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화. 가장 찬란한 두 번째 인생(최종화)다시 시간이 흘렀다.대저택의 넓은 잔디 정원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민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남동생의 두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맞춰 주고 있었다.“하나, 둘. 천천히.”아이가 몇 걸음 걷다가 잔디 위에 주저앉자 민지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에이든은 카메라를 들고 두 아이의 모습을 정신없이 찍고 있었다.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던 혜진이 물었다.“사진을 몇 장이나 찍는 거예요?”“중요한 순간입니다.”“아까부터 중요한 순간만 백 장은 넘은 것 같은데요?”“전부 보관해야 합니다.”혜진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에이든의 온기를 느꼈고, 낮에는 라온 그룹의 대표로 자신의 꿈을 이어갔다.저녁이 되면 민지와 아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과거의 혜진은 행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다.좋은 아내가 되어야 했고,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했으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했다.하지만 지금의 혜진은 알고 있었다.진짜 행복은 자신을 잃으며 얻는 것이 아니었다.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혜진은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에이든은 그녀가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허리를 끌어안았다.“쉬지 않고 왜 나왔습니까?”“남편이 사진만 찍고 있어서요.”“아이들의 성장 기록을 남기는 중입니다.”혜진은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나도 찍어 줘요.”에이든은 카메라를 내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Last Updated: 2026-07-26
Chapter: 54화. 다시 날아오른 여자결혼식이 끝난 뒤에도 혜진과 에이든의 삶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라온 뷰티 그룹은 필리핀을 넘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하며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혜진은 회사가 커질수록 처음 세웠던 원칙을 더욱 분명히 지켰다.누군가의 기준에 맞추기 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브랜드.그 철학은 국경을 넘어 수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었다.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나갈 무렵, 혜진은 아시아 경제 포럼의 메인 연사로 초청받았다.그때 그녀의 배 속에는 에이든과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만삭에 가까운 몸이었지만 혜진은 단정하게 재단된 크림빛 임산부 정장을 입고 연단에 올랐다.수천 명의 기업가와 투자자, 언론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카메라 셔터가 연이어 터졌지만 혜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진정한 성공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혜진의 차분한 목소리가 넓은 행사장을 채웠다.“상처와 실패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장내가 조용해졌다.“저 역시 한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제게는 다시 시작할 용기와 사랑하는 딸, 그리고 끝까지 저를 믿어 준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객석 한쪽에는 에이든과 민지가 앉아 있었다.에이든은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혜진을 바라보고 있었고, 민지는 두 손을 모은 채 엄마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무너졌다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무엇을 지키고 다시 세울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미래가 시작됩니다.”강연이 끝나자 장내에는 뜨거운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Last Updated: 2026-07-26
Chapter: 53화. 우리의 영원한 시작
결혼식 당일.마닐라의 하늘은 마치 두 사람을 축복하듯 티 한 점 없이 맑았다.이른 아침부터 프라이빗 리조트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화이트 장미와 피오니, 난초, 그리고 은은한 열대 꽃들이 해변 정원을 가득 채웠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향해 길게 이어진 버진로드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신부 대기실.혜진은 거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순백의 실크 웨딩드레스는 화려하기보다 우아했다.목선을 따라 흐르는 레이스와 자연스럽게 퍼지는 긴 트레인이 그녀의 품격을 더욱 빛나게 했다.메이크업을 마친 스타일리스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정말 아름다우세요."혜진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예전에도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날의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다.시댁의 눈치를 보며,남편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자신의 결혼식이면서도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했다.혜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거울 속에는 더 이상 과거의 윤혜진이 아니었다.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된 여자가 서 있었다.그때 문이 살며시 열렸다.민지가 작은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엄마."혜진이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우리 공주 왔네."민지는 한참 동안 엄마를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응?""세상에서 제일 예뻐."혜진은 웃으며 아이의 이마에 입을
Last Updated: 2026-07-25
Chapter: 52화. 가문의 문이 열리다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아침.에이든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혜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평소와 달리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오늘 오후, 유럽에서 우리 가문의 어르신들이 도착합니다."혜진은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긴장하고 있네요?"에이든은 작게 웃었다."솔직히 그렇습니다."그는 혜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그분들은 제게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입니다.""하지만 당신을 평가하려는 자리는 아닙니다."혜진은 부드럽게 그의 손을 감싸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 아니에요.""다만 당신의 가족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싶을 뿐이에요."에이든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품으로 끌어안았다."당신은 언제나 저보다 강한 사람입니다.""아니에요."혜진이 웃으며 그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지금은 당신이 옆에 있어서 강해진 거예요."에이든은 그녀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오늘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오후.마닐라 국제공항에는 에이든의 가문을 상징하는 전용기가 착륙했다.유럽에서 온 가문의 원로들과 친척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오랜 전통을 지켜 온 명문가답게 모두가 품격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날 저녁.새 저택에서는 가족만을 위한 작은 만찬이 준비되었다.혜진은 화려함보다 절제된 우아함이 돋보이는 네이비 실크 드레스를 선택했다.블루
Last Updated: 2026-07-25
Chapter: 51화. 세상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다결혼 소식이 공식 발표되자 가장 먼저 들썩인 곳은 마닐라가 아니었다.한국이었다.필리핀 금융그룹의 후계자이자 라온 그룹의 대표인 윤혜진이 결혼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경제지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장식했다.한때 그녀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라며 함부로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글로벌 CEO'와 '필리핀 대표 재벌가의 예비 안주인'이라는 수식어를 믿지 못한 채 기사만 새로고침하고 있었다.어떤 이는 축하를 보냈고,어떤 이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여전히 악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하지만 혜진은 더 이상 그런 말들에 흔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이제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평가로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며칠 뒤.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매거진과의 화보 촬영이 진행되었다.혜진은 깊은 레드 컬러의 수트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왼손 약지에는 에이든이 끼워 준 블루 다이아몬드 웨딩링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대표님, 시선을 조금만 이쪽으로 부탁드립니다."카메라 셔터가 연이어 터졌다.촬영이 끝난 뒤 인터뷰가 이어졌다.기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혜진은 잠시 생각한 뒤 미소를 지었다."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기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혜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그 시간을 견뎌냈기에 지금의 제가 있으니까요.""그리고 이제는 과거를 증명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려고 합니다."
Last Updated: 2026-07-24
Chapter: 50화. 별빛 아래의 두 번째 약속리조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이든은 해변의 가장 외딴 곳에 혜진만을 위한 특별한 저녁 식사 자리를 준비해 두었다.백사장 위에는 수백 개의 작은 촛불이 은은한 길을 만들고 있었고, 잔잔한 파도 소리가 고요한 음악처럼 밤공기 속에 퍼졌다.혜진은 에이든이 준비해 둔 화이트 실크 드레스를 입고 촛불 사이를 천천히 걸어왔다.바닷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드레스 자락과 달빛을 머금은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검은 수트를 입고 기다리던 에이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만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요?”혜진이 수줍게 묻자 에이든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매일 보고 있는데도, 볼 때마다 처음 만난 사람처럼 설렙니다.”혜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요즘은 정말 말을 너무 예쁘게 해요.”“당신이 제게 예쁜 말만 하고 싶게 만드니까요.”에이든은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촛불과 별빛 아래에서 천천히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민지는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다 먼저 잠이 들었고, 오랜만에 두 사람만의 조용한 시간이 찾아왔다.“휴가가 끝나는 게 아쉬워요.”혜진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다시 오면 됩니다.”“그때도 이렇게 전부 준비할 거예요?”“당신이 좋아한다면 매번 더 잘 준비하겠습니다.”혜진은 웃으며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이 정도면 충분해요. 당신이 옆에 있잖아요.”그 말에 에이든의 눈빛이 깊어졌다.식사가 끝날 무렵,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혜진 씨.”에이든은 그녀의 손을 잡
Last Updated: 2026-07-24
Chapter: 146화. 불길 속에 갇히다“우리는 같이 들어가고.” 연수가 태성의 말을 이었다. “같이 나가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비밀 통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진혁이 휴대전화의 불빛으로 앞을 비추며 먼저 좁은 통로를 살폈다. 벽과 천장은 모두 녹슨 철판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오래된 먼지 위에는 누군가 최근에 오간 듯한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태성은 한 손으로 연수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벽을 짚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통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답답해졌다. 오래된 기름과 금속이 뒤섞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혁이 앞쪽을 살피며 낮게 말했다. “통로 끝에 공간이 하나 더 있어.”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아직은 모르겠어.” 진혁이 바닥의 발자국을 비췄다. 안쪽으로 들어간 흔적뿐 아니라 밖으로 나온 흔적도 여러 개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 이 장소를 최근까지 드나들었다는 뜻이었다. 연수는 태성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태성이 곧바로 그녀를 돌아봤다. “괜찮아?” “네.” 연수는 짧게 대답했지만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태성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 뒤에 있어.” “오빠도 혼자 앞에 나가지 마요.” “연수야.” “약속했잖아요.” 연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Last Updated: 2026-08-16
Chapter: 145화. 함께 나가는 길연수는 한동안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강한 척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태성은 휴대전화를 진혁에게 건넨 뒤 연수 앞에 섰다. “연수야.” 연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성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나 봐.” 연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오빠.” “응.” “저 사실 무서워요.” “알아.” “혹시 아빠가 정말 잘못한 거면요?” 태성의 표정이 아프게 흔들렸다. 연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제가 믿었던 아빠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니면 어떡해요?” 태성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그래도 네가 사랑받았던 기억까지 거짓이 되는 건 아니야.” “…….” “사람은 잘못할 수 있어.”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진실을 안다고 해서 네가 아버지를 사랑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연수는 눈을 감았다. 태성의 숨결과 체온이 가까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진실이 나와도.” “네.” “그 진실이 널 아프게 하면 나도 같이 아플게.” 연수가 눈을 떴다. “왜 그런 말까지 해요.” “네 아픔을 대신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Last Updated: 2026-08-16
Chapter: 144화. 놓지 않는 손“거짓말.” 연수는 힘겹게 말했다. 그러나 이민우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당신도 이미 알아봤잖아.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보았던 아버지의 서명이니까. 연수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 말은 정확했다. 문서에 적힌 서명은 너무도 익숙했다. 아버지가 생일카드에 써주던 이름. 학교 준비물에 적어주던 글씨. 회사에서 돌아와 피곤한 얼굴로 자신이 내민 알림장에 서명하던 손끝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민우는 연수의 침묵을 즐기는 듯했다. —왜 아무 말도 못 하지? 연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명만 진짜일 수도 있어.” —그래? “내용을 속이고 받은 서명일 수도 있고,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박성규가 남긴 유서도 거짓이라고 해야겠군. 태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유서지?” —박성규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기록. 박성규의 아내는 녹음테이프와 수첩을 건넸지만 유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성은 이민우가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런 게 있다면 공개해.” —때가 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보여주지 못하는 거겠지.” 태성의 도발에도 이민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143화. 아버지의 서명지하 공간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낡은 철제 선반과 부서진 나무 상자가 어둠 속에 줄지어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서류철이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습기에 젖어 종이가 서로 붙어 있었고,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진혁은 손전등으로 벽에 붙은 번호표를 비췄다. M-12. M-13. M-14. 번호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거워졌다. 태성은 연수보다 반걸음 앞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튀어나오면 가장 먼저 자신이 막겠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연수는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다 조용히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태성이 곧바로 돌아봤다. “왜?” “그냥요.” “무서워?” 연수는 잠시 망설이다 작게 대답했다. “오빠가 너무 앞서 가서요.” 태성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말했잖아. 떨어지지 않겠다고.” 연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오빠가 저보다 먼저 위험한 걸 발견하려고 자꾸 앞에 서잖아요.” “그게 낫지.” “저는 안 나아요.” “연수야.” “오빠가 다치는 것도 저한테는 똑같이 아픈 일이에요.” 태성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연수는 그의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142화. 이민우의 덫진혁에게서 CK 물류에 관한 보고가 도착한 것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였다. 박성규가 남긴 수첩 속 메모. M-17 / CK 물류 / 지하 보관실. 그 짧은 문장을 시작으로 진혁은 폐업 법인의 기록과 토지대장, 건물 소유권 변경 내역을 밤새 추적했다. CK 물류는 서류상으로 십 년 전에 폐업한 회사였다. 하지만 도심 외곽에 자리한 물류 터미널은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 소유자는 이창석이나 이민우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작은 투자 법인이었다. 문제는 그 투자 법인의 대표가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대표자는 오랫동안 해외에 체류 중이었고, 국내에서 회사를 운영한 기록도 없었다. 그럼에도 세금과 건물 관리비, 화재보험료는 단 한 번도 연체되지 않았다. 누군가 건물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게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진혁이 마지막으로 찾아낸 기록은 더욱 수상했다. 정우 산업이 파산한 직후, 수십 개의 문서 상자가 CK 물류로 옮겨졌다는 운송 기록이었다. 운송 지시자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지만 도착지는 분명했다. 지하 보관실 M-17. 그리고 그날 이후 그 공간이 다시 열렸다는 공식 기록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태성은 진혁이 보내온 자료를 몇 번이고 살펴봤다. 모든 단서가 지나치게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웠다. 마치 누군가 자신들이 그곳까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길을 닦아놓은 것 같았다. 태성은 옆에서 자료를 읽고 있던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141화. 장부를 기다리는 자“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박성규의 아내가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연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모님과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태성도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저희가 찾아온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안전한 거처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여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 누구도 믿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은 카세트테이프와 수첩을 증거물 보관 봉투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원본은 최대한 훼손되지 않도록 전문 기관에 복원과 감정을 맡기겠습니다.” “복사본을 먼저 만들고, 원본은 사모님 동의 없이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여자는 박성규의 사진을 한 번 바라본 뒤 말했다. “가져가요.” “그 사람도 이걸 숨기기만 하려고 남긴 건 아닐 테니까.” 연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진실만 밝히는 게 아니라 박 상무님의 진실도 함께 밝힐게요.” 박성규의 아내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남편이 잘못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마요.” 연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사람도 돈을 받았고, 다른 사람의 회사를 망가뜨리는 일에 가담했어요.” 여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겁을 먹었다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91화. 위험한 선택태산그룹 본사.27층 전무실.시계는 어느새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대부분의 사무실은 불이 꺼졌지만, 전무실 안만큼은 형광등의 차가운 백색빛이 적막한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거대한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이진성의 얼굴은 창백했다.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손에 쥔 만년필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며칠 전 회계팀장이 했던 말이 또다시 귓가를 파고들었다.'이번 분기 자금 집행 내역은 회장님께 직접 보고드릴 예정입니다.'그 한마디는 시간이 지날수록 목을 조여 오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다.공금에 생긴 구멍은 이미 자신의 힘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처음에는 잠깐 빌려 쓰는 돈이라고 생각했다.곧 주식으로 손실을 만회하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시장은 그의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유진에게 사 준 명품과 보석, 고급 외제차, 고가의 생활비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고미혜에게도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결국 그의 앞에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었다.진성은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미리 준비해 둔 허위 세금계산서와 지출 결의서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그는 잠시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깊게 눈을 감았다."...미안합니다."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아버지에게인지.회사에게인지.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양심에게인지.잠시 후,그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펼쳤다.노트북에 회사 공인인증 USB를 연결하고 자금 흐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계좌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키고,허위 거래처를 입력하고,실제 지출처럼 보
Last Updated: 2026-08-16
Chapter: 90화. 깊어지는 밤의 여운혜진과의 잠자리에서도 지혜를 떠올린 민성은 평소와 달리 그녀의 집에서 밤을 지내지 않고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민성은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허전함을 덮기 위해 찾아갔던 곳이었다. 언제나처럼 자극적인 쾌락과 온기로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내려 했지만, 오늘 밤은 어쩐 일인지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혜진의 품 안에서 격렬하게 얽혀 있던 순간조차, 그의 시선 끝에는 엉뚱하게도 행복나무에서 환하게 웃던 지혜의 맑은 미소가 아른거렸다.차가운 핸들 위에 손을 올린 채, 민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양손으로 핸들을 감싼 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오늘도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밤을 보냈다.맛있는 음식.술.그리고 서로의 외로움을 잠시 잊기 위한 혜진과의 섹스.예전 같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달랐다.그 모든 시간이 끝난 뒤에도 마음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오히려 더 깊은 허전함만 남아 있었다.민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왜 이러는 거지."눈을 감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혜진이 아니었다.행복나무 보육원 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던 지혜였다.아이의 운동화 끈을 묶어 주며 환하게 웃던 얼굴.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등을 다독이던 따뜻한 손길.그 평범한 장면들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민성은 피식 웃었다."...미치겠네."그녀는 화려하지 않았다.짙은 화장도,비싼 명품도,남자를 유혹하는 기술도 없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만 서면 마음이 조용해졌다.그 평온함이 낯설었다.그리고 조금 두려웠다.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동안 그는 사람에게 마
Last Updated: 2026-08-16
Chapter: 89화. 지우려는 온도친구인 재혁과 무거운 술자리를 마치고 헤어진 민성은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차를 돌리지 않았다.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묘한 허전함과 지혜를 향한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재혁의 충고대로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서늘한 공백을 견딜 수 없었던 민성은 결국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지금… 뭐 해?""어머, 민성 씨?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혜진의 목소리는 반가움으로 젖어 있었다. 평소 두 사람이 필요할 때만 가볍게 만나 몸을 섞던, 깊은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였다."지금 갈게."짧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민성은 곧장 혜진의 오피스텔로 향했다.도착한 민성을 맞이한 혜진은 오랜만의 방문에 기분이 좋은 듯, 평소보다 훨씬 짙은 향수를 뿌리고 아슬아슬한 슬립 차림으로 그를 반겼다."오늘따라 연락도 없이 웬일이에요? 얼굴이 왜 이렇게 굳어 있어…"혜진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민성의 목에 두 팔을 감싸 안으며 몸을 밀착해 왔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체온과 자극적인 손길은 민성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민성은 혜진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두 사람의 몸은 곧장 침실로 이어졌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꽃이 튀어 올랐다.학, 하아……!침대 위에서 혜진은 민성을 완전히 사로잡겠다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몸을 얽어맸다. 그의 귓가에 야릇한 속삭임을 뱉어내고, 손톱으로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자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도록 강하게 매달렸다.하지만 민성의 몸은 혜진과 엉켜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혜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자신의 몸짓 하나에 눈이 멀어 광기 어린 시선을 보내던 민성이었지만, 오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88화. 친구의 충고주연을 집 앞까지 다정하게 데려다준 뒤, 재혁은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 문이 닫히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에도 재혁의 입술 끝에는 여전히 아스라이 묻어나는 온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이건… 당신에게 드리는 저의 위로예요.’조심스럽지만 진심을 담아 건네던 주연의 목소리와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며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아직 결혼이라는 계약에 묶여 있었지만, 그 속에 피어난 감정은 이제 완벽한 진심으로 스며들고 있었다.재혁은 긴 숨을 내쉬며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찰나,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화면에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민성.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성의 목소리는 평소의 여유롭고 능청스러운 톤과 달리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야.""시간 있냐?"재혁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어?""술 한잔하자.""이 밤중에 갑자기?"잠시 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그냥.""오늘은 네 얼굴이 좀 보고 싶다."친구의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피로와 헛헛함을 알아챈 재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알겠다.""삼십 분 뒤.""늘 가던 그곳에서 보자."청담동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프라이빗 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구석진 부스 자리에 앉아 있는 민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혁이 다가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민성 앞의 테이블 위에는 이미 독한 위스키 잔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꽤 늦었네, 최 대표.""차가 좀 막혔어. 미안하다."재혁은 민성의 맞은편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바텐더를 향해 가벼운 칵테일을 주
Last Updated: 2026-08-15
Chapter: 87화. 당신에게 주는 위로한강의 야경이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재혁의 검은 세단은 조용한 도로를 따라 성북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뒷좌석에는 오늘 두 사람이 함께 고른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주연은 뒤를 돌아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오늘 책을 정말 많이 샀네요."재혁도 백미러로 책들을 한번 바라봤다."생각보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 많더군요."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책은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주연이 고개를 돌렸다."네?""무겁기도 하고.""이번 주말 행복나무에 갈 예정이니 제가 직접 가져가겠습니다."주연은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전보다 훨씬 편안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어느새 차는 주연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재혁은 언제나처럼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조심해서 들어가세요."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재혁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주연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시 걸어왔다.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재혁의 눈을 바라봤다.그 눈빛에는 오늘 들었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혼자 견뎌 온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주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재혁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주연 씨..."주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오늘은...""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그녀는 아주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짧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긴 시
Last Updated: 2026-08-14
Chapter: 86화. 그의 어린 시절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창밖으로는 겨울밤의 불빛이 강물 위에 길게 번지고 있었고, 레스토랑 안에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주연은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조용히 재혁을 바라보았다.조금 전 서점에서 아이들 책을 고르던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외우려 애쓰던 모습.어떤 책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모습.그리고 아이들을 생각하며 미소 짓던 모습.그런 사람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지금의 사람이 되었는지 문득 알고 싶어졌다.주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재혁 씨."재혁이 고개를 들었다."아까...""예전 이야기는 재미없는 이야기라고 하셨잖아요.""...네.""그래도 듣고 싶어요.""재혁 씨가 어떤 사람인지."잠시 침묵이 흘렀다.재혁은 컵에 담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들려준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달랐다.그녀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것 같은 이상한 믿음이 들었다.재혁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육원에 들어갔습니다."주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희망 보육원이었습니다.""그날도 겨울이었어요.""눈은 오지 않았지만...""지금처럼 많이 추운 날이었습니다."재혁의 시선이 천천히 과거를 향했다."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그 한마디에 주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Last Updated: 2026-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