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민성의 능청스러운 보살핌과 정성 덕분이었을까. 지혜의 컨디션은 하루가 다르게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다. 차가웠던 마음의 벽도 민성의 무대포 직진 앞에 서서히 녹아내리며,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하고도 달달한 기류가 싹트기 시작했다.창백했던 얼굴에도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무엇보다 식사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물론 그 과정에 민성의 지분이 상당했다.유명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이 복지센터로 배달되는가 하면—퇴근 시간이 되면 어떻게 알았는지 나타나 밥을 먹이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지혜가 부담스럽다며 화를 내면 민성은 늘 같은 말을 했다.“연애하자는 거 아니잖아요.”“그럼 이게 뭔데요?”“친구의 건강 회복 프로젝트?”“누가 친구예요?”“사과 받아줬으니까 친구.”말로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그렇다고 예전처럼 무작정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지도 않았다.지혜가 정말 싫다고 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집 앞까지 데려다줘도 올라오겠다고 하지 않았고,밥을 먹이고 나면 더 붙잡지도 않았다.그저,“약 먹고 자요.”“내일 아침 꼭 먹고.”그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그런 민성의 모습이 오히려 지혜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몸이 한결 가벼워진 지혜는 가장 먼저 주연을 불렀다."주연아, 너 나 때문에 언제까지 여기 붙잡혀 있을 거야? 나 이제 멀쩡해. 기운도 팔팔하고 혼자서도 잘 지내니까, 이번 주말에는 무조건 재혁 씨 집으로 돌아가. 알았지?"지혜는 친구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제 좀 부담스러워.”주연이 눈을 크게 떴다.“뭐?”“남의 남편한테 원망받는 거.”“재혁 씨가 언제 너를 원망했다고 그래?”
민성의 변화는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말로만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아침부터 그는 꽤 분주했다.유명 레스토랑의 셰프에게 인맥을 통해 직접 전화를 걸어 메뉴를 주문했다.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몸이 회복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음식들로 부탁했다.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민성이 대형 쇼핑백들을 양손에 주렁주렁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는 평소의 오만하고 차가운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센터 직원들에게 먼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갔다."안녕하세요,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우리 지혜 씨가 요즘 몸이 좀 축나서…… 동료분들 힘내시라고 제가 유명 제과점에서 마카롱이랑 생과일주스 좀 넉넉하게 사 왔습니다. 우리 지혜 씨 앞으로도 잘 좀 부탁드려요!"지혜의 눈이 커졌다.“민성 씨?”민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었다.“안녕하세요.”“여긴 왜…….”그런데 지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동료 직원들이 먼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어머, 누구세요?”민성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김지혜 선생님 친구입니다.”능청스럽고 친근하게 센터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민성의 모습에 다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화기애애하게 환호했다.정작 당사자인 지혜는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민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에 들고 온 상자를 직원들에게 내밀었다.“이건 선생님들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이게 뭐예요?”“마카롱이랑 주스요.”“어머, 이렇게 많이요?”민성이 능청스럽게 웃었다.“우리 지혜 씨가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일 너무 많이 시키지 마시고 잘 좀 부탁드립니다.”“민성 씨!”지혜가 결국 그를 불렀다.직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주연은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했다. 도착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지혜에게서 전화 한 통 없자, 주연의 마음은 점차 불안으로 물들어갔다. 복지센터에서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연락 불통인 채 집에도 들어오지 않으니 혹여 지난번처럼 몸이 아파 어디 쓰러지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연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만 이어졌다. 결국 주연은 가디건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입구까지 내려온 주연은 연신 주변을 살폈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왔지만 지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익숙한 차 한 대가 아파트 앞으로 들어왔다. 주연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재혁이었다. 재혁 역시 입구에 서 있는 주연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해?” “재혁 씨.” 재혁은 반가워하다가 금세 주연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일 있어?” "아, 재혁 씨…… 지혜가 퇴근한다고 연락은 왔는데, 전화도 안 받고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와서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걱정돼서 나와 봤어요." 주연의 굳은 표정을 본 재혁은 차에서 내려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며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까 사무실에서 민성이가 지혜 씨가 아팠다는 소릴 듣고는 갑자기 눈이 뒤집혀서 튀어나갔거든. 아마 지금쯤 그 녀석이 지혜 씨 곁에 있을 거야." 주연이 눈을 크게 떴다. “민성 씨요?” "그래.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다시 전화 해 봐." 재혁의 말에 안심이 된 주연이 다시 지혜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이내 지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연아, 미안. 전화 소릴 못 들었어. 걱정하지 마, 나 지금 잘 들어가고 있으니까 곧 도착해.’ "정말이지? 다행이다…… 조심해서 와, 지혜야." 전화를 끊은 주연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정말…… 미안합니다.”민성은 처음으로 아무런 핑계도 대지 않았다.“내가 잘못했어요.”“민성 씨…….”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내가 살아온 방식이 원래 그랬다는 말도 안 할게요.”민성의 목소리도 조금씩 흔들렸다.“몰랐다는 말도 안 할 거고.”민성은 지혜를 올려다봤다.“당신한테 상처 준 건 나니까.”지혜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졌다.“내가 잘못한 거니까.”“…….”“한 번만 용서해줘요.”지혜가 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이러지 마요.”“지혜 씨.”“제발 일어나요.”지혜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이렇게까지 하지 마요…….”민성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지혜가 잡아끄는 손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다.그런데—손은 놓지 않았다.지혜가 손을 빼려는 순간 민성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민성 씨……!”“잠깐만.”“놔요.”“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지혜의 몸이 굳었다.민성은 그녀가 정말 밀어내면 놓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만큼은—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보고 싶었어요.”지혜의 눈이 감겼다.“미치도록 보고 싶었어.”“…….”“전화하고 싶었고.”민성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찾아가고 싶었어요.”지혜의 두 손이 그의 가슴 앞에 멈춰 있었다.밀어내야 했다.그런데—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자신 역시 보고 싶었으니까.너무 보고 싶어서 아팠으니까.민성은 조금 떨어져 지혜의 얼굴을 바라봤다.가까이서 보니 더욱 마음이 무너졌다.그동안 얼마나 아팠던 건지.
재혁의 집무실을 뛰쳐나온 민성은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았다.가슴속에서 치솟는 불안감은 차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지혜 씨가 많이 아팠어.병원에도 갔었고.재혁이 무심코 던진 말이 민성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얼마 전 레스토랑에서 마주쳤던 지혜의 모습이 떠올랐다.창백했던 얼굴.전보다 눈에 띄게 야윈 모습.그때는 자신이 박지민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런 줄 알았다.그런데 아니었다.아팠던 거였다.그것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왜 그렇게 아픈데…….”민성은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차는 어느새 지혜가 사는 임대 아파트 단지 앞에 멈춰 섰다.민성은 핸들을 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휴대전화를 들었다.지혜의 번호를 띄웠다.그러나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민성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었다.이번에는 메시지를 썼다.지혜 씨, 잠깐 볼 수 있어요?한참 바라보다 지웠다.다시 썼다.아팠다는 얘기 들었어요. 괜찮아요?그것도 지웠다.“미치겠네…….”민성은 휴대전화를 조수석에 던졌다.여자에게 전화 한 통 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있었던가.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했는데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오히려 이제는—정말 다른 남자가 있다고 해도 그 남자에게서 지혜를 빼앗아오고 싶은 심정이었다.이기적이라는 걸 안다.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안다.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때였다.민성의 시선이 차창 밖 한곳에서 멈췄다.저 멀리 익숙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지혜 씨.”민성의 몸이 굳었다.복지센터에서 퇴근
아침부터 지혜는 출근 준비를 했다. 주연은 식탁에 앉아 죽을 먹고 있는 지혜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다. “너 진짜 출근하려고?” “응.” “어제 내가 뭐라고 했어?” “다 들었어.” “그런데?” 지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죽을 한 숟가락 더 떠먹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주연은 지혜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도 오늘 하루만 더 쉬지.” “싫어.” “김지혜.” “이주연.” 지혜가 웃었다. “나 진짜 괜찮아.” “힘들면 바로 조퇴할게. 약속.” 주연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결국 한숨을 쉬었다. “진짜 힘들면 바로 와.” “알았어.” 집에 가만히 누워있어 봤자 복잡한 머릿속만 더 어지러워질 뿐이었다. 지혜는 주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복지센터로 출근을 강행했다. 차라리 복지센터에 나가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몸이 피곤하면 적어도 마음이 아픈 것은 조금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민성은 며칠째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서류를 펼쳐놓아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집중하는가 싶으면— 또 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레스토랑.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쳤던 지혜.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말랐지? 얼굴도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