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교수님, 저 이번엔 진짜 퇴사할 겁니다.” 성형외과 의사를 꿈꾸던 한채이. 어쩌다 흉부외과의 미친개, 강태혁 교수에게 낚여 4년째 죽도록 구르는 중이다. 이제는 정말 탈출하려는데, 이 남자가 자꾸 앞길을 막는다. “한채이. 누가 마음대로 그만두래?” 분명 지독하게 싫었던 교수님인데, 어째서 요즘은 자꾸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걸까? 퇴사하고 싶은 전공의 한채이와, 그녀를 절대 놓치기 싫은 흉부외과 교수 강태혁의 아슬아슬하고 달콤살벌한 병원 로맨스!
View More“한채이 선생. 너 미쳤어?”
아침 6시 12분. 한국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실에서 하루를 시작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문장은 없었다. 나는 손에 든 아메리카노를 내려다봤다. 얼음은 이미 다 녹았고, 출근한 지 겨우 12분 만에 인생의 의욕도 함께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인사 참 정겹게 하시네요, 교수님.” “내가 지금 인사를 하는 것 같아?” “아니요. 인성에 문제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정적. ‘아. 씨발.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흰 가운을 걸친 강태혁이 차트를 든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하게 넘긴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어 보이는 얼굴. 대한민국 흉부외과에서 수술 실력으로는 손꼽히는 천재. 그리고 성격으로는 단연 독보적인 개자식. 한국대병원 미친개 강태혁 교수님 되시겠다. “한채이.” “네.” “너 오늘 당직이야?” “아닙니다.” “그럼 왜 벌써부터 정신이 나가 있어?” “교수님을 뵈어서요.” “…….” “영광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강태혁이 들고 있던 차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탁. 그 작은 소리에 내 영혼이 한 번 더 사망했다. “응급 수술 잡혔어. 준비해.” “무슨 환자입니까?” “대동맥 박리. 혈압 불안정하고 파열 위험 있어. 수술방 들어가기 전까지 영상 다시 보고 브리핑 준비해.” 나는 즉시 표정을 고쳤다. 대동맥 박리. 대동맥 내벽이 찢어지면서 혈액이 혈관벽 사이로 파고드는 질환. 진행이 빠르면 생명이 위험하다. 환자 상태가 불안정하다면 한순간도 허비할 수 없었다. *** 두시간 후 수술방 앞 “영상은 확인했습니다. 상행 대동맥까지 침범했고, 심낭삼출도 보여서 심장압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수술 준비하면서 혈역학적 상태 계속 확인하겠습니다.” “수술 계획은?” “병변 범위에 따라 상행 대동맥 치환술을 우선 고려하겠습니다. 정확한 범위는 수술 소견과 영상 다시 대조하겠습니다.” “그걸 나한테 보고라고 해?” “교수님께서 환자 상태부터 확인하라고 하실 것 같아서요.” “내가 언제?” “그야 매일 하시잖아요.” 강태혁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은 건가? 아니겠지. 저 인간이 웃으면 병원 전산망에 공지부터 올라와야 한다. “좋아. 그럼 네가 수술해.” “…네?” “못 하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뭘 놀라. 너 레지던트 4년 차잖아.” 그렇다. 나는 흉부외과 레지던트 4년 차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도 한때는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한국대학교 의과대학 수석 졸업. 인턴 성적 우수. 수술 술기 평가 상위권. 부모님은 사업가였고, 친오빠는 같은 병원 신경외과 교수였다. 머리도 좋고 손도 좋고, 집안까지 든든한 내가 굳이 고생길을 택할 이유는 없었다. 내 인생 계획은 완벽했다. 성형외과 전문의가 된다. 강남에 개원한다. 병원을 확장한다. 건물주가 된다. 그리고 매년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통장에 쌓이는 돈을 확인한다. 인류애? 물론 있었다. 다만 인류애와 수익성이 공존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는 정도였다. 그런 나를 흉부외과로 끌고 온 인간이 바로 저 남자였다. 4년 전, 인턴 시절. 강태혁은 분명 지금과 달랐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 “한채이 선생 맞죠?” 인턴 첫 달, 흉부외과 회진을 따라가던 날이었다. 강태혁은 내 이름이 적힌 명찰을 확인하더니 차트를 넘겨 보았다. “의대 수석이라던데.” “운이 좋았습니다.” “손도 빠르다면서.” “그것도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겸손하네.” 그가 웃었다. 지금으로선 상상불가지만, 그땐 정말로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남자가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한 선생 같은 사람은 흉부외과에 와야 해요.” “네?” “수술하는 걸 봤는데 감각이 좋더군요. 손도 안정적이고, 상황 판단도 빠르고.” 칭찬이었다. 분명 칭찬이었다. 심지어 눈빛도 진지했다. “흉부외과는 힘들어요. 대신 제대로 배우면 어디에서도 밀리지 않는 외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실력은 확실하게 만들어 줄게요.” 강태혁은 그날 내게 미래를 보여 주었다. 최고의 수술 실력을 갖춘 외과의.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의사. 그리고 그 끝에 있을 찬란한 커리어. 나는 감동했다. 아니, 정확히는 홀렸다. ‘와. 저 정도로 실력 있는 교수가 나를 키워 준다고?’ 그날 밤, 나는 성형외과 지원 계획을 접고 흉부외과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뒤. 흉부외과 레지던트 지원서에 이름을 적었다. 그게 바로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 “한채이.” 현재로 돌아왔다. 강태혁이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자냐?” “아닙니다.” “그럼 왜 멍청하게 서 있어?” “제 인생을 되돌아보느라 바빴습니다.” “헛된 짓거리로 시간 낭비하지 마. 수술 준비나 해.” 그는 돌아서며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네가 제1 보조 아니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 “네가 집도해.” “…….” “내가 옆에서 볼 거니까 실수할 생각은 하지 말고.” “교수님.” “왜.” “제가 지난 4년 동안 교수님께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강태혁이 고개를 돌렸다. “뭔데?”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겁니다.” “그건 잘 배웠네.” “특히 교수님 같은 사람은요.” “한채이.” “네.” “수술 끝나고 보자.” ‘아. 오늘도 글렀다.’ 나는 차트를 품에 안고 교수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동안 머릿속으로 수술 계획을 정리했다. 환자의 상태는 위중했다. 농담도, 투덜거림도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였다. 수술실에서는 달라져야 했다. 강태혁이 아무리 개자식이어도, 내가 아무리 그를 싫어해도. 환자 앞에서만큼은 예외가 없었다. 그게 내가 의사로서 지키는 유일한 원칙이었다. 그리고 그 원칙을 강태혁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 인간은 나를 갈궜다. 내가 버틸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내가 도망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물론 가끔은 진짜로 도망치고 싶었다. “채이 선생님!” 수술실 앞에서 타과 전공의 1년 차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교수님이 찾으세요!” “뭐라고 하시던?” “아, 그게….” 후배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한 선생님 손이 오늘따라 유난히 느려 보인다고….” 나는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강태혁 이 개자식을 오늘은 꼭 죽이리라. 물론 의학적으로. 수술 결과가 좋으면 한 대쯤 때려도 되지 않을까? “알았어. 가자.” 수술실 문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 기계음,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진. 그리고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 나는 손을 닦고 장갑을 끼며 생각했다. 성형외과에 갔으면 지금쯤 이 날쎄고 섬세한 손으로 예쁜 코를 만들고 있었을 텐데. 왜 내가 남의 대동맥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한채이.” 수술대 맞은편에서 강태혁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집중해.” 그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장난기도, 빈정거림도 없었다. 오직 수술에 필요한 판단과 확신만이 남아 있었다. “환자 살리자.” 나는 짧게 대답했다. “네, 교수님.” 메스가 건네졌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환자를 살린다. 그것만 생각한다. 그리고 세 시간 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실을 나서려던 순간, 강태혁이 내 이름을 불렀다. “한채이.” “네.” “오늘은 괜찮았어.” “...” “왜. 칭찬받으니까 감격스러워?” “아니요. 혹시 열이 나시나 해서요.” 강태혁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처럼. 하지만 그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일부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까.” 역시. 내가 미쳤지. 저 인간한테 인간적인 면모를 기대하다니. “그건 굳이 예고 안 해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한 선생.” 그가 한 발 다가왔다. “내일 아침 여섯 시. 교수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입니까?” “새로운 수술 들어갈 거야. 네가 맡아.” “환자는요?” “내일 알려 줄게.” “교수님, 저 오늘 밤 당직인데요.” “알아.” “그런데 아침 여섯 시에요?” “응.” “잠은요?” 강태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아서 자.” “…….” “대신 늦으면 죽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나는 수술실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인간은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나는 아직도 이 인간을 이길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흉부외과 레지던트 4년 차 한채이. 내 목표는 여전히 돈이었다. 내 꿈도 여전히 개원이었다. ‘그러니까 제발. 강태혁 교수님. 내 인생에서 좀 꺼져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그 소원을 들어줄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내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채이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도윤과의 저녁은 즐거웠다. 대화도 잘 통했고, 오랜만에 병원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도 했다. 도윤은 채이의 진로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 줬고, 성형외과로 가든 흉부외과에 남든 응원한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자꾸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문 앞에 서 있던 강태혁. 자신이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어쩐지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 않던 얼굴. 채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 진짜.” 휴대폰이 울렸다. [내일 6시 30분.] 채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교수님.] [왜.] [저 오늘 윤도윤 선생님이랑 밥 먹었는데요.] 답장은 없었다. 채이는 웃음을 참으며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교수님 생각보다 질투 많으신 것 같아요.] 이번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채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 또 무시하시네.’ 그녀가 이불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한채이.] 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뒤,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내일은 발표 준비만 하자.] 채이는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말이었다. 발표 준비만 하자니. 그럼 오늘은 뭘 했다는 건데? 그녀는 천천히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렸다. [네, 교수님. 그런데 교수님.] [또 뭐.] [저한테 관심 있으시면 그냥 있다고 하셔도 돼요.] 이번에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채이는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웃었다. 물론 강태혁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었다. 그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만큼은 조금 기대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신경 쓰는 이유가 단순히 제자라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채이는 재빨리 화면을 확인했다. [자.] 채이는 그대로 굳었다. “…뭐?” 다시 읽었다. [자.] 끝이었다. 채이는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인간이 진짜!” 휴대폰을 쥔 채 한참
채이는 병원 정문 앞에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병원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진 식당이었다. 도윤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고, 채이는 휴대폰을 확인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한채이.”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아니길.“…네, 교수님.”돌아보니 강태혁이 서 있었다. 그는 퇴근하려는 듯 정장 재킷을 걸친 채였다.“여기서 뭐 해?”“약속 기다리고 있는데요.”“알아.”“…아세요?”“아까 들었잖아.”아. 그랬지.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 선생님 기다리고 있습니다.”태혁의 입매가 굳었다.“아직 안 왔어?”“네. 조금 늦으신대요.”“그래.”대화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태혁은 가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정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채이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교수님.”“왜.”“퇴근 안 하세요?”“할 거야.”“그런데 왜 안 가세요?”“차가 안 와서.”채이는 병원 주차장을 바라봤다. 태혁의 차는 주차장에 있었다.“교수님 차 저기 있잖아요.”“알아.”“그런데 왜 차가 안 왔다고 하세요?”“한채이.”“네.”“너 오늘 정말 한가하구나.”채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아, 진짜! 교수님!”태혁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웃어?”“아니, 너무 티 나시잖아요!”“뭐가.”“질투하는 거요!”“…….”“교수님, 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채이는 한 걸음 다가갔다.“저 성형외과로 가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랑 밥 먹는 것도 싫으세요?”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이는 그 침묵을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미쳤냐,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지금 할 일이 뭐냐.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태혁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할 만큼 진지했다.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거뒀다.“…교수님?”그 순간 태혁이 입을 열었다.“네가 누구를 만나든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다음 날 오후. 국제학회 발표 준비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채이는 수술이 끝난 뒤 의국에서 자료를 수정하고 있었다. 태혁은 외래와 회진을 마치고 나서야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 의국 문이 열렸다.“한 선생님?”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낯선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아.”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윤 선생님.”윤도윤. 심장혈관흉부외과에서 전임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의사로, 얼마 전 다른 병원에서 한국대학교병원으로 옮겨 왔다. 채이보다 몇 살 위였고, 인상이 부드러워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오랜만이네요. 요즘 바쁘시죠?”“네. 윤 선생님도요.”도윤은 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바라봤다.“학회 준비하세요?”“네. 다음 달에 국제학회 발표가 있어서요.”“아, 그 증례요? 강 교수님이 한 선생님 발표시킨다고 말씀하셨는데.”채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요.”“그래도 강 교수님이 맡기셨다는 건 기대하신다는 뜻이겠죠.”“…그런가요?”“그럼요. 강 교수님이 아무한테나 중요한 발표를 맡기시는 분은 아니잖아요.”채이는 피식 웃었다.“그건 맞아요. 대신 아무한테나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시기도 하죠.”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한 선생님은 강 교수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세요?”“그럼요.”“대단하시네. 저는 아직도 교수님 앞에만 가면 긴장하는데.”“저도 긴장은 해요.”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다만 긴장한다고 입이 다물어지진 않더라고요.”도윤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도윤이 말했다.“그런데 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채이는 고개를 들었다.“네?”“제가 새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병원 근처를 잘 모르거든요. 전에 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식당이 괜찮았던 것 같아서요.”“아, 네. 거기 맛있어요.”“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제가 살게요.”채이는 잠시 망설였다.
오후 8시 17분. 한국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실.“다시.”“…교수님.”“다시 하라고.”한채이는 마이크도 없는 손에 쥐어진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다봤다.“저 방금 세 번째 했거든요?”“그래서?”“사람이 세 번이나 발표했으면 칭찬 한 번쯤 해 주실 수 있잖아요.”강태혁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세 번 다 별로였어.”“와.”채이는 허탈하게 웃었다.“교수님, 혹시 제가 발표를 잘하면 칭찬해 주실 생각은 있으세요?”“있어.”“언제요?”“잘하면.”저 인간은 정말 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 재능이 있었다.국제학회 발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지 나흘째. 채이는 진료와 수술, 회진을 소화하면서 발표 자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태혁은 퇴근 직전 그녀를 교수실로 불러 발표 연습을 시켰다.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태혁이 짚어 주는 부분은 대부분 정확했고, 자신이 놓친 논리적 허점도 분명히 있었다. 문제는 이 남자가 피드백을 하는 방식이었다.“첫 슬라이드부터 다시 봐. 네가 왜 이 환자를 선택했는지 설명이 부족해.”“선정 이유는 뒤쪽에 있습니다.”“청중이 뒤까지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해?”“…….”“첫 30초 안에 관심을 끌어야지. 네가 지금 발표하는 건 환자 기록 낭독회가 아니야.”채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게 더 열받았다. 틀린 말이면 반박이라도 하지.“그리고 이 부분.”태혁이 화면을 가리켰다.“네 판단의 근거가 뭐야?”“수술 전 영상과 수술 중 확인한 소견을 종합했을 때….”“그건 결과고. 당시 네가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 설명하라고.”채이는 잠시 생각했다.“위험 요소를 먼저 배제했고, 그다음에 가능한 접근법을 비교했습니다.”“그걸 청중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네.”“다시.”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이 인간이 오늘만큼은 인간적으로 굴기를.“교수님.”“말해.”“저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거 아시죠?”“알아.”“내일도 수술이 있는 거 아시죠?”“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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