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주헌은 강수진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무슨 일이야?”강수진은 차주헌을 보고서야 겨우 안도하며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나, 나 방금 서율 씨를 본 것 같아.”차주헌은 이 말을 듣고 이마에 주름을 깊게 잡으며 말했다.“뭐라고? 임서율을 봤다고?”“대충 본 거라 확실하진 않아. 게다가 서율 씨가 이렇게 오래 모습을 감췄는데, 어쩌면 이미 죽은 걸 수도 있잖아.”“주헌아, 내가 혹시 착각한 걸지도 몰라.”강수진은 차주헌이 임서율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느꼈다. 그가 몰래 임서율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차주헌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꼭 착각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강수진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두려움이 스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주헌아, 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방금 내가 본 사람이 서율 씨라고 생각하는 거야?”“잘 생각해 봐. 경찰은 실종 신고만 접수했지, 죽었다고 확정한 적은 없어. 게다가 아저씨가 지금 위독해서 이 병원에 입원해 있대.”“임서율은 가족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람이야. 만약 살아 있다면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걸 알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차주헌은 손가락을 세게 쥐며 속으로 한탄했다. 왜 진작 임규한을 미끼로 삼아 임서율을 불러낼 생각을 못 했을까.그렇게 오랜 세월 허송세월만 했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수많은 사람을 동원해도 그녀의 흔적은 단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임서율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그의 시선이 달라진 걸 알아챈 강수진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불만을 숨기지 못했다.혹시 차주헌이 임서율과 옛정을 다시 이어가려는 건 아닐까?그녀가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차주헌이 말했다.“아저씨가 이 층에 있어. 네가 본 게 진짜 임서율이라면 가서 확인해보자. 분명 뭔가 있을 거야.”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병동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강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려 했지만 결국 삼키고 말았다.‘그래, 임서율이 살아 있는
임서율은 그 메시지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역시 하도원은 손발이 빠른 사람이었다. 겨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만에 그녀의 전화번호부터 위치까지 다 파악해버렸다.하지만 그녀가 그 사실을 인정할 리 없었다. 아예 답장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떴다.[3초 안에 답장 안 하면 내가 직접 와서 잡을 거예요.]임서율은 그 메시지를 보고 손이 떨렸다.하도원이 그녀의 머리 뒤에 몰래 감시 카메라를 단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아니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까지 다 알 수 있겠는가.지금은 어찌할 겨를도 없었다. 하도원은 말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니까.급히 휴대폰을 들고 답장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얘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그렇게 3초가 훌쩍 지나갔고 임서율은 당황한 나머지 그저 한 글자 찍어 보낼 수밖에 없었다.이것도 답장이라고 해야 하나.곧바로 메시지가 또 도착했다.[이건 최신식 채팅법인가요?][대표님께서 3초라고 하셨잖아요.]하도원은 그걸 보고 웃음이 터졌다.[이럴 땐 잘 듣네요?]임서율은 더 이상 하도원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말씀하세요.]임규한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임규한의 남은 소원을 도와야 했고 임씨 가문의 집안 일도 차근차근 정리해야 했다.그것도 딸로서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 생각했다.[오늘 일은 내일 따지러 오죠. 임서율 씨, 그런 수작 좀 덜 써요. 너무 똑똑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거든요.]임서율은 그저 보기만 하고 답장은 하지 않았다.다행히 하도원에게서 오늘 밤 오라는 말은 없었다.임서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은 달성했으니 오늘 벌어진 소동이 적어도 헛수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물, 물...”임규한이 혼미한 상태로 중얼거렸다.임서율은 재빨리 휴대폰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빠, 잠깐만요. 금방 물 가져다 드릴게요.”그녀는 물병을 집어 들고 병실
진승윤은 더는 말대꾸할 수 없었다.“지금 바로 가겠습니다.”전화를 끊으려는데, 하도원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그리고 임서율. 그 여자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도 알아봐.”순간, 진승윤이 굳었다.“대표님, 임서율 씨가 돌아왔어요?”“응.”놀람이 고스란히 그의 얼굴에 번졌다.“그럼 살아 있었군요!”하도원의 인내심이 바닥났다.“가서 알아보라니까, 왜 이렇게 말이 많아.”“네. 그럼 며칠 뒤에 B국 가는 건요?”원래 하도원이 직접 가서 협력 건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지만 상황이 바뀐 듯해 조심스럽게 물었다.잠시 말이 없던 하도원이 대답했다.“B국 쪽 상황이 요즘 좋지 않아. 들으니까 거기 협력사 놈들이 우리 몰래 다른 회사랑도 접촉 중이래. 괜히 계약했다가 나중에 말썽 생길 수 있으니 일단 보류해.”진승윤은 입을 가리고 슬며시 웃었다.역시나였다.그는 전화를 끊고 차를 처리하러 갔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견인된 뒤였기에 벌금만 내고 돌아서야 했다. CCTV를 확인하고서야 범인이 임서율임을 알았다.“이야...”그는 혀를 찼다. 몇 년 만에 보니 임서율은 간이 더 커졌다. 하도원 차를 몰고 간 것도 모자라, 대로 한복판에 버려두다니, 운성에서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임서율은 정말 겁도 없었다.이 사건은 금세 핫이슈로 떠올랐다. 하도원은 어쩔 수 없이 회사로 복귀해 수습에 나섰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한밤중이었다.하도원 정도의 인물이 아니더라도 교통 방해를 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 하물며 대중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인터넷은 순식간에 들끓었다.[와, 멋있긴 한데 그래도 교통 질서는 지켜야지.][남신이 당한 것 같은데? 아무리 거만해도 대놓고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우진 않을 텐데.][이런 짓 할 사람은 한종서밖에 없지.][그건 진짜 미친놈이잖아!][예전에 우리 남신이랑 레이싱하다가 들이받혔다잖아. 저 미친놈 손볼 사람은 우리 남신밖에 없어.][근데 이번 건은 이해가 안 가네. 일단 재호그룹 공식
그녀는 택시를 잡아보려 했지만 이런 황량한 곳에선 사람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었다. 걸어서 시내까지 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해 질 때까지 간다 해도 임규한이 기다려줄 리 없었다.하도원은 원한을 반드시 갚는 성격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자신에게 쌓인 감정이 적지 않을 터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돈으로 끝냈을 일일 테지만 그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냉정해 보여도 사실은 몰아붙이는 사람이었다. 계약 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그는 자신을 속이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하도원은 하늘이 내린 총아이자, 운성을 쥐락펴락하는 절대 권력자였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그런 사람을 감히 속일 자가 어디 있겠는가.하물며 그게 여자라면 더더욱.임서율은 발길을 돌리다 차에 그대로 꽂힌 채 빠지지 않은 열쇠를 발견했다. 순간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원이 깜빡한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당장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도망칠 수 없다면 맞서야 했다. 임서율은 곧장 차 문을 열고 올라탔고 굉음과 함께 차는 아파트 정문을 빠져나갔다.그 시각, 하도원은 소파에 앉아 미간을 짚고 있었는데 온몸에서 묘한 피로가 묻어났다. 발치에 누워 있던 개가 코로 그를 스치듯 훑더니 무언가를 알아챈 듯 발을 비비며 파고들었다.그 기척에 눈을 뜬 하도원은 개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고 묵직하게 중얼거렸다.“그 사람이 돌아왔어.”개가 소파로 폴짝 뛰어올라 그의 손을 냄새 맡더니 혀로 핥았다. 하도원은 잠시 멈칫하다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아직도 기억해?”개는 꼬리를 힘차게 흔들었다.그는 옅게 웃고는 다시 몸을 소파에 기댔고 곧 고른 숨결과 함께 목젖이 오르내렸다. 왼손 끝에는 아직 다 타지 않은 담배꽁초가 매달려 있었다.그 시선은 천장을 향했고 속눈썹은 눈꺼풀 아래로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만약 임규한이 시한부가 아니었다면 그 무심한 여자는 여전히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그거 보세요. 소용없는 거 뻔히 아는데 옆에서 소리만 질러서 대표님 집중까지 흐트러뜨리면 제 목숨이 더 빨리 날아가겠죠.”임서율은 더는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 털썩 기대앉았다.“게다가 대표님이야 지금 뭐든 가진 분이잖아요. 대표님도 죽는 걸 안 두려워하는데, 제가 겁낼 이유가 있나요?”하도원이 살짝 허리를 굽혀 차갑고 단단한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그러자 억지로 시선이 맞닿았다.임서율의 또렷한 눈매 속에는 장난기 어린 빛이 번뜩였고 그녀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예전 그 얼굴이지만 다섯 해 전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지금의 그녀는 마치 깨어난 사자처럼 자신의 무기를 쓸 줄 아는 존재 같았다.그는 시선을 내리깔아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거친 손가락으로 턱선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의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무심했다.“위약금 내고 이 일을 끝내고 싶다는 거예요?”“맞아요. 그 계약에 위약금 조항이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원래 금액 그대로 드릴게요. 그냥 우리가 그 계약 안 한 걸로 하죠.”임서율은 하도원이 직접 그 얘기를 꺼내자 혹시 협상의 여지가 있나 기대했다.하지만 하도원은 턱을 놓으며 가볍게 혀를 찼다.“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방금까지 펴져 있던 임서율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그게 무슨 뜻이에요?”하도원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휘어졌다. 그 압박감에 공기가 한순간 무겁게 내려앉았다.“아직도 모르겠어요? 이 계약은 당신이 끝내고 싶다고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내 허락이 있어야 끝나는 거죠.”그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스쳤지만 임서율은 오히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서늘해졌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귓속에서 맴돌았다.임서율은 눈빛을 매섭게 세우며 올려다봤다.“저랑 원한도 없으면서 굳이 이 종이 한 장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나요?”하도원은 아파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겉으로는 태평스러워 보였지만 시선
임서율은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역시 하도원이 이렇게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든 그녀가 그를 속인 건 사실이었으니, 차라리 잘 이야기해서 풀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몸을 돌려 무구하고 또렷한 눈빛으로 하도원을 바라봤다.키 190이 넘는 하도원은 그녀를 마치 병아리라도 들듯이 한 손에 들고 있었다.임서율은 조심스러운 협상 어투로 말했다.“하 대표님, 이렇게 하죠. 위약금, 제가 전부 드릴게요. 그냥 애초에 계약이 없었던 걸로 하면 어떨까요?”하도원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이제 돈이 좀 생겼나 보네요?”“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쨌든 잘못은 제 쪽이니까요.”하도원의 성격상 정면으로 맞서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임서율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직 잘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었다.하도원은 그제야 그녀를 내려놓고 느릿하게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봤다.“난 서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죠. 여기서 얘기하긴 귀찮네요.”“무슨 뜻이에요?”그는 턱짓으로 자신의 차 쪽을 가리켰다.“타요.”임서율은 곧장 임규한 쪽 상황이 떠올라 망설였다.“그런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하지만 하도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차 쪽으로 걸어갔다.임서율은 그제야 알았다. 이 남자는 절대로 시간을 끌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걸.그는 이미 조수석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하도원에게선 묵직한 압박감이 밀려왔다.마치 ‘이 차, 오늘 네가 타든 안 타든 선택지는 하나’라는 분위기였다.임서율은 잠시 고민하다 휴대폰 시간을 흘끗 보고 결국 차에 올라탔다.안전벨트를 막 맨 순간, 차가 마치 폭주하듯 튀어나갔다. 순간적인 가속에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가 다시 등받이에 세게 부딪혔다.임서율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하도원을 돌아봤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그는 아무 말 없이 오히려 액셀을 더 깊게 밟았는데 그 얼굴은 마치 지옥에서 걸어나온 사신처럼 싸늘했다.임서율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차올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