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이 이렇게 묻는 것은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겼다."괜찮아요.”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람 시켜서 드라이기를 보내라고 했는데 뭐 또 부족한 거 있어? 내가 사람을 시킬게.”"괜찮아요.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을 거예요.”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이리 와, 내가 머리 말려줄게.”강하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거절했다. "아니예요. 제가 직접 닦으면 돼요.”구승훈의 얼굴은 또 어두워졌다."내 말 못 알아듣겠어?”강하리가 구승훈을 쳐다보자, 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구승훈이 간호사가 한 그 말 때문에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강하리는 알고 있었다.강하리도 더 이상 다투기 귀찮아서,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구승훈은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살살 닦았다. 마침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자 구승훈은 한마디 했다."미안해. 방금은 내가 심했어.”미안하다는 말이었지만 강하리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미안함도 느끼지 못했다. 예상과 벗어나지 않게 구승훈은 곧이어 한마디 했다."하지만 내 탓으로 넘기면 안 되지. 사진이 그렇게 나오면 누구나 오해할 수 있으니 어. 강 부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강하리는 조용히 웃었다."대표님이 저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다면 묻지도 않고 바로 의심하지 않았을 거예요.”구승훈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확실히 강하리를 믿지 못했다.강하리는 외모가 출중했다.하필이면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니, 그들의 세상에서는 이런 여자는 그저 노리개에 불과하다.하지만 구승훈은 한 번도 강하리를 노리개로 생각한 적이 없다.그와 그녀의 거래는 줄곧 공평했다.이런 돈 거래 중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계약뿐이다.그런데 하필 강하리가 거듭 계약을 위반하고 구승훈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강 부장, 불평해도 소용없어. 이 모든 것은 네가 그 임 변호사를 만나러 가서 생긴 일이야. 네가
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뭐야? 안 믿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나 자신만 믿어. 이런 대답이라면 강 부장 마음에 들어?”구승훈이 진지하게 생각하고는 말했다.강하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구승훈의 말은 송유라 마저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그럼 송유라는요?”구승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을 빤히 쳐다봤다.구승훈이 입을 떼려 하자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전담비서는 밖에 서서 구승훈에게 봉지를 건네주었다.구승훈은 나가 물건을 받고는 강하리에게 물건을 건넸다. "이리 와, 머리 말리자.”강하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소파에 앉아 구승훈이 머리를 말리도록 내버려두었다.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야 구승훈이 입을 뗐다."유라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야.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두 번 다시는 유라와 비교하지 마.”강하리는 잠시 뜸 들이다 머리를 끄덕였다.그때 구승훈의 폰도 울렸다.송유라 전용 벨소리였다.강하리는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대표님, 일이 있으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구승훈은 강하리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유라가 약을 바꾸러 병원에 왔대, 내가 같이 있어 줘야겠어.”"네."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 위로 푹 올려 썼다. 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불을 끌어 내렸다."피곤하면 좀 자. 난 약 바꾸는 거 보고 올게.”강하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사실 구승훈과 강하리는 서로에게 별 믿음이 없었다.지금 구승훈이 하는 말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말썽을 부려봤자 자신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 뿐이었다.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는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병실 안이 몹시 답답하게 느껴졌다.결국 옷을 입고 밖에 나가 돌아다니려 했다.그런데 병실 문을 나서자, 강찬수가 병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강하리가 몸을
그날 보경시에서 돌아왔을 때, 아파트 입구에서 강찬수를 마주치지 않아 다행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강찬수가 병원에 달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병실에 들어서자, 강하리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또 무슨 일이세요.”강찬수가 병실에 들어서자 오히려 조급해 하지 않았다.그는 병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요즘 병실은 이렇게 고급이냐? 우리 딸 정말 대단하네.”강하리는 그딴 헛소리를 듣기 싫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도대체 뭘 더 원하는 거죠? 당신이 원하는 돈은 이미 드렸잖아요!”강찬수는 바보처럼 웃어댔다."왜, 이렇게 네 아비를 싫어해도 돼?”"지금 대꾸도 하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요!”"쯧쯧, 무슨 성깔이냐!"강찬수는 투덜대다가 탁자 위에 구승훈이 올려놓은 담배를 보고는 주섬주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내가 나쁜 일로 찾아온 게 아니야. 너도 이제 나이가 서른이다. 네 어미는 비록 반쯤 죽어가지만, 내가 네 아버지로서 네 평생의 큰일을 결정은 해줘야지. 내가 결혼 상대를 소개해 줄게.”강찬수가 결혼 상대를 소개해 준다니, 강하리는 어이가 없어 차갑게 웃었다. 팔려 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울 지경이다."괜찮아요. 당분간 연애할 생각이 없어서요.”강찬수는 투덜거렸다."하리야, 난 분명 경고했어. 나중에 내 탓 하지 마라. 내가 좋게 말할 때 내 말 듣는게 좋을 거야. 나를 또 그 반쯤 죽어가는 사람한테 손을 대게 강요하지 마!”"당신, 도대체 무슨 짓 하려는 거예요?”"별다른 생각은 없어. 네가 순순히 선을 보면 돼. 나도 그 년을 건드리기 귀찮아!”그러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피우기 시작했다.담배 두어 모금 빨고 나서야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하리야, 너 설마 남자 있는 거 아니지?”강하리는 몸이 굳어서 뜸 들이다 대답했다. "아니요.”강찬수는 벌떡 일어나 냉소를 지으며 추궁했다. "아니라고? 그럼, 이 담배는 누구 거야?”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
강하리가 말하자 구승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구승훈은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강하리한테 시선을 고정하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승낙했어?”강하리가 승낙하지 않아도 강찬수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거다."요즘 몸이 아파서 괜찮아지면 다시 얘기하자고 했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구승훈은 냉소를 지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길 바라는데?”강하리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강찬수는 대표님을 꽤나 무서워 해요. 대표님이 말만 해주시면 더는 저를 위협하지 않을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서 그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구승훈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강 부장이 이렇게 사람을 잘 부려 먹었었나?”강하리는 입꼬리가 떨리더니 그의 말에 부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구승훈을 이용해서 강찬수가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구승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와주실래요?”구승훈은 풋 하고 웃으며 강하리를 향해 손짓했다.강하리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다리 위에 올라 탔다.앉자마자 그는 강하리의 목덜미를 잡고 키스를 했다.남자의 몸에서 나는 무거운 향기와 옅은 담배 냄새가 그녀를 엄습하고 있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반항하려 했지만 겨우 자제했다. 구승훈은 한참 동안 키스를 해서야 강하리를 놓아주었다.하얗게 질려 있던 강하리의 입술이 빨갛게 부어올랐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강하리의 입술을 스윽 만졌다."강 부장 입술이 좀 거칠다. 물 많이 마셔.”강하리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피식 웃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병실은 몹시 조용했다.강하리가 폰으로 메일을 확인하자 임정원은 이미 일부 자료를 보내왔다.구승훈의 노트북이 강하리의 눈에 들어왔다."대표님, 노트북 좀 써도 될까요?”구승훈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노트북을 건네주었다.강하리가 노트북을 받아 가려는 순간 구승훈은 노트북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강하리는 어리둥절해서 구승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
얼마 후 강하리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듯이 웃었다.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망상을 하는지 현타가 왔다.감정을 추스른 강하리는 능청스럽게 구승훈을 바라보더니 말했다."그래도 괜찮아요?”구승훈은 딱히 상관이 없었다. 그는 원래 제멋대로 행동하고,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다른 사람의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오히려 강하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한다면, 확실히 적지 않은 번거로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적어도, 흑심을 품은 사람들은 완전히 단념시킬 수 있다."뭐 괜찮지 않을게 있어?”강하리는 웃으며 농담으로 물었다."유라 씨 귀에 들어가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구승훈은 그녀를 보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 부장, 네가 한두 번 유라 앞에서 위세를 떤 게 한두 번이야? 유라한테 우리 관계에 대해 말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이제 와서 무슨 무고한 척할 필요는 없어.”강하리는 이내 목이 메었다.그녀는 유라한테 지금 구승훈과 만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하지만 정말 강하리가 원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분명 구승훈과 만나는 사람은 강하리인데, 마치 그녀가 그 둘 사이에 끼어든 제3자인 것처럼 되고 있었다.이 삼각관계에서, 강하리는 영원히 수동적인 사람이었다.그녀는 항상 이 둘 사이의 제3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지금은 말을 아꼈다.그녀는 침대에 앉아 조용히 임정원이 보낸 자료를 번역하고 있었다.마음이 좀 답답하지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더 이상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으면 그렇게 슬프지 않을 것이다.강하리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구승훈의 얼굴색이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그는 강하리가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강하리와 옆에 있어서 불편한 건지, 아니면 남자친구 있다고 하는것을 허락한다는 말이 불편한 건지 알아챌 수 없었다.구승훈은 계약서를 집어 던지고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노트북 화면을 집중해 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강하리는 너무 화가 났다.비록 현재 그녀의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해도 이미 번역을 끝낸 문서를 지워버리는 건 무슨 뜻일까?강하리는 그를 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승훈은 또 몇 마디 했다.“그리고 난 내 컴퓨터에 다른 남자 물건이 있는 건 바라지 않아.”강하리는 숨이 막혀 갑자기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구승훈이라는 남자는 원래부터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최악의 경우 다시 번역하면 된다.구승훈은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말했다.“강 부장 좋은 말로 할 때 집에서 휴식하면서 건강 관리해. 내가 강 부장에게 휴가를 준 건 집에서 잘 휴식하면서 건강 관리를 잘하라는 뜻이지 다른 남자를 위해 일하라는 건 아니야. 만약 강 부장이 그렇게 일을 하고 싶은 거라면 내일부터 회사로 출근해.”강하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구승훈이 너무 강압적이었기에 이 일은 앞으로 몰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식사를 가져왔다.구승훈은 뜨거운 물수건을 가져와 강하리의 손을 닦아주었다.강하리는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구승훈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강 부장 나한테 직접 보살펴 달라고 하지 않았어?”강하리의 입술은 얼어붙었다. 이 정도까지는 할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의 손을 다 닦은 뒤 놓아주었다.“그렇게 말했으면 더는 투정 부리지 말고 와서 밥 먹어.”강하리가 앉자 구승훈은 도시락을 하나씩 열었다.그런 다음 대추 수프를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단 걸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자주 먹으면 안 돼.”“자주 먹진 않았어요.”3년 동안 그녀는 고작 몇 번 정도밖에 먹지 않았다.구승훈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코웃음을 치고서는 젓가락을 들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는 식사 예절을 중시했고 항상 천천히 우아하게 먹었다.강하리는 그와 3년을 함께하며 식사할 때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두 사람은 매우 조용하게 식사했고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구승훈의 핸드폰이
구승훈은 전화를 다 받은 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일이 있어서 오늘 저녁에는 함께 못 있을 것 같아. 혼자 괜찮겠어?”“네, 괜찮아요.”강하리는 바로 대답했다.“그래,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그리고 퇴원하자.”“네.”구승훈은 병원을 나왔고 우연히 안현우를 만났다.안현우는 요즘 회사에 강하리를 닮은 인턴이 들어와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오늘 그 인턴이 몸이 안 좋다며 병원에 꼭 같이 와달라고 해서 그는 함께 병원으로 왔다.이것이 그가 점심에 레스토랑에서 강하리를 마주친 이유였다.사실 강하리를 마주치기 전까지 그는 인턴과 재밌게 즐기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점심 강하리를 마주친 순간 그 인턴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떨어졌다.아우라도 강하리에게 비교할 수가 없었고 생김새도 강하리와 닮지 않은 것 같았다. 유일하게 비슷한 점이 강하리와 비슷한 키였다.강하리의 매력은 역시 일개 인턴과 비교할 수 없었다.안현우는 순간 마음이 심각하게 간질거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강하리 이 여자는 꽤 능력이 있었다. 계속해서 구승훈의 옆에 남아있었다.“승훈아?”안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안현우는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점심에 그 사진들 봤어?”구승훈은 그를 바라보았다.“안 대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바로 해.”안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더러운 여자를 계속 옆에 두는 게 재밌어?”구승훈의 발걸음조차 멈추지 않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안 대표도 알다시피 난 내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 묻는 거 안 좋아해.”안현우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그도 당연히 알고 있다. 구승훈이 사적인 일은 아무리 구승재라고 해도 묻기 어려웠다.그런데 이 문제는 단지 여자 때문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돈을 주면 데리고 놀 수 있는 여자였기에 안현우는 구승훈이 이 일 때문에 자기에게 화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구승훈도 안현우가 일부러 그를 오해하게 만들려고 사진을 보냈다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강하리에 대한 안현우의 욕망
구승훈의 얼굴은 계속 굳어 있었다.안현우가 강하리를 언급한 이후로 그의 마음속에는 또 짜증이 몰려왔다.그는 항상 안현우가 그에게 강하리를 언급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결국, 그도 강하리와 어떠한 관계도 맺을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어쨌든 계약이 만료되면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이 관계는 단지 돈을 주고 잠자리를 가진 거래였고 그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랬기에 그의 주변 사람들이 강하리에게 호감을 표시하더라도 그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오직 강하리만 자기의 신분을 똑똑히 알고 계약 기간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안현우가 이렇게 계속 그의 앞에서 강하리에 대한 욕망을 나타내니 그도 조금 짜증이 났다.그는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더니 바로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형?”구승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안현우에게 귀찮은 일 좀 만들어 줘.”“뭐?”그는 심지어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안현우는 구승훈과 함께 자란 친구였다. 두 가문도 사이가 좋았다고 안현우와 구승훈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갑자기 안현우에게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라니?“내 말 못 알아듣겠어? 안현우를 골치 아프게 만들어 주란 말이야.”구승훈은 정말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구승재는 멈칫했다.“왜 그래 형? 무슨 일 있었어?”“아니.”구승훈은 짜증을 참으며 말했다.“그럼 왜 갑자기 현우 형한테 귀찮은 일을 만들어 주라는 거야? 만약 현우 형이 알게 된다면 이다음에 어떻게 지내려고 그래?”구승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딸칵 소리를 냈다.라이터의 약한 불꽃이 남자의 차가운 옆 모습을 비추어 그림자 때문에 더욱 어두워 보였다.“못하겠어? 못하겠으면 다른 사람 시킬 거야.’구승재는 조금 두려웠다.그는 자기 형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어느 정도로 하면 되는데?”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결국, 오랫동안 서로를 알고 지낸 친구이기 때문에 지난번 김주한을 상대하
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남긴 뒤, 휴대폰을 들고 옆으로 비켜섰다. 안현우의 휴대폰엔 영상이 수없이 많았다.대부분이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적인 장면들, 잔혹하고 역겨웠다.구승훈은 말없이 화면을 아래로 계속 넘겼고 그러다 어느 한 영상에서 눈길이 멈춰졌다.영상 속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체형도, 몸에 있는 흉터도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더군다나, 그날 차 안에서 보여졌던 건 불과 몇 초뿐.강하리는 제대로 확인할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구승훈은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는 그 영상을 자신의 폰으로 전송한 뒤 안현우의 휴대폰을 류덕구 서장에게 되돌려주었다.그리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안현우는 한참을 소란 피운 끝에 겨우 잠잠해졌지만 구승훈이 들어서는 순간 또다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구승훈! 네가 감히 여기까지 와?!”구승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며 물었다.“그 영상...네가 꾸민 거야?”양쪽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걷어올리자,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염주가 드러났다.그는 손을 멈추고 염주를 조용히 주머니에 넣었다.곧이어 붕대를 꺼내 손에 감기 시작했다.그가 이 모든 걸 조용히 마칠 때쯤 안현우는 비로소 무슨 영상을 말하는지 깨달았다.병상에 누워 있던 안현우는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내가 꾸민 거다. 어때? 짜릿하지 않아? 강하리가 나보고 더럽다며 질색하더라?근데 넌 뭐 깨끗하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대로 병상에 올라가 안현우를 강하게 내리쳤다.주먹이 쉼 없이 날아갔다.생사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분노였다.결국 류덕구가 뛰어들어 그를 말렸다.“그만 좀 해! 이대로 죽여버리면 나도 보고할 방법이 없어.”구승훈은 아직 가시지 않은 살기를 눈에 담은 채, 손목에 감았던 붕대를 풀며 안현우의 목을 감았다.“영상 속 그 놈...누구야?”안현우는
“누나, 지금 일부러 날 유혹하는 거예요?”그 말이 천아름의 머릿속에서 몇 번을 맴돌다 결국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이제야 알았어?”구승재는 순간 멈칫했다.사실은 그냥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고, 복잡해진 감정을 조금이라도 풀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인정해버리자,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천아름은 차 문 옆에 서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구승재를 향해 미소 지었다.“왜 그래? 바보같이?”구승재는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이렇게나 취했는데...그만 좀 유혹해요.집에 데려다줄게요. 푹 자야죠.”천아름은 아무 말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문을 열고,차에 먼저 타버렸다.차는 도심 쪽으로 조용히 달렸다.천아름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늘 시크하고 당당하던 그녀가 이 순간만큼은 어디선가 무너질 듯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구승재는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뜨거운 우유 한 병을 사 오고,근처 약국에 들러 숙취해소제도 사왔다.다시 돌아왔을 때 천아름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긴 속눈썹 아래,눈가엔 아직 촉촉함이 남아 있었다.구승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 생각하면서, 왜 하필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진짜 날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보는 건가?우유를 옆에 두고,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그 손길엔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그는 예전부터 생각했다.천아름 같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담아두는 스타일이 아니라고.거침없고 자유롭고, 세상에 발목 잡힐 일도 없어 보였던 그녀.그런데 오늘의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도 약해 보였다.구승재는 손끝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고 붉은 입술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가조용히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그가 자세를 고치기도 전에 천아름이 그를 끌어당겼다.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승재야, 섹스는 할 줄 알아?”방금까지 진정됐던 마음속에 또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하지
구승재는 문득 그날 밤의 부드러운 입술이 떠올랐다.목젖이 몇 번 움직이고, 심장은 어느새 통제가 안 되기 시작했다.술에 살짝 취한 채 그의 품에 안긴 천아름.붉은 입술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그의 목이 바짝 말라왔다.순간 정신을 차린 그는 천아름을 품에서 조심스레 떼어냈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꿀꺽 마셨다.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그건 천아름이 마시던 술이었다.그녀는 벌써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담배 뺏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 술까지 뺏어가?”구승재는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다행히도 조명은 어두웠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럼 내가 한 잔 더 시켜줄까요? 아름 누나가 ‘술 마셔준다’ 해놓고 이 반 잔도 아까워해요?”“안 마셔. 재미없네.”그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구승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까 그건...정말 미쳤었다.순간 그 입술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뻔했으니까.“가요. 데려다줄게요.”“가기 싫어.”천아름은 비틀비틀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구승재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심장이 또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그럼 어디 가고 싶은데요? 별 보러 갈래요?”천아름은 피식 웃었다.“좋아.”차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 어깨에 덮어주고, 핫팩 하나를 손에 쥐여주었다.“이제 좀 말해줄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천아름은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구승재를 바라봤다.늘 ‘꼬마 강아지’라며 장난치던 그였지만, 구승재의 얼굴선은 결코 ‘강아지’ 같지 않았다.어딘가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느낌.하지만 성격은, 그 남자와는 달리 훨씬 부드럽고 따뜻했다.그녀는 벽에 살짝 기대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구승재는 그녀의 손짓에 손바닥에 땀이 맺히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누나 예뻐?”천아름의 목소리는 여전히 치명적이고 매혹적이었다.구승재는 순간 목이 탔고, 입술을 몇 번 떨다 겨
천아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붉은 입술에 가벼운 미소를 띄웠고, 눈꼬리에 스친 표정은 매력적인 얼굴에 한층 더 치명적인 분위기를 더했다.“왜요? 조명현 씨, 또 뭘 부탁하시려구요? 아니면 이번에도 아내분 보석 맞추는 거예요?먼저 말해두는데요...지금은 개인 오더 안 받아요.”조명현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여전히...하나도 안 변했구나.”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웃었다.“그럼. 난 나니까. 왜 변해야 하죠?”말투는 사근사근했고, 아까 그가 ‘아내를 위해’라며 장난처럼 던진 말에도 질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태연했다.혹여 느꼈다 한들, 그건 분명 ‘착각’일 것이다.그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조명현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그래서 내가 약혼했다는 말도, 신경 안 쓰는 거야?”“그건 너 사정이지, 나랑 무슨 상관?”천아름은 휴대폰을 내려다봤고, 마침 구승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더 할 말 없으면, 난 이만.”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명현의 폰도 울렸다.그가 화면을 보는 사이, 천아름은 벌써 자리를 떴다.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명현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전화를 받았다.표정이 단숨에 바뀌는 걸 보면, 전화기 너머에 있는 여자는 분명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겠지.도시는 이제 막 밤이 시작되는 시각.열 시 반, 술과 음악에 취해 어깨를 부대끼는 청춘들.하지만 바의 한 구석, 천아름 앞에는 이미 비워진 잔만 일곱, 여덟 개가 놓여 있었다.희미하게 흐려진 눈동자, 손끝에 살짝 집은 가느다란 담배. 옆으로는 수많은 남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한편, 여초천의 수술이 끝나자 구승재는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천아름이 앉은 테이블 앞에 도착한 그는, 그녀 앞에 늘어선 빈 술잔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얼마나 마셨어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하지만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한 건지 천아름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그저 멍한 시선으로
심준호는 말끝을 망설였지만,강하리는 오히려 단호했다.“딱히 할 말 없어요. 어떤 길은 한두 번은 돌아갈 수 있어도,그 이상은 그냥 시간 낭비예요.”심준호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밤이 되자, 강하리와 가정부 이모가 병실에 남았다.조시욱은 끝까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전화 한 통에 결국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연정이는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눈을 뜨자마자 입을 열었다.“아빠는?”강하리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아빠는 일이 있어서, 곧 시간 나면 올 거야.”연정이는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그래도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강하리의 가슴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저려왔고,그녀는 연정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손연지는 그날 몇 번이나 병실에 왔었고,밤에도 함께 있으려 했지만, 응급 수술 콜에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아름이 병실로 뛰어들어왔다.연정이를 꼭 안아 들며 말했다.“우리 공주님, 어떻게 이렇게 불쌍할 수가 있어?”강하리는 그저 웃었지만,속으론 같은 생각을 되뇌고 있었다.그래...내 아기, 왜 이렇게 어릴 때부터 힘든 일만 겪어야 해?천아름은 연정이와 잠깐 놀아주고,간단히 뭐라도 먹인 뒤 다시 잠들게 했다.병실이 조용해지자,두 사람은 새로 계약할 광고 모델 이야기를 꺼냈다.강하리는 병원에 있는 와중에도 기획팀에서 보내온 모델 리스트는 꼼꼼히 챙겨보고 있었다.하지만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도 전에 병실 문이 다시 한 번 두드려졌다.이번엔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얼굴 생김새는 조시욱과 어딘가 닮은 듯했지만,더 노련하고 세련된 분위기.정장에 코트까지 걸친 모습.선 굵은 이목구비에,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위험한 기운.강하리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시죠?”남자의 눈은 잠시 천아름을 스친 뒤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조명현입니다.시욱이 일이 생겨서 제가 대신 물건 좀 가져다드리려고요.”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여초천의 자살 시도는 여초연에게도 꽤 큰 충격이었다.사실 지금이 그녀를 압박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지만, 구승훈은 오히려 이때 물러나겠다는 뜻을 보였다.준봉은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구승훈은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지금 내 상태로는 운전 못 해.”그는 말하면서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풀었다.“여초연한테 여초천이 지금 응급실에서 치료받는 걸 직접 보게 해. 그리고 말해. 이젠 약 하나만 넘기면 되는 게 아니라,임희주 약도 전부 내놓으라고. 그리고 노민준이 개발한 약, 진시연한테도 주사해. 압박 좀 줘.”준봉은 머뭇거리며 자꾸만 뒷좌석을 힐끗거렸다.구승훈은 눈매가 짙게 내려앉은 채,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선생님, 굳이...임희주까지 구할 필요가 있으신가요? 이런 거 부인께서 알게 되면, 오해가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 없이 창밖을 응시했다.그의 눈동자엔 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다.준봉은 속으로 몇 마디 더 하고 싶었지만 구승훈은 그저 조용히 말했다.“만약 네가 강하리 입장이었고 내가 다른 여자랑 껴안고 있는 사진이나,침대 위에 함께 있는 장면을 봤다면...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준봉의 이마가 순간 찌푸려졌다.이건 뭐라 말하긴 좀...어쩌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죽여버릴 수도 있고,어쩌면 두 번 다시 보기 싫다고 등을 돌릴 수도 있을 거다.어떤 경우든 자기 목숨은 보장 못 하는 대답이겠지...잠시 고민한 끝에 준봉은 조심스레 말했다.“제가 부인이라면, 아마 정말 많이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구승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그렇지. 화도 안 내면 그땐 진짜 끝난 거지.”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거든 호텔 두 달 이내의 CCTV와 투숙 기록 전부 확인해. 임희주랑 나, 같이 드나든 기록이 있는지 봐.”준봉은 살짝 찡그렸지만, 이내 곧 “네” 하고 대답했다.호텔 쪽에서 꽤 빠르게 자료를 보내왔다.구승훈이 비행기를 타기 전, 영상이 도착했다.기록상으로는 구승훈과
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가끔은 자신이 너무 소심한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을까?구승훈도 강하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마침 조시욱을 보게 되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시선을 다시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아직까지도 나한테 대답 하나 안 해줄 거야? ”구승훈의 말은 쓸쓸했고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강하리는 입술을 움직이다가 결국 짧게 말했다.“핸드폰 돌려줘.”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당장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얘기가 끝나고 나면 줄게.”강하리는 화가 치밀어 올라 발로 차고 싶었지만 자신의 다친 다리를 생각하니 그럴 가치도 없었다.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누가 나한테 사진을 보냈더라...”구승훈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고 그는 조용히 그녀의 핸드폰을 꺼내 그녀 손에 건넸다. 처음 사진을 받았을 때 강하리가 삭제하지 않았다.그 후에 일이 터졌고 침대 위의 영상까지 본 뒤에는 그 사진조차 다시 보기 싫어졌기에 그냥 그대로 남겨두었을 뿐이었다.강하리는 몇 번 화면을 터치하더니 이내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도촬로 찍힌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선명했다.임희주는 수줍고 애틋한 얼굴에 구승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래서 그때 이후로 구승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혐오감이 밀려왔다.구승훈의 눈동자엔 위험한 기운이 스쳤다.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강하리를 바라봤다.“이게 나 아니라고 하면...믿겠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핸드폰을 챙겨 들고 조시욱을 바라봤다.“집에 데려다줘.”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그의 눈빛은 복잡하고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고 있었다.“강하리, 넌 처음부터 나를 믿은 적이 없었던 거야?”강하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조소가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신뢰는 항상 서로 주고받는 거야, 구승훈 내가 널 믿지
강하리는 구승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누굴 만나든 그건 당신 자유야. 나랑은 상관없어.”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구승훈은 갑자기 장난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정말 누구든 괜찮아? 임희주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다 후처로 받아줄 수 있어?”강하리는 대답하지 않고 휠체어를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구승훈은 휠체어의 팔걸이를 단단히 잡고 그녀를 다시 제자리로 끌어당겼다.“나, 임희주랑 아무 사이 아니야. 네가 왜 그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강하리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다 아닌 거야?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되는데?”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귀 가까이 다가갔다.“내가 진짜 그 여자랑 뭔 일 있었으면... 평생 발기 부전 걸리게 해달라고 빌게. 음, 성기 썩어도 상관없어.”말투가 지나치게 능청스러웠다. 입김이 귓가에 닿자 강하리는 온몸이 얼어붙었고, 본능적으로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때리려 했다.구승훈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 손바닥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댔다.“아니면, 내 심장이라도 파내고 싶어? 그것도 괜찮아.”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이내 손을 빼냈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말해봐. 도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거야? 정말 내가 잘못했다 쳐도 내 말을 한마디쯤은 들어줄 수 있잖아.”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고, 마음은 이미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다행히도 이번엔 구승훈이 먼저 거리를 두었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진심인지 거짓인지 눈빛을 통해 알아내려 했다.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너무 깊고 어두워,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예전에 그녀는 구승훈이 호텔에서 임희주를 안고 있는 사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심지어 안현우의 핸드폰에서 그 장면의 영상까지 직접 본 적도 있었다.사진은 조작일 수 있어도, 영상도 조작일까?하지만 영상이 안현우의 폰에서 나온 거라는 점이 그녀 마음 어딘가에 작은 희망 하나를
조시욱은 짙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디서 얘기할 건데? ”그녀는 구승훈과 눈을 마주쳤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병실을 나섰다.조시욱은 당황한 듯 따라가려 했지만 구승훈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등을 향한 채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조 선생은 그렇게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나 보죠?”조시욱은 굳은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봤다.“난 단지, 하리가 당신과 단둘이 가는 게 걱정될 뿐입니다.”구승훈이 고개를 돌렸고, 얼굴은 마치 한겨울 서리처럼 싸늘했다.그런데 그가 아무 말 꺼내기도 전에 강하리가 또 먼저 입을 열었다.“따라오지 마.”조시욱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문제 생기면 바로 전화해.”“응.”구승훈은 그녀를 데리고 병원 아래 정원으로 향했다.겨울의 정원은 생각보다 을씨년스럽지 않았고, 몇 그루의 납매가 피어 있어 오히려 단정하고 고고한 느낌이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납매나무 아래로 데려갔다.금빛 꽃잎에서 은은한 향이 퍼졌지만 지금 두 사람 모두 향기를 느낄 여유는 없었다.“난 연정이 양육권 포기 안 해.”강하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구승훈은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하고 나무 아래에 섰다.노란 꽃잎들이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왜?”그는 갑자기 몸을 기울였고, 손으로 휠체어 양쪽 팔걸이를 움켜잡았다.너무 가까웠다.그의 숨결이 얼굴을 스칠 정도였다.이 자세는 마치 그녀를 품 안에 가두는 것처럼 느껴졌다.“구승훈, 비켜.”강하리는 냉랭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익숙한 향수 냄새 속에서 임희주의 체취가 느껴져 역겨웠다.구승훈은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고, 눈빛엔 장난기 섞인 악의가 담겨 있었다.“안 비키면?”강하리는 온몸이 들끓었다.역시, 이 뻔뻔한 남자랑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핸드폰을 꺼내 조시욱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하지만 번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