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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作者: 봉숭아
야자 시간에도 정민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진세라도 자리를 비웠다.

어차피 수시로 일류 대학교에 합격했을뿐더러 외국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기에 사실 수업 들을 필요가 전혀 없었지만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왔다. 심지어 출국할 기회까지 포기했는데 전부 진세라를 위해서라는 사실은 모두가 뻔했다.

텅 빈 두 자리를 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마음도 심란하고 문제를 하도 풀어서 머리가 뒤죽박죽 한 탓에 하교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새엄마를 보는 순간 짜증이 극에 달했다.

나는 못 본 척 지나치고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고민욱이 물었다.

“은성아, 민규랑 얘기해봤어? 뭐래?”

나는 냉소를 지었다.

“정민규가 전생에 우리한테 빚이라도 졌어요?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말 한마디에 수백억짜리 계약을 맺겠어요?”

고민욱의 안색이 대뜸 어두워지더니 호통치려는 찰나 옆에 있던 김다비가 팔을 끌어당기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상 그룹과 거래할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는 거지. 요즘 민규랑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참에 식사하자고 집에 초대하는 건 어때?”

“아니요.”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동안 정민규를 하도 귀찮게 해서 절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요? 괜한 기대 하지 마세요.”

“부모한테 말투가 그게 뭐니?”

“은성아, 아빠가 진짜 화를 내면 어떡하려고 그래? 너한테 조금이라도 더 풍족한 삶을 누리게 해주려고 이렇게 고생하시는 거잖아. 설마 회사가 부도나길 바라는 건 아니지?”

나는 냉소를 금치 못했다.

“하루빨리 망하는 게 제 소원인데요?”

연명 수단으로 이용되는 신세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고은성!”

그리고 노발대발하는 고민욱을 무시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은행 잔액을 확인했다.

나를 낳아준 친엄마는 박혜경인데 초등학교 때 고민욱이 비서인 김다비와 몰래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뿐더러 고작 6개월 터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은 1년 만에 종결되었고, 박혜경은 재산 분할로 거액을 챙기고 미련 없이 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국인 남편을 만나 혼혈 쌍둥이를 낳았다.

그 틈을 타서 사생아를 데리고 사모님의 자리를 꿰차는 데 성공한 김다비는 드디어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결국 나만 공처럼 이리저리 치여 어딜 가나 불필요한 취급을 당했다.

그나마 부모로서 형편없는 와중에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바로 용돈을 넉넉하게 준다는 점이다. 잔액을 확인하고 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아쉽게도 고민욱은 바람 피우는 것만큼 회사를 운영하는데 소질이 없지만 꿍꿍이 하나는 기가 막혔다.

전생에 정민규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을 뿐이지만 외부에 예비 여자친구라고 떠벌리고 다닌 덕분에 정상 그룹의 명성을 이용해 회사는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몇 년이나 더 버텼다.

나중에는 정민규의 장인어른 행세하며 거액을 투자했다가 프로젝트가 손실이 나면 염치 불고하고 마이너스를 메꾸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비록 정민규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고민욱의 만행 때문에 정씨 가문 친척들의 비난을 적잖이 받았고 괜스레 주눅이 들어 부부 관계도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번 생에서는 정민규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더는 고민욱의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틀 뒤, 2차 모의고사가 끝나고 나는 절친 성지연과 함께 노래방으로 갔다.

“드디어 시험이 끝났군. 오늘 밤 생일 파티를 다시 해줄 테니까 신나게 놀자고.”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을 터뜨렸다.

“은성아, 생일 축하해!”

꽃가루가 휘날렸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성지연은 어렸을 때부터 알던 소꿉친구였다. 전생에 정민규 하나만 바라보고 단성대학교에 합격하는 기적을 이루게 되었을 때 그녀는 무난한 실력으로 일반 대학교에 붙었다. 하지만 졸업하고 나서는 유학길에 올라 가업을 물려받았고, 반면 나는 정민규의 어머니인 허은미의 요구대로 회사를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당시 성지연이 씩씩거리며 욕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고3 때 노력이 아깝지도 않니? 은성아, 넌 언젠간 후회하게 될 거야.”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한편, 성지연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리고 문을 열자 반 친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들어섰다.

“생일 축하해, 고은성!”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훤칠한 키와 고귀한 분위기,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촌스럽게 꾸며진 룸도 갑자기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정민규가 여기 왜 왔단 말이지?

흐뭇한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전생에 비록 고백에 실패했지만 나는 불굴의 의지로 정민규에게 생일 파티에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마지못해 참석했고, 단지 두 손은 텅 빈 채 싸늘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감동을 금치 못한 나머지 생일 주인공이라는 신분으로 옆자리를 차지해 밤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대하지도 않았다.

칠흑처럼 까맣고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시선을 피했고 제일 멀리 떨어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성지연은 내 옆구리를 미친 듯이 찔렀다.

“왜 그래? 기껏 초대해줬더니 얼른 행동 개시 안 해?”

범인이 바로 성지연이라니!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정말 눈물 나게 고맙군. 정민규를 초대하기 꽤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아니?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얘기하니까 바로 알겠다고 했어.”

그럴 리가?

전생에 얼마나 힘들게 부탁해서 겨우 확답받았는데 성지연이 초대하자마자 승낙하다니?

끄떡도 하지 않는 나를 보자 성지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진짜 포기할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좋아했는데?”

나는 설명하기 귀찮은 나머지 대충 얼버무렸다.

“감정이란 마음 먹기 나름이야. 단성대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잡생각부터 지워야지.”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 노래 한 곡이 끝나는 타이밍이라 마치 맹세처럼 룸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분위기가 금세 싸늘해졌다.

정민규 옆에 앉은 사람들이 몰래 그의 안색을 살폈고 괜스레 등골이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무표정으로 일관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저기...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성지연이 서둘러 수습했다.

“다음 곡 누구야? 얼른 시작해.”

룸은 금세 왁자지껄해졌고, 정민규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가 일어서자 몇몇 남학생이 즉시 뒤를 따랐다.

“고은성 지금 밀당하는 거야? 민규를 초대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저런 말까지 하고.”

“그건 아닌 듯? 지난번에 고백하기 전에 깊이 반성하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했잖아. 아마도 진짜 민규를 포기할 생각인 것 같아.”

“이렇게 쉽게? 민규한테 진심은 아니었나 본데...”

정민규 옆에 있던 한정수가 서둘러 끼어들었다.

“헛소리 하지 마.”

정녕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이 안 보인단 말인가?

한정수는 정민규의 소꿉친구로서 현재 기분이 바닥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차렸다.

이내 가볍게 헛기침했다.

“고은성이 민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들 잘 알잖아. 2년 동안 쫓아다니다가 갑자기 포기할 리 있겠어? 지난번에 민규가 수능이 끝나면 다시 얘기하자고 했으니 아마도 단성대학교에 합격하지 못해서 생이별이라도 당할까 봐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나 봐.”

남학생들이 서둘러 수긍했다.

“그렇구나.”

드디어 표정이 밝아지는 정민규를 보자 한정수는 몰래 식은땀을 훔치며 속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나는 화장실에서 한참을 꾸물대다가 밖으로 나왔고, 룸에 돌아갔을 때 정민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물론 성격상 화를 못 이겨 이미 떠나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그렇게 자기합리화하던 중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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