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해?”남자의 눈에는 아픔이 묻어났다.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눈꼬리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곳에 맺힌 물기를 살짝 문질렀다.강하리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구승훈은 웃으며 말했다.“B시로 출장 왔어.”강하리는 눈가에 번지는 서글픔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억울한 건 괜찮다고 쳐요. 근데 내키지는 않아요. 내가 분명 더 잘했는데.”“맞아, 네가 백만 배는 더 잘했지.” 구승훈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대신 나서서 해결해 줄까, 어때?”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며 한참 후 웃음을 터뜨렸다.“외교부 일에는 참견하지 않는 게 좋아요. 됐어요,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구승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내가 참견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능하지.”그렇게 말한 뒤 그는 강하리에게 옆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그제야 강하리는 자신의 옆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거의 모든 사람들이 외교부의 중요한 임원들이었다.진태형을 비롯해 백아영과 심준호까지 왔다.심준호 옆에는 징계 위원회 직원들도 있었다.강하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승훈이 웃었다.“모두 옆 회의실에서 너와 문연진의 대결을 지켜봤어. 누가 이기고 졌는지도 똑똑히 봤지. 진 장관님이 사적으로 해결했는지, 문씨 가문이 부당하게 힘을 썼는지 다 알고 있어. 신고한 사람도 찾았고 이미 징계 위원회로 가서 모함한 거라고 자백했어. 너와 진 장관님은 이제 결백한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오늘 밤에 제대로 정의 구현할 수 있으니까.”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끝이 시큰해졌다.원래는 별로 억울하지도 않고 그저 마음속으로 납득할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지금은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돌려 진태형을 바라보았다.“삼촌, 남은 일엔 더 간섭하지 않을게요.”진태형은
그렇게 말한 후 그는 방금 결과를 발표한 직원을 차갑고 엄숙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훌륭한 통역사는 통역사다운 모습을 보여라, 누가 보면 네가 협상하러 올라간 줄 알겠다. 자, 그럼 그쪽이 올라와서 어떻게 통역해야 하는지 말해 보시죠?”방금 결과를 발표하던 심사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고 진태형은 말을 이어갔다.“여기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잊어버리고 특혜를 받았는지, 징계 위원회 분들이 전부 똑똑히 밝혀낼 겁니다, 오늘 이 대결의 결과에 대해서는...”진태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연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진 장관님, 제 실력이 강하리 씨보다 훨씬 부족하다는 걸 잘 알아요. 그러니 오늘 밤 이 기회는 제가 양보하겠습니다.”문연진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당황했다.아무도 그녀가 자발적으로 포기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정의 구현을 하려던 상황이 문연진의 말 때문에 마치 진태형이 외교부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그들에게 기회를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졌고 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네 거야, 네가 양보하게?”당황한 문연진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렸다.구승훈의 어투에는 여전히 조롱이 가득했다.“애초에 이 기회는 네가 훔친 거니까 이제 돌려준다고 하는 게 맞지, 문연진 씨, 이 정도 도리도 모르나?”문연진의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려 있다가 한참 후 싱긋 웃으며 말했다.“승훈 오빠, 오해에요. 이 기회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쟁취하는 거고 제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양보하는 건데 그게 뭐가 잘못됐어요?”심준호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공정한 경쟁이라니요, 조금 전 대결은 우리 모두가 지켜봤어요. 문연진 씨는 이런 식으로 공정한 경쟁을 합니까? 공정한 경쟁이 무슨 뜻인지 제가 설명해 드릴까요?”문연진은 다소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심준호에게 밉보일 수 없었기에 도움을 청하듯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문원진이 손녀를 위해 나서려는데 진태형이 먼저
강하리가 뒤돌아보니 주해찬이 문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못본 사이 살이 많이 빠졌지만 그의 모습은 더 활기차 보였다.주해찬은 진태형과 함께 와서 강하리에게 인사하러 가고 싶었지만 구승훈이 강하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이제 막 떠나려는 그녀를 보며 도저히 참지 못한 그가 불러세운 것이었다.강하리의 눈에 미소가 담겼다.“선배, 오랜만이네요.”주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 옆에 서 있는 구승훈을 힐끗 쳐다보던 그의 가슴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그동안 연성에 가본 적이 없고 특별히 연성에 대해 들은 것도 없었지만 구승훈과 강하리가 화해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정주현이 매일 같이 그에게 푸념을 널어놓았으니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그럭저럭요, 선배는요?”주해찬은 눈가의 씁쓸함을 숨긴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냥 그래.”강하리가 다른 말을 하려던 찰나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았다.“주해찬 씨 요즘 맞선 본다면서요? 어때요, 잘 되어가나요?”주해찬이 싱긋 웃었다.“제가 듣기로 구승훈 씨도 맞선을 본다던데요.”구승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주해찬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고 그녀는 휴대폰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전화 좀 받을게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옆으로 걸어가자 구승훈의 시선은 그녀를 쫓았고 주해찬은 그런 그의 표정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구승훈 씨, 그렇게 매달리면서 손 놓지 않겠다면 앞으로 잘해주세요. 잘해주지 않으면 내가 또 데려갑니다.”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며 주해찬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주해찬 씨, 당신이 무슨 자격이 있는데?”주해찬의 눈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난 자격 없죠. 하지만 구승훈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구승훈 씨, 정말 하리를 사랑해요, 아니면 그저 당신 소유욕 때문인가요?”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주해찬 씨,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주해찬은 그를 바라보았다.
“주해찬 씨, 시간도 늦었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야, 애초에 너를 힘들게 한 건 우리 가족이었으니까 이별을 선택한 너를 탓한 적은 없지만 앞으로는 너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고 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물었다.“선배 말이 사실이에요?”구승훈은 자신의 잘못이 맞았기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하리야...” 강하리는 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런 건 확실히 구승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구승훈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화났어?”“아니요.” 대답을 마친 강하리가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가자 구승훈은 서둘러 따라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차에 탄 그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 화 풀어, 응?”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때론 자신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난감한 상황에 밀어 넣기도 하고, 오늘처럼 여기까지 달려와서 그녀를 도와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가끔은 그가 정말 자신을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단지 손에 얻고자 하는 건지 모르겠다.차 안엔 끔찍한 적막이 감돌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구승훈 씨, 그 일 말고 또 나한테 수작 부린 거 있어요?”구승훈의 목울대가 일렁거렸다.많았다.“일부러 다쳤어. 전에 팔 다쳤을 때 피할 수 있었고, 할아버지가 때렸을 때도 피할 수 있었어... 교통사고도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어.” 강하리는 멍하니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이 계산된 행동이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남자는 독하게 자신이 다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강하리는 답답함이 밀려왔다.“구승훈 씨, 자기 몸으로 장난하는 게 재밌어요?”구승훈은 그녀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하
강하리가 멈칫했다.벌써 12시가 넘었는데 3시 비행기라면...적어도 두 시에는 공항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구승훈은 축 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나 좀 거둬줘, 응?”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말했다. “소파에서 자요.”구승훈은 서둘러 말했다.“샤워하는 거 도와줄까?”“필요 없어요!”구승훈은 웃으며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았다.문제는 더 진도를 나가고 싶어도 시간이 부족했다.한 시간 조금 넘게 남은 시간으로는 전희만으로도 부족했다.강하리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구승훈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나오는 것을 본 그는 상대방에게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고 강하리는 그를 힐끗 바라본 뒤 침대로 향했다.구승훈은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가 수건으로 하체만 감싸고 나왔다.강하리는 순간 당황했다.분명히 목욕 가운이 있었는데 왜 굳이 수건만 두르고 나왔을까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문득 그의 복부에 있는, 길지는 않지만 유난히 눈에 띄는 흉터에 시선이 갔고 다소 흉측하기까지 했다.순간 입가에 차오른 말을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구승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소파는 불편해. 아무 짓도 안 할게, 응?”강하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적당히 해요.”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누웠다.“정말 아무것도 안 해, 하리야. 너랑 잠시만 이대로 같이 있고 싶어.”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용한 방 안에서 귓가엔 온통 구승훈의 숨소리만 울려 퍼지자 강하리의 심장이 어느새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속에는 여전히 분노가 남아 있었지만 구승훈이 자신을 위해 힘들게 뛰어다닌다는 걸 잘 알았다.그녀는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잠깐 쉬어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에 입맞춤을 했다.이윽고 그의 커다란 손이 옷깃 안으로 파고들며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움켜쥐었다.강하리의 몸이 심하게 굳어지며 경고하듯 그를 불렀다.“
구승훈이 보낸 건 사진 한 장이었다.비행기에서 찍은 일출, 하늘의 절반을 물들인 찬란한 아름다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강하리는 그 사진에 한참 동안 시선이 머물렀다가 저장한 뒤 휴대폰을 베개 밑에 넣고 잠이 들었다.진태형이 데리러 올 사람을 보낸다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주해찬이었고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어젯밤에 잘 잤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요.”주해찬이 싱긋 웃었다.“다행이다, 잘 못 잤을까 봐 걱정했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었다.“하리야, 너랑 구승훈 씨 화해한 거야?”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아직요.”아직 화해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강하리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구승훈이 다가오는 걸 점점 거절하기 힘들었다.다만 구씨 가문 사람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그녀는 주해찬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짐을 챙겨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주해찬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하리야, 내가 잘못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고 주해찬은 더 말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잘못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애초에 그렇게 포기하는 게 아닌데.지금 구승훈의 상황은 그와 비슷했지만 분명한 건 구승훈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만약 자신도 그때 조금만 버텼다면 지금 그들 사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강하리는 구승훈의 전화가 왔을 때 막 차에 올라탄 상태였다.그녀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영상통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출발했어?”말을 마친 구승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주해찬 차에 있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진 장관님께서 저를 데리러 오라고 보냈어요.”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진 장관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저 사람을 보내?”“구승훈 씨, 말조심해요!”말을 가려 할 여념이 없었던 구승훈은 지금 당장 다시 날아가고 싶었다.“주해찬도 이번 일에 참여해?”강하리는 지금까지도 이번 일 구성원에 누
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주해찬을 바라보았다.“미안해요, 선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주해찬은 피식 웃었다.그는 개의치 않았다. 구승훈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그런 위기감은 자신도 전에 겪어본 적이 있는데 이번엔 상황이 정반대였다.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하리야, 내가 그때 네 손 놓지 않았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메시지를 보내던 강하리의 손이 순간 멈칫하며 그녀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 역시 확신이 서지 않았다.하지만 구승훈이 옆에서 방해하는 상황에선 아무리 버텨도 그들은 결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선배, 지나간 일은 그냥 내려놔요.”하지만 주해찬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내려놓으라고, 그게 어디 쉽나.애초에 자신과 강하리가 헤어지게 된 원인이 구승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이다.구승훈이 강하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도 기꺼이 축복해 주겠지만, 만약 그가 또다시 그녀에게 상처를 준다면 미련 없이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외교부에서 열린 오전 회의는 주로 이번 일에 대한 설명회였다.교포 출신의 한 부유한 사업가가 Y국에서 은밀한 경로를 통해 해외에서 분실된 문화유물을 발견했는데 상대와 정보를 교환해 문화유물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내에 들여오려다가 문화 유물 밀수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이번 임무는 그 부유한 사업가를 구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문화유물 일괄을 국내로 되찾아오는 것이었다.강하리를 포함한 협상팀은 총 15명으로 구성되었다.문화유적 전문가, 외교부 관계자, 고문 변호사,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국방부 관계자까지 함께했다.그리고 그 선두에는 놀랍게도 90대의 심문석이 있었다.심씨 가문의 어르신인 심문석은 아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백발의 정정한 모습이었다.심문석 옆에는 심준호가 고문 변호사 역할로 서 있었다.심문석의 시선이 모두를 훑어보다가 강하리에게 향했고 그는 잠시 멈칫
“아이고, 나이가 드니 감수성이 풍부해지나 보네.”심준호는 그가 심미현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옆으로 데려가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강하리는 떠나기 전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구승훈은 이사회에 참석 중이었고 책상 위에 놓인 그의 휴대폰이 울리자 회의실 안에 있던 SH그룹 어르신들의 얼굴이 일제히 어두워졌다.“구승훈, 지금 이사회를 하는데 어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지.”구승훈은 휴대폰 화면을 흘깃 쳐다보고는 곧바로 휴대폰을 들었다.이사회에 참석한 어르신들은 하나둘씩 얼굴이 일그러졌다.“구승훈! 우리 말이 안 들리는 거야?”구승훈의 어두운 눈빛이 번뜩이자 버럭버럭하며 날뛰던 이사들의 표정이 다시 시들해졌다.저쪽에서 강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바빠요? 그럼 먼저 끊을게요.”구승훈은 짧게 대답할 뿐 끊지 않고 그대로 전화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강하리도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전화가 끊어지기도 전에 저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구승훈, 북교 땅에 관해 설명해 봐!”강하리는 잠시 멈칫하며 별안간 전화를 끊으려던 손가락이 멈췄다.곧이어 그곳에서 여러 사람의 화난 고함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그래 구승훈, 그렇게 풍수 좋은 땅이 네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어. 우리 임원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듣기론 여자한테 줬다고 하던데? F대륙 시장의 3분의 1과 맞바꾼 그 땅을 여자한테 그냥 준 거야? 구승훈, 너 미쳤어?”“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까짓 여자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해? F대륙 시장의 3분의 1이 무슨 뜻인지 네가 누구보다 잘 알 텐데!”강하리는 잇달아 들리는 질책에 휴대폰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구승훈이 그 땅을 얻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대가가 F대륙 시장의 3분의 1인 줄은 몰랐다.F대륙 시장의 3분의 1이 고작 땅 하나와 교환하는 데 사용되었다.강하리는 마음이 복잡했다.구승훈이 일부러 그 말을 들려준 건 아닌지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