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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Penulis: 봉숭아
정민규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아래로 향한 눈동자 위로 풍성한 속눈썹이 드리웠다. 게다가 고고한 분위기는 잘생긴 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10년이 넘는 감정은 결코 한순간에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넋을 잃고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인기척을 느낀 듯 정민규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는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설령 포기했다고 한들 안면박대할 정도는 아닌지라 머쓱한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

“뭐야? 너도 화장실이 급했어?”

어리석은 내 모습이 너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정민규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똑바로 서서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이리 와.”

나는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인데?”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정민규는 표정이 눈에 띄게 불쾌해졌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리 오라고.”

결국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고 여전히 거리를 유지했다.

정민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

잠시 후, 의미심장한 얼굴로 손에 든 책가방을 휙 던졌다.

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자칫 놓칠 뻔했다.

‘왜 이렇게 무거워?’

“이게 뭔데?”

정민규는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였다.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남자가 다가오자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고 숨이 턱 막히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은성,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마치 이를 악물고 말하는 듯싶었다.

어리둥절한 나를 뒤로한 채 그는 이미 멀리 떠나갔다.

룸에 돌아가자 성지연이 바짝 다가왔다.

“이게 뭐야? 누가 생일 선물을 줬어?”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가방을 여는 순간 성지연은 폭소를 터뜨렸다.

“맙소사, 시험지를 선물로 주는 기발한 생각은 어떻게 했대? 네가 단성대학교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라나 본데?”

결국 머쓱한 웃음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7년 전으로 환생해도 정민규의 속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단성대학교까지 쫓아와서 귀찮게 하는 건 절대로 원치 않을 것이다.

주말은 금세 지나갔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전교 50등 안에 든 모의고사 결과를 게시판에 공개했다.

월요일 수업 전,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고 나도 성지연에게 끌려갔다.

“고은성, 여기서 뭐 해? 전교 50등 안에 드는 성적을 발표하는 거지 500등이 아니라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진세라와 일당을 또다시 마주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눈을 흘기고 가뿐히 무시했다.

이때, 한 여학생이 깨고소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정민규한테 생일 파티에 참석해달라고 졸랐다며? 하지만 너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말도 없이 가버렸다고 하던데?”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질투 작렬이네. 설마 너도 정민규 좋아하니?”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당황한 얼굴로 진세라를 힐끔거렸다.

“헛소리하지 마. 이게 다 세라를 위해 하는 얘기거든?”

이내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정작 주인은 아무 말이 없는데 오히려 졸개가 더 난리네?”

“이...!”

여학생의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진세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성아, 다들 친구잖아. 말 가려서 해야지.”

이런 상황을 전생에 얼마나 많이 겪어봤는지 모른다.

정민규와 관련이 있을 때마다 나를 비웃는 무리가 나타나기 일쑤였고, 행여나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꾹꾹 참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진세라가 주는 ‘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참지 않고 되받아쳤다.

“어차피 좋게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하잖아.”

마치 내가 받아칠 줄 몰랐다는 듯 진세라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소탈하게 웃었다.

“아직 생일 축하 인사를 못 해줬네. 사실 저번 주에 민규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혼자 보냈어.”

다정한 말투는 흡사 정민규의 여자친구가 따로 없었다.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전생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결혼하고 나서 정민규에게 보낸 진세라의 문자, 주변 사람들의 잡담, 밑도 끝도 없이 비교하는 정씨 가문 친척, 결혼기념일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정민규...

고통스러운 순간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환생하고 나서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성아?”

성지연이 내 손을 잡았고, 검은색 동공에 창백한 내 얼굴이 비쳤다.

진세라 일당이 기회를 틈타 비웃기 급급했다.

“얼른 돌아가. 괜히 순위가 발표되고 나서 충격이나 받지 말고.”

“50등 안에 들지도 못하면서 단성대학교에 가려고? 적어도 제 주제는 알아야지.”

성지연이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쓸데없는 말이 많네? 그 입 다물지 못해?”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침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진세라를 발견했는데 승자의 미소가 따로 없었다.

이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로 길길이 날뛰는 성지연을 뜯어말리고는 성적 순위표를 들고 오는 교감 선생님을 향해 턱짓했다.

“바보랑 시비를 가려봤자 소용없으니까 결과로 증명하자고.”

진세라 일당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서 잘난 척하는 거야?”

“다들 비켜.”

교감 선생님이 성적 순위표를 펼치더니 게시판에 붙였다.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나한테 한 소리 들은 여학생이 즉시 비아냥거렸다.

“네 이름 아예 없는데?”

이어서 오합지졸의 조롱이 이어졌다.

“하하하, 결과로 증명한다고?”

진세라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다들 눈이 멀었니?”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성지연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순위표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봐. 고은성, 28등!”

가운데에서 아래쯤에 있는 위치라 얼핏 보면 티가 나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성지연은 큰 소리로 웃으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은성아, 어떻게 하면 수학 만점, 영어 만점을 받을 수 있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생에 죽을힘을 다해서 겨우 단성대학교에 붙었지만 드디어 한시름 놓게 되었다는 생각과 달리 정민규와 결혼하고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고작 단성대학교 졸업생이라는 스펙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씨 가문 친척들에게 잘 보이려고 조카들의 과외 공부를 열심히 해주었다.

결혼 생활 3년 동안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였고 전문 과외 선생님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국어를 놓은 지 오래되어 성적이 비교적 낮았다.

진세라는 도무지 믿기 힘든 듯 순위를 재차 확인했고 자칫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일당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내가 뭐랬어? 결과로 증명한다고 했지?”

아까만 해도 조롱하기 급급했던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며 난색을 보였다.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른 울화통이 그제야 한결 누그러졌다.

어두운 안색의 진세라를 보자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듣기 거북한 말도 거침없이 내뱉었다.

“진세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랑 졸개들이 눈에 거슬리니까 앞으로 다시는 주위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미 진절머리가 난 상황에서 말이 곱게 나갈리 있겠는가?

진세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면박당할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성지연이 나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은성아...”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옆에 서 있는 정민규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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