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민수와 헤어진 뒤에도 수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가방 안에는 조금 전 받은 정민수의 명함이 들어 있었다.하지만 수아를 설레게 하는 것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첫 번째 작품 의뢰.그 사실이었다.수아에게는 단순한 의뢰 이상의 의미였다.언젠가 도윤을 떠나게 되는 날이 와도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도윤과 헤어지는 미래를 생각하면 여전히 아팠다.도윤에게는 이미 정해진 미래가 있었고, 자신은 언젠가 그 미래에서 빠져나와야 했다.그날이 왔을 때—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수아에게는 조금씩 모아둔 돈이 있었다.도윤과 함께 한 이후로 수아는 자신이 번 돈은 딱히 사용 할 필요가 없었다.큰돈은 아니었다.하지만 수아는 그 돈을 거의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언젠가 자수아가 아픔을 억누르며 그림에만 몰두하자, 민수는 다정한 후원자의 가면을 쓴 채 시시때때로 그녀의 원룸을 찾아왔다. 따뜻한 차를 건네며 위로를 건네고, 이별의 상처로 허기진 마음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들며 안식처인 척 연기했다. 수아는 그 친절의 이면에 도사린 검은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채, 고립된 공간에서 점점 더 민수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지고 있었다.민수는 로비를 지나가다가 그림 앞에 서 있는 수아를 발견했다.그녀는 높은 작업용 발판에 올라가 캔버스 윗부분에 색을 입히고 있었다.민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수아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그림에 집중하는 것은 늘 같았지만,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민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오후 두 시가 넘었다.그는 천천히 수아에게 다가갔다.“수아 씨.”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이수아 씨.”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아, 대표님.”민수는 미소를 지었다.“점심은 드셨어요?”수아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그러다 시계를 확인했다.“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민수의 눈빛이 움직였다.“안 드셨군요.”수아는 어색하게 웃었다.“그림에 집중하다 보니…….”“내려오세요.”“네?”“식사부터 하시죠.”수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조금만 더 하면 오늘 계획한 부분은 끝날 것 같아요.”민수는 캔버스를 바라봤다.“그림은 도망가지 않습니다.”수아는 작게 웃었다.“알아요
이별이란 이름의 칼날로 서로를 베어낸 뒤, 두 사람은 각자의 지옥 속으로 파고들었다.수아와 도윤은 그렇게 헤어졌다.오히려 너무 사랑했기에,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선택한 이별이었다.수아는 그 지독한 상실의 아픔과 눈물을 숨기기 위해, 민수에게 의뢰받은 그림에만 미친 듯이 매달렸다. 붓을 쥔 손이 부서져라 캔버스를 채워나갔지만, 홀로 남겨진 원룸의 밤은 너무나 시리고 잔인했다.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일이 아니었다.함께했던 시간 속에 남겨진 수많은 습관을 하나씩 지워내는 일이었다.하지만 머리로 이해한 이별을 마음까지 받아들이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필요했다.온기 없는 침대는 이불을 덮어도 한없이 추웠고, 허전함을 견디지 못한 수아는 일부러 채널도 돌아가지 않는 텔레비전을 켜둔 채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곤 했다. 눈을 감으면 도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드는 순간조차 눈물로 얼룩졌다.수아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낯선 천장이 보였다.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무심코 옆으로 손을 뻗었다.그러나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침대 시트뿐이었다.“…….”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아무도 없었다.수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제 정말 혼자구나.’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것 같았다.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당겨도 추웠다.수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그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일하자, 이수아.”그림은 수아에게 유일한 도피처가 되어 있었
본가 서재를 박차고 나와 자신의 차에 올라탄 도윤의 손끝은 아직도 차갑게 떨리고 있었다. ‘네가 약혼식을 거부한다면 더 힘들어지는 건 그 여자일 거야.’어머니 이명희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도윤은 이를 악물었다.그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도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젠장…….”그때였다.조수석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울렸다.김민철 비서였다.도윤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김 비서.”“전무님, 확인된 내용이 있습니다.”도윤의 등이 곧게 펴졌다.“수아 찾았어?”“네. 정민수 대표의 빌딩으로 들어간 것이 확인됐습니다.”정민수. 그 이름이 귀에 박히는 순간, 도윤의 눈앞이 새하얗게 뒤틀렸다.도윤은 즉시 차를 몰아 민수의 빌딩을 향해 미친 듯이 엑셀을 밟았다. 달리는 내내 수아의 번호로 거듭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수아야…….”그는 낮게 중얼거렸다.빌딩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도윤은 민수의 번호를 확인해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뒤,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 잘나신 태하그룹의 후계자께서 이 밤에 나한테 웬일이실까?’그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 묻어 있었다.“정민수.”잠시 침묵이 흘렀다.도윤은 눈을 감았다.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을 도발이었다.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다른 것이 중요했다.“이수아 어디 있어?”민수는 잠시 침묵했다.그리고 낮게 웃었다.“인사도 없이 본론부
차태하는 잠시 침묵했다.그리고 대답했다.“그렇다.”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차태하는 말을 이어갔다.“네가 지금까지 태하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차태하는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기업의 수장은 자신의 감정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서재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네가 지금 맡고 있는 태하그룹에는 수만 명의 직원들이 있다.”차태하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그 직원들 뒤에는 또 그들의 가족이 있다.”“…….”“네가 내리는 결정 하나에 수많은 사람의 생계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도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그런데 너는 지금 여자 때문에 그룹의 중요한 결정을 뒤집겠다고 하고 있어.”“아버지.”“내 말이 틀렸느냐?”차태하는 단호했다.“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라.”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너는 단순히 차도윤이라는 한 남자가 아니야.”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태하그룹의 후계자다.”차태하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사업 자료를 가리켰다.“그 이름에는 책임이 따른다.”그는 한층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개인의 감정이나 이익보다 그룹 전체를 먼저 생각해야 해.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그 결과가 태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부터 판단해야 한다.”도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버지.”“한서희와 결혼해서 현성그룹과 결탁했을 때 얻는다는 그 거대한 이익…… 그런 정략적인 결혼 타이틀이나 조건 따위 없어도, 제 능력만으로 태하를 얼마든지 더 크게 키울 수 있습니다!"도윤은 어머니를 바라봤다.“어머니께서는 제가 현성그룹의 사위가 되지 않
태하그룹 본가도윤은 차를 세우고도 한동안 운전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핸들을 움켜쥔 두 손에는 아직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잠시 후,서재의 문이 묵직하게 닫혔다.서재 안에는 이명희 여사와 차태하 회장이 나란히 앉아 도윤을 맞이했다. 평소라면 부모 앞에서의 예우를 갖추었겠지만, 지금 도윤의 눈에는 그 어떤 형식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꾹꾹 눌러 담은 그의 표정은 살얼음판처럼 차갑고도 위험했다.도윤이 들어서자마자, 이명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약혼식 준비로 바빠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들고 연락도 안 되더니, 그 여자가 집을 나가니 이 밤에 미친 듯이 달려오는구나!"어머니의 비꼬는 투에 도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어머니…… 설마 지금까지 그 사람을 계속 감시하고 계셨던 겁니까?"이명희는 숨길 생각조차 없다는 듯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감시라니? 태하그룹의 후계자가 될 내 아들의 발목을 잡는 하찮은 년의 동정을 파악하는 게 당연한 내 일 중 하나일 뿐이다. 다행히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네 약혼식이 치러지기 전에 스스로 그 집을 기어 나갔더구나."도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어머니.”“왜? 내가 틀린 말 했니?”명희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약혼식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어. 그런데 정작 약혼할 당사자는 전화도 제대로 받지 않고, 의상 피팅도 거절하고, 리허설 일정도 잡지 않고 있잖니.”이명희의 입에서 나오는 ‘기어 나갔다’는 말 한마디에 도윤의 머릿속이 쿵 하고 끊어졌다. 어머니가 그동안 수아에게 얼마나 지독하고 모멸찬 말들을 쏟아부었을지, 그로 인해 수아가 얼마나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편지 한 장 남긴 채 도망쳤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 도윤은 가슴이 미어졌다.명희는 잠시 아들을
도윤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서재 책상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던 하얀 봉투를 집어 든 순간, 이미 가슴 한구석은 시리게 내려앉고 있었다.‘도윤 씨…’그 첫 줄을 읽는 것만으로도 도윤의 심장은 칼로 도려내듯 찢어졌다.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듯 묵묵히 버텨왔던 그였지만, 수아가 꾹꾹 눌러 담은 마지막 진심 앞에서는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행복했던 추억,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씩씩하게 잘 살 테니 행복해달라는 당부까지. 편지 한 장 구석구석에 묻어나는 수아의 온기와 눈물이 도윤의 목을 사정없이 졸라맸다."수아야……!"도윤은 이를 악물었다.“지금 나한테…….”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도윤은 급하게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수아의 번호를 눌렀다.—지금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 있어…….냉혹한 기계음만이 귀를 때렸다. 다시 한번, 미친듯이 번호를 눌러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도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젠장…….”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이수아.”도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게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아?”그는 편지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나한테 이렇게 편지 한 장 남겨놓고 사라지면…….”말끝이 떨렸다.“내가 알겠다고 할 것 같아?”분노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수아가 정말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졌다는 두려움.“이수아!”그의 목소리가 서재 안에 울려 퍼졌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그는 거칠게 서재 문을 열었다.“아주머니!”도윤의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유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