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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옥과 우리 사이

부서진 옥과 우리 사이

By:  허이하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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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불사에서 사람들이 눈을 감고 기복패를 뽑고 있었다. 내가 뽑은 침향목 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마다 평안하기를. 온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나는 늘 곁을 지키리라.] 힘찬 필체는 내 부군, 진북장군 서한주의 것이었다. 관리들의 부인들은 모두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혼인한 지 삼 년이 지났는데도 서 장군께서는 여전히 부인을 이토록 아끼시는군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는 목패 뒷면에 새겨진 작은 ‘은’ 자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초은은 서한주가 전쟁터의 시체 더미에서 구해 온 고아였다. 서한주는 내 손에서 목패를 빼앗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초은이는 의지할 곳도 없고 몸도 약하다. 내가 평안을 빌어 준 것이 뭐가 잘못이냐? 너는 이미 장군 부인으로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는데, 그깟 애정까지 빼앗으려 드느냐?" 원초은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장군께서는 언니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자 지난 삼 년이 모두 우스워졌다. 함께 도성에 갈 때면 서한주의 우산은 늘 원초은 쪽으로 기울었다. 자객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나를 칼날 앞으로 밀어 놓고, 발목을 삔 원초은만 안아 들고 빠져나갔다. "너는 무예를 익혔으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초은이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집안을 돌보고 함께 전쟁터에 나서 주기를 바라면서도, 연약한 원초은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즐겼다. "더는 따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서한주의 눈에 스친 당혹감을 바라보았다. "장군 부인의 자리와 그 부귀영화도 모두 돌려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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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소원아."

서한주는 절문 밖까지 뒤따라와 내 손목을 붙잡고 우산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는 내 손목을 감싸 쥔 채 엄지로 습관처럼 두어 번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 모습은 마치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매섭게 나무란 사람이 자신이 아닌 듯했다.

"너는 나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고, 훗날에도 나와 한 무덤에 누울 아내다. 초은이는 그저 위로 몇 마디를 받았을 뿐인데, 어찌 네 자리를 넘볼 수 있겠느냐?"

그는 몸을 숙여 내 속눈썹에 맺힌 빗물을 닦아 주며 목소리를 낮췄다.

예전에도 다툴 때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먼저 내 것을 빼앗은 뒤 부인의 자리와 평생을 약속하며 달랬다.

마치 내가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니, 다른 여인에게 나누어 주는 애정쯤은 참아야 한다는 듯이.

그때 등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자, 서한주는 바로 내 어깨의 망토를 벗겨 원초은에게 둘러 주었다.

망토와 함께 내 몸에 남아 있던 온기마저 찬 바람 속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원초은은 옷깃을 여미며 겁먹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께서도 추우실 텐데, 장군께서는 망토를 돌려주시어요."

"소원이는 내공이 있어 추위를 견딜 수 있다. 너처럼 몸이 약한 줄 아느냐?"

서한주는 원초은의 옷고름까지 단단히 매어 준 뒤에야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는 셋이 탈 수 없다. 너는 비좁은 것을 싫어하니, 내가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가마."

그는 말 한마디로 나를 버리는 일을 배려인 양 꾸몄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지나쳐 홀로 빗속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왼쪽 어깨가 팔을 들지 못할 만큼 아팠다.

서한주는 젖은 옷을 벗겨 주고, 오래된 화살 상처 위에 손바닥을 얹어 굳은 근육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몸은 마음보다 먼저 그를 기억했다.

익숙한 온기가 닿자 팽팽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본능처럼 조금 느슨해졌다.

삼 년 전 내가 독에 중독되었을 때, 그는 눈보라를 뚫고 삼백 리 길을 달려 해독약을 구해 왔다.

이틀 밤을 꼬박 내 곁을 지키느라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다시는 내가 다치게 두지 않겠다고 손을 붙잡고 맹세했다.

지금도 내 상처를 어루만지는 이는 그였다.

거듭 내게 상처를 입히는 이도 그였다.

고민철이 문밖에 서서 나직이 아뢰었다.

"장군님, 원초은 아씨께서 악몽을 꾸셨다는데... 누구도 곁에 오지 못하게 합니다."

서한주의 손이 멈췄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소매를 힘껏 움켜쥐었다.

"제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그래도 가실 겁니까?"

서한주는 소매를 붙잡은 내 손을 내려다보다가, 잠시 후 몸을 숙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소원아, 나를 배은망덕한 자로 만들지 마라."

그의 소매가 내 손가락 사이에서 조금씩 빠져나갔다.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겉옷을 걸치고 장부를 보관하는 방으로 향했다.

원초은이 머무는 별원과 해마다 복용하는 값비싼 약재는 물론, 그 명의로 된 점포 두 곳까지 모두 내 혼수에서 비용을 대고 있었다.

집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장군님께서 부부 사이에는 네 것과 내 것이 따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장부의 마지막 장까지 넘겼다.

서한주는 내 돈으로 원초은을 보살피면서, 그녀의 고마움을 앞세워 자신이 정 많고 의리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찬 패를 풀어 장부 위에 눌러 놓았다.

"오늘부터 장군부에서는 내 혼수에 손대지 못한다."

"원초은에게 들어간 돈도 장군에게 한 푼도 빠짐없이 갚으라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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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소원아."서한주는 절문 밖까지 뒤따라와 내 손목을 붙잡고 우산 아래로 끌어당겼다.그는 내 손목을 감싸 쥔 채 엄지로 습관처럼 두어 번 부드럽게 문질렀다.그 모습은 마치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나를 매섭게 나무란 사람이 자신이 아닌 듯했다."너는 나와 정식으로 혼례를 치렀고, 훗날에도 나와 한 무덤에 누울 아내다. 초은이는 그저 위로 몇 마디를 받았을 뿐인데, 어찌 네 자리를 넘볼 수 있겠느냐?"그는 몸을 숙여 내 속눈썹에 맺힌 빗물을 닦아 주며 목소리를 낮췄다.예전에도 다툴 때마다 늘 이런 식이었다.먼저 내 것을 빼앗은 뒤 부인의 자리와 평생을 약속하며 달랬다.마치 내가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니, 다른 여인에게 나누어 주는 애정쯤은 참아야 한다는 듯이.그때 등 뒤에서 기침 소리가 들리자, 서한주는 바로 내 어깨의 망토를 벗겨 원초은에게 둘러 주었다.망토와 함께 내 몸에 남아 있던 온기마저 찬 바람 속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원초은은 옷깃을 여미며 겁먹은 듯 나를 바라보았다."언니께서도 추우실 텐데, 장군께서는 망토를 돌려주시어요.""소원이는 내공이 있어 추위를 견딜 수 있다. 너처럼 몸이 약한 줄 아느냐?"서한주는 원초은의 옷고름까지 단단히 매어 준 뒤에야 내게 손을 내밀었다."마차에는 셋이 탈 수 없다. 너는 비좁은 것을 싫어하니, 내가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가마."그는 말 한마디로 나를 버리는 일을 배려인 양 꾸몄다.나는 그가 내민 손을 지나쳐 홀로 빗속으로 걸어갔다.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왼쪽 어깨가 팔을 들지 못할 만큼 아팠다.서한주는 젖은 옷을 벗겨 주고, 오래된 화살 상처 위에 손바닥을 얹어 굳은 근육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몸은 마음보다 먼저 그를 기억했다.익숙한 온기가 닿자 팽팽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본능처럼 조금 느슨해졌다.삼 년 전 내가 독에 중독되었을 때, 그는 눈보라를 뚫고 삼백 리 길을 달려 해독약을 구해 왔다. 이틀 밤을 꼬박 내 곁을 지키느라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다시는 내가 다치게 두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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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음 날은 서가 노부인의 탄일 연회였다.원초은이 차를 올리려고 몸을 숙이자 옷깃 사이로 초승달 무늬가 있는 붉은 옥패가 미끄러져 나왔다.나는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어머니는 전사하기 전, 붉은 옥패 하나를 내 품에 넣어 주셨는데, 그것은 심씨 가문에 남은 유일한 유품이었다. 나는 그것을 화장함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둔 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다.그런데 그 옥패는 반으로 잘려, 한쪽은 비녀가 된 채 서한주가 내민 비단함에 담겨 있었다."어제 너를 화나게 했으니 오늘은 제대로 사과하려고 준비했다."서한주는 직접 옥비녀를 꺼내 내 머리에 꽂아 주었다."옥패가 너무 커 네가 차지도 않기에 장인에게 두 개로 나누어 만들라 했다. 하나는 네가 지니고, 하나는 초은이의 몸을 지키는 데 쓰면 된다."나는 머리에서 옥비녀를 뽑았다."누구의 허락을 받고 손대셨습니까?"서한주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 굳었다."옥은 그대로다. 모양만 바꾸었을 뿐이다.""제 어머니께서 남기신 유품입니다.""알고 있다."서한주는 내 손을 잡으며 난처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그 옥이 전쟁터에서 너를 살아 돌아오게 해 주었으니, 그 복을 빌려 초은이도 지켜 주고 싶었다. 심 부인께서는 생전에 마음이 어진 분이셨다. 살아 계셨다면 고아가 된 아이가 밤마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외면하지 않으셨을 게다."원초은은 황급히 목에 걸린 옥고리를 풀었다."언니, 심 부인의 유품인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순간 붉은 끈이 끊어지면서 옥고리가 펄펄 끓는 국 속으로 굴러떨어졌다.뜨거운 국물이 튀자 원초은이 비명을 질렀다.서한주는 곧장 그녀를 품에 안고, 조금 붉어진 손을 감싸 쥔 채 약을 가져오라 재촉했다.옥패에는 초승달 무늬를 가로지르는 금이 나 있었다.손바닥이 새빨갛게 데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원초은에게 약을 발라 준 서한주는 내 손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정신이 나간 게냐?"그는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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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튿날 아침, 병부 연무장에는 열아홉 구의 시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마지막 흰 천이 걷히자 하태호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굴 절반이 피로 뒤덮인 채, 허리에는 여전히 심가군의 낡은 구리 호각을 차고 있었다.십이 년 전 심씨 가문이 무너졌을 때, 어린 나를 시신을 나르는 수레에 숨긴 뒤 불길 속에서 업고 나온 사람이 바로 하태호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들이 열여섯이 되면 내게 보내 창술을 배우게 해도 되겠느냐고 사람을 시켜 물어 왔다.그런 하태호의 오른손이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굳어 버린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자 피에 흠뻑 젖은 엿 한 알이 보였다.청석협(青石峽)은 도성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이었다.지난밤 누군가 내 옛 인장으로 병력을 요청한 뒤, 서한주가 관리하는 보조 인장까지 찍어 군령을 완성했다. 내 인장은 이미 효력을 잃어 요청자가 나라는 사실만 증명할 뿐, 실제로 군사를 움직일 권한을 부여한 것은 서한주의 인장이었다.병부시랑이 두 인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서 장군, 해명하시게."원초은은 병풍 뒤에 숨어 치맛자락을 떨고 있었다. 서한주는 원초은을 한 번 바라보더니 태연히 사람들의 시선을 가로막았다."소원이가 제게 인장을 찍어 달라고 청했습니다."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서한주의 얼굴은 마치 미리 합의한 일을 말하듯 평온했다."청석협에서 심가군의 유품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가져오려 했습니다. 저는 제 부인을 믿었기에 자세히 살피지 않았습니다."병부는 두 인장을 거둔 뒤, 내게 외출을 삼가고 처분을 기다리라 명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원초은이 병풍 뒤에서 나와 무릎을 꿇었다."언니의 옛 인장을 가져간 사람은 저입니다."원초은은 울면서 서신 한 통을 내밀었다."오라버니가 살아 있으니 청석협으로 오라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호위 몇 명만 데려가려 했을 뿐, 사람이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서한주는 몸을 숙여 원초은을 일으켜 세웠다."민철아, 초은이를 데려가라."나는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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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사흘 뒤, 병부는 감찰관이 지켜보는 조건으로 충열사 참배를 허락했다. 제례가 끝나면 곧바로 삭주로 압송될 예정이었다.영당 밖에는 유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하태호의 아들이 아버지의 투구를 품에 안은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두 눈은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심 장군님, 아버지는 장군님이 군공을 세우려고 부하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그런데 왜 아버지를 보내셨습니까?"주변의 울음소리가 일시에 멎었다.사람들은 모두 내가 심씨 가문의 유품 몇 점을 되찾으려고 열아홉 명의 병사를 죽게 했다고 믿고 있었다.나는 몸을 낮춰 피 묻은 엿을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조금만 기다려 다오.""반드시 진실을 밝혀 주마."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뒤늦게 나타난 서한주의 곁에는 원초은도 있었다. 손목에 흰 천을 감은 원초은은 영당에 들어오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었다."오라버니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언니께 전한 탓에 언니께서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원망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언니를 제때 말리지 못한 저를 원망해 주십시오."잘못을 인정하는 듯했지만, 결국 병력을 움직인 사람이 나라고 못 박는 말이었다.하태호의 노모가 눈을 붉힌 채 달려들어 향로로 내 이마를 내리치려 했다.서한주가 손을 들어 향로를 막아 내자 뜨거운 향재가 온몸에 쏟아지고 손등이 순식간에 벌겋게 데었다. 이어 나를 품에 감싸안았다.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치 오래전처럼 여전히 내 앞을 지켜 주던 소년인 것만 같았다.그러나 곧 서한주는 내 어깨를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잘못을 인정하고 위로금도 갑절로 치르겠다고 약조하거라. 네가 고개만 숙이면 이 일은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나는 붙잡았던 그의 소매를 천천히 놓았다."인장을 훔친 사람은 원초은이고, 군령을 승인한 사람은 장군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사죄해야 합니까?"원초은은 돌연 비녀를 뽑아 제 목에 들이댔다."언니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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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진찬후가 마차 휘장을 내리고 칼자루를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자 호송대에 숨어 있던 황실 호위 여섯 명이 일제히 고삐를 움켜쥐었다."지금 잡을까요?""고민철이 도성의 호송대에 제 발로 들어왔으니, 데려온 자들이 저 병사들뿐일 리 없다."나는 밀서를 옷깃 안에 갈무리했다."고민철이 먼저 손을 쓸 때까지 기다리자꾸나."호송대가 응수령 깊숙이 들어섰을 때 앞쪽에서 말이 다급하게 울부짖었다. 수레바퀴가 눈구덩이에 빠지자, 절벽 위에서 바위가 굴러 내려오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내리십시오!"나는 발로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곧이어 바위가 굉음과 함께 떨어지며 마차를 산산조각 냈다.양쪽 절벽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첫 화살이 땅에 닿기도 전에 진찬후가 칼을 뽑았고, 호송대에 숨어 있던 황실 호위들도 일제히 반격했다.하지만 고민철의 병사들은 절벽 위의 복병을 상대하지 않고 칼을 뽑아 내게 달려들었다.진찬후가 칼을 가로 세워 한 사람을 막아 냈다."고 부장군, 이것이 마님을 안전하게 호위하겠다는 말의 뜻이었소?"고민철은 천천히 망토를 벗었다.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북적의 첩자가 용의자를 습격했고, 저는 호위에 실패한 것입니다. 시신을 도성으로 돌려보낸 뒤 장군께 죄를 청하겠습니다.""서한주가 나를 죽이라고 했느냐?""장군께서는 차마 그러지 못하십니다."고민철이 칼을 들고 다가왔다."그러니 제가 대신 악인이 되어 드려야지요."칼날이 정면으로 날아들었다.나는 몸을 틀어 칼을 피한 뒤, 손에 숨겨 둔 붉은 옥 조각으로 고민철의 손목을 그었다. 고민철이 아픔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러섰지만, 그 순간 내 왼쪽 어깨의 옛 상처도 다시 벌어져 피가 옷자락을 적셨다.고민철은 피로 물드는 내 어깨를 보더니 문득 웃었다."역시 장군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마님은 무엇이든 견디는 분이니,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겠지요."나는 고민철의 오금을 걷어차고 몸을 돌려 칼을 빼앗았다.그때 절벽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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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한주가 군막으로 들이닥쳤을 때, 군의는 막 내 소매를 잘라 낸 참이었다.내 어깨를 누르고 있는 군의의 손을 본 서한주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나가시게."군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상처가 이미 곪아서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서한주가 다가와 약병을 빼앗았다."어디를 건드리면 안 되는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소."나는 옷깃을 여며 잠갔다."장군, 분수를 지키십시오."내게 뻗던 서한주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한참 뒤에야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예전에는 네가 열이 날 때마다 내가 곁을 지켰다. 궂은 날씨에 옛 상처가 도질 때도 내가 너를 안고 밤을 지새웠지.""이제 군의가 몇 번 손을 댔다고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냐?"나는 응수령의 복병에게서 찾아낸 화살촉을 그의 앞에 던졌다."고민철이 장군께서 정해 준 길에서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군사에 관한 일은 묻지 않고 누가 제 몸에 손을 댔는지만 중요하십니까?"서한주의 시선이 화살촉에 멎었다."고민철이 너를 죽이려 했다고?""장군의 보조 인장을 지니고, 장군께서 허락한 길로 저를 데려갔습니다.""그 길은 고민철이 직접 정해 올린 것이다. 네 옛 상처가 도질까 걱정되어 북방의 길을 잘 아는 옛 부하를 붙여 준 것뿐이야."서한주는 내 앞에 몸을 낮추고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피했다."첫 번째 서신은 어찌 된 것입니까?"나는 서신 뒷면에 적힌 지시를 펼쳐 보였다.서한주는 자신의 글씨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그 서신에 북쪽 군영의 교대 시기를 묻는 내용이 있어 수상히 여겼다. 그래서 고민철에게 알아보라 일렀다. 초은이는 오라버니가 유일한 혈육이라며 밤새 무릎을 꿇고 서신을 군의 기록에 남기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고민철이 서신을 가져온 자까지 조사했지만 별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그래서 조사 기록을 태우셨습니까?""초은이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서한주가 나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점차 잠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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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원경준의 유해는 북쪽 산비탈에 묻었다. 서한주가 제멋대로 군영을 이탈했던 과거가 영원히 묻히기를 바란다면 약속대로 병력 교대 시각을 보내라.]지난 이 년간의 송금 전표와 서신 사본, 고민철의 옛 부하가 한 진술이 모두 일치했다.사흘 뒤, 원초은은 대질을 위해 삭주로 압송되었다. 서신 사본을 본 순간 원초은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서한주는 탁자 앞에 선 채 문제의 서신을 움켜쥐고 있었다."두 번째 서신을 받았을 때는 이미 네 오라버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원초은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다."장군, 무섭습니다."서한주가 반걸음 물러서자 원초은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언제 알았느냐고 물었다."그제야 원초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들은 장군께서 저를 구하려고 군영을 이탈했던 일도, 심가군이 장군을 대신해 군영을 지키다 죽은 일도 알고 있었습니다. 고민철은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일을 도성에 알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저는 모두 장군을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나를 지키려고 했다고?"서한주가 서신 사본을 탁자 위에 세게 내리쳤다."열아홉 명이 죽고 소원이는 명예를 잃었다. 심씨 가문의 충절마저 내 손으로 더럽힐 뻔했는데, 이것이 정녕 나를 지킨 일이란 말이냐?"원초은은 눈물을 흘리다가 문득 웃었다."하지만 첫 번째 서신이 수상하다는 것을 아시고도 덮어 주신 분은 장군이십니다.""제가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번번이 뒤처리를 해 주셨습니다.""예전에는 제가 무섭다고 하면 언니를 두고 제게 와 주셨고, 제가 위험해지면 저만 바라보셨습니다."원초은이 무릎을 꿇은 채 두 걸음 다가갔다."저는 그저 장군께서 이번에도 저를 구해 주시기를 바랐을 뿐입니다.""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을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군막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서한주는 천천히 원초은에게서 멀어졌다."군영 감옥에 가둬라."호위들이 원초은을 끌고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서한주가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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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북적의 선봉대가 방책에 부딪힌 순간, 바깥 성문이 굉음과 함께 닫히고 양쪽 성벽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앞장서던 기병들이 말과 함께 뒤엉켜 쓰러졌지만, 뒤따라온 지원군은 계속 바깥 성문을 들이받았다.나는 경기병 삼백 명을 이끌고 서문으로 우회해 적의 후방을 기습했다.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챈 고민철은 원초은을 붙잡아 안쪽 성문 앞까지 물러났다. 칼날이 원초은의 목을 베어 피가 흘렀다."안쪽 성문을 열어라!""열지 않으면 이 계집을 죽이겠다!"성루에 선 서한주는 성문을 여는 장치에 손을 얹었다.안쪽 성문이 열리면 갇혀 있던 북적의 선봉대가 삭주성 안으로 밀려들고, 성 밖의 지원군은 내 경기병을 앞뒤에서 포위할 터였다.원초은은 성루의 서한주를 올려다보며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장군, 살려 주십시오!""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지켜 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부장군이 다급히 외쳤다."심 장군이 이미 적의 후방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성문을 열면 심 장군과 경기병 삼백 명이 모두 갇혀 죽습니다!"한쪽에는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원초은이, 다른 한쪽에는 고통조차 내색하지 않는 내가 있었다.서한주의 손끝이 심하게 떨리자, 고민철은 비웃으며 원초은의 목에 댄 칼을 더욱 깊이 눌렀다."장군, 이런 눈물에 가장 약하지 않습니까?""예전에는 이 여인이 몇 번 울기만 해도 정예 기병 삼백 명을 이끌고 군영을 이탈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 구하지 않는 것입니까?"적진 후방에서 붉은 신호 화살 세 발이 솟아올랐다.포위할 때가 된 것이다.서한주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성문 장치에서 손을 떼고 활을 집어 들었다."궁수들은 준비하라."원초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한주를 바라보았다."장군,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서한주는 원초은을 보지 않았다."다시는 다른 이의 목숨으로 내 정을 증명하지 않겠다."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고민철의 손목을 꿰뚫었다.동시에 나는 경기병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은빛 창으로 고민철의 칼을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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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원초은은 서신이 거짓임을 알고도 병력 교대 시각을 넘기고 옛 인장을 훔쳤으며, 경비병 매수에도 가담한 죄로 참수형이 선고되었고, 형 집행 여부는 가을에 다시 심의하기로 했다.판결을 들은 원초은은 울지 않았다.서한주 곁을 지나던 원초은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저를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족쇄를 찬 서한주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없다."원초은이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정은 제게 주셨습니다.""심소원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그분의 혼수와 유품, 명예와 목숨까지 모두 저를 위해 내놓으셨습니다.""서한주,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습니다.""그저 남들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매달리는 것을 좋아할 뿐입니다."옥졸들이 원초은을 끌고 나갔다.이어 서한주의 판결이 내려졌다.재판관이 황명을 펼쳐 읽었다.“서한주는 군사 보고서를 몰래 없애고 함부로 병력을 움직였으며, 거짓 진술서를 꾸며 폐하를 속이고 다른 이에게 죄를 덮어씌웠으니 본래 참수형에 처해야 한다.다만 오랫동안 북방을 지키며 공을 세웠고, 마지막 순간 삭주성을 지킨 데다 스스로 증거를 내놓았기에 군공으로 목숨은 살려 준다.작위와 관직을 빼앗고 얼굴에 죄인의 낙인을 새기며, 재산 절반을 몰수한 뒤 서령에서 평생 노역하게 하되 사면에서도 제외한다.”서한주는 말 없이 황명을 받았다.이어 품에서 화리서(和離書)를 꺼냈는데, 자신의 이름과 손도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심소원의 혼수는 애초부터 서씨 가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초은이 쓴 돈은 제 재산에서 두 배로 갚겠습니다.""청석협에서 죽은 열아홉 명의 위로금도 서씨 가문에서 책임지겠습니다."재판관이 문서를 받아 들었다.서한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바라보았다."소원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그때 원초은을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혹시...""아닙니다."나는 서한주의 말을 끊었다."원초은이 아니었어도 장군은 구해 줘야 할 다른 사람을 찾았을 것입니다.""장군은 저의 강인함을 좋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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