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그땐 장난이었어

[GL]그땐 장난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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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사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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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장난이었어" 한마디로 나를 버린 첫사랑이 내 팀원이 되어 돌아왔다. 팀장 문해솔에게는 2년을 함께한 연인 채린이 있다. 그런데 권지오와 단둘이 남는 밤마다, 미워해야 할 사람 앞에서 몸이 먼저 무너진다. 거짓말이 쌓이는 사이 채린은 먼저 이별을 고하고, 지오 곁에는 해솔이 모르는 그녀의 시간을 아는 선배 서도하가 나타난다. 잃은 사람, 잃을까 두려운 사람, 다른 미래를 내미는 사람. 서로를 질투하고 원하고 상처 입히는 네 사람. 그때 그 말은, 정말 장난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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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면접

새벽 세 시, 디자인과 작업실.

졸업 전시까지 두 달이 남아 있었다. 4학년 권지오의 졸업 작품 앞에서, 2학년 문해솔이 타이포 시안을 붙잡고 있었다. 벌써 열 번째 수정이었다.

“이 자간,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해솔이 모니터를 노려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집중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지오는 한참 그 입술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만 깨물어. 피 나.”

엄지로 해솔의 아랫입술을 눌러 이 사이에서 떼어냈다. 말랑한 살이 엄지 밑에서 눌렸다.

해솔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지오의 엄지를 입술로 물었다.

이로 살짝, 장난처럼. 그런데 눈은 장난이 아니었다.

“선배.”

젖은 목소리였다.

지오는 엄지를 빼고, 그 자리에 입술을 댔다.

해솔이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지오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술이 벌어지고, 숨이 섞였다. 해솔의 손이 지오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그때 둘은 서로가 전부였다.

*

그 입술을, 7년 만에 봤다.

“다음 분, 권지오 씨 들어오세요.”

최종 면접장 문을 연 지오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손잡이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면접관은 셋이었다. 왼쪽은 인사팀, 오른쪽은 본부장. 그리고 가운데.

둥근 얼굴에 아직 남아 있는 볼살. 곱슬기 있는 머리를 대충 묶었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책상 위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디자인팀 팀장 문해솔.

7년 전, 지오가 모질게 끝낸 사람이었다.

몰랐다. 회사 이름만 보고 지원했다. 채용 공고 어디에도 팀장 이름은 없었다. 알았다면 이 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해솔이 고개를 들었다. 지오를 봤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앉으세요.”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목소리였다.

“디자인팀 실무 면접은 문 팀장이 맡아요. 우리 회사 최연소 팀장이에요.”

본부장이 웃으며 덧붙였다. 해솔은 웃지 않았다.

최연소 팀장. 스물여덟. 7년 전엔 자간 하나에 밤을 새우던 애가, 이제 지오를 평가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오는 의자에 앉았다. 무채색 셔츠 소매 끝을 괜히 한 번 당겼다. 이혼하던 날 잘라버린 턱선 단발이 목덜미를 스쳤다.

서른한 살. 경력 단절 5년. 지오에게 오늘 면접은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하필, 문해솔이었다.

해솔은 지오를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오도 그래야 했다. 여기서 아는 척을 하는 순간, 둘 다 곤란해질 테니까.

해솔은 지오 쪽은 보지도 않고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린 뒤, 이력서만 한 장 넘겼다. 그러다 펜 끝으로 한 줄을 톡 짚었다.

“권지오 씨.”

“네.”

“공백 5년. 뭐 하셨어요?”

면접실이 조용해졌다.

지오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왼손을 오른손으로 슬며시 덮었다. 반지를 뺀 지 석 달. 약지에는 아직 하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결혼했었습니다. 이혼했고요. 결혼 생활 동안 일을 쉬었습니다.”

해솔의 펜이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본부장도 인사팀 직원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하지만 지오는 봤다. 펜 끝이 이력서 위에서 딱 한 박자 늦게 움직이는 걸.

“요즘은 그런 경우 많죠. 공백보다 지금 실력이 중요하니까.”

본부장이 부드럽게 넘겼다. 인사팀 직원이 뭔가를 적었다. 해솔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포트폴리오 볼게요.”

해솔이 손을 내밀었다. 지오는 일어나 들고 온 파일을 건넸다. 손끝이 닿지 않게, 파일 모서리만 쥐고. 해솔도 똑같이 모서리만 받아 갔다.

해솔이 파일을 펼쳤다. 한 장, 두 장. 넘기는 손이 빨랐다. 그러다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지오의 졸업 전시 작품이었다.

7년 전,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며 만든 포스터 시리즈. 그 위에 얹힌 제목 타이포는 해솔이 열 번 넘게 고친 것이었다. 설치도, 출력도, 마지막 날 새벽의 벽 칠도 둘이 같이 했다.

하지만 작품 설명 아래 크레딧에는 이름이 하나뿐이었다.

권지오.

“이거.”

해솔이 페이지를 톡 짚었다.

“혼자 하신 거예요?”

본부장이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평범한 포트폴리오 질문이었다. 이 방에서 그게 평범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지오는 대답을 고르느라 잠깐 늦었다.

“…같이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크레딧엔 권지오 씨 이름밖에 없는데요.”

“졸업 작품이라, 제 이름으로만 낼 수 있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혼자 만든 작품은 아니었다.

해솔이 안경 너머로 지오를 봤다. 면접이 시작되고 처음으로, 정면으로.

7년 전과 같은 눈이었다. 온도만 달랐다.

“그 사람은 지금 뭐 해요?”

“모릅니다.”

사실이었다. 7년 동안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 찾아보지 않으려고 꽤 애를 썼다.

해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세게. 입술 가운데가 하얗게 질릴 만큼. 그리고 그 자리에 붉은 점 하나가 천천히 맺혔다.

예전 같으면 망설임 없이 다가갔을 거리였다. 면접관 테이블까지, 겨우 두 걸음.

지오의 손은 무릎 위에 있었다. 손가락이 한 번, 저절로 접혔다. 그게 다였다.

“문 팀장, 더 물어볼 거 있어요?”

“없습니다.”

해솔이 포트폴리오를 덮었다. 펜을 내려놓았다.

“제 질문은 끝났습니다.”

지오는 인사를 하고 면접실을 나왔다.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고 나서야 알았다.

손이 비어 있었다.

포트폴리오를 두고 나왔다. 7년 전 그 작품이 들어 있는 파일을, 해솔의 책상 위에.

다시 들어가야 했다. 해솔이 있는 그 방으로.

지오가 돌아서려는 순간, 복도 끝에서 면접실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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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장난이었다며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해솔이었다.손에 지오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있었다.복도에는 둘뿐이었다. 해솔이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다가왔다. 지오는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면접실에서와 똑같은 무표정이었다. 그런데 파일을 쥔 해솔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띵.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오가 먼저 탔다. 해솔도 따라 탔다.해솔은 층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내려갈 일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문이 닫혔다.좁은 상자 안에 둘만 남았다.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8에서 7로 바뀌었다.해솔은 지오보다 한 뼘 작았다. 7년 전에도 늘 지오를 올려다봤다. 지금도 올려다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내려다보는 쪽은 해솔 같았다.“두고 가셨어요.”해솔이 포트폴리오를 내밀었다.지오는 두 손으로 받았다. 그 바람에 왼손이 드러났다. 약지의 하얀 자국까지.해솔은 파일을 놓지 않았다.둘이 파일 양끝을 쥔 채로, 해솔의 시선이 지오의 약지에 멎었다. 한참이었다. 숫자가 6으로, 5로 바뀌는 동안.그리고 해솔이 입을 열었다.“장난이었다며.”반말이었다. 7년 만에 처음 듣는. 면접실의 ‘권지오 씨’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지오는 숨을 멈췄다.그 말을 한 사람은 지오였다. 7년 전, 학교 뒤편 벤치에서. 울면서 매달리는 해솔에게, 지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장난이었어. 그냥.대답해야 했다.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뭐라도.그런데 목이 막혀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해솔이 다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면접실에서 깨문 자리가 벌어졌다. 붉은 것이 입술 선을 따라 번졌다.지오의 손이 움직였다.파일을 놓은 오른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엄지가 먼저. 7년 전 작업실에서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입술을 눌러 떼어내려고.“하지 마요.”존댓말로 돌아온 목소리였다.지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해솔의 입술까지 한 뼘. 닿지도, 거두지도 못한 채였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엘리베이터 안이 너무 조용해서, 둘의 숨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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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처음 뵙겠습니다
그날 밤, 채린의 집.현관문이 열리자마자 해솔이 채린에게 입을 맞췄다. 신발도 벗기 전이었다.“어, 뭐야.”채린이 웃었다. 키 172, 짧게 친 투블럭, 웃으면 얼굴 전체가 환해지는 사람. 작은 타투가 새겨진 팔이 해솔의 허리를 감쌌다. 2년 동안 이 웃음 앞에서 해솔은 늘 편했다.오늘은 아니었다.해솔이 채린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손이 급했다. 하나가 걸리자 그냥 잡아당겼다.“천천히 해. 안 도망가.”“불 꺼.”“응?”“불 끄자.”채린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 속에서 채린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오늘 무슨 일 있었어?”해솔은 대답 대신 다시 입을 맞췄다.침대까지 가는 동안 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해솔이 채린을 눕히고 그 위로 올라갔다. 평소와 반대였다. 채린은 잠깐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해솔의 허리를 끌어당겼다.해솔은 채린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거칠게. 뭔가를 지우려는 사람처럼.맨살이 맞닿았다. 채린의 손이 해솔의 등을 쓸어내려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익숙한 손이었다. 해솔이 어디서 숨을 멈추는지 다 아는 손.해솔의 숨이 가빠졌다.그때 채린이 한 손을 올려 해솔의 입술을 쓸었다. 엄지로, 다정하게. 낮에 깨문 자리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입술 왜 이래. 또 깨물었어?”해솔이 얼굴을 확 돌렸다.“거기 말고.”채린의 엄지가 허공에 멈췄다.“알았어.”채린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서운한 기색도 없이, 그 손을 다시 아래로 가져갔다. 그래서 해솔은 더 미안했다.해솔은 눈을 감았다.눈을 감자 다른 손이 떠올랐다. 오늘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기 입술 앞 한 뼘에서 멈췄던 손. 가늘게 떨리던 엄지. 지오의 손.닿지도 않은 그 손이, 지금 해솔의 몸을 만지고 있는 손보다 선명했다.“해솔아.”채린이 불렀다. 해솔은 눈을 뜨지 않았다.채린의 입술이 해솔의 목으로 내려왔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세게 빨아들였다. 따끔했다. 자국이 남을 걸 알았다. 해솔은 막지 않았다.채린의 손이 빨라졌다. 해솔의 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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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좋은 사람이에요
오전 열 시. 지오는 모니터 앞에서 굳어 있었다.익숙한 프로그램이었다. 5년 전까지 눈 감고도 다루던 툴. 그런데 버전이 몇 번 바뀌는 사이 메뉴 위치가 전부 달라져 있었다. 자주 쓰던 기능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단축키를 눌렀다. 엉뚱한 창이 떴다.지오는 조용히 그 창을 닫았다. 한 번 더 눌렀다. 또 다른 창이 떴다.등 뒤에서 발소리가 멈췄다.회의 자료를 든 해솔이었다. 팀장실에서 나오던 길에 지오의 모니터를 본 모양이었다. 화면에는 닫히지 않은 창이 세 개나 겹쳐 있었다.해솔은 지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사무실 전체에 들리게 말했다.“유진 씨. 권지오 씨 툴 좀 가르쳐 드려요. 버전이 많이 바뀌어서.”키보드 소리가 잠깐 멎었다. 팀원들의 시선이 지오의 모니터로 모였다가, 흩어졌다.“네! 제가 할게요!”유진이 의자를 끌고 와 지오 옆에 붙었다. 해솔은 그대로 회의실로 들어갔다.“이거 되게 헷갈리죠? 저도 처음에 엄청 헤맸어요. 여기, 이 메뉴가 이쪽으로 옮겨 갔거든요. 그리고 이 단축키는요….”스물다섯 살 막내가 서른한 살 신입에게 마우스를 가리켰다. 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했다.7년 전엔 반대였다.작업실에서 이 툴을 처음 배우던 해솔 뒤에, 지오가 서 있었다. 마우스 위 해솔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 어깨 너머로 화면을 가리켰다.“선배, 너무 가까워요.”“그러니까 빨리 외워. 외우면 떨어져 줄게.”해솔은 그날 단축키를 하나도 못 외웠다. 일부러 그런 건지는 끝내 묻지 못했다.“권지오 씨? 제 설명 너무 빨라요?”“아뇨. 계속하세요.”유진은 예시를 보여 주겠다며 자기가 작업하던 시안을 띄웠다. 음료 브랜드 패키지였다. 파란 바탕 위에 초록 로고.지오의 눈이 화면에 멈췄다.“이 파랑.”“네?”“모니터에선 괜찮은데 인쇄하면 탁해질 거예요. 초록이랑 붙어 있어서 더 그래요. 파랑에서 초록 기운을 조금만 빼 보세요.”유진이 반신반의하며 색 값을 몇 칸 옮겼다. 화면이 달라졌다. 흐릿하던 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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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이번 한 번이에요
다음 날 오전 10시, 3층 회의실.디자인팀 전원이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맨 앞자리에는 해솔. 벽 스크린에는 지오의 로고 초안이 떠 있었다.이번 프로젝트는 한결제과의 리브랜딩이었다. 부산에 본사를 둔 40년 된 과자 회사. 쉽게 말해 브랜드 새 단장 작업이었다.지오의 안은 단순했다. 40년 동안 과자 봉지에 찍혀 있던 붓글씨 로고를 그대로 살리고, 뭉개진 선만 깔끔하게 정리했다. 색도 원래의 주황을 조금 밝혔을 뿐이었다.해솔이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안전하네요.”펜 끝으로 테이블을 톡 쳤다.“5년 전에 많이 보던 방향이에요.”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5년.지오에게는 그 숫자가 그냥 디자인 유행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력서에 찍힌 공백도 정확히 5년이었다. 어제는 스물다섯 살 막내에게 툴까지 배웠다.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유진이 지오와 해솔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옆자리 선임이 조심스럽게 거들었다.“요즘 리브랜딩은 좀 더 과감하게 가는 추세긴 하죠. 젊은 층 겨냥해서.”해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안으로 넘어가려는 참이었다.지오는 알았다. 여기서 입을 다물면 이 안은 오늘로 끝이다. 그리고 ‘5년 전 사람’이라는 딱지도 그대로 붙어 남을 것이다.“요청서 첫 줄이요.”지오의 목소리였다.모두가 돌아봤다. 입사 이틀째 신입이 팀장 말에 토를 다는 건, 이 회의실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지오는 요청서를 펼치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오래된 브랜드가 새것처럼 보이지 않게.’ 클라이언트가 제일 먼저 쓴 문장이에요.”해솔의 펜이 멈췄다.“요청서에 적힌 기존 구매층은 대부분 50대 이상이에요. 마트에서 포장만 보고 늘 사던 걸 집어 가는 분들이고요. 로고가 확 바뀌면 다른 과자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칩니다.”지오는 화면 속 붓글씨를 가리켰다.“젊은 층은 그다음 문제예요. 이번 요청의 핵심은 기존 손님을 안 놓치는 거고요. 안전한 게, 요구사항입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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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 여자
점심시간 10분 전.본부장 보고가 끝나자마자 해솔은 외근을 나갔다. 사무실 공기가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유진은 벌써 배달 앱을 켜 놓고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그때 사무실 유리문이 열렸다.“다들 점심 전이지? 커피 왔어요!”양손에 커피 캐리어를 든 여자가 들어섰다.키가 컸다. 짧게 친 투블럭,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작은 타투 몇 개. 웃음소리가 사무실 끝까지 울렸다.“채린 언니!”유진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고개를 들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처음 오는 손님이 아니었다.“신메뉴 테스트 중이라 좀 넉넉하게 만들었어. 솔직하게 맛 평가해 줘야 돼. 해솔이 건 이거, 걔 책상에 좀 올려 줘.”해솔이.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이름이었다.유진이 커피를 받아 들며 지오에게 속삭였다.“팀장님 애인이세요. 우리 팀은 다 알아요. 다른 팀은 잘 모르고요. 회사 앞에서 카페 하셔요.”해솔에게 애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무엇을 남겼는지도.이틀 전 밤, 야근하던 사무실에서 해솔의 셔츠 깃 사이로 보이던 붉은 자국. 그 자국의 주인이 지금 사무실 한가운데서 웃고 있었다.지오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봐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자꾸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채린은 팀원 자리를 하나씩 돌며 커피를 나눠 줬다. 누구 입맛에 뭐가 맞는지 다 알았다. 이건 덜 달게, 이건 샷 추가. 농담을 던지고, 웃고, 해솔 험담도 조금 했다.“걔 요즘 또 입술 물어뜯는 거 알죠? 피 나도 몰라. 누가 좀 말려 줘요.”팀원들이 따라 웃었다. 지오는 웃지 못했다.그 버릇을 말리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 사람은 모를 것이다.7년 전, 지오와 해솔은 과 사람들 앞에서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었다.마지막 한 잔이 남았다. 채린이 처음 보는 얼굴 앞에 섰다.“아, 새로 오신 분이구나. 이거 드세요. 제일 무난한 걸로 남겨 놨어요.”“감사합니다.”지오는 일어나서 두 손으로 컵을 받았다.채린의 시선이 지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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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너 세 잔이면 울잖아
다음 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서울역.부산행 KTX 좌석은 회사에서 한꺼번에 예매해 둔 것이었다. 5호차 9A, 9B. 창가가 지오, 통로 쪽이 해솔이었다.한결제과 본사 미팅. 본부장 지시로 잡힌 1박 2일 출장이었다.비상계단 일이 있고 나서 엿새. 해솔은 그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업무 지시는 메신저로, 대답은 짧게, 눈은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지오도 그렇게 했다.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해솔은 태블릿을 켜고 미팅 자료만 넘겼다. 옆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지오는 창밖을 봤다. 회색 건물들이 뒤로 밀려났다.대전을 지날 무렵, 태블릿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돌아보니 해솔이 눈을 감고 있었다. 태블릿은 무릎 위에 엎어져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자료를 고친 모양이었다. 메신저 마지막 알림이 새벽 한 시였다.안경을 벗은 얼굴은 면접 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둥근 볼 때문에, 스물한 살 때 얼굴이 그대로 겹쳤다.지오는 다시 창밖을 봤다.잠시 뒤, 어깨가 무거워졌다.해솔의 머리였다.지오는 그대로 굳었다. 숨을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해솔이 깰 것 같았다. 깨면, 이 거리가 끝날 것 같았다.코끝에 샴푸 냄새가 닿았다.익숙한 냄새였다. 7년 전 작업실, 밤새 시안을 붙잡다 지오 어깨에 기대 졸던 해솔에게서 나던 냄새와 아주 비슷했다. 같은 샴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해솔의 셔츠 깃.지난주 거기 있던 붉은 자국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옅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지오는 그걸 확인한 자기가 싫었다.신경 쓸 자격이 없는 일이었다. 자국이 있든 없든, 누가 남겼든.그런데 방금, 분명히 안도했다.지오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냄새 맡았죠.”지오의 숨이 멎었다.해솔의 목소리였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머리도 그대로 지오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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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럼 이것도 장난이에요?
새벽 두 시.지오는 불 꺼진 방에서 천장만 보고 있었다.잠이 오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물을 두 컵이나 마셨는데도 취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는 맑은데 몸만 조금 뜨거웠다.너 세 잔이면 울잖아.자기 입으로 한 말이 자꾸 되감겼다. 7년 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던 기억을, 하필 그 얼굴 앞에서 꺼냈다.지오는 휴대폰을 켰다. 메신저 맨 위에 해솔의 마지막 메시지가 떠 있었다. [문해솔] 내일 체크아웃 9시. 로비에서 봬요.업무 말투 그대로였다. 지오는 화면을 끄고 돌아누웠다. 눈을 감았다. 소용없었다.똑똑.노크 소리였다. 옆방 벽이 아니라, 712호 문이었다.지오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일어나 문을 열었다.해솔이 서 있었다.화장을 지운 맨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 회색 후드티 차림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붉던 얼굴은 이제 원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해솔은 멀쩡히 깨어 있는 얼굴이었다.손에는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이거요.”해솔이 봉지를 내밀었다. 안에 숙취 해소제 두 병과 생수 한 병이 보였다.“대신 마신 거, 빚지기 싫어서요.”지오는 봉지를 받았다.“고마워.”반말이 또 나왔다. 해솔은 고치라고 하지 않았다.해솔은 돌아서지 않았다.문턱 바로 바깥에 선 채로 지오를 보고 있었다. 봉지를 건넸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713호는 바로 옆이었다. 세 걸음이면 돌아갈 수 있었다.해솔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드티 끈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복도 조명이 해솔의 안경알에 작게 맺혀 있었다.지오의 입이 먼저 열렸다. 평소라면 끝까지 삼켰을 말이었다.“왜 뽑았어.”합격 전화를 받던 날, 지오는 누가 뽑았는지를 물었다. 지금 묻는 건 그게 아니었다.해솔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렸다. 그리고 지오를 똑바로 올려다봤다.“당신이 한 짓 그대로 해 주고 싶어서.”당신.권지오 씨도, 선배도 아닌 호칭이었다. 회사에서는 한 번도 쓰지 않던 말이었다.“내가 한 짓?”물으면서도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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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그 사람이랑도 이랬어요?
“…해.” 지오가 말했다. 해솔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목소리는 낮았지만 떨리지 않았다. 해솔의 손가락이 반쯤 풀린 가운 끈을 끝까지 당겼다. 면 끈이 고리를 빠져나가며 사르륵 스쳤다. 매듭이 풀리고, 가운 앞자락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한꺼번에 닿았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지오의 몸 위에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쇄골에서 시작해 가슴 사이를 지나, 마른 배 위로. 샤워를 하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걸쳤던 가운이었다. 해솔의 시선이 그 빛의 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손끝이 시선을 따라왔다. 쇄골 가운데에서 시작해, 불빛이 그은 선을 그대로 덧그리듯 아래로. 가슴 사이를 지나, 명치를 지나. 차가운 손끝이었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피부가 오소소 일어섰다. 배꼽 바로 위에서 손끝이 멈췄을 때, 지오가 저도 모르게 배에 힘을 줬다. 지오는 가운을 여미지 않았다. 대신 손이 다시 해솔의 허리로 갔다. 키스할 때 이미 한 번 쥐었던 자리였다. 후드티 아래, 얇은 허리선. 해솔이 그 손목을 잡았다. 손끝처럼 손바닥도 차가웠다. 그리고 떼어 냈다. “손 내려요.” 지오의 손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해솔이 덧붙였다. “아직.” 해솔이 지오의 어깨를 밀었다. 세게 민 것도 아닌데 지오의 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걸렸다. 지오는 그대로 침대에 앉았다. 시트가 허벅지 뒤에 서늘하게 닿았다. 해솔이 지오의 무릎 사이에 섰다. 지오보다 한 뼘 작은 해솔이, 지금은 위에서 지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드티를 벗었다. 머리 위로 한 번에. 묶었던 머리가 풀려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안경이 비뚤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안에는 얇은 민소매 하나뿐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둥근 어깨와 가느다란 팔이 드러났다. 7년 전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쇄골이 더 도드라졌고,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옅게 붉어져 있었다. 지오는 보기만 했다. 손은 시키는 대로 시트 위에 있었다. 손가락 끝이 시트를 조금 쥐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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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허락
안 된다고 말은 했지만, 해솔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지오를 내려다보는 눈이 흔들렸다. 민소매 아래로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지오를 무너뜨리는 동안, 해솔의 숨도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한참 그렇게 버티다가.해솔이 지오의 손목을 잡았다.이번엔 시트에 누르지 않았다.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지오의 손바닥이 해솔의 허리에 닿았다. 민소매 자락 아래, 맨살에.“이제 해요.”작은 목소리였다. 명령이라기보다 무너지는 소리에 가까웠다.지오가 몸을 일으켰다. 해솔은 그대로 지오의 무릎 위에 올라앉은 자세가 됐다. 얼굴이 가까웠다. 해솔이 아직 조금 더 높은 자리였다.지오는 민소매 자락을 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해솔이 팔을 들어 주었다. 옷이 머리 위로 빠져나가고, 풀어진 머리카락이 다시 어깨로 쏟아졌다.가로등 불빛이 이번엔 해솔의 몸 위에 선을 그었다. 둥근 어깨, 도드라진 쇄골, 옅게 붉어진 가슴. 가는 허리까지.7년 만이었다.지오의 손이 해솔의 등을 쓸어내렸다. 척추를 따라, 허리가 움푹 꺼지는 자리까지. 손바닥이 그 자리에 멈추자 해솔의 숨이 멎었다.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손끝에서 하나씩 돌아왔다.지오의 손이 바지 허리춤을 찾았다. 해솔이 허리를 들어 도왔다. 옷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지오의 가운도 어느새 몸 아래에 구겨져 있었다. 이제 둘 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지오는 서두르지 않았다. 해솔이 어디서 숨을 삼키는지, 어디서 허리를 비트는지, 어디를 만지면 지오의 어깨를 움켜쥐는지. 하나씩 다시 찾아갔다.해솔의 손톱이 지오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허벅지가 가늘게 떨렸다. 이마가 지오의 이마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 서로의 입술 사이에서 섞였다.해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세게. 소리를 삼키려고.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무언가를 막으려고. 입술 가운데가 하얗게 질렸다.지오의 엄지가 올라갔다.생각보다 손이 먼저였다. 7년 전 작업실에서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엄지가 해솔의 입술을 눌러 이 사이에서 떼어 냈다.“그만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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