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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Author: 릴리박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6 22:14:06

36화.

며칠 뒤.

늦가을을 지난 계절은 하루가 다르게 겨울로 접어들었다.

국제 도서전 개막 전, 은별은 마지막 회의를 하기 위해 오늘 출판사에서 이정후 대표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모직 재킷을 집어 들자 옆에 있던 재훈이 재킷을 가져가더니, 그녀가 입기 편하도록 뒤에서 펼쳐주었다.

은별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킷을 입었다.

재훈이 그녀를 돌려세워 재킷의 단추를 채워주었다.

“근데, 내가 정말 대표한테 사과 안 해도 되겠어?”

“응. 내가 잘 말씀드릴게. 사과 안 해도 돼.”

“미안해. 그날…, 당신 곤란하게 해서 진심으로 미안해.”

“됐어,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되지.”

재훈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저를 대하는 은별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은별아.”

“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은별의 입술에서 나오는 ‘사랑한다’는 말이 여전히 믿겨 지지 않은 듯, 재훈은 잠시 넋을 놓더니 이내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당신, 요즘 너무 예뻐.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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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18화.

    118화.여름에 들어선 태양은 쉽사리 붉은 빛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지지 않은 해를 뒤로 하고 은별은 빌라 입구에 들어섰다.선주는 상원의 차로 은별이 살고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려 했지만, 은별은 근처에 들를 곳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북촌에서 헤어졌다.재훈과 함께 사는 신혼집은 강남에 있었는데, 그 일대에서도 최고급 빌라에 속했다.자신의 경제 사정을 대략 알고 있는 선주에게 이런 고급 빌라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면, 단번에 의구심을 품고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물어볼 게 뻔했다.은별은 친한 친구에게조차 자신의 사정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착착함을 느꼈다.한데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을 자초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사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배신하고, 감쪽같이 숨어버린 죄.은별에게 재훈과의 결혼은 사랑보다 속죄에 가까웠다.신혼집 현관문 앞에서 선 은별은 잠시 멈칫했다.“휴우….”명치를 조이는 답답함에 깊게 숨을 들였다 내쉬었다.오랜만의 외출이 가져다준 해방감은 현관문 앞에서 그 존재를 완전히 잃었다.은별은 다시금 깊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열었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구두를 벗었다.몇 개월 만에 상당히 오래 길을 걸어서인지 발바닥이 욱신거렸었다.두 사람만 사는 집인데도 현관에서 거실까지 거리가 터널처럼 길었다.그녀가 발을 옮길 때마다 높은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조명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밝게 빛나며 그녀를 비췄다.시간은 7시를 향하고 있었다.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는 6시면 퇴근했다.이 집에 살면서 이 시간까지 밖에 있었던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아주머니는 늦게 들어오는 저를 위해 집의 전등을 켜놓고 간 듯했다. 집은 어두운 곳 하나 없이 밝았다.재훈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는지 집안은 조용했다.‘저녁은 집에서 같이 먹자.’은별은 재훈의 말을 떠올리며 거실을 지나 다이닝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재훈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저녁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준비할 게 많은 건 아니었다.아주머니가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17화.

    117화.같은 시각, 프로덕션 〈MINE〉재훈은 들고 있던 핸드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이러니, 고은별을 가둬 놓고 싶은 거다. 밖을 나갔다 하면 똥파리 새끼들이 달라붙지, 달라붙어.지금 재훈의 기분은 말 그대로 더러웠다.‘여보’라는 소리에 은별을 향한 의심의 꼬리를 내렸었다.무엇보다 그녀의 친구 선주는 재훈도 잘 아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나간 은별을 더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다.은별과 첫 번째 통화 후, 그는 은별과 저녁을 먹으며 오늘 하루에 관해 이야기할 생각에 나름 기분이 좋기까지 했었다.몇 달을 집에만 있는 여자였다. 재훈은 은별이 집 밖을 나가는 것을 기본적으로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은별의 일상이 대부분 집이다 보니 대화할 거리가 많지 않았다.재훈은 은별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한데 대부분 저만 떠들어대고 은별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오도카니 앉아 숨만 쉬는 예쁜 인형과 같았다.그녀가 제 말에 반응하든 안 하든 재훈에게 은별은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매일 물고 빨아도 부족할 여자였지만, 점점 말을 잃는 그녀가 걱정되긴 했었다.그래서 영화사 인수가 마무리되고 바쁜 일정들이 끝나면, 좋은 곳으로 휴가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혼인 신고만 했지, 결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었고, 신혼여행도 다녀오지 않았다.겸사겸사 기분 전환도 할 겸 해외로 나가볼까 생각 중이었다.그랬는데…. 고은별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종알종알 이야기하고, 심지어 개소리 같은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제기랄!은별과 처음 통화가 끝나고 곧장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보통 그녀가 저에게 전화를 먼저 하는 일은 드물기에 반가운 마음에 전화가 한번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은…!”- 에스프레소가 나와서요. 식으면 맛이 없어서. 선주 씨가 온다는 걸 제가 은별 씨 데려온다고 떼써서 온 건데, 너무 조용히 다가왔나 보네요. 괜찮아요?젠장. 남자 목소리였다.그것도 내 여자에게 대놓고 찝쩍대는 중후한 목소리의 아저씨였다. 그리고 이어진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16화.

    116화.“휴우….”은별은 통화 종료 화면으로 전환된 핸드폰 액정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통화 다 끝나셨어요?”“헉!”은별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타탁!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이런, 죄송해요. 저 때문에.”마도준이 놀란 은별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곧장 몸을 수구려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그는 핸드폰을 은별에게 건넸다. 은별은 너무 당황해 얼른 핸드폰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언제부터 들어와 있었던 것일까. 저와 재훈의 통화를 들었나?은별은 좀처럼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고 긴장감 가득한 눈빛으로 마도준을 바라봤다.“에스프레소가 나와서요. 식으면 맛이 없어서. 선주 씨가 온다는 걸 제가 은별 씨 데려온다고 떼써서 온 건데, 너무 조용히 다가왔나 보네요. 괜찮아요?”“아, 네. 괘, 괜찮아요.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다음엔 똑똑, 노크하고 들어오겠습니다. 숙녀분 놀라지 않도록.”“아….”은별은 대꾸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뻐금거렸다.그런 은별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하던 마도준은 이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은별 씨 의상이 여기 갤러리 전시와 너무 잘 어울리네요.”“네?”은별은 도준의 말에 갤러리에 걸린 작품에 시선을 두었다.흰색과 검은색, 주황색과 녹색, 빨간색과 파란색 등, 모든 작품이 각각 두 가지 색깔만 사용해 그려진 그림들이었다.그녀는 자연스레 제가 입은 옷을 훑어보았다.무릎 위로 조금 올라오는 반소매 원피스는 가슴 부근까지 브이넥으로 살짝 파여있었는데, 위에는 연분홍색이었고, 허리 부분부터는 하얀색이었다.단정하면서도 허리선이 보기 좋게 들어가 있어 은근히 몸매를 드러나게 했다.“이번 전시 프로젝트의 주제가 ‘경계’에요.”“아, 네.”“단순하게 색과 선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표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경계’라는 단어에는 상당히 다양한 뜻이 내포되어 있죠. 저는 경계가 주는 선악적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15화.

    115화.별채로 가는 길은 작은 궁궐에 들어온 듯 고택의 멋스러움과 곳곳에 아름다운 나무 문양들이 장식되어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은별은 막상 이곳에 오니, 재훈에 대한 걱정을 잊은 채 오래된 한옥에 홀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기에 바빴다.오랜만에 외출이 가져다준 해방감 가득한 행복이었다.어느새 별채에 도착한 세 사람은 몇 개의 돌계단을 올라 카페 입구 앞에 섰다.상원이 손을 뻗어 전통 나무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였다.벌컥, 하며 안에서 문이 먼저 열렸다.“돌쇠 왔냐!”‘이리 오너라!’라고 말하는 양반집 도령이 나올 법한 곳에서 정말 돌쇠와 같은 사람이 나와서 세 사람을 반겼다.이 사람은 상원의 제일 친한 친구, 마도준이었다.그는 상원보다도 키가 컸고,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거친 남성미가 물씬 풍길 정도로 몸이 좋았다.역삼각형의 몸에 딱 붙은 셔츠 위로 선명한 근육이 보일 정도였다.“사장 놈아, 숙녀분들 계시다. 말조심해라.”상원은 입구를 막고 있는 도준의 어깨를 밀며 안으로 익숙하게 진입했다.밀릴 몸이 아니었지만, 도준은 친구에게 일부러 밀려주며 입구를 열었다.“반가워요, 선주 씨.”마도준은 상원의 뒤로 들어오는 선주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런 그의 행동이 익숙한지 선주는 미소로 받아치며 인사했다.“네, 도준 씨. 오랜만이에요.”“그런데 같이 오신, 이 눈부신 분은 누구?”마도준이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은별을 향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물었다.“제 제일 친한 친구예요. 은별아, 이분이 상원 씨 제일 친한 친구분이야.”선주가 은별에게 마도준을 소개했다. 은별과 도준이 마주 섰다.은별이 먼저 얼굴에 미소 지은 채 인사했다.“처음 뵙겠습니다, 고은별이예요.”“와아, 선주 씨한테 이렇게 아름다운 친구분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반갑습니다. 마도준입니다.”도준이 은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별은 그의 인사말에 가볍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가늘고 여린 손이 커다랗고 큰 손에 쏙 감겼다. 순식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14화.

    114화.은별의 승낙에 선주는 해맑게 웃으며 다시 통화를 이어갔다.“상원 씨, 친구도 좋대요. 여기가 어디냐면 우리가 항상 같이 오는….”선주의 통화 소리를 뒤로 하고 은별은 물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이내 창밖 넘어 푸르른 정원에 시선을 두었다.정원 한가운데에 주홍빛 꽃 무리가 바람에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누군가를 유혹하는 물결처럼 매혹적으로 일렁거렸다.양귀비인가.은별은 그 꽃에 시선을 둔 채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갈증이 났던가 싶은 정도로 그녀의 물잔을 금세 바닥을 보였다.잠깐 내린 여우비에 버석하게 마른 땅이 해갈하듯,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마지막 물줄기가 빠르게 흡수되었다.***얼마나 지났을까.테이블이 깨끗하게 치워지고, 후식으로 허브티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선주야.”듣기 좋은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선주가 행복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부른 사람을 반겼다. 은별도 덩달아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선주의 예비 남편, 상원이었다.그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선주보다 나이가 2살이 많다고 했다.“상원 씨,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어. 길이 안 막혀서. 근데 이분이 은별 씨?”상원이 선주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두르며 은별과 마주 섰다.“맞아요. 이쪽은 내 가장 친한 친구, 고은별.”“안녕하세요, 은별 씨. 선주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전 한상원입니다.”상원은 선주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고는 은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안녕하세요, 고은별입니다. 결혼 축하드려요.”은별도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인사가 끝난 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상원 씨, 점심 안 먹었으면 뭐 먹을래요?”“괜찮아. 병원에서 먹었어. 자기는 뭐 먹었어? 스테이크 먹었구나.”“어머, 어떻게 알았어요?”“내가 자기에 대해 모르는 게 있나. 눈빛만 봐도 다 알지.”평범한 커플의 일상적인 대화가 참으로 아름답게 들렸다.은별은 제 앞에서 행복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13화.

    113화.“어? 아, 아냐. 좀 피, 피곤해서.”은별은 멋쩍어하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진짜 속상하게. 건강 좀 잘 챙겨.”“응, 그럴게. 앉자.”연이은 친구의 걱정에 은별은 애써 웃어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선주도 더는 다그치지 않고 은별과 마주 앉았다.실로 오랜만에 만남이었다. 근심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기엔 둘 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여기 음식 다 맛있어. 뭐 먹을까?”선주가 메뉴판을 펼치며 물었다.“아무거나. 선주 너 좋아하는 걸로 시켜. 내가 살게.”“됐어. 네가 무슨 돈이 있니? 너 백수 된 지 오래됐잖아. 오늘은 결혼 턱으로 내가 살 거야. 비싼 거 먹어, 내 친구.”백수 된 지 오래된 건 사실이나, 돈이 없지는 않았다.그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돈도 있었지만, 재훈과 결혼 후, 그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책임지고 있었다.무엇보다 집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드물었으니 돈을 쓸 일이 없었다.은별은 결혼 턱을 내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더는 제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잠시 뒤.두 사람이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놓였다.연어 샐러드와 안심 스테이크, 해물 스파게티였다.안심 스테이크를 주문했던 선주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 은별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얼굴이 그게 뭐야. 많이 좀 먹어.”은별은 제 앞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보고 잠시 미간을 좁혔다.매일 질리도록 먹는 게 고기였다.재훈은 은별의 식단을 집안일을 하는 아주머니에게 맡겼는데, 매일매일 식단에 고기가 꼭 들어가 있었다.민박집에서부터 재훈과 함께 산 지 몇 달 동안, 은별은 매일 고기를 먹었다. 그녀의 식성에 맞지 않은 고기를 억지로 먹어야 했다.은별이 재훈과 함께하는 시간 중 가장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왜, 입맛이 없어?”“아, 아니. 선주야, 나 고기는 별로. 미안.”“여기 스테이크 진짜 맛있어. 우리 자기는 여기서만 먹어. 다른 곳은 질겨서 못 먹겠대.”우리 자기,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선주의 예비 신랑을 말하는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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