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명희 여사의 비서 조미진이 떠난 뒤에도, 수아는 한참 동안 멍하니 거실 창가에 서 있었다.
‘다가오는 전무님의 약혼식 전까지, 이 펜트하우스를 나가주셔야겠습니다.’ 그것은 부탁이 아니었다. 이명희가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수아는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연락처를 열었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 지아. 가슴속을 짓누르는 숨막히는 공포와 비참함을 견뎌내기 위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거제에 있는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아와, 그리고 전화를 건네받은 지아의 어린 아들 준우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수아는 겨우겨우 메말라 있던 숨을 쉴 수 있었다. "수아야, 몸은 좀 어때? 의뢰받은 그 일은 언제쯤 마무리되는 거야? 네가"대표님, 저…… 이 작업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지으려고 해요. 혹시 그 전에…… 근처에 한 달 정도 짧게 지낼 수 있는 작은 원룸이나 방을 구할 수 있을까요?"수아의 입에서 빌딩 내 거처 이야기가 나오자, 민수의 눈빛이 찰나간 은밀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철저히 감추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는 수아를 바라봤다. “원룸이요?” “네.” “수아 씨가 지내실 곳이요?” “네. 잠깐 머물 곳이 필요해서요.” 민수는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거라면 왜 걱정해요?” 그가 태연하게 웃었다. “이 건물에도 원룸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이런 곳은 임대료가 너무 비쌀 텐데요……." “이 빌딩에 있는 오피스텔이나 방들은 원래 일반인들에게 잘 내주지 않는 호화롭고 비싼 곳들이지만…… 수아 씨가 머물 곳 하나 마련해 주는 게 뭐 어렵다고 그래요. 내 빌딩인데 그 정도 일쯤은 충분히 해줄 수 있죠." 민수는 수아가 자신의 친절을 부담스러워하며 거절할 것을 미리 짐작했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사실 일반 임대용 원룸 말고도 관리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해둔 방이 몇 개 있어요. 일반에 세를 주지 않는 곳이라 상업적인 시세는 따질 필요도 없고, 아주 조용하고 아늑합니다. 그곳이라면 수아 씨가 작업에 몰두하며 지내기에 딱 좋을 거예요." “관리 직원들이요?” “네. 야간 근무를 하거나 급하게 머물 곳이 필요한
이명희 여사의 비서 조미진이 떠난 뒤에도, 수아는 한참 동안 멍하니 거실 창가에 서 있었다. ‘다가오는 전무님의 약혼식 전까지, 이 펜트하우스를 나가주셔야겠습니다.’ 그것은 부탁이 아니었다. 이명희가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수아는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바라보다 연락처를 열었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 지아. 가슴속을 짓누르는 숨막히는 공포와 비참함을 견뎌내기 위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거제에 있는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아와, 그리고 전화를 건네받은 지아의 어린 아들 준우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수아는 겨우겨우 메말라 있던 숨을 쉴 수 있었다. "수아야, 몸은 좀 어때? 의뢰받은 그 일은 언제쯤 마무리되는 거야? 네가 전에 일이 끝나면 거제로 내려와서 우리랑 같이 지내자고 했잖아." 지아의 다정한 다그침에 수아는 목이 컥 막혀왔지만,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지아야…… 거의 다 끝나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곧 그리로 내려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준우는 뭐 해?” “우리 아들? 지금 옆에서 자동차 가지고 놀고 있지. 잠깐만.” 전화기 너머로 지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준우야! 엄마 친구 수아 이모 전화 왔어. 인사할래?” 잠시 후 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수아 이모!” 수아의 얼굴에 그제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준우, 잘 있었어?” “네에!” “밥
수아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조미진은 주머니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카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기계적이고도 냉혹한 어조에 이어, 조미진은 탁자 위의 카드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툭 쳤다."그리고 이건 사모님께서 베푸시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차도윤 전무님을 멀리 떠나 살려면 돈이 필요하겠죠. 수아 씨 명의로 발급된 카드입니다.” 배려.그 말이 수아의 가슴에 날카롭게 박혔다.“그 돈이면 서울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당분간 생활하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으실 겁니다.”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미진은 카드를 수아 쪽으로 밀어놓았다.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도윤 씨를 떠나는 대가가 되는 건가요?”미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현명하게 판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수아 씨께도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수아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단호한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인 카드를 집어 들어 조미진의 앞으로 스윽 밀어냈다.“돌려드릴게요.”미진이 수아를 바라봤다.“이 카드는 받을 수 없어요.”“이수아 씨.”“여사님께 전해주세요.”수아는 고개를 들었다.눈가에는 희미하게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도윤 씨 약혼식 전까지 이 집에서 나가겠다고요.”미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수아는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돈은 필요 없다고 전해주세요.”“…….”“저는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미진은 한동안 수아를 바라봤다.그녀가 예상했
태하그룹 본가.오전 햇살이 넓은 거실의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이명희는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그녀의 앞에는 현성그룹 한서희와 아들 차도윤의 약혼에 관한 기사들이 정리되어 있었다.태하그룹 차도윤 전무, 현성그룹 한서희와 5월 6일 약혼 예정.명희는 기사의 제목을 천천히 훑어보았다.사진 속 두 사람의 모습은 더없이 잘 어울렸다.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을 이끌어갈 후계자와 그에 걸맞은 집안에서 자란 여자.명희가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그림이었다.그녀는 아들 도윤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그 아이의 미래를 설계해왔다.태하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완벽한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이명희 여사의 셈법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도윤은 단순히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다.태하그룹의 미래였다.자신 역시 태하그룹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온 여자였다.젊은 시절의 감정이나 개인적인 행복 따위는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는 순간부터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세상이었다.그리고 도윤 역시 그 세상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사랑이라…….”명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번졌다.“그깟 감정이 얼마나 간다고.”도윤이 이수아라는 여자에게 빠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만 해도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윤은 그 여자를 정리하지 않았다.수아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를 하던 그날 아들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처음으로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갤러리가 민수의 소유 건물에 있었다면 전시회를 들를 이유도 충분했다.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말 역시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작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민수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조금 전과 달랐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네.” “혹시…… 제가 도윤 씨와 만나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요?” 민수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느긋하게 웃었다. “그랬다면 어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겠죠?” “…….” “수아 씨가 누군가와 만나고 있다는 건 알았어요.”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차도윤이라는 건 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수아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민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수아에게 관심을 갖게 된 시점과 도윤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을 교묘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혹시 제가 도윤이 때문에 일부러 접근했다고 생각했어요?” 수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민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 뜻으로 여쭤본 건…….” “알아요.” 민수는 수아의 말을 가볍게 받아주었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수아는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의문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민수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화요일 오전. 수아는 정민수의 빌딩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묵직한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직접 확인해야 했다. 어제 도윤이 던졌던 날 선 경고. ‘그 자식이 어떤 꿍꿍이로 너한테 접근했는지 알아?’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의 일을 그만두라고 하는 도윤이 야속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정민수는 어떻게 자신의 졸업 작품전에 오게 되었을까? 그 전시회는 유명 작가들이 참여하는 전시도 아니었다. 그냥 야간대학의 작은 졸업 작품전이었다. 일반 관람객이 찾아올 수는 있었지만, 정민수처럼 사업으로 바쁜 사람이 우연히 들렀다는 사실은 조금 이상했다. 만약 민수가 정말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라면, 지금 그리고 있는 그 그림조차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오늘은 꼭 확인해야 했다. “안녕하세요.” 수아가 로비 안내 데스크에 다가갔다. 직원이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 작가님.” “혹시 정민수 대표님을 뵐 수 있을까요?” “대표님이요?” “네. 잠깐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직원은 곧바로 내선전화를 들었다. “대표님께 확인해보겠습니다.” 얼마 지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