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송남지가 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오후의 햇살은 부서지듯 쏟아졌다.차창 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니 길은 막힘 없이 뚫려 있었고 햇살은 눈부시게 찬란했다.문득,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그 어떤 하루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서경을 떠나 하정훈이 있는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는 3시간 20분의 비행 끝에 땅에 닿았다.화려하면서도 청초한 느낌을 주는 그녀의 드레스는 서경에서는 다소 추워 보였지만 이곳의 날씨에는 안성맞춤이었다.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내릴 때까지, 그녀는 어디서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차가운 느낌을 주는 동양적인 얼굴에 화사한 빛깔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걸음걸이는 하늘거리듯 우아했다.송남지는 여권과 환전한 현지 화폐를 가방에 챙겨 넣고 현지 유심칩을 구매한 뒤 하정훈이 머무는 호텔로 향할 채비를 했다.그런데 막 유심칩을 갈아 끼우고 고개를 드는 순간, 인파 속에서 불타는 듯한 시선 하나가 자신에게 꽂혀 있음을 느꼈다.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항 안에서 송남지는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하정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송남지의 가슴이 벅차게 뛰어올랐다.굳이 마중 나올 필요 없다고 신신당부했건만, 그는 기어코 와 있었다.예고 없는 그의 등장에 설레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을 것이다.송남지가 겨우 두어 발자국을 떼었을 때, 하정훈은 이미 폭풍처럼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다가와 있었다. 그는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공항 한복판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온 힘을 다해 송남지를 안아 든 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벅찬 희열이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나타나는 가장 본능적인 환희였다.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을 되찾은 아이처럼, 그는 그녀를 품에 넣고 놓아줄 줄 몰랐다. 이러다 튕겨 나갈까 두려워진 송남지는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귓가에 외쳤다.“정훈 씨! 그만 돌아요, 넘어지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송남지에게 윤이현의 전화가 걸려왔다.그녀는 브랜드 후원 건으로 연락했으리라 짐작하며 전화를 받는 동시에 재스민 갤러리 옆문으로 빠져나와 자신의 차로 향했다. 지금쯤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다.전화를 받자마자 송남지는 먼저 말을 꺼냈다.“윤 대표님, 오늘 전시회에 직접 오실 줄 알았어요.”겨울 전시회에 참석하겠다던 윤이현은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불참했고 별무리 측에선 브랜드 매니저만 모습을 드러냈다.이에 대해 윤이현은 구태여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처음에는 송 관장님께 흑심을 품고 후원 계약을 체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젯밤 관장님이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제가 직접 가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놀랐습니다. 별무리가 투자한 비용에 비해 재스민을 통해 얻는 가치가 훨씬 크더군요. 송 관장님, 정말 대단한 분이십니다.”“과찬이십니다.”송남지는 윤이현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만찬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을 터였다.송남지는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이득을 보고도 짐짓 모르는 척하는 것도 질색이었다.그녀는 사실대로 말했다.“제가 대단하다기보다는 윤 대표님께서 관대하신 거죠. 어젯밤 만찬에서 제가 윤 대표님을 이용했다는 걸 아실 텐데도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하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윤이현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정시연 씨가 그 동영상을 올리기 전까지는 저도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안들 어떻습니까. 미인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나름 운치 있는 일이죠. 게다가 제게는 또 다른 수확이 생겼거든요. 이번 일로 경쟁사의 점유율을 상당 부분 뺏어왔습니다. 특히 젊은 층의 반응이 뜨겁더군요. 사업가로서는 이용당한 대가치고 꽤 쏠쏠하게 남는 장사를 한 셈입니다.”윤이현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송남지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그녀가 감사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윤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게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송남지는 곧이어 도착한 하정훈의 경고성 문자를 보았다.[옷이 너무 얇잖아!]텍스트일 뿐인데도 그 위압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송남지는 장난스럽게 혀를 쏙 내밀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는데 하필 그 장면이 생중계 화면을 통해 하정훈의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그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을 안 듣네, 요 앙큼한 고양이가.”재스민의 겨울 전시회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순조로웠다.처음에 초청했던 재계 인사들은 물론, 뒤늦게 초청한 예술계 인사들까지 모두 참석했고 언론사들 또한 빠짐없이 자리를 채워 현장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말끔한 정장 차림의 박재용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운 송남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이야, 다 죽어가던 판을 이렇게 뒤집을 줄은 몰랐네요. 난 또 우리 삼촌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투자 구걸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더니만, 이제 보니 헛수고할 뻔했어요.”송남지는 웨이터가 건넨 샴페인 잔을 받아 들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막다른 골목에도 길은 있다, 그 말만으로도 투지가 솟구치지 않아요?”박재용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막다른 골목에 정말... 길이 있을까?’그는 송남지를 빤히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정말 그곳에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송남지는 평소 즐기지 않던 술이지만, 오늘만큼은 축배를 들어야겠다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길이 없으면 밟아서 만들면 되죠. 길이라는 게 원래 사람이 걸어가면 생기는 거잖아요?”그 말에 박재용은 생각에 잠긴 듯 샴페인 잔을 쥔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지금까지 자신에게는 오직 죽을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녀를 보며 어쩌면 없는 길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된 것이다.겨울 전시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송남지가 인터뷰를 하러 이동하려던 찰나, 민지현이 흥분된 표정으로 그녀를 막아섰다.“관장님, 예전에 계약 해지했
어시스던트의 얼굴에는 인내심이 가득했지만,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엄가을 씨, 전 노동의 대가를 받으러 온 거지 제 자존심을 팔러 온 게 아닙니다. 당신이 주는 보수는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지불이지 인격을 짓밟아도 된다는 면죄부가 아니란 뜻이에요.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죠. 더는 이런 취급 받으며 일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각자 갈 길 가시죠.”말을 마친 어시스던트는 가방을 움켜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기자회견장 홀에는 엄가을 혼자만 남았다.그녀는 텅 빈 홀을 멍하니 응시했다. 먼발치 거울 속에는 완벽하게 세팅된 화장과 12센티미터의 높은 굽 위에 간신히 버티고 선 자신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태로운 고층 빌딩 같았다.그녀는 마침내 이 순간, 모든 쓰디쓴 고통을 맛보았다....다음 날. 재스민 갤러리.서경의 오늘 기온은 영하 10도 정도였지만, 햇볕이 비치자 코트를 입어도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쨍한 핫핑크 코트를 입은 민지현은 마카롱 핑크 세단에서 내리는 송남지를 보고 기가 차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쯧쯧, 추워 죽으려고 환장했나? 옷이 저게 뭐야?”본인 역시 멋을 부리느라 추위를 참는 중이었지만 얇은 드레스 하나로 버티는 저 여자의 기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송남지가 뒷좌석에서 우아하게 내렸다.오늘은 하씨 가문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왔다.늦잠을 자는 바람에 화장을 차 안에서 급하게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수많은 취재진이 카메라를 들이밀며 몰려들었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송남지는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그녀는 손에 든 흰색 핸드백으로 살짝 얼굴을 가렸다.“송남지 씨, 어젯밤 정시연 씨가 폭로한 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송남지 씨, 보아하니 엄가을 씨는 정말 까칠한 상대 같은데, 혹시 예전부터 그 실체를 체감하셨던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송남지는 얼굴을 가리
유경태는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역시 하 대표야!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네! 내일 사모님의 겨울 전시회에 내가 가줄까?”“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남지라면 그런 작은 상황쯤은 능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유경태는 하정훈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방금 막 자정이 지났을 뿐인데, 송남지는 이미 최고의 여론 선동 타이밍에 연예계에 한바탕 큰 소동을 일으켰으니 말이다.그녀가 이런 작은 상황들을 처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둘째치고 그녀 자체가 이미 소동의 발화점이었다....한편, 송남지는 컴퓨터를 닫고 서재의 불을 껐다.이 밤, 그녀는 사실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긴장해서 잠 못 드는 것이 아니라, 이 한바탕 쇼가 끝나야 비로소 잠들 수 있을 터였다.이 모든 연극의 연출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안방의 포근한 침대에 몸을 누인 송남지는 문득 다가올 아침이 간절히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들기도 전에 낯선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서경 발신 번호였기에 송남지는 아무런 경계 없이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에서 엄가을의 히스테릭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송남지, 이 독한 년! 너 지금 나랑 장난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네 밥그릇에 담긴 걸 내가 조금이라도 탐낸 적 있어? 내가 네 몫을 가로채기라도 했냐고! 그런데 왜 나 하나를 못 잡아먹어서 이 난리야!”송남지는 휴대폰을 살짝 멀리 떼어 놓았다. 엄가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그럼 네 밥그릇에 담긴 걸 내가 뺏어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하도 오래 연기하며 살다 보니 이젠 정말 본인이 피해자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먼저 여론전 시작한 거 너 아니었어? 기자들 매수해서 나랑 윤이현 사진 찍게 만든 것도, 박재용의 대화 내용을 유출한 것도 전부 너잖아. 그것도 모자라서 나한테 뿌릴 오물이 부족할까 봐 정시연까지 끌어들여 판을 키운 건 누구였지?”송남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단호하게 말했다.“엄가을, 네가 지금 처한 상황은 네가 저지른 짓들
“윤 대표님, 3분도 채 안 걸립니다.”유경태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제가 하 대표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그 사람 마음엔 이미 남지 씨뿐이었습니다. 그 긴 세월을 오직 남지 씨만을 기다려왔죠. 모르셨겠지만 남지 씨는 이혼한 전력이 있습니다. 전남편 이름은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윤해진이라고.”유경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윤이현을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송남지 씨가 이혼녀라고요? 잠깐,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전남편이 윤해진? 온갖 추문은 다 몰고 다니는 데다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그 윤씨 가문 말입니까?”말할수록 윤이현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유경태는 송남지를 향한 동정을 담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사람 잡아먹는다는 그 집안 맞습니다. 옛날엔 하 대표가 배짱이 없어서 고백도 못 하고 끙끙 앓으며 남지 씨가 대학 졸업하기만 기다렸는데 졸업도 하기 전에 윤해진이 홀랑 낚아채서 결혼해버린 거죠. 그 후로 하 대표는 진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고요.”윤이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유경태에게 담배 한 개비를 더 청했다.“하 대표님이 배짱이 없다니, 믿기지가 않는데요.”유경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뭐, 안 믿기시면 나중에 하 대표가 동남아 사업 마무리하고 돌아오셨을 때 직접 식사 대접받으면서 들어보시죠. 그럼 믿게 될 겁니다. 너무 사랑하면 원래 그런 법 아닙니까? 사랑은 때로 용기의 찬가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겁쟁이가 되는 근원이기도 하니까요.”“사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두 사람이 정말 어렵게 오늘을 맞이했고 비로소 서로에게 안착했다는 겁니다. 친구로서 저는 그들 사이에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죠. 윤 대표님도 워낙 출중한 인재시니 ‘왜 내가 아니라 하정훈인가'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지난 세월을 지켜본 저로서는 하 대표보다 남지 씨를 더 사랑할 남자는 세상에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이 말을 들은 윤이현은 마음 깊이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이번 승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