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만불사에서 사람들이 눈을 감고 기복패를 뽑고 있었다. 내가 뽑은 침향목 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마다 평안하기를. 온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나는 늘 곁을 지키리라.] 힘찬 필체는 내 부군, 진북장군 서한주의 것이었다. 관리들의 부인들은 모두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혼인한 지 삼 년이 지났는데도 서 장군께서는 여전히 부인을 이토록 아끼시는군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는 목패 뒷면에 새겨진 작은 ‘은’ 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초은은 서한주가 전쟁터의 시체 더미에서 구해 온 고아였다. 서한주는 내 손에서 목패를 빼앗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초은이는 의지할 곳도 없고 몸도 약하다. 내가 평안을 빌어 준 것이 뭐가 잘못이냐? 너는 이미 장군 부인으로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는데, 그깟 애정까지 빼앗으려 드느냐?" 원초은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장군께서는 언니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자 지난 삼 년이 모두 우스워졌다. 함께 도성에 갈 때면 서한주의 우산은 늘 원초은 쪽으로 기울었다. 자객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나를 칼날 앞으로 밀어 놓고, 발목을 삔 원초은만 안아 들고 빠져나갔다. "너는 무예를 익혔으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초은이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집안을 돌보고 함께 전쟁터에 나서 주기를 바라면서도, 연약한 원초은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즐겼다. "더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서한주의 눈에 스친 당혹감을 바라보았다. "장군 부인의 자리와 그 부귀영화도 모두 돌려드리지요."
View More원초은은 서신이 거짓임을 알고도 병력 교대 시각을 넘기고 옛 인장을 훔쳤으며, 경비병 매수에도 가담한 죄로 참수형이 선고되었고, 형 집행 여부는 가을에 다시 심의하기로 했다.판결을 들은 원초은은 울지 않았다.서한주 곁을 지나던 원초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저를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족쇄를 찬 서한주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없다."원초은이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정은 제게 주셨습니다.""심소원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그분의 혼수와 유품, 명예와 목숨까지 모두 저를 위해 내놓으셨습니다.""서한주,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습니다.""그저 남들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매달리는 것을 좋아할 뿐입니다."옥졸들이 원초은을 끌고 나갔다.이어 서한주의 판결이 내려졌다.재판관이 황명을 펼쳐 읽었다.“서한주는 군사 보고서를 몰래 없애고 함부로 병력을 움직였으며, 거짓 진술서를 꾸며 폐하를 속이고 다른 이에게 죄를 덮어씌웠으니 본래 참수형에 처해야 한다.다만 오랫동안 북방을 지키며 공을 세웠고, 마지막 순간 삭주성을 지킨 데다 스스로 증거를 내놓았기에 군공으로 목숨은 살려 준다.작위와 관직을 빼앗고 얼굴에 죄인의 낙인을 새기며, 재산 절반을 몰수한 뒤 서령에서 평생 노역하게 하되 사면에서도 제외한다.”서한주는 말 없이 황명을 받았다.이어 품에서 화리서(和離書)를 꺼냈는데, 자신의 이름과 손도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심소원의 혼수는 애초부터 서씨 가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초은이 쓴 돈은 제 재산에서 두 배로 갚겠습니다.""청석협에서 죽은 열아홉 명의 위로금도 서씨 가문에서 책임지겠습니다."재판관이 문서를 받아 들었다.서한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바라보았다."소원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그때 원초은을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혹시...""아닙니다."나는 서한주의 말을 끊었다."원초은이 아니었어도 장군은 구해 줘야 할 다른 사람을 찾았을 것입니다.""장군은 저의 강인함을 좋아하면
북적의 선봉대가 방책에 부딪힌 순간, 바깥 성문이 굉음과 함께 닫히고 양쪽 성벽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앞장서던 기병들이 말과 함께 뒤엉켜 쓰러졌지만, 뒤따라온 지원군은 계속 바깥 성문을 들이받았다.나는 경기병 삼백 명을 이끌고 서문으로 우회해 적의 후방을 기습했다.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챈 고민철은 원초은을 붙잡아 안쪽 성문 앞까지 물러났다. 칼날이 원초은의 목을 베어 피가 흘렀다."안쪽 성문을 열어라!""열지 않으면 이 계집을 죽이겠다!"성루에 선 서한주는 성문을 여는 장치에 손을 얹었다.안쪽 성문이 열리면 갇혀 있던 북적의 선봉대가 삭주성 안으로 밀려들고, 성 밖의 지원군은 내 경기병을 앞뒤에서 포위할 터였다.원초은은 성루의 서한주를 올려다보며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장군, 살려 주십시오!""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지켜 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부장군이 다급히 외쳤다."심 장군이 이미 적의 후방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성문을 열면 심 장군과 경기병 삼백 명이 모두 갇혀 죽습니다!"한쪽에는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원초은이, 다른 한쪽에는 고통조차 내색하지 않는 내가 있었다.서한주의 손끝이 심하게 떨리자, 고민철은 비웃으며 원초은의 목에 댄 칼을 더욱 깊이 눌렀다."장군, 이런 눈물에 가장 약하지 않습니까?""예전에는 이 여인이 몇 번 울기만 해도 정예 기병 삼백 명을 이끌고 군영을 이탈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 구하지 않는 것입니까?"적진 후방에서 붉은 신호 화살 세 발이 솟아올랐다.포위할 때가 된 것이다.서한주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성문 장치에서 손을 떼고 활을 집어 들었다."궁수들은 준비하라."원초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한주를 바라보았다."장군,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서한주는 원초은을 보지 않았다."다시는 다른 이의 목숨으로 내 정을 증명하지 않겠다."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고민철의 손목을 꿰뚫었다.동시에 나는 경기병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은빛 창으로 고민철의 칼을 쳐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원경준의 유해는 북쪽 산비탈에 묻었다. 서한주가 제멋대로 군영을 이탈했던 과거가 영원히 묻히기를 바란다면 약속대로 병력 교대 시각을 보내라.]지난 이 년간의 송금 전표와 서신 사본, 고민철의 옛 부하가 한 진술이 모두 일치했다.사흘 뒤, 원초은은 대질을 위해 삭주로 압송되었다. 서신 사본을 본 순간 원초은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서한주는 탁자 앞에 선 채 문제의 서신을 움켜쥐고 있었다."두 번째 서신을 받았을 때는 이미 네 오라버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원초은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다."장군, 무섭습니다."서한주가 반걸음 물러서자 원초은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언제 알았느냐고 물었다."그제야 원초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들은 장군께서 저를 구하려고 군영을 이탈했던 일도, 심가군이 장군을 대신해 군영을 지키다 죽은 일도 알고 있었습니다. 고민철은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일을 도성에 알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저는 모두 장군을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나를 지키려고 했다고?"서한주가 서신 사본을 탁자 위에 세게 내리쳤다."열아홉 명이 죽고 소원이는 명예를 잃었다. 심씨 가문의 충절마저 내 손으로 더럽힐 뻔했는데, 이것이 정녕 나를 지킨 일이란 말이냐?"원초은은 눈물을 흘리다가 문득 웃었다."하지만 첫 번째 서신이 수상하다는 것을 아시고도 덮어 주신 분은 장군이십니다.""제가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번번이 뒤처리를 해 주셨습니다.""예전에는 제가 무섭다고 하면 언니를 두고 제게 와 주셨고, 제가 위험해지면 저만 바라보셨습니다."원초은이 무릎을 꿇은 채 두 걸음 다가갔다."저는 그저 장군께서 이번에도 저를 구해 주시기를 바랐을 뿐입니다.""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군막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서한주는 천천히 원초은에게서 멀어졌다."군영 감옥에 가둬라."호위들이 원초은을 끌고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서한주가 갑
서한주가 군막으로 들이닥쳤을 때, 군의는 막 내 소매를 잘라 낸 참이었다.내 어깨를 누르고 있는 군의의 손을 본 서한주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나가시게."군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상처가 이미 곪아서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서한주가 다가와 약병을 빼앗았다."어디를 건드리면 안 되는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소."나는 옷깃을 여며 잠갔다."장군, 분수를 지키십시오."내게 뻗던 서한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한참 뒤에야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예전에는 네가 열이 날 때마다 내가 곁을 지켰다. 궂은 날씨에 옛 상처가 도질 때도 내가 너를 안고 밤을 지새웠지.""이제 군의가 몇 번 손을 댔다고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냐?"나는 응수령의 복병에게서 찾아낸 화살촉을 그의 앞에 던졌다."고민철이 장군께서 정해 준 길에서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군사에 관한 일은 묻지 않고 누가 제 몸에 손을 댔는지만 중요하십니까?"서한주의 시선이 화살촉에 멎었다."고민철이 너를 죽이려 했다고?""장군의 보조 인장을 지니고, 장군께서 허락한 길로 저를 데려갔습니다.""그 길은 고민철이 직접 정해 올린 것이다. 네 옛 상처가 도질까 걱정되어 북방의 길을 잘 아는 옛 부하를 붙여 준 것뿐이야."서한주는 내 앞에 몸을 낮추고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피했다."첫 번째 서신은 어찌 된 것입니까?"나는 서신 뒷면에 적힌 지시를 펼쳐 보였다.서한주는 자신의 글씨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그 서신에 북쪽 군영의 교대 시기를 묻는 내용이 있어 수상히 여겼다. 그래서 고민철에게 알아보라 일렀다. 초은이는 오라버니가 유일한 혈육이라며 밤새 무릎을 꿇고 서신을 군의 기록에 남기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고민철이 서신을 가져온 자까지 조사했지만 별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그래서 조사 기록을 태우셨습니까?""초은이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서한주가 나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점차 잠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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