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수녀같이 살아온 중년의 은행 지점장이 어느 날 사랑에 빠졌다. 이것은 축복인가 재앙인가. 상대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은 죄악인가. 사랑에 빠진 상대가 한참 어린 남자라고 해서 이 지점장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가. 일생에 한 번, 다 던진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이들을 비난하지 못하리라.
View More또각또각.. 흐트러짐 없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망설임 없이 전진하는 발걸음.
월요일 아침이다.
커피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던 직원들의 말소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잦아들고 모두들 자세를 고쳐앉고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발소리가 지점의 뒤쪽 비상문 밖에서 멈춰 서고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지점장님."
일제히 문 쪽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개중에는 엉거주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는 직원들도 있었다.
"굿모닝, 오늘 아침 날씨가 조금 쌀쌀하네? 다들 주말 잘 보냈죠?"
"네, 지점장님. 지점장님도 주말 잘 보내셨지요?"
"네, 푹 쉬면서 보냈어요. 토요일 저녁에는 음악회 갔었는데 캔들 라이트 켜진 홀에서 쇼팽 듣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직원들은 깍듯했고 지점장은 교양있고 매너가 있었다.
직원들이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굳이 불편해 하지도, 바꾸려 하지도 않았다.
지점장은 선이 트렌치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날렵한 네이비 정장에 아이보리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차림으로 명찰을 서랍에서 꺼내 달았다.
지점장 문수연.
방금까지 환하게 웃으며 주말에 대한 사담을 하던 모습에서 얼굴의 웃음기가 싸악 걷히고 샤프한 실루엣에 프로페셔널한 표정만이 남았다.
45세의 외국계 은행 지점장.
깐깐했지만 누구든 하대하는 법이 없고 선을 철저히 지켰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영국계 은행의 단 다섯 개밖에 없는 한국 내 지점 중 한 지점의 지점장을 단 그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상을 풍겼다. 쉽게 다다갈 수는 없는 아우라를 풍겼으나 직장 내에서, 특히 여직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여자로서 그 자리에 오른 것도 그랬지만, 수연은 직장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람이다.
매달 지점 전체 회식비가 나왔는데 술 먹고 밥 먹고 하지 않고 수연은 파격적으로 뮤지컬 공연 티켓을 구입해서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남자 직원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여직원들은 다 좋아했다. 회식이랍시고 끌려 다니며 좋아하지도 않는 곱창에 소주 마시며 팀워크 운운하는 건배사를 듣지 않아도 됐으니까. 어쩌면 팀워크의 허울을 쓰고 나이 많은 남자 상사가 어린 여직원이랑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싶어 하는 게 직장 회식인지도 모른다.
변변히 볼만한 공연이 없는 달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의 바우처로 줬다. 수연은 누구도 그렇게 보진 않았지만 자기한테 단 하나 꿀리는 건 나이뿐이라는 듯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반면에 어린 여직원들에게 딱딱하게 굴기도 했다. 특히, 젊음과 밝음을 무기로 실수같은 걸 했을 때 애교 섞인 웃음으로 퉁치려는 여직원들을 혐오했다.
"지은 씨, 지금 웃음이 나와요?
"미정 씨, 웃지만 말고 질문에 답을 해요."
같은 말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똑똑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수연이었던 것이다. 다른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도.
그런 거침없고 직선적인 성격 탓에, 또한 지위 탓에,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면서도 부담스러워 했다. 눈 밖에 나기 싫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절대로 속마음이나 개인적인 일은 털어놓을 수 없는, 그저 직장 상사.
수연은 고급 소재의 날렵한 정장을 입고, 보이지 않는 견고한 혼자만의 성을 쌓고, 사회적으로는 성공한 여성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수연의 직장은 개인금융도 취급을 하긴 했지만 입출금 통장조차 최소 300만원이 있어야 개설이 가능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바쁘진 않았다. 언제나 조용하고, 자산가들이나 기업 대표들이 거래하는 그곳. 클래식 음악이 은은히 흐르고, 톤다운된 우드와 베이지 벽으로 인테리어가 된 고급스러운 그곳.
평화롭고 일상적인 일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위험할 정도로 섹시한 외모를 가진 청원경찰이 들어왔다.
잔잔하던 그곳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굿모닝""안녕하세요, 지점장님?""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지점장님.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박 과장님, 제가 뭐 언제는 기분이 안 좋았나요? 꼭 제가 기분 좋은 게 별일이라는 듯이 말씀하시네요?"사무실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수연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은 많은,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거북목이 심한 박 과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본인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들이 일하는 은행이 한국에 지점을 열 때부터 일하기 시작한 충성도 높은 직원이었지만, 해외 유학파에 영어가 더 능숙한 수연을 비롯한 몇몇에게 밀려 만년 과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사람이었다.직원들은 일제히 수연과 박 과장을 번갈아 보더니, 슬금슬금 제자리에 착석해 업무 준비를 시작했다.원래는 그 시간 쯤이면 벌써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입구에 서 있어야 할 지훈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몸이 좋지 않다면서 병가를 신청한 것이다.그런 일이 처음이라 수연은 문자 메시지를 받자마자 걱정이 되었다.바로 전화를 해 보았지만 지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언제나처럼 날렵한 라인의 정장을 갖춰 입고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와 화장을 하고 평소보다 일부러 더 환하게 웃으며 또각또각 걸어서 사무실에서 유일한 별도의 방에 가 높은 책상에 앉았지만, 수연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서류 더미를 뒤적이는 척하며 한손으로는 계속해서 지훈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어디가 아파? 많이 아파?""어제까지 괜찮았잖아. 어디가 아픈 건데?""뭐 필요한 거 없어? 필요한 거 있음 배달시켜 줄게.""너 어디야? 진짜로 아픈 거 맞아? 왜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는 건데?""너 어디서 딴년이랑 뒹굴고 있는 거 아냐?""너 나한테 어떻게 이래? 왜 이러는 건데?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내가 뭐 잘못했어?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만나서 얘기하자. 만나자. 응?""오피스텔에서 기다릴게. 점심 때 맞춰서 와. 응?""너 진짜 딴년 거 빨고 있니? 빨리 답장 안
지훈도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둘 다 극도로 흥분되어 있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다시 누워 비로소 몸을 겹쳤다.수연의 몸 위로 지훈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떨어졌다.둘의 흥분과 미처 끄지 못한 복사기의 열기가 더해져 사무실 안은 후끈후끈했다.늘 정갈하게 빗어 넘겨져 있던 수연의 머리에서는 잔머리가 삐져나왔다.낮은 조도의 사무실 안에서, 젊은 지훈의 팔뚝과 허벅지의 근육과 힘줄이 도드라져 보였다."내가 너를 바라본다는 걸 알았던 거니?"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티가 많이 났니?"지훈은 이번에는 슬몃 웃어 보였다."큰일났네. 어쩌면 좋니."지훈은 수연을 안아올려 책상 위에 엎드리게 했다. 선 채로 책상을 감싸안은 모양이 된 수연의 나신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그 상태로 수연의 몸에 들어왔다."안아보고 싶었어요."지훈은 고백하듯 독백하듯 낮게 말했다.멋있다고 생각됐던 것이다. 수연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행위가 끝난 후 수연은 조금 울었다. 내내 울음을 참고 있었다는 듯이.그 자신도 영문을 알지 못하는 눈물이 터져나왔다.지훈은 말없이 수연을 안아 주었고 그 눈물과 그 포옹의 의미를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그날의 그 랑데뷰가 끝났다. 그 날부터였다. 깨어나 버린 거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오래 누르기만 해 왔던 것이,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 헤어밴드에 마지막 1밀리의 힘이 가해져 탁 하고 끊어져 튕겨나가듯이, 언제나 동그랗게 닫고 새초롬한 모양을 유지해 왔던 그것이 탁 풀어져 열렸다. 수연은 자신도 어리둥절한 절박한 욕정에 휩싸여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은행은 15층 높이의 큰 오피스텔 건물 1층에 자리해 있었는데 수연은 같은 건물 10층의 한 레지덴셜 원룸을 계약했다. 그저 불안에 떨지 않고 누울 수 있으며 씻을 수 있는 곳으로. 다시 단정하게 매무새를 고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아름다우나 어딘가 메말라 있던 수연에게서 생기가 돌고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밤꽃
"흐음... 하... 넣어 줘. 넣어 줘, 제발."수연은 거의 숨이 넘어갈 듯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리를 벌리고 그대로 지훈에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판타지 속에서나 존재할 거라 믿었던 상황이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수연이 성관계를 한번도 안해본 건 아니었다. 당연히 해봤다.수연은 얼굴도 예쁘고, 피부도 반질반질 윤이 났고, 평생 날씬했으며, 탐스러운 머리숱에 곧은 다리 라인을 가진 여자였다.중고등학교 시절, 대학 시절, 유학 시절, 사회 초년생 시절.언제나 시선의 중심에 있었다.유복하게 자랐고, 미술을 전공했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감각도 뛰어났다.그러나 당차고 똑부러진 성격에 반해, 사랑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었다.집안에 롤모델이 돼줄 만한 남자가 없이 자라서 그런지, 남자와의 모든 관계가 어색했다.어느 정도 선까지가 친구로 허용되는 거고, 어느 정도 선부터는 마음이 그게 아니라면 받아주지 말아야 하는지도 잘 가늠이 안됐다. 또한, 그런 걸 드러내 놓고 고백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그럴 때 유일한 해결방법은, 그 분야에 관심 없는 척하는 것이다.잘 모른다는 걸 인정하기 싫으니, 그걸 싫어하는 것처럼 포장해야 하는 삶.설익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가로등 아래에서 엉겁결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부모님이 집을 비운 남자친구의 집에 가서, 어설프게 야한 외화 따위를 보다가, 주춤주춤 서투르게 성관계를 해 보기도 했다. 첫 성경험이라는 걸 내던져 버리고 싶었기 때문에.그랬다.어느 틈에선가, 그것은 멍에처럼 느껴졌다.호기심이 들기도 했고.첫 경험은 아프기만 했다. 상대방도 경험이 없었던지라, 그저 몇 분만에 끝나 버렸던 그 허무한 기억.이불에 묻은 피를 보면서 얼마간의 해방감을 느끼기는 했다.옥죄어 오는 어머니의 과도한 보호를 벗어나, 뭔가 어머니가 싫어할 만한 짓을 했다는 데에 안도감이 들었다.수연은 은행의 카페트 바닥에 누워 옛기억의 편린들이 자신을 덮쳐오는 그 상황 속에서 불현듯 조금 눈물이
수연과 지훈은 카페트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마치 그 순간만을 위해 전생애를 기다려 왔다는 듯이.수연은 손을 뻗어 사무실의 전등을 껐다. 넓은 사무실은 어둑어둑해지고, 바깥으로부터 버스의 불빛, 거리의 간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미처 끄지 못한 수연의 컴퓨터 모니터로부터도 희끄무레하게 빛이 뿜어져 나왔다.어두운 사무실 안에서 두 사람의 움직임은 다급했다.지훈은 수연의 등 쪽으로 손을 뻗어 한 손으로 수연의 몸을 받쳐 조심스레 그녀를 눕혔다. 그리고는 엉덩이 쪽을 더듬어 스커트의 후크를 풀었다.꽉 낀 펜슬 스커트는 천천히 벗겨졌다.반투명 스타킹을 조심스럽게 벗겨냈다.그 모든 손놀림이 너무나 섬세하고 조심스러워 수연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그러는 동안 수연의 피부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고 깊은 그곳에서는 끈적하고 뜨뜻한 액체가 흘러나왔다.지훈은 수연의 절박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그녀의 스타킹을 벗겼다.수연은 아랫도리에는 팬티 한 장만을 걸친 채, 위에는 브라를 입고 단추가 다 열린 블라우스를 걸친 채였다."아름다워요."지훈은 그 한 마디를 했다.수연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지훈은 바닥에 등을 대고 있는 수연의 등 뒤로 손을 가져가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었다.소름이 오소소 돋아 유두가 바짝 선 수연의 가슴이 어둑한 실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육체였지만, 수연은 뭔가 수줍기도 했다.수연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빈틈없는 외모와 자세로 꼿꼿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실크 블라우스와 절제된 스트레이트 라인 정장을 입고 필요한 때에 유창한 영어로 업무를 해내는 걸 보일 때면 보는 사람들은 그 카리스마에 저절로 탄성을 터트리기도 했다.한 개의 특이점이 있었다면 미혼이라는 것. 자발적 미혼이야 누가 뭐라 하랴마는 수연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어머니가 있었다. 딸이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 어머니. 언제까지나 자기와 살아주기를 바라는 어머니. 다른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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