나자, 은영은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그를 찾기 시작하는데...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던 그 밤. 두 사람은, 다시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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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 사무실의 여자들

"자자, 이거 하나씩들 먹고 시작하자구."

은영은 집에서 직접 싸 온 샌드위치를 팀 동료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삶은 달걀을 마요네즈, 후추와 함께 으깨어 넣고 토마토와 아보카도 슬라이스도 넣은 든든한 샌드위치였다. 팀원 여덟 명에게 하나씩 돌리고 은영도 하나 들어 한 입 베어먹었다.

"어머, 배 주임님. 매번 안 이러셔도 되는데 황송해서 어쩌죠?" 

"아이 등교시키고 남편 출근시키느라 바쁘실 텐데 어찌 아침마다 이러세요?"

"혼자 사는 저도 겨우 일어나 시간 맞춰 출근하는 게 큰 업적인데 주임님 정말 대단하세요."

"맞아 맞아. 진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역시 이 정도 부지런함이 겸비되어야 결혼이란 걸 하는 건가 봐."

"주임님 남편분 부럽네. 진짜 상향혼 하신 분이야. 인정 인정."

"상향혼? 상향혼이 뭐야?"

"자기 자신보다 훨씬 나은 상대랑 결혼해서 팔자가 펴는 게 상향혼이야. 그 반대는 하향혼이고. 완전 나은 상대랑 결혼해서 완전히 팔자를 고치게 되면 초상향혼이지."

"어머, 무슨 그런 말이 있어? 근데 말은 된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말 잘 지어냈네."

"요새 인플루언서들 중에는 상향혼 강좌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돈 내고 강좌 듣는 사람도 많다더라. 돈 많은 남자 만나려면 어디에 가야 하는지부터, 옷차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화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가의 선물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은지, 연애에서 그치지 않고 결혼까지 가려면 어떤 포인트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 아주 세세하게 가르쳐 준다던데."

"세상에! 진짜야? 완전 요지경 세상이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상향혼, 하향혼 기준은 뭐야?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면 상향혼 한 거야? 결혼은 둘이 사랑해서 하는 거고 둘이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한 사람끼리 하는 거야."

"아이고, 지현 씨 또 교과서에 나오는 말하네. 현실은 그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지현 씨같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더라. 호호."

"알고 보면 지현 씨 장래 희망이 상향혼 정복자 아니야? 하하. 상향혼 하고서 직장 그만두고 상향혼 하는 방법으로 인플루언서 되는 건 아닌가 몰라."

"메디프 해라, 메디프. 상향혼 종결자가 메디프 아니냐?"

"메디프는 또 뭐야?"

"뭐일 것 같아?"

"글쎄? 메.. 메... 메디컬? 아~ 의사 와이프?"

"딩동댕! 역시 센스가 있다니까?"

"에휴... 나도 메디프나 돼서 직장 딱 사표 쓰고 스파나 다니면서 살고 싶다."

"나도 나도."

"하하, 나도."

"이 놈의 회사는 언제 시원하게 때려 치우나.. 에휴."

"주희 씨, 아이 참 왜 그래 아침부터? 오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파이팅하자구."

은영이 주희에게 핀잔을 줬다.

"아, 네 주임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제 팔자에 뭐 직장을 어찌 그만두겠어요? 그저 감사히 생각하며 소처럼 일해야지요."

주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팀원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꺄르르 대며 전날 저녁에 본 드라마 이야기, 어제 한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존잘남 봤다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어느덧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승희 씨는 오늘도 늦네."

작은 입술에 벽돌색 립스틱을 발라 펭귄같이 보이는 진경이 앞머리에 말려 있던 구루프를 풀며 한 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승희 씨는 지각이 잦다. 지각에 민감한 윤 과장이 금방이라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려와 아침 순찰을 돌까 은영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계약직으로 시작해 천신만고 끝에 평사원이 된 후 몇 년을 버티다 겨우 주임을 단 지 10개월차인 은영은 잘하고 싶었다. 팀워크를 좋게 하기 위해 안 떠지는 눈을 힘겹고 뜨고 새벽배송 받은 신선한 재료로 매일 아침 김밥이며 샌드위치를 쌌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팀원들이 각자 조금씩 더 열심히 해주면 팀 전체 실적도 올라갈 것이고 그러면 주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과장으로도 진급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 

다정한 남편과 결혼했지만 난임을 겪으면서 경력 단절이 되었고 무수하고도 다양한 시도 끝에 끝끝내 아들 하나를 품에 안아 세상 부러울 게 없어졌었다. 아이가 너무나 소중해 기관에 최대한 늦게 보내고 싶었고 끼고 있고 싶었다. 가정보육을 하며 아이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하나하나 쌓았었지만 그와 함께 이대로 전업주부로 일평생 나앉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으로 밤을 지샌 나날들도 많았다. 

사십 대에 진입하면서 남편도 회사에서 이리저리 압박을 받는 눈치였다. 윗선은 안 나가고 자리 보전하고 있는데 밑으로는 창창하고 빠릿빠릿한 해외 대학 출신들이 즐비하게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도 자라며 태권도다 영어다 줄넘기다 수영이다 미술이다 피아노다 시키고 싶은 게 생겨났다. 남들 보낸다는 브랜드 영어 학원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은영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혼을 결심할 즈음 친정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결혼 자금으로 차곡차곡 모아놨던 돈을 친정집에 많이 내놓고 결혼을 했던 것이다. 남편은 혼수나 결혼할 때 가져온 돈의 규모에 대해 여태 살면서 단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지만 은영은 스스로 움츠러들었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도 상처가 되었다.

"너네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들을 때조차도 은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돈 없는 나와 결혼해 줬으니까 좋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전업맘인 나를 그래도 끼고 살고 있으니 좋은 사람이라는 뜻인가?'

이렇게 혼자 곡해해서 듣고 속상해 했던 것이다. 

개중에는 좀 더 직설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너는 결혼할 때 얼마 들었어?"

"이 집 사는 데 얼마 보탰어?"

상향혼이니 메디프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은영은 자신도 좀더 저돌적이거나 좀더 비위가 강해서 그저 돈만 보고 결혼했으면 더 행복했을까를 잠깐 생각했다. 그럼 저렇게 대놓고 상처를 주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쏘아 보며 비웃듯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어머, 내 돈을 왜 보태니? 남녀평등이니 뭐니 하면서 정의로운 척, 쿨한 척 좀 그만 할래? 그래 봤자 손가락 까딱 안 하고 일하는 사람 쓰며 평일 낮에 백화점이나 다니는 여자들 팔자 부러워하는 거 다 알아."

물론,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생은 요정도 선이라 생각했다. 그저 평범한 삶. 큰 돈은 못 벌어도 아이 학원비는 꼬박꼬박 버는 삶. 그래도 다시 취업을 해서 워킹맘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꿈에 불태우지도, 미칠 듯한 정열에 불태우지도, 뻔뻔한 세속에 불태우지도, 그렇다고 꺼지지 않는 에로스에 불태우지도 못한 삶이지만.

은영은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좋은 사람이기라도 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사남매 중의 장녀로 빠듯하게 자라서 그랬던 것일까.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동생들 탓에, 특히 딸 셋 끝에 태어난 막내 남동생 탓에 양보해 와서 그랬던 것일까. 고등학생 시절, 유난히 동경했던 해외 유학의 꿈이 좌절되어서 그랬던 것일까. 부모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훗날 스스로 벌어서 결국엔 일 년의 해외 유학을 해냈지만 자라면서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집에서 안 받쳐주네.' 라고 생각해 왔던 건 결국엔 결핍으로 자리 잡았다. 마음껏 펼치지 못한 자신의 가능성이 뭉개지고 줄곧 스스로를 증명하면서 살아야 했던 삶의 방식은 결혼을 하고 둥지를 새로이 만들고 새 생명을 잉태해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부자도 아니고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업적도 없으니 좋은 사람이기라도 되고 싶었다. 

사람은 어쩌면 어린 시절, 십대 시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같은 상황이라도 결핍으로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은영은 결핍이 큰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을지라도.

가끔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바라볼 때면

'그래도 나 정도면 아직은 괜찮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스스로가 더 안타까울 때도 있었다.

젊음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결혼과 함께 파생된 그 모든 낯선 인간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고 자녀가 자라면서 처음으로 배우는 것들, 겪는 것들, 그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켜보고 다독이고 격려하고 속상함과 걱정과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사랑"이라는 말로 명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의리 같기도 했고, 동지애 같기도 했고, 연민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육체가 반응하는 말초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직 남편과의 사이에 남아 있는가?

은영이 온갖 상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저 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의 꽃이라 불리는 승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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뚠뚠잉
뚠뚠잉
잘보고 있어요! 매일 연재 해주세요...
2026-11-07 07: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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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Chapters
1. 사무실의 여자들
"자자, 이거 하나씩들 먹고 시작하자구." 은영은 집에서 직접 싸 온 샌드위치를 팀 동료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삶은 달걀을 마요네즈, 후추와 함께 으깨어 넣고 토마토와 아보카도 슬라이스도 넣은 든든한 샌드위치였다. 팀원 여덟 명에게 하나씩 돌리고 은영도 하나 들어 한 입 베어먹었다. "어머, 배 주임님. 매번 안 이러셔도 되는데 황송해서 어쩌죠?" "아이 등교시키고 남편 출근시키느라 바쁘실 텐데 어찌 아침마다 이러세요?" "혼자 사는 저도 겨우 일어나 시간 맞춰 출근하는 게 큰 업적인데 주임님 정말 대단하세요.""맞아 맞아. 진짜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역시 이 정도 부지런함이 겸비되어야 결혼이란 걸 하는 건가 봐." "주임님 남편분 부럽네. 진짜 상향혼 하신 분이야. 인정 인정." "상향혼? 상향혼이 뭐야?" "자기 자신보다 훨씬 나은 상대랑 결혼해서 팔자가 펴는 게 상향혼이야. 그 반대는 하향혼이고. 완전 나은 상대랑 결혼해서 완전히 팔자를 고치게 되면 초상향혼이지." "어머, 무슨 그런 말이 있어? 근데 말은 된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말 잘 지어냈네." "요새 인플루언서들 중에는 상향혼 강좌하는 사람도 있다더라. 돈 내고 강좌 듣는 사람도 많다더라. 돈 많은 남자 만나려면 어디에 가야 하는지부터, 옷차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화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가의 선물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은지, 연애에서 그치지 않고 결혼까지 가려면 어떤 포인트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 아주 세세하게 가르쳐 준다던데.""세상에! 진짜야? 완전 요지경 세상이네.""에이, 그런 게 어딨어? 상향혼, 하향혼 기준은 뭐야?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가면 상향혼 한 거야? 결혼은 둘이 사랑해서 하는 거고 둘이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한 사람끼리 하는 거야." "아이고, 지현 씨 또 교과서에 나오는 말하네. 현실은 그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지현 씨같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더라. 호호." "알고 보면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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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무실의 꽃
쌍꺼풀 수술이 좀 과하게 됐다는 거 말고는 흠잡을 데 없이 예쁜 승희가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사무실로 들어옴과 동시에 몸을 내던지듯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로그하는 시간이 기록되기 때문에 컴퓨터를 9시 전에 켜는 건 아주 중요했다. "아, 오늘도 성공." 하며 눈을 찡긋 하고는 그제야 새삼스레 의자를 뱅그르르 돌려 회사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승희 씨, 안녕? 오늘도 슬라이딩 도어네?" 만년 평사원 경은이 비꼬면서 한 마디 했다. "네, 제가 좀 타이밍을 잘 맞추거든요." 승희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일견 조소의 톤을 띄우고 받아쳤다. 그 소리를 어깨 너머로 듣고 여직원들은 일제히 입을 삐죽거렸다. 몇몇은 들리게 혼잣말인 듯 험담을 하기도 했다."자랑인가?""자기만 잘났지, 자기만.""타이밍 잘 맞춘다, 이 지랄."일부러 승희 들으라는 듯이 소리 내어 말하는 험담이었지만 승희는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는 눈알을 살짝 위로 굴려 뜨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그렇다. 승희는 누구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매력적이게도 보이게 했고, 동시에 얄밉게도 보이게 했다. 승희는 언제나처럼 금방이라도 선 자리에 나갈 듯 한껏 꾸민 채였다. 등의 중간까지 오는 굽실굽실한 갈색 머리에서는 은은한 모링가 향이 났다. 바람이 불어와 코끝에 그 향이 전해져 오기만 해도 침샘에 침이 순식간에 차올라오는 향기였다. 디자인은 단정하나 소재가 뭔가 야한, 속이 비치는 베이지색 쉬폰 블라우스에 나풀거리는 노란색 치마를 입고 키튼 힐의 미디엄 높이 하이힐을 신은 승희는 지각할까 봐 금방 허겁지겁 달려온 사람답지 않게 여유가 넘쳤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당당함이었다. 깡마르지 않았으나 하늘하늘한 핏을 가진 승희에게는 아직 단 한 번도 아기를 낳아보지 않은 여자 특유의 몸선이 있었다. 아이를 낳아 본 여자들은 그 차이점을 단박에 알아봤다. 단정한 옷 속에는 어딘가 모르게 헤픈 여자의 몸짓이 있었다. 승희는 조심성 없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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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주임님, 3시 57분인데 콜 막아도 되죠?" 경은이 헤드셋을 내려 놓으며 은영에게 명랑하게 물었다. 질문처럼 물었지만 경은은 이미 시스템을 끄고 헤드셋을 거치대에 걸고 있었다. 경은이 그렇게 하자 주변의 다른 직원들도 하나 둘씩 따라서 시스템을 끄기 시작했다. 한숨과 잡담으로 한순간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금요일 오후의 바이브에 얼마간은 행복해 보였다. "응, 그럴까?" 그날은 한 달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그들이 일하던 부서는 달의 마지막 금요일마다 4시에 업무를 마치고 회사 휴게실에서 조촐한 간식 타임을 가졌다. 업무를 마쳤다고는 하나 퇴근을 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간식 타임 또한 업무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케이크를 주문해 그 달에 생일을 맞았던 직원들의 생일을 다같이 축하했고, 간부들이 일하고 있는 7층에서 센터장이 내려와 한 마디 하기도 했다. 가끔 맥주와 와인 등 가벼운 주류가 제공되기도 했다.금요일 저녁이지만 약속이 없는 싱글들, 집에 바로 가기 싫은 기혼들...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기다리는 금요일 오후의 혜택이었다.물론, 빨리 돌아가고 싶은 가정이 있거나 연인이 있는 직원들은 이런 거 안 해도 되니 30분이라도 일찍 퇴근하기를 바라기도 했다.그들이 일하던 부서는 엘리베이터 4층에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눈 앞으로 커다란 유리문이 있었고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면 오픈플랜 사무실이었다. 유리문 안쪽 오른쪽에 사방이 유리로 된 신 과장의 사무실이 있었다. 오픈플랜이었지만 군데군데 기둥이 있어서 모든 자리를 한눈에 볼 수는 없었다. 유리문 안으로 들어오기 전 왼쪽에 휴게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휴게실에는 텔레비전과 냉장고와 싱크대와 소파 자리가 있어서 직원들은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거기서 먹기도 하고 커피를 타 마시기도 했다. 4시가 땡 되자마자 직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주임님, 같이 가요." "응, 그래." 다들 금요일의 바이브에 젖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데이트가 있는지 다들 잘 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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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건드려진 욕망
은영은 슬며시 휴게실에 돌아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람들 무리에 합류해서 사담을 나눴다. 맞장구도 치고 웃기도 하면서.그러다 5시 땡 되자마자 사무실을 나갔다.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지만 그 층을 떠나진 않았다. 확실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알 것 같았지만...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이런 일에 어떤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엉뚱한 사람을 오해하고 싶지는 않았다.사무실 밖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복도에 있는 화장실엘 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하며 퇴근하는 사람들의 양말과 구두만 뚫어져라 봤다. 아들을 데리러 가는 것도 미룬 채. 정말 은영답지 않은 행동이었다.왠지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른 그 무엇보다, 그 순간에는 그게 중요했다.계단으로 내려가려면 무거운 철제문을 열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거의 모두가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주임님, 퇴근 안 하시고 여기서 뭐 하세요?" "주임님, 누구 기다리세요?""엘리베이터 왔는데 같이 타시죠. 한 명 더 탈 수 있겠는데.""주임님, 문 잡고 있는데 얼른 타세요.""아, 갈 거야. 먼저들 가. 다음 거 탈게.""정말요?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혼자서 뭐 하려고 저러시지? 같이 타면 되는데..."데이트를 가는지 클럽엘 가는지 한껏 꾸민 직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반짝 빛냈지만 은영은 꿋꿋이 기다렸다. 승희도 퇴근했다. 약속이라도 있는지 신이 나서는. 몇십 명이 같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간식 타임이긴 했어도 엄연히 근무 시간 내에 그런 아슬아슬한 짓을 저질렀으니 얼마나 도파민이 터졌을지 짐작도 안 됐다. 훅 분출했으니 시원하기도 하고 나른한 만족감도 느꼈던 것일까. 은영은 질투인지 심술인지 모를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일부러 존재를 알리고 싶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승희 씨, 이제 퇴근해? 기분 좋아 보이는데 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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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첫 정사
"승재, 오늘 하루는 어땠어?"은영의 남편 태형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아이에게 물을 따라주었고 의자를 바로 해 주었으며 반찬을 이것저것 집어 밥 위에 올려주기도 했다."재밌었어요.""선생님 말씀도 잘 들었어?""네.""친구들하고도 잘 놀았고?""네.""오늘 있었던 일 중에 뭐가 제일 재밌었어?""재영이가 레전드 풋볼카드 두 장 줬어요.""그래? 그거 엄청 좋은 거 아냐? 근데 재영이가 왜 줬어?""재영이는 같은 게 두 장씩 있대요.""그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른 친구를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승재한테 줬구나. 재영이가 승재 좋아하나 보다. 고맙다고 했어?""네, 당연하죠.""그 풋볼카드 가지고 뭐 할 거야?""스크랩북에 넣어서 모을 거예요.""그래? 몇 장까지 모을 건데? 모아서 뭐 할 거야?""백 장까지 모을 거예요. 모으는 동안 다른 친구들이랑 서로 더 마음에 드는 걸로 바꾸기도 할 거예요."태형은 승재의 시시한 얘기도 진심을 다해 들어 주었다. 승재가 골고루 먹는지를 계속 예의주시하면서.'예전에는 저런 다정함과 세심함이 다 나를 향했었지.'은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굳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세월과 함께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거겠지, 생각했다. 자식에게조차 무심한 남자도 많다던데 이 정도면 선방하는 거지,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저 남자의 관심을 고스란히 받았던 시절이 있었지.은영은 그들의 연애 시절을 떠올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뛰어든 어느 서점의 지붕 아래, 먹구름이 껴 갑자기 밤처럼 어두워진 그 한낮에 첫 키스를 나눴었다. 둘 다 서툴렀다. 엉거주춤 서서 입은 맞추고 있으나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손. 먼저 그 손을 잡은 것은 은영이었다. 은영의 적극성에 마음을 놓은 태형은 이내 한 손으로 은영의 허리를 감쌌고 키스가 길어지는 동안 손은 은영의 엉덩이께로 내려와 부드럽게 움직였다."비 맞아서 옷이 다 젖었네. 춥지 않아?"그들은 맞은편 건물에서 대낮에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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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툰 욕망
은영은 살면서 오르가즘이란 걸 딱 두 명과 겪어 봤다.한 명은 놀랍게도 첫 번째 남자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그로부터 10여 년 후 어학연수 중 만난 독일 남자 옌스.첫 번째 남자 친구랑은 무수히 많이 가졌던 관계 중 단 한번이었고 옌스와는 가졌던 대부분의 관계에서 느꼈었다. 그것이 소위 속궁합이 맞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와 은영은 왜 헤어졌을까. 그 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걸. 사람이란 젊었을 때는 모두 어느 정도 자만심을 가진다. 지금 가능하니 앞으로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지레 믿어 버리는 것이다. 앞으로 살 날이 많기 때문에, 젊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 가며 그런 일은 또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새털같이 많은 날들 중에 그런 일은 또 흔히 일어날 거라고 덮어놓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 중 하나는, 어떤 것은 딱 한 번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시간이 마구 흐른 뒤, 훗날에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그 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구나, 하고.스무 살을 갓 넘겼을 때.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귄 남자 친구 민우.동갑이었던 민우와는 추억이 많았다.2년 반 정도의 만남 동안 둘은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다.여느 어린 연인들처럼, 여느 풋풋한 대학생 커플들처럼 은영과 민우는 사귀기로 시작한 날부터 시작해서 날짜를 세었다.사귄 지 100일이 되는 날,다른 과 학생이었던 민우는 전공 수업을 하고 있던 은영의 강의실에 백 송이 장미꽃을 들고 찾아와 주었다.전공 수업이었으므로 학과의 모든 동기들이 거기에 있었고 모두가 부러워했다.은영은 어깨가 으쓱해졌던 기억이 나서 피식 웃었다.그 날 저녁, 둘은 갓 스무 살을 넘긴 학생들이 가기에는 꽤 고급스러운 호텔의 25층 라운지에서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야경을 바라보며 칵테일을 마셨다.은영은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주문했고 민우는 블랙 러시안을 주문했다."너 돈이 어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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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처녀성
정말로 그런 마음이었다.처녀성이라고 불리는 그것.'그까짓 게 도대체 뭔데'어떤 이에게는 고귀함을 넘어 성역이 되어 버린 그것.끝끝내 지켜내서 소위 말하는 '천연기념물'이 되느냐, 아니면 미리 허물어뜨려 자유로워지느냐.술이 셌던 은영은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주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최후의 1인이었고 그러다 보니 종종 예기치 않게 내밀한 이야기를 듣게 되기도 했다. 군입대를 앞둔 남자 동기들이 "총각 딱지"를 어떻게 뗄지에 대해 고심하는 그런 술자리가 있기도 했다. "나송이한테 말해 봤어? 너 그러다 택시 타고 입대한다?""자차 타야지 택시 타서야 되겠어?""택시도 돈 많이 주면 모범택시 탈 수 있다더라.""나송이 고등학교 때 남자 친구 있었다던데 너나 아다지, 나송이는 벌써 깨졌을 걸?""정작 나송이는 너 먹고 싶어서 드릉드릉대고 있는 거 아니냐? 낄낄.""야야, 여자 마음 좀 받아 줘라. 너 순결 지키냐?""왜 그래? 잘 못 하는 거 들켜서 입대도 하기 전에 차일까 봐 걱정돼?""야 임마!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뭘 잘 못 해?""발끈하기는. 자신 있으면 이번 주말에 1박 2일로 놀러 가자고 해 봐. 간다 그러면 그건 나송이도 하고 싶은 거라고.""진짜 그럴까? 싫다 그러면 어떡해? 어색해질 수도 있잖아. 나 입대 앞두고 차이기 싫다.""너희 사귀는 거 아니었어? 사귄다는 거 네 혼자 착각이야? 사귀는 사이면 같이 놀러 가겠지.""나송이 아버지 되게 엄하시대.""야야, 갈 마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간다. 몰래 도망쳐 나와서라도 가더라.""아 씨... 그럼 말해 볼까?""그래. 말이라도 해 봐. 싫다 그러면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돈 만들어서 너 은하 누나한테 데려다 줄게."남자 동기들이 낄낄대며 그런 얘기를 주고받을 때, 조금 역겹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은영은 잠자코 있었다. 학교에서 버스로 서너 정류장 떨어진 곳에 오래된 제분 회사와 방직 공장이 있었고 그 근처에 "은하수"라는 이름의 낡은 술집이 있었는데 매춘도 한다고 알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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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첫 경험의 흔적
"많이 아프다던데 괜찮을까?"민우는 말이 없었다.은영이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만둘 것처럼 진짜 괜찮겠냐고 묻더니, 이제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나 보았다. 이제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내가 아프다고 하면 그만둘 거지?"그러나 은영도 집요했다. 진짜로, 무서웠기 때문이다.거듭된 은영의 질문에도 민우는 묵묵부답이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다.민우가 그렇다고 힘 주어 대답해 주기를 바랐으나, 한편으로는 무턱대고 달래며 수긍하지 않아서 믿음이 가기도 했다.은영은 피가 얼마나 나올지 걱정됐다.'다 젖어서 침대 시트가 더러워지면 어떡하지? 그럼 나갈 때 카운터에다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시트 뿐만 아니라 매트리스에까지 물들면 진짜 어떡하지? 수건 몇 장을 미리 깔아둬야 하나?'도대체 피가 얼마나 나올지 가늠조차 안 되었다.은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민우가 딱딱해진 성기를 은영의 음부에 가까이 갖다 댔다.말랑말랑하던 것이, 완전히 딱딱해지고 커지고 발그레해진 게 보였다. 영화에서 실루엣으로만 보던 것이 은영의 눈 앞에 있었다. 몸과 직각으로 빳빳하게 서 있는 것이 약간 코믹하다고도 생각되었다. 은영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성인 남성의 성기를 정면에서 본 적이 있다. 은영이 살던 아파트 근처에 '로얄탕'이라는 대중 목욕탕이 있었다. 로얄탕 건물의 1층에는 여탕과 미용실과 작은 온돌방이 딸린 카운터가 있었고 2층에는 남탕과 구두 수선집이 있었다. 3층에는 건물주이자 목욕탕 주인의 가족이 살았는데 은영의 친구가 그 집의 막내 딸이었다. 한 번은 목욕탕집 친구가 은영을 포함한 세 명의 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부잣집이라고 동네에서 소문 났던 집이라 은영은 신나서 갔다. 재미있는 잡지책과 게임기, 인형들이 많을 것 같았다. 은영은 목욕탕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갈 줄 알았는데 목욕탕집 딸은 친구들을 건물 뒤편으로 안내했다. 목욕탕은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휴업했고 문을 여는 날에도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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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샤워
은영은 다시 샤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욕실로 가고 싶었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이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서 욕실에 들어갔다.조금 굴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민우는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괜찮아?" 라고 물었다.그러나 민우는 은영이 많이 아픈지를 걱정하기보다는, 너무 빨리 사정해 버린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다."있잖아, 은영아."바닥에 걸레질을 하는 자세로 기어서 욕실로 가고 있는 은영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있잖아, 은영아... 나 더 길게 할 수 있어. 이게 내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마."은영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기어가다가 고개를 돌려 뜨악한 표정으로 민우를 쳐다 봤다.알몸으로 기어가는 자기 뒷모습을, 엉덩이를 내민 채 기어가고 있는 모습을 민우가 보고 있다는 게 민망하고 화가 났다."그게 무슨 소리야?""아니... 너무 짧게 한 거 같아서... 네가 나한테 실망했을까 봐.""뭘 짧게 했다는 말이야? 내가 뭐에 실망을 해야 되는데?"은영은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에휴...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됐다, 됐어."민우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조금은 안심한 표정이 됐다.사실 은영은 민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이미 그런 주제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루와 지루에 대해 이야기했고, 특히 조루에 대해 혐오를 담아 이야기했다. 은영은 직접 경험은 그 날이 처음이었지만, 민우와의 첫 경험이 짧았다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얘기했다간 비웃음과 동정을 받을 게 뻔했다. 물론 은영은 그런 얘기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었다. 민우의 잠자리 퍼포먼스에 대해 불만이 있더라도 그걸 술안주 삼아 친구들이랑 씹어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제 얼굴에 침 뱉기 같았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당사자인 민우에게는 결국 말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당장은, 그런 걸 따지기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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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상이몽
"이렇게 해주니까 좋아?"민우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민우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쑥스러워하는 듯도 했고, 의기양양해하는 듯도 했다."응? 으...응."은영은 그런 질문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생각됐지만, 민우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민우가 지금 하는 행위를 멈추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아까는 아랫도리가 너무 아파 그야말로 밑이 빠져 버릴 것 같았는데, 고통이 누그러뜨려졌다. 따뜻한 물 아래 서 있었지만,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흥분으로 인해 질에서 애액이 물컹 하고 나왔고 음부 주변이 말랑말랑해졌다."더 천천히 할까? 아님 손을 더 빠르게 움직일까?""이렇게 눌러도 아픈 건 아니지? 더 세게 만져 줄까? 여기보다 여기가 더 좋아? 어때?"민우는 손놀림을 여러 다른 형태로 변주하며 움직였다. 마치 놀이를 하는 듯 했다.'이미 처녀막이라는 게 찢어져서 피가 나왔으니 이젠 아프지 않으려나?'은영은 발가벗은 몸을 완전히 내맡긴 채,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했다. 아프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다면, 다시 한번 해 보고 싶었다."첫 경험"이라고 부르기에는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평생에 한 번뿐일 텐데.아프고 민망한 기억으로만 남기긴 싫었다.이번에 잘해서, 이걸 첫 경험이라고 기억해 두고 싶었다.'어차피 다 그런 거 아닐까?'은영에게는 첫사랑도 그랬다. 첫사랑이 너무 허접해서 그걸 첫사랑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몇 년 후, 다른 사랑을 하고 나서 그게 "진정한" 첫사랑이라고 결정했다. 무슨 상관인가? 기억은 어차피 왜곡되는 것이다. 멋대로 왜곡되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스스로 좋은 쪽으로 왜곡해 버리자고 생각했다. 첫사랑이 허접한 건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영화나 소설같지는 못 해도 그래도 그나마 아름다운 기억이었다고 자조할 수는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어쩌면 삶에서 진실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보다 내가 어떻게 느꼈느냐가 더 진실일 수 있다.은영은 민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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