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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봉숭아
18살의 나는 공개 고백이 용기의 상징이자 청춘의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을 뿐이다.

용기와 청춘은 무슨,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아직 고백하기 전이라 만회할 여지가 있었다.

어찌 됐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 이상 정민규와 최대한 거리를 두고 전생의 비극을 재현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는 심호흡한 다음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대고 하느님에게 맹세하듯이 경건한 태도로 말했다.

“맞는 말이야. 내가 저지른 행동에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동안 불편했으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미안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제 잘못을 뉘우친 이상 앞으로 허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학업과 꿈을 이루는 데 집중할게.”

정민규는 벙찐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 단상에서 내려와 쏜살같이 도망쳤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고은성이 정민규를 포기해?”

“그럴 리가? 쌀쌀맞은 민규의 태도에 얼마나 많은 여학생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는데 그중에서 불굴의 의지로 살아남은 자가 바로 고은성 아니야? 매번 거절당해도 지치지 않고 계속 열정적으로 대시했잖아. 지난달만 해도 정민규와 같은 대학교에 가겠다고 내기까지 했을걸?”

“괜히 큰소리쳤다가 망신당할까 봐 자진 포기하는 것 같은데?”

“정민규는 한시름 놓았겠네. 드디어 거머리에서 탈출하게 되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소년은 허둥지둥 도망가는 가녀린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작 본인은 전혀 기쁘지 않은 듯 잘생긴 얼굴이 점점 싸늘해졌다.

교실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때, 책상 위에 있던 손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비록 25살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3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해 눈빛이 생기를 잃은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불면증에 시달린 탓에 안색이 창백하고 피부가 칙칙했으며 짙은 타크서클을 가리기 위해서는 항상 화장을 두껍게 해야만 했다.

하지만 거울 속 어린 소녀의 피부는 뽀얗고 매끈했으며 눈빛마저 반짝반짝 빛났다. 촉촉하고 혈기가 감도는 입술은 건강하면서 아름다워 보였고 젊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이는 18살의 내 모습이 확실했다.

그제야 다시 태어났다는 실감이 났고 속으로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거울 봐도 똑같지 뭐.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정민규는 너한테 관심이 없거든?”

누군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정민규와 진세라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있나?”

정신을 차리자 마치 여왕처럼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한가운데 서 있는 진세라를 발견했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딱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리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예쁘다고 해줘서 고마워. 나도 같은 생각 했거든.”

여자는 순간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라이벌끼리 만나면 서로 질투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전생에 정민규과 결혼하고 나서 진세라가 저질렀던 각종 만행에 이미 진저리가 난 상황이지 않은가? 또한 우리 부부 사이를 가로막은 벽으로서 결혼 생활을 파탄 낸 주범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진세라를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 삼각관계의 일원이 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이내 진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능까지 3개월밖에 안 남아서 지금은 공부에 올인하고 싶어. 얼른 소원을 성취해 멋진 남자친구를 만들기 바랄게.”

진지한 말투에도 진세라는 여전히 의심되는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지만 얼굴만큼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은성아, 네가 농담으로 민규와 같은 대학교에 가겠다고 내기한 걸 알고 있으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또 시작이군.’

나는 입을 삐쭉거렸다.

착하고 이해심이 많은 겉모습과 달리 몰래 잔꾀를 부려 쥐도 새도 모르게 논란의 중심으로 밀어 넣는 사람이 바로 진세라였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학생들이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무 싫어! 남의 연애에 대체 왜 끼어드는 거야? 정말 뻔뻔스럽네. 정민규의 관심을 끌려고 단성대학교에 가겠다는 큰소리까지 마다하지 않는다니.”

“지금 성적으로 대학교에 붙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인데, 단성대학교가 웬 말?”

“내일 모의고사가 있으니까 두고 보자고.”

전생에 이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나고 속상했지만 괜히 내가 진세라를 싫어한다고 정민규의 오해라도 살까 봐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들어보니 유치하고 가소롭기만 했다.

나는 진세라를 쳐다보며 조소를 흘렸다.

“단성대학교는 갈 테지만 정민규는 이제 관심 없거든? 그러니까 잔꾀 부릴 생각하지 말고 네 껌딱지나 잘 간수해.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게 했으면 좋겠어.”

진세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옆에 있더 여자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고은성, 그게 무슨 뜻이지?”

“별거 아니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단지 진심으로 진세라와 정민규가 하루빨리 결실을 이루기를 바랄 뿐.”

어차피 나중에 이판사판으로 기어코 재결합할 텐데 차라리 일찌감치 불변의 사랑을 축복하면서 둘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밖에서 우르르 몰려 들어왔고 선두에 정민규가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은 방금 내가 한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

진세라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민규야, 은성이가 농담한 거야.”

정민규의 차가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누가 봐도 불쾌한 모습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이제 관심이 없었다.

이내 정민규를 힐긋 쳐다보고는 태연하게 고개를 숙이고 책을 내려다보았다.

정민규의 안색이 점점 차가워졌고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풍겼다.

“다들 공부 안 할 거야?”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정민규가 천천히 다가왔고, 내 책상 옆을 스치듯 지나가 뒤에 앉았다.

비록 고등학생에 불과하지만 카리스마가 흘러넘쳤고 존재감이 뚜렷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볼펜을 움켜쥐었다.

당시 정민규의 앞자리를 사수한 것도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핑계로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태도는 쌀쌀맞았지만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결국 나만 특별 대우해준다는 착각에 그의 매력에서 점점 더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짜증과 혐오를 꾹꾹 눌러담으며 끈질기게 들러붙는 나를 참아줬던 게 아닌가 싶었다.

이내 심호흡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제집을 푸는 데 집중했다.

정씨 가문은 조카들이 많아서 주부로 살아온 지난 3년간 집안의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이들의 숙제를 자주 봐주었다. 덕분에 7년 전으로 환생해도 문제들이 크게 낯설지 않았다.

오후 내내 시험지를 연속 3개 풀고 나서 비로소 수능 실전 감각을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있어 무의식적으로 뒤돌아 앉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정민규의 칠흑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느낌이 들었다.

정민규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심한 얼굴로 볼펜을 들고 시험지를 건네받으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빼내고 그의 짝꿍인 강태혁 앞에 내려놓았다.

“태혁아, 이거 좀 봐줄래?”

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강태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더니 넌지시 물었다.

“어...? 나한테 물어본 거 맞아?”

나는 시치미를 뗐다.

“그럼!”

강태혁은 정민규를 흘긋 쳐다보더니 말을 아꼈다.

오히려 다른 남학생이 다가오더니 의아한 얼굴로 대신 의혹을 풀어주었다.

“왜? 넌 항상 민규한테 물어봤잖아.”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동안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서 앞으로 귀찮게 안 하려고.”

남학생이 혀를 끌끌 찼다.

벌써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건가?

순간 공기마저 냉랭해지면서 온도가 뚝 떨어지는 듯싶었다.

나는 강태혁을 재촉했다.

“얼른 알려줘. 이따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강태혁은 덜덜 떨며 시험지를 건네받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정민규는 입을 꾹 다문 채 볼펜을 책상 위에 내동댕이치고 교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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