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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두 사내는 태자가 믿지 않을까 두려웠는지 황급히 품에서 은표 다섯 장을 꺼내 들었다."전하, 보십시오. 이 은표에는 운씨 전장에서 찾아간 붉은 인장까지 찍혀 있습니다. 저희가 한마디라도 거짓을 고했다면 천벌을 받을 겁니다!"내시도 손에 들고 있던 최음제를 태자 앞에 내밀었다."전하, 윤월 아가씨 방의 비밀 공간에서 찾아낸 것입니다."증인과 증거가 모두 갖춰지자 변명하려던 윤월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버니와 고연의 차갑고 실망 어린 시선을 마주하자 윤월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아버지, 어머니,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오라버니, 저를 믿어 주십시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고연 오라버니와 혼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윤정은 친딸이니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두 분께서 감싸 주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남이나 다름없는 양녀일 뿐입니다. 저도 그저 좋은 부군을 만나 훗날 기댈 사람이 있기를 바랐을 뿐입니다."예전 같으면 윤월이 눈물만 흘려도 안쓰러워하던 오라버니가 이를 악물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끝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윤월! 네가 양녀라 한들 우리가 언제 너를 조금이라도 박대한 적이 있느냐! 어찌 이런 짓까지 저질렀단 말이냐!"아버지와 어머니도 눈시울을 붉히며 분노에 차 외쳤다."어린 나이에 어찌 마음 씀씀이가 이토록 악독하단 말이냐. 우리가 그동안 정이에게 매사 너에게 양보하라고 했건만, 네가 이토록 은혜도 모를 줄은 몰랐구나. 오늘부로 너는 더 이상 윤부의 둘째 아가씨가 아니다. 그동안 네가 정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조리 밝혀내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늘 윤월을 편애하던 고연마저 얼굴을 돌렸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윤월, 정이에게 이래서는 안 되었다. 정이는 네 언니가 아니냐."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내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라버니는 울며 내게
"누가 윤정의 말이 허튼소리라고 하더냐?"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태어나던 해, 관상감에서 내가 훗날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가슴이 철렁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태자 전하, 그게 무슨 뜻이십니까?"고연과 오라버니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나를 조심스레 안아 든 태자에게 시선이 향하자 두 사람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어제 네 안색이 몹시 창백해 보여 오늘 청혼하러 오면서 특별히 어의를 데려왔다. 맥을 짚어 몸을 추스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정말 쓸 일이 생겼구나."태자는 고연 일행을 차갑게 훑어본 뒤 미간을 찌푸리고, 이미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내시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무얼 멍하니 있느냐. 어서 어의 소씨에게 정이의 맥을 짚고 상처를 치료하게 하라."태자는 나를 푹신한 침상에 내려놓고, 어의가 두 달 안에 내 상처를 말끔히 낫게 하겠다고 장담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표정을 누그러뜨렸다.그러고는 돌아서서 내시가 들고 있던 혼인을 명한 조서를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힘껏 내던졌다."내 말이 무슨 뜻이냐고?""오늘 아침 윤씨 가문의 족장이 내가 오늘 윤정에게 청혼하러 올 것이라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그 말을 들은 오라버니는 몸을 크게 떨더니 비틀거리며 서 있기도 힘들어했다.오늘 아침 족장이 오라버니를 찾아와 그 일을 전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침 윤월과 고연이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밖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본 오라버니는, 내가 족장까지 끌어들여 고연이 윤월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나와 혼인하게 하려 꾸민 악독한 계략이라고 여겼다.그 탓에 오라버니는 곧바로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한마디도 전하지 않았다.아버지는 여전히 믿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조서를 펼쳤다. 옥새의 붉은 인장을 확인한 순간, 아버지는 눈앞이 아찔해지며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했다.뒤에 있던 고연도 조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뒤따라온 집사는 연신 나를 가리키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눈짓을 보냈다.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윤월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그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가 태자가 의장대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을 보자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태자 전하를 뵙습니다."오라버니도 무릎을 꿇은 채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태자 전하께서 윤부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그들은 태자가 청혼하러 올 것이라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았기에, 그 일 때문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윤월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숨이 끊어질 듯한 나를 힐끗 보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다음 순간, 윤월은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울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겁먹은 듯 나를 대신해 용서를 빌었다."태자 전하께서 언니의 허튼소리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언니가 방금 감히 전하와 혼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하지만 언니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일로 언니를 벌하지 말아 주십시오."경성에서는 태자는 스물다섯이 되도록 곁에 여인을 한 명도 둔 적이 없었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황제와 황후도 그 일로 애를 태웠지만, 혼인 이야기만 나오면 태자는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표정을 굳혔다.그 뒤로는 누구도 감히 태자의 혼사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그 일이 태자가 꺼리는 화제라는 것을 아는 고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윤월을 바라보았다."됐다. 더는 말하지 말거라."그러고는 태자를 향해 두 번이나 머리를 세게 조아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사촌 형님, 윤정이 요 며칠 제게 화가 나 말을 가리지 못하고 형님께서 꺼리시는 일을 함부로 입에 올렸습니다. 저와 백부가 이미 조금 벌을 주었으니, 부디 이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내일은 반드시 윤정을 데리고 동궁으로 찾아가 직접 사죄드리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도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그렇
몇 마디만 듣고도 나는 그들이 내 처소에 찾아온 이유를 모두 알았다.아버지와 어머니는 분노가 차올랐고, 고연과 오라버니는 나를 향한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나는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팔을 감싸 쥔 채 처연하게 웃었다."말씀하신 일은 저는 한 적이 없습니다..."하지만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긴 채찍이 다시 등을 후려쳤고, 살이 찢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오라버니는 나를 힘껏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아직도 변명하는 것이냐! 고연이 분명 너와 혼인하겠다고 했거늘, 무엇이 그리 질투가 나 월이까지 해친 것이냐.""어서 월이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거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 아버지께서 집안의 규율에 따라 마흔아홉 대를 모두 치실 것이다."윤월을 감싸고 있던 고연의 목소리는 더없이 차가웠다."윤정, 네가 참으로 역겹구나!"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애써 태연한 척하던 표정도 끝내 무너졌다."저는 윤월을 해친 적이 없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어찌 제 말은 믿지 않으십니까? 어찌 윤월이 울기만 하면 그 아이의 말은 모조리 믿으시는 겁니까?"그들이 윤월만 편애하는 데는 이미 익숙했지만, 무뎌진 줄 알았던 마음은 여전히 온몸이 떨릴 만큼 쓰라렸다.나는 온 힘을 다해 태자가 준 징표를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분명 말씀드렸습니다. 혼약은 여기서 끝입니다. 저는 고연과 혼인하지 않겠습니다!""어제 태자 전하께서 공을 맞혀 떨어뜨리셨습니다. 혼인을 명한 조서가 내려오면 직접 찾아와 청혼하실 겁니다.""저와 고연 세자는 이제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제가 무엇 때문에 굳이 윤월을 해치겠습니까?"내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굳어 버렸다.윤월은 내 손에 든 징표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힌 채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태자 전하께서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다지만, 어찌 언니처럼 나이도 찬 데다 다른 사내와 정혼까지 했던
윤씨 가문의 규율에 따르면, 윤씨 집안의 여인이 혼인하려면 반드시 혼인할 사내가 직접 사당의 높은 곳에 걸린 공을 쏘아 떨어뜨려야 했다.아버지와 어머니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고, 오라버니도 곧장 앞으로 나서 그 공을 받아 들었다.한참 뒤, 오라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틀림없다. 꾸며 낸 것이 아니다."그 말을 들은 고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윤월이 놀란 듯 외치며 끼어들었다."언니, 고연 오라버니와 억지로라도 혼인하려고 직접 떼어 낸 공을 누군가 쏘아 떨어뜨렸다고 거짓말까지 하시는 겁니까?"윤월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언니도 저희를 속이려면 좀 그럴듯한 핑계를 대셔야 하지 않습니까? 경성에서 언니가 고연 오라버니의 정혼자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감히 평남후부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그 집 며느리를 빼앗으려 들겠습니까?"그 말을 들은 고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실망과 혐오만 가득했다."윤정, 너는 그리도 사내 없이는 못 사는 것이냐? 그토록 시집을 가고 싶으냐?""내가 너와 혼인하겠다고 했으니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다. 굳이 이처럼 떳떳하지 못하고 더러운 수작까지 부려 우리를 속여야겠느냐? 참으로 어처구니없구나!"아버지와 어머니도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소매를 털었다."우리 윤부에서 어찌 너처럼 사리 분별도 못 하는 딸이 나왔는지 모르겠구나. 차라리 월이가 우리 친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오라버니는 어이없다는 듯 공을 내 앞에 던지고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윤정, 명문가 규수라면 조금은 체통을 지킬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네 모습이 사내가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기녀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나는 홱 고개를 들었다. 친오라버니가 내게 이토록 모진 말을 할 줄은 믿을 수 없었다.손바닥을 세게 움켜쥐자 피가 흘렀다. 나는 쓰린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어 해명하려 했지만, 고연이 비웃
고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매에서 옥비녀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며 사과의 뜻을 보였다."그만 울어라. 내년에는 반드시 공을 맞혀 너와 혼인하마. 그러니 한 해만 더 기다려라."또 같은 말이었다.예전의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계례를 치른 뒤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렸건만, 그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나는 손에 들린, 윤월이 고르고 남은 옥비녀를 바라보았다.모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눈물을 닦고 옥비녀를 힘껏 바닥에 내던져 깨뜨렸다."필요 없습니다, 세자. 이제 더는 기다리지 않겠습니다."옥비녀뿐만이 아니었다.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평안 부적을 풀고 손목의 비취 팔찌를 벗은 뒤, 소매에서 미리 준비해 둔 파혼서를 꺼냈다.모조리 그의 앞에 던졌다.하지만 다음 순간, 고연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윤정, 그 부적은 네가 계례를 치르던 해에 내가 일보일배를 하며 영은사에 가서 빌어 온 것이다. 게다가 그 비취 팔찌는 너와 나의 정표가 아니냐! 네가 어찌 이것들을 버릴 수 있느냐?"그는 파혼서를 찢어 버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어차피 너와 나는 언젠가 혼인할 사이인데, 이번에 공을 맞히지 못했다는 이유로 꼭 이리 고집을 부려 양가 모두를 언짢게 해야겠느냐?"윤월은 서둘러 내 팔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달랬다."언니,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는데 어찌 고연 오라버니께 이리 화를 내십니까."아버지와 어머니마저 미간을 찌푸리고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동안 우리가 너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구나. 파혼을 장난으로 여길 줄은 몰랐다.""윤정, 어서 고연에게 사과하거라.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겠다."두 사람은 마치 철없는 사람은 언제나 나이고, 이 모든 일을 벌인 자신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오라버니가 찔린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나는 윤월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차분히 고연과 눈을 마주했다."저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