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오늘 다시 박수환을 만나자 또다시 익숙함이 느껴져 분명 어디선가 박수환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서민아가 골똘히 생각하며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를 포착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주희정이 차갑게 말했다. “서유정, 네가 항상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니까 너도 예의 없이 행동하는 거야!”서유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주희정이 평소에도 그녀를 깎아내리는 건 참을 수 있지만 그녀 주변 사람까지 같이 비난하고 있었다.“확실히 서민아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죠. 친딸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계속 곁에 두고 키우잖아요. 여사님도 참 책임감 넘치고 교양 있는 분이세요.”주희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서유정, 나한테 삐딱하게 굴지 마. 네가 민아처럼 사랑스러웠으면 나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서유정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여사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전 여사님 호감 따위 필요 없어요.”16살에 서씨 가문에 막 돌아온 서유정은 필요했을지 몰라도 26살의 서유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넌 정말 답이 없구나!”주희정은 분노가 치밀었다.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서유정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을 거다.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분노를 억누르던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민아는 이미 서경 그룹에 입사했고 머지않아 서경 그룹을 물려받을지도 몰라. 네가 운영하는 그 허접한 로펌으로는 평생 얘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서유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요?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서민아에게 조금도 주식을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여사님 손에도 서경 그룹 지분은 없죠 아마?”서민아가 이제 막 서경 그룹에 들어갔는데 벌써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고 허풍을 떨다니, 이러다가 조금만 지나면 이혜숙이 모든 지분을 서민아에게 줬다고 할지도.주희정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발끈했다.“입 다물어!”주희정의 감정이 격해지는 걸 본 서민아는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엄마, 화내지 마세요. 언니도 일부러 화나라고 말하는 건 아닐 거예요.”서
“그래, 안녕.”서유정의 뒷모습이 모퉁이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성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병실로 들어갔다.그가 멍하니 넋이 나간 모습을 보자 전가인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냥 실연당한 건데... 이럴 필요 있어? 나처럼 이렇게 맞은 것보다는 낫잖아.”성우현은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말디부에서 만났을 때 고백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지금 서유정의 남자 친구가 내가 되진 않았을까...’하지만 만약은 없었다.“야, 성우현. 너 병문안 온 사람 맞아? 귤이나 까줘.”전가인은 성우현에게 전혀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서 친남매는 아니지만 남매나 다름없었다.고등학교 때 늘 누군가 둘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지 물었고 그때마다 전가인은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 신선함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게다가 성우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서유정이라는 걸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다.그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이었다.성우현이 아무런 반응도 없자 전가인은 눈을 흘기며 순간 헷갈릴 뻔했다.속아서 6천만원을 잃고 헤어진 뒤 고소까지 당한 본인이 비참한지, 아니면 고등학교 때부터 서유정을 좋아했지만 지금껏 고백할 기회조차 없었던 성우현이 더 비참한지.한편, 서유정은 계단을 내려와 박수환의 차 쪽으로 걸어가서는 문을 열고 올라탔다.“기다리느라 힘들었죠?”박수환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그러면서 마술이라도 부리듯 작은 케이크를 꺼내 서유정에게 건넸다.“병원 근처에 있는 가게 케이크가 무척 맛있대요. 기다리는 동안 가서 사 왔는데 딸기 맛이에요.”서유정은 딸기를 아주 좋아했기에 딸기 케이크도 분명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서유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케이크를 받아서 들었다. “고마워요. 저 딸기 케이크 제일 좋아해요.”딸기를 무척 좋아해서 딸기와 관련된 모든 음식도 다 좋아했다.“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집에 가서
전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따지러 찾아갔을 때 바람피운 그 여자가 계속 옆에서 나를 욕했어. 순간 화가 나서 그 여자와 몸싸움했는데 그 자식이 그 여자를 위해 나를 계단에서 밀어버렸어.”말하며 전가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내가 정말 눈이 멀었나 봐. 이런 양심도 없는 남자를 사랑하다니.”서유정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말했다.“이번 사건을 오랫동안 진행할 텐데 혼자서 그렇게 성급하게 찾아가서는 안 됐어. 남녀는 힘의 차이가 있어서 결국엔 네가 불리할 수밖에 없어. 다음에 갈 거면 꼭 사람 몇 명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거야.”“응, 알겠어. 그 자식이 나를 계단에서 밀었는데 고의적 상해로 고소할 수 있을까?”“그건 지금 당장 답해줄 수 없어. 신고는 했어?”“신고했어.”“그러면 양측의 진술을 듣고 경찰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봐야겠네. 내가 최대한 도와주겠지만 네가 그 여자와 서로 다툰 걸로 봐서 경찰은 고의적 상해가 아니라 과잉 방어로 판단할 가능성이 커.”“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그때 나를 계단에서 밀면서 죽으라고 했어!”전가인의 격앙된 표정을 보며 서유정은 그녀를 위로한 뒤 말을 이었다.“녹음은 했어? 그 말을 녹음했다면 네게 훨씬 유리할 거야.”전가인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그럼 일단 경찰 조사 결과를 기다려 보자. 그동안은 다친 곳 잘 치료하고 그 사람들과 절대 만나지 마. 만약 만나게 돼도 무슨 말을 하든 꼭 녹음해.”“그래, 알겠어.”병실에서 잠시 더 머물며 상황을 대략 파악한 뒤 서유정은 일어나서 떠나려 했다.문 앞에 다다랐을 때 병실 문이 열리며 밖에 서 있는 성우현이 보였다.서유정을 본 그가 순간 놀라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서유정, 또 만나네. 상황 알아보러 온 거야?”“응, 가인이도 볼 겸 겸사겸사. 얘기 끝내고 이제 가려던 참이야.”그 말을 듣고 성우현의 눈가에 잠시 실망이 스쳤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왔네...”
황수연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서유정 씨, 그런 뜻이 아니라 전 단지 당신이 상처받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서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황수연 씨, 충고는 고마워요. 하지만 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 충고는 필요 없어요.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볼게요.”황수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려던 찰나 카페 문이 열리며 박수환이 차가운 표정으로 들어왔다.그를 본 황수연의 눈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서유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만나는 걸 수환 오빠에게 말했어요?”서유정도 놀랐다. ‘나한테 위치 추적기라도 달아놨나?’박수환이 빠른 걸음으로 10초도 안 되어 테이블 쪽으로 다가와서는 서유정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차가운 눈빛으로 황수연을 바라보았다.“유정 씨를 몰래 불러내서 무슨 짓을 하려고?”황수연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굳어졌다. “오빠, 내 말 좀 들어봐...”“필요 없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관심 없으니까 앞으로 이 사람 곁에서 멀리 떨어져.”그의 눈빛에 담긴 차가움과 냉담함을 보자 황수연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손을 천천히 말아쥐었다.“오빠...”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박수환은 곧장 서유정의 손을 잡고 떠났다.서유정의 손목을 잡은 남자의 손에 시선이 향하자 황수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카페를 나와 십여 미터나 떨어진 곳에 와서야 박수환은 자리에 멈춰 섰다.“앞으로 황수연이 또 찾아오면 무시하고 나한테 말해요. 내가 처리할 테니까.”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서유정은 입술을 달싹였다.“뭐라고 하진 않았고 그냥 내가 수환 씨랑 안 어울린대요. 그건 사실이잖아요.”그녀는 이미 박수환이 한성 박씨 가문 사람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거긴 재벌 중의 재벌이었기에 그들 사이에는 확실히 넘을 수 없는 깊은 골이 있었다.“누가 그래요? 내가 유정 씨에 비해서 부족하지.”말하며 박수환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스쳤다.“수환 씨가 왜 나한테 부족한 사람이에요? 나한테 얼마나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송지민의 음성 통화가 바로 걸려 왔다.“유정아, 이렇게까지 박수환 씨 기분을 신경 쓰는 걸 보니 제대로 빠졌나 봐?”“놀리지 말고 오빠한테 물어봐 줘.”“물어봤는데 너 보고 궁금하면 직접 박수환 씨에게 물어보래. 그건 박수환 씨 사생활이라서 말하고 싶지 않대.”서유정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 알겠어. 나도 앞으로 이런 건 조심할게.”전화를 끊은 뒤 서유정은 한숨을 내쉬며 이 일은 잠시 뒤로하고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지웠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다음 날 아침 황수연의 연락을 받았고 서유정은 살짝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황수연 씨,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황수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번호 알아내는 건 쉽죠. 서유정 씨, 한번 만나고 싶어요.”한 시간 후, 서유정이 약속한 카페로 들어섰을 때 황수연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서유정이 그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황수연 씨, 박수환 씨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게 뭐죠?”황수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손을 뻗어 직원을 불렀다. “서두를 것 없잖아요. 서유정 씨, 뭐 마실래요?”“레몬수면 돼요.”직원이 떠난 후 서유정은 황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황수연 씨,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황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유정 씨, 오늘 제가 만나자고 한 건 수환 오빠와 좀 거리를 뒀으면 해서예요. 물론 현우랑도 멀어지면 더 좋고요. 그 둘은 그쪽이랑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서유정 씨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서유정이 박수환과 계속 이런 식으로 관계를 발전시킨다면 결국 상처받는 건 서유정뿐이었다.박씨 가문은 박수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여자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황수연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바라보며 서유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황수연 씨, 대체 무슨 자격으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쪽과 박수환 씨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인데 그 사람 일에 대해 황수연 씨가 간섭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황수연은 그녀의 말에도 화내지
서유정과 박수환은 두 시간 넘게 마트를 돌아다니다가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왔다.집에 돌아와 물건을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박수환 집 문 앞에 가냘픈 실루엣이 서 있었다.황수연임을 알아본 후 서유정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박수환이 눈썹을 찌푸렸다.“여긴 왜 왔어?”그의 불쾌함을 감지하고 황수연의 웃는 얼굴이 순간 굳어졌지만 다시 원래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아주머니가 물건 좀 전해달라고 해서.”“무슨 물건?”“이거.”그녀는 가방에서 검은색에 금색 테두리가 둘린 은행 카드를 꺼내 박수환에게 건네며 말했다.“오기 전부터 가져다주라고 했는데 지난번에 깜빡했어.”박수환은 고개를 숙여 그 카드를 바라보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가서 전해. 난 필요 없다고.”황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눈빛으로 서유정을 살짝 훑어본 뒤 입가에 차오른 말을 삼켰다.“오늘은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병원에서 얘기해.”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두 사람을 지나쳐 그냥 떠났다.박수환은 붙잡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서유정을 바라보는 얼굴엔 이미 미소가 담겨 있었다.“우리도 들어가요.”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챈 서유정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황수연이 다녀간 이후로 서유정은 박수환의 기분이 매우 나빠진 것을 눈치챘다.둘이 함께 부엌에서 재료를 준비할 때 여전히 그녀에게 말을 걸긴 해도 전보다 말수가 훨씬 줄어들었다.지금 둘 사이에선 딱히 물어볼 수가 없어서 자잘한 이야기만 나누었다.저녁을 먹고 서유정은 그와 함께 정리까지 마친 뒤 돌아가려고 했다.박수환이 그녀를 문 앞까지 배웅하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일찍 쉬어요. 잘 자요.”서유정은 그를 바라보며 잠깐 침묵하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남자를 껴안았다.박수환의 몸이 순간 굳어졌고 온몸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과 놀라움이 가득했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