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4화. 사랑하는 방식이른 아침, 채 밝지 않은 여명의 빛이 창가를 두드릴 때쯤 재혁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재혁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어젯밤 아쉽게 헤어져야만 했던 주연의 얼굴이었다. 하루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그녀가 그리웠고,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었다. 재혁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회사로 곧장 향하지 않았다. 주연이 머무는 아파트로 향하기 전, 그는 유명 베이커리와 죽을 살 수 있는곳을 들렀다. 주연이 아침으로 가볍게 먹을 샌드위치와 향긋한 커피, 그리고 아직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지혜를 위한 부드러운 전복죽까지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바로 그때, 핸드폰 화면에 주연으로부터의 메시지가 반짝였다. ‘재혁 씨, 오늘 아침은 제가 지혜랑 같이 있으려고요. 보육원 원장님도 지혜 잘 챙겨주라고 연락이 와서요. 오늘은 보육원에 나가지 않고 지혜 옆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침이 이른 시간이었다. 재혁은 차에서 내려 주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재혁의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잤어?” “재혁 씨?” 그제야 잠이 조금 깬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봐.” “네?” “문 앞이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라고요?” 재혁이 웃었다. “현관 앞이라고.”
Last Updated: 2026-10-01
Chapter: 173화.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깊은 진심과 묵직한 다짐을 나누었던 거실의 공기를 뒤로하고, 재혁은 주연을 태운 차를 몰아 지혜의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차 안은 아까 전의 긴장감 대신, 서로를 향한 단단한 신뢰와 애정이 빚어낸 은은한 온기로 가득했다. 운전대를 잡은 재혁의 한쪽 손은 여전히 주연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잠시 후, 차는 지혜의 아파트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조수석 문을 열고 내려 주연의 손을 잡은 재혁은, 그녀를 그냥 올려보내지 않고 아파트 현관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스쳤지만, 주연을 바라보는 재혁의 눈빛만큼은 봄날처럼 따스했다."…… 왠지 오늘 밤은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지네."주연이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재혁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주연아.”주연이 돌아봤다.재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그리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잘 자.”“재혁 씨도요.”“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알았어요.”재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다정하게 웃었다."오늘은 편히 쉬어. 내일 아침 출근길에 데리러 올게." 주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주연이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지혜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연을 맞이했다."어? 주연아? 너… 오늘부터 재혁 씨 집에서 같이 지내는거 아니었어?”“왜 다시 이쪽으로 와?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지혜가 정말 걱정하는 얼굴을 하자 주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무 문제 없어.”“정말?”“응.”“그런데 왜?”주연은 지혜를 바라봤다.“너 때문에.”
Last Updated: 2026-10-01
Chapter: 172화. 당신에게 무릎 꿇게 할 거야“그리고 그 사람은…….”주연은 잠시 말을 멈췄다.입 밖으로 꺼내려니 2년 전의 기억이 생각보다 선명하게 되살아났다.백화점에서 최진태를 보는 순간 굳어버렸던 몸.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끝이 차가워졌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재혁은 재촉하지 않았다.그저 주연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한참 후 주연이 입을 열었다.“2년 전에…… “재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주연은 천천히 2년 전 이야기를 시작했다.최진태와 얽히게 된 일.그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큰 충격과 수치심을 느꼈는지.그리고 그 일을 빌미로 최진태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던 것을.주연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재혁의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사라졌다.그는 단 한 번도 말을 끊지 않았다.하지만 소파 위에 놓인 손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가 있었다.손등의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였다.2년 전 이창수 회장이 내밀었던 결혼 조건.3년의 계약.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창수 화장은 딸을 그 망나니와 결혼 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주연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던 재혁의 손이 꽉 쥐어졌다. 하얗게 질린 너클 뼈 위로 핏줄이 곤두섰고, 그의 눈동자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그의 아내, 세상 누구보다 아껴주고 보호해야 할 여자가 세상의 차가운 폭력 앞에 방치되었던 그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그 최진태라는 놈이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났더라면, 재혁은 이성 따위는 집어치우고 목이라도 조를 수 있을 것 같았다.주연이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순간 단단하게 굳어 있던 재혁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재혁은
Last Updated: 2026-10-01
Chapter: 171화. 우리 집주연이 따뜻한 차를 몇 모금 마시는 사이,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작은 카드와 몇 개의 열쇠가 들려 있었다. 재혁이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주연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이건 뭐예요?” “집 비밀번호는 당신 휴대전화에 보내놨어.” “네?” “그리고 이건 필요한 열쇠들.” 주연이 눈을 깜빡였다. 재혁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이제 나 없을 때도 언제든 들어와.” 주연은 재혁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열쇠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 작은 열쇠 하나가 이상할 만큼 마음을 울렸다. 이제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곳. 재혁이 없어도 들어올 수 있는 곳. 자신의 물건을 두고— 자신의 옷을 걸어두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 우리 집. 주연은 천천히 거실을 둘러봤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그런데 할 일이 정말 많겠네요.” “뭐가?” “이 집이요.” “왜?” “너무 삭막해요.” 재혁도 덩달아 거실을 둘러봤다. “뭐가 부족한데?” “많이요.” 주연은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기 시작했다. “일단 쿠션도 좀 놓고, 거실에 화분도 두고…….” 벌써 머릿속으로 집을 바꾸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기 작은 테이블 하나 있으면 좋겠어요. 조명도 좀 따뜻한 걸로 바꾸고.” 재혁은 그런 주연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또?” “주방도요.” “주방?” “냉장고에 물밖에 없잖아요.” 재혁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지갑을 꺼냈다. 잠시 후 블랙 카드 한 장이 주연 앞으로 내밀어졌다. 주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카드를 바라봤다. “이건 또 뭐예요?” “집 꾸미는 비용.” “재혁 씨.” “사람 사는 집처럼 만들어준다며.” 재혁은 카드를 주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집 좀 사람 사
Last Updated: 2026-09-28
Chapter: 170화. 이제 우리의 집부모님과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온 주연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몇 번이나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2년 동안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엄마를 다시 안았고—아버지와 같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감정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도망치지 않았다.재혁은 운전하면서도 그런 주연을 몇 번이나 곁눈질했다.“좋아?”주연이 고개를 돌렸다.“뭐가요?”“집에 다녀온 거.”주연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어요.”재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다행이네.”“재혁 씨가 같이 가줘서 그런 것 같아요.”신호에 차가 멈췄다.재혁이 주연을 바라봤다.“앞으로도 같이 갈게.”주연이 웃었다.“네.”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앞으로도—함께. 지혜가 있는 임대 아파트로 가기 전, 두 사람은 재혁의 집에 먼저 들렀다.낮에 백화점에서 구입한 옷과 물건들을 가져다 놓기 위해서였다.현관문이 열리고 주연이 안으로 들어섰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처음 왔던 날이 선명했다.모델하우스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집.냉장고를 열었더니 물밖에 없어 자신이 기가 막혀 했던 것도 떠올랐다.그때는 이곳이 그저 재혁의 집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주연은 현관에 서서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이제 여기가…… 내 집이기도 한 거구나.묘한 기분이었다.재혁이 양손
Last Updated: 2026-09-28
Chapter: 169화. 뜻밖의 재회집을 나온 진성은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었지만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두 손을 운전대 위에 올린 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사실 약속 같은 건 없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둘러댄 핑계였을 뿐이었다. 조금 전 식탁에서 오가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주연. 그런 주연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어머니.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아버지. 그리고 주연을 바라볼 때마다 눈빛부터 달라지던 재혁. 진성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다들 아주 행복해 죽겠네.”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더 답답해졌다. 그는 결국 자주 가던 칵테일 바로 차를 몰았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바 안에는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잔잔한 재즈가 흐르고 있었고, 긴 바 테이블 위로 은은한 조명이 떨어졌다. 진성은 구석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 “늘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바텐더의 물음에 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후 술잔이 놓였다. 진성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평소라면 이곳에 오기 전 유하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같이 술을 마시든 아니면 그녀의 집으로 향하든.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유하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진성은 잔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저녁 식사 자리가 다시 떠올랐다. 특히 주연과 재혁이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며 웃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다. 재혁이 테이블 아래에서 주연의 손을 잡아주는 것도 보았다. 주연도 싫지 않은 듯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비웃었다. “좋을 때지.” 그런데 이상했다. 비웃고 싶은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부러웠다. 진성의 표정이 굳었다. 어머니
Last Updated: 2026-09-27
Chapter: 98화.낮선 남자“김 실장.” 인터폰으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철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전무님.” 집무실로 들어가자 도윤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유럽 출장 일정 나왔지?” “네.” “언제 출국이야.” “다음 주 목요일입니다. 런던을 시작으로 파리, 프랑크푸르트까지 약 열흘 일정입니다.” 도윤이 서류 한 장을 넘겼다. “일정 하루 늘려.” 민철이 잠시 멈췄다. “하루를요?” “응.” “어느 도시에서 늘릴까요?” “파리.” 민철은 메모했다. “알겠습니다.”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 명 더 가.” “누구 말씀입니까?” 그제야 도윤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수아.” 민철의 손이 멈췄다. “……이수아 씨 말씀이십니까?” 민철은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공적이고 엄중한 해외 출장에 사적인 인물을 동행시킨다는 것은 도윤의 철저한 공사 구분 원칙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민철은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같이 출국하시는 겁니까?” “응.” “전 일정 동행으로 준비할까요?” 도윤이 잠시 생각했다. “회사 일정에는 안 따라다녀도 돼. 호텔이랑 이동만 같이 준비해.” “네.” “항공편도.” 민철은 다시 한번 확인
Last Updated: 2026-10-01
Chapter: 97화. 행복이 스며드는 자리세상의 낯선 소문과 시선을 뒤로하고 도윤 옆에 있는 동안은 도윤을 온전히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수아의 일상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아가씨, 그렇게 많이 넣으면 짜요.”“아…… 진짜요?”수아가 화들짝 놀라 숟가락을 멈췄다.옆에서 지켜보던 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조금만 넣으세요.”“이 정도요?”“네. 그 정도면 돼요.”수아는 조심스럽게 국간장을 넣었다.그리고 다시 국자로 국을 저었다.아직 이른 아침이었다.평소 같으면 조금 더 자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요즘 수아는 유진을 따라 주방에 내려오는 날이 많아졌다.처음에는 그저 옆에서 구경만 했다.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유진에게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주방에 서는 법부터 서툴렀던 수아는 집사 유진의 곁에 얌전히 붙어 서서 도윤이 좋아하는 입맛과 취향을 하나씩 알아가며 서툴지만 진심 어린 손길로 식사 준비를 도왔다.수아는 애써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오늘만 생각하자.오늘 도윤이 자신의 음식을 먹고 좋아하면,그것으로 충분했다.주방 입구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도윤이었다.출근 준비를 마친 그는 짙은 회색 슈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일어났어요?”수아가 환하게 웃었다.도윤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자신을 보자 자연스럽게 번지는 미소.요 며칠 수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자신을 피하지 않았다.퇴근하면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잠들 때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품으로 들어왔다.그것만으로도 이상할 만큼 마음이 편안했다.“뭐 해?”“아침 준비했어요.”도윤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네가?”“왜요?”수아가 조금 불만스러운
Last Updated: 2026-10-01
Chapter: 96화. 다시 그의 품으로늦은 밤.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도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미국과 유럽 프로젝트 때문에 하루 종일 회의에 시달렸던 날이었다. 뉴욕 법인과의 화상회의에 이어 런던 쪽 투자사와의 미팅까지 겹치면서 제대로 식사할 시간조차 없었다.머리가 무거웠다.어깨에는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내일 아침에도 일찍 출근해야 했다.그런데 거실을 지나치던 도윤의 걸음이 불쑥 멈췄다. 소파에 수아가 있었다. 작게 몸을 웅크린 채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읽다 만 책과 미지근하게 식은 차가 놓여 있었다. 도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서희와의 약혼이 공식화되기 전, 수아는 종종 이렇게 자신을 기다렸다.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곤 했다.하지만 언론에 자신과 서희의 기사가 나간 이후부터는 달라졌다.퇴근 시간을 묻는 메시지도 줄었고,늦게 돌아오면 수아는 먼저 침실에 들어가 있었다.때로는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었다.그런 수아가 자신을 기다리던 그 모습 그대로 잠든 수아를 마주한 순간, 도윤의 가슴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수백억이 오가는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도윤은 조용히 다가가 소파 앞에 잠시 서서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뺨 위에 조금 흩어져 있었다.도윤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Last Updated: 2026-10-01
Chapter: 95화. 평범함을 내려 놓은 자리졸업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수아는 한참 동안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바라봤다. 얇은 흰색 봉투. 그 안에는 짧은 사직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처음 이 학원에 왔던 날이 떠올랐다. 카페를 그만두고 새롭게 시작한 곳.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면서 웃었고, 처음으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곳. 졸업하고 나면— 이곳에서 정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모으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 평범했던 계획을 하나씩 정리해야 했다. 수아는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문을 열자 김미숙이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수아 선생님?” “원장님,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 “그래요. 앉아요.” 수아는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 망설이다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저…… 학원 그만두려고요.” 미숙의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죄송해요.” 미숙은 봉투를 바로 열지 않았다. 오히려 수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졸업하면 정식으로 일하기로 했잖아요.” “…….” “아이들도 수아 선생님 얼마나 좋아하는데.” 미숙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아쉬움이 묻어났다. “졸업하면 이 선생님한테 정규반 몇 개 더 맡기려고 했어요.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잘하고, 학부모들 반응도 좋고.” 수아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원장님…
Last Updated: 2026-09-30
Chapter: 94화. 차도윤의 여자서울 강남의 한 프라이빗 클럽.회원의 소개 없이는 출입조차 쉽지 않은 곳이었다.늦은 밤.가장 안쪽에 자리한 VIP 룸의 문이 열렸다.“오랜만이네.”소파에 앉아 있던 한서희가 고개를 들었다.정민수.서른두 살.서울 요지에 수십 억, 수백 억 원대 빌딩을 여러 채 보유한 막대한 자산가 집안의 아들이었다. 훤칠한 외모와 여유로운 태도로 유명 연예인이나 톱모델들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는 바람둥이였지만, 그의 내면은 비뚤어진 열등감과 잔인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차도윤과 경쟁했지만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여학생이 도윤을 향한 연심 때문에 자신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했던 아픈 기억이 있었다.그날 이후로 민수는 도윤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 혹은 그의 주변에 있는 여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아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비뚤어진 집착을 품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도윤의 공식 약혼자인 서희가 먼저 접근해 온 것은 짜릿한 유흥이자 기회였다. 서희에게 잘 보여 어떻게든 인정을 받고 싶었던 민수는 서희의 연락을 받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왔던 것이다.잘 다듬어진 헤어스타일과 고가의 슈트.손목에는 쉽게 가격을 짐작하기 어려운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민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서희의 맞은편에 앉았다.“네가 먼저 만나자고 하는 날도 있네.”“왜? 싫어?”“그럴 리가.”민수가 능숙하게 웃었다.“한서희가 부르면 자다가도 나와야지.”서희가 피식 웃었다.민수는 원래 그런 남자였다.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직접 사업을 일으켜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가족이 가진 부
Last Updated: 2026-09-30
Chapter: 93화. 대답할 수 없는 관계오늘은— 수아는 차에 타지 못했다. “아가씨?”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수아가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오늘은 혼자 갈게요.” “네?” 태수가 당황했다. “도련님께서—” “그냥 오늘만…… 혼자 가고 싶어요.” “도윤씨에게는 제가 연락 할게요.” 태수는 수아의 붉어진 눈을 보았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수아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수아는 돌아섰다. 그리고 혼자 걸었다. 뒤에서 검은 세단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도윤을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사랑해 버렸다.미국과 유럽 등 해외 신규 프로젝트 진출로 인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도윤. 기사 최태수로부터 도윤에게 보고가 올라왔다. 며칠 전부터 수아가 학원 오갈 때 전용 차량을 타지 않고 직접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고 있으며, 표정 또한 영 좋지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도윤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잠시 후 책상 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수아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며칠째였다.퇴근 시간을 묻지도 않았고,언제 오느냐는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한서희와의 관계가 언론에 공개된 이후부터—수아는 조금씩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도윤은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오후 여섯 시 십 분.집에 일찍 가서 수아의 얼굴을 직접 보고 묻고 싶었다.하지만—“전무님.”
Last Updated: 2026-09-29
Chapter: 177화. 에필로그 (2)어느 늦가을 저녁이었다. 업무를 마친 태성과 연수는 태성그룹 본사 옥상 정원에 나란히 서 있었다. 재단의 지원 사업 보고를 위해 회장실을 찾았던 연수는 회의가 끝난 뒤에도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하늘은 붉은 노을과 짙은 보랏빛이 천천히 섞여 가고 있었다. 도시는 저물어 가는 햇살을 머금은 채 황금빛으로 빛났고,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이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태성은 말없이 재킷을 벗어 연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안 추워요." "바람이 차." "오빠는요?" "나는 괜찮아." 연수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태성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침묵조차 서로에게는 편안했다. 얼마 후 연수가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여기 기억나요?" 태성은 천천히 웃었다. "잊을 수가 없지." "2년 전에도 여기였잖아요." 그날. 회장이 된다는 두려움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던 사람. 그리고 그 두려움을 누구보다 담담하게 받아 주었던 사람이 연수였다. '잘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숨기지만 않으면 돼요.' 그
Last Updated: 2026-08-31
Chapter: 176화. 에필로그 (1)태성과 연수가 오래된 공원 벤치 앞에서 서로의 평생을 약속한 뒤, 두 사람은 그다음 해 봄 결혼식을 올렸다. 화려한 재벌가의 결혼식이 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과 달리, 결혼식은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만 참석한 조용한 예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얀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리던 날. 태성은 신부 입장을 기다리며 몇 번이나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수많은 임원과 기자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연수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순간만큼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길게 늘어진 베일 아래 드러난 연수의 얼굴은 맑고 평온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던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살아가던 희미한 그림자도 아니었다. 연수는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의 얼굴로 태성을 향해 걸어왔다. 태성은 그녀 앞에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연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 사이에는 오래전 작은 카페에서 태성이 끼워주었던 반지가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하얀 꽃비가 두 사람 위로 쏟아졌다. 연수는 눈을 감은 채 환하게 웃었고, 태성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정말 내 옆에 있네.” 연수가 웃으며 눈을 떴다. “이제야 믿어요?” “아직도 가끔 꿈같아.” 연수는 그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그럼 평생 확인해요.” 태성은 대답 대
Last Updated: 2026-08-31
Chapter: 175화. 가장 선명한 약속태성은 연수의 뺨에 남은 눈물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바닥이 연수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연수는 피하지 않고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연수야.” “네.” 태성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해.” 수많은 말을 나눴지만 그 한마디만큼 선명한 말은 없었다. 연수는 눈물 속에서 천천히 미소 지었다. “저도 사랑해요.” 태성은 한동안 연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려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과 입술, 붉어진 뺨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연수는 눈을 감았다. 태성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처음에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듯 짧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 수없이 엇갈렸던 시간이 그 짧은 순간 안에 조용히 녹아들었다. 태성이 천천히 물러나려 하자 연수가 그의 코트 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수는 눈물을 머금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이번에는 제가 놓지 않을게요.” 태성은 연수를 다시 품에 안았다. 다친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러웠지만,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한 포옹이었다. 연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그 소리는 두 사람이 모든 위기를 지나 마침내 같은 자리에 도착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태성은 연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연수가 다
Last Updated: 2026-08-31
Chapter: 174화. 희미하지 않은 사람태성그룹의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한 뒤, 태성과 연수는 각자의 자리에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태성은 그룹의 신뢰를 다시 세우기 위해 연일 회의를 이어갔고, 연수는 새롭게 출범할 사회공헌재단의 운영안을 준비했다. 같은 건물 안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좀처럼 긴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성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저녁 시간 비워둬. —무슨 일인데요? —중요한 일. 약속 장소는 화려한 호텔도,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레스토랑도 아니었다. 태성이 연수를 데려간 곳은 두 사람의 인연이 처음 시작된 오래된 공원 근처의 작은 카페였다. 공원 한쪽에는 어린 시절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벤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기였어요?” 연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시간이 처음 시작된 곳이니까.” 카페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창가의 작은 테이블 위에는 소박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에는 낯익은 포장지의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연수는 초콜릿을 발견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아주 오래전, 혼자 파티장 구석에 있을때 서진 오빠에게 받았던 그 초콜릿이었다. 여기 공원에서 연수가 전해 주었던 그 초콜릿, 파티장에서 다시 만났을때 전해 주던 그 초콜릿,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태성은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잊은 적 없어.” “그렇게 오래전 일인데도요?” “나한테는 오래전 일이 아니었어.” 태성은 힘들
Last Updated: 2026-08-30
Chapter: 173화. 새로운 주인넓고 무거운 책상 너머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강 회장은 저 자리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앉고 보니 태성은 조금도 높은 곳에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사람의 삶과 회사의 미래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온 듯했다. 화려한 권력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이었다. 태성은 다친 오른쪽 어깨를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둔하게 욱신거렸다. 폐공장에서 연수를 감싸 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장부가 불타던 모습. 이민우의 광기 어린 얼굴. 그리고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살아달라고 울던 연수. 태성은 책상 위에 놓인 재단 설립 계획서를 바라봤다. 잠시 후 회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연수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수정된 재단 운영안이 들려 있었다. “첫날부터 너무 심각한 얼굴인데요?” 태성이 그녀를 바라봤다. “회장실에 앉으면 원래 이런 얼굴이 되는 건가 봐.” 연수는 천천히 회장실 안을 둘러봤다. 벽에 걸려 있던 사진들이 모두 내려간 탓에 공간이 조금 휑해 보였다. “사진은 왜 다 내렸어요?” “권력을 물려받았다는 느낌이 싫어서.” 연수는 벽을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Last Updated: 2026-08-30
Chapter: 172화.다시 일어설 사람들을 위해“이게 뭐예요?” “새로 설립할 사회공헌재단 계획서.” 연수는 서류의 첫 장을 펼쳤다. 재단 설립 목적과 지원 대상, 운영 방식이 상세히 정리돼 있었다. 자금난에 처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지원. 부당한 계약이나 대기업의 횡포로 피해를 입은 기업을 위한 법률 지원. 기업 비리 제보자 보호와 긴급 생계 지원. 도산 위기에 몰린 기업의 회생 프로그램까지. 연수의 눈빛이 깊어졌다. “정우산업과 같은 일을 겪는 기업을 돕기 위한 거군요.” “그래.” 태성은 그녀를 바라봤다. “재단 이사장을 네가 맡아줬으면 해.” 연수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제가요?” “이 재단은 단순히 돈을 나눠주는 곳이면 안 돼.” 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수 곁으로 다가왔다. “과거 우리 아버지들처럼 권력과 자금 앞에서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해.” 연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어줬으면 해.” 태성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네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알잖아.” 연수의 시선
Last Updated: 2026-08-29
Chapter: 54화. 가장 찬란한 두 번째 인생(최종화)다시 시간이 흘렀다.대저택의 넓은 잔디 정원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민지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남동생의 두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맞춰 주고 있었다.“하나, 둘. 천천히.”아이가 몇 걸음 걷다가 잔디 위에 주저앉자 민지는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에이든은 카메라를 들고 두 아이의 모습을 정신없이 찍고 있었다.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던 혜진이 물었다.“사진을 몇 장이나 찍는 거예요?”“중요한 순간입니다.”“아까부터 중요한 순간만 백 장은 넘은 것 같은데요?”“전부 보관해야 합니다.”혜진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에이든의 온기를 느꼈고, 낮에는 라온 그룹의 대표로 자신의 꿈을 이어갔다.저녁이 되면 민지와 아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과거의 혜진은 행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다.좋은 아내가 되어야 했고,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했으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했다.하지만 지금의 혜진은 알고 있었다.진짜 행복은 자신을 잃으며 얻는 것이 아니었다.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혜진은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에이든은 그녀가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허리를 끌어안았다.“쉬지 않고 왜 나왔습니까?”“남편이 사진만 찍고 있어서요.”“아이들의 성장 기록을 남기는 중입니다.”혜진은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나도 찍어 줘요.”에이든은 카메라를 내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Last Updated: 2026-07-26
Chapter: 54화. 다시 날아오른 여자결혼식이 끝난 뒤에도 혜진과 에이든의 삶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라온 뷰티 그룹은 필리핀을 넘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하며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혜진은 회사가 커질수록 처음 세웠던 원칙을 더욱 분명히 지켰다.누군가의 기준에 맞추기 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브랜드.그 철학은 국경을 넘어 수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었다.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나갈 무렵, 혜진은 아시아 경제 포럼의 메인 연사로 초청받았다.그때 그녀의 배 속에는 에이든과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만삭에 가까운 몸이었지만 혜진은 단정하게 재단된 크림빛 임산부 정장을 입고 연단에 올랐다.수천 명의 기업가와 투자자, 언론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카메라 셔터가 연이어 터졌지만 혜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진정한 성공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혜진의 차분한 목소리가 넓은 행사장을 채웠다.“상처와 실패가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장내가 조용해졌다.“저 역시 한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제게는 다시 시작할 용기와 사랑하는 딸, 그리고 끝까지 저를 믿어 준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객석 한쪽에는 에이든과 민지가 앉아 있었다.에이든은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혜진을 바라보고 있었고, 민지는 두 손을 모은 채 엄마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무너졌다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무엇을 지키고 다시 세울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미래가 시작됩니다.”강연이 끝나자 장내에는 뜨거운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Last Updated: 2026-07-26
Chapter: 53화. 우리의 영원한 시작
결혼식 당일.마닐라의 하늘은 마치 두 사람을 축복하듯 티 한 점 없이 맑았다.이른 아침부터 프라이빗 리조트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화이트 장미와 피오니, 난초, 그리고 은은한 열대 꽃들이 해변 정원을 가득 채웠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향해 길게 이어진 버진로드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신부 대기실.혜진은 거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순백의 실크 웨딩드레스는 화려하기보다 우아했다.목선을 따라 흐르는 레이스와 자연스럽게 퍼지는 긴 트레인이 그녀의 품격을 더욱 빛나게 했다.메이크업을 마친 스타일리스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정말 아름다우세요."혜진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예전에도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날의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다.시댁의 눈치를 보며,남편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자신의 결혼식이면서도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했다.혜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거울 속에는 더 이상 과거의 윤혜진이 아니었다.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게 된 여자가 서 있었다.그때 문이 살며시 열렸다.민지가 작은 꽃다발을 안고 들어왔다."엄마."혜진이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우리 공주 왔네."민지는 한참 동안 엄마를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엄마...""응?""세상에서 제일 예뻐."혜진은 웃으며 아이의 이마에 입을
Last Updated: 2026-07-25
Chapter: 52화. 가문의 문이 열리다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아침.에이든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혜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평소와 달리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오늘 오후, 유럽에서 우리 가문의 어르신들이 도착합니다."혜진은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긴장하고 있네요?"에이든은 작게 웃었다."솔직히 그렇습니다."그는 혜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그분들은 제게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입니다.""하지만 당신을 평가하려는 자리는 아닙니다."혜진은 부드럽게 그의 손을 감싸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 아니에요.""다만 당신의 가족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싶을 뿐이에요."에이든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품으로 끌어안았다."당신은 언제나 저보다 강한 사람입니다.""아니에요."혜진이 웃으며 그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지금은 당신이 옆에 있어서 강해진 거예요."에이든은 그녀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오늘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오후.마닐라 국제공항에는 에이든의 가문을 상징하는 전용기가 착륙했다.유럽에서 온 가문의 원로들과 친척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오랜 전통을 지켜 온 명문가답게 모두가 품격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날 저녁.새 저택에서는 가족만을 위한 작은 만찬이 준비되었다.혜진은 화려함보다 절제된 우아함이 돋보이는 네이비 실크 드레스를 선택했다.블루
Last Updated: 2026-07-25
Chapter: 51화. 세상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다결혼 소식이 공식 발표되자 가장 먼저 들썩인 곳은 마닐라가 아니었다.한국이었다.필리핀 금융그룹의 후계자이자 라온 그룹의 대표인 윤혜진이 결혼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경제지와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장식했다.한때 그녀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라며 함부로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글로벌 CEO'와 '필리핀 대표 재벌가의 예비 안주인'이라는 수식어를 믿지 못한 채 기사만 새로고침하고 있었다.어떤 이는 축하를 보냈고,어떤 이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으며,여전히 악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하지만 혜진은 더 이상 그런 말들에 흔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이제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평가로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며칠 뒤.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매거진과의 화보 촬영이 진행되었다.혜진은 깊은 레드 컬러의 수트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섰다.왼손 약지에는 에이든이 끼워 준 블루 다이아몬드 웨딩링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대표님, 시선을 조금만 이쪽으로 부탁드립니다."카메라 셔터가 연이어 터졌다.촬영이 끝난 뒤 인터뷰가 이어졌다.기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혜진은 잠시 생각한 뒤 미소를 지었다."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기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혜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그 시간을 견뎌냈기에 지금의 제가 있으니까요.""그리고 이제는 과거를 증명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려고 합니다."
Last Updated: 2026-07-24
Chapter: 50화. 별빛 아래의 두 번째 약속리조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이든은 해변의 가장 외딴 곳에 혜진만을 위한 특별한 저녁 식사 자리를 준비해 두었다.백사장 위에는 수백 개의 작은 촛불이 은은한 길을 만들고 있었고, 잔잔한 파도 소리가 고요한 음악처럼 밤공기 속에 퍼졌다.혜진은 에이든이 준비해 둔 화이트 실크 드레스를 입고 촛불 사이를 천천히 걸어왔다.바닷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드레스 자락과 달빛을 머금은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검은 수트를 입고 기다리던 에이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만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요?”혜진이 수줍게 묻자 에이든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매일 보고 있는데도, 볼 때마다 처음 만난 사람처럼 설렙니다.”혜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요즘은 정말 말을 너무 예쁘게 해요.”“당신이 제게 예쁜 말만 하고 싶게 만드니까요.”에이든은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촛불과 별빛 아래에서 천천히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민지는 하루 종일 바다에서 놀다 먼저 잠이 들었고, 오랜만에 두 사람만의 조용한 시간이 찾아왔다.“휴가가 끝나는 게 아쉬워요.”혜진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다시 오면 됩니다.”“그때도 이렇게 전부 준비할 거예요?”“당신이 좋아한다면 매번 더 잘 준비하겠습니다.”혜진은 웃으며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이 정도면 충분해요. 당신이 옆에 있잖아요.”그 말에 에이든의 눈빛이 깊어졌다.식사가 끝날 무렵,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혜진 씨.”에이든은 그녀의 손을 잡
Last Updated: 202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