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구승훈이 낮게 대답했다.구승훈의 등에는 무섭고 보기 흉한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고 하필 심장 바로 뒤쪽이었다.연고를 쥐고 있던 강하리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구승훈이 다쳤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흉측한 상처는 여러 번 꿰맨 것처럼 보였다.구승훈도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이건 내 아내와 딸을 지켜준 걸로 받은 공로 훈장이지.”말을 마친 그의 목울대가 움찔했고 순간 그는 이 말을 한 것을 다소 후회했다.예상대로 강하리의 눈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번뜩였고 그녀는 두 눈 속에 일렁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숨기기 위해 시선을 내린 채 그에게 연고를 발라주었다.“저녁에 샤워할 때 조심해. 내가 사람 보내서 카메라 확인해 볼게.”말을 마친 그녀가 뒤돌아 가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하리야, 해외로 가 있지 않을래? 해외로 갔다가 이쪽 일 다 해결되면 그때 다시 돌아와.”눈꼬리가 살짝 붉어진 그녀는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구승훈 씨, 만약 입장 바꿔서 당신 위험할까 봐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해외로 가서 숨어 있으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아내와 아이가 이렇게 다쳤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남자라고 할 수 있나.강하리는 더 말하지 않고 나문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나문빈은 강하리의 전화를 받았을 때 막 도착한 상태였다.“벌써 내가 보고 싶어요?”강하리는 그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주소 하나 보낼 테니까 거기 감시카메라 확인해 줘요.”나문빈이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사업가 나셨네요. 나 좀 쉬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강하리가 웃었다.“예서 씨 좋아해요? 돌아오면 내가 두 사람 이어줄까요?”나문빈이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었다.“좋아하는 건 아니고 어리바리해서 놀리는 게 재밌어요. 저기 뭐야, 주소나 얼른 보내요.”강하리는 웃으며 전화
“할 겁니까, 말 겁니까?”“사람은 그쪽에서 보내는데 이득은 내 쪽에서 취하는 겁니까?”“구씨 가문은 그쪽이, 문씨 가문은 내가 맡는 걸로 하죠. 어차피 결국 내 결혼 선물이 될 텐데 나한테서 뺏지 마시죠, 최하영 씨?”최하영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결혼 선물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전화를 끊은 구승훈은 옷을 갈아입고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점심때 밥이나 먹자. 입찰에 대해 할 얘기가 있어.”한편 강하리는 방으로 돌아와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전화를 받았고 입을 열자마자 자신의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다.강하리도 당황했다.“연지야, 너...”손연지는 2초 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쳤다.노민우는 여전히 긴 팔을 그녀의 허리에 얹은 채 잠들어 있었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노민우가 마침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손연지의 머릿속이 요란하게 돌아갔다.그녀가 움직이려는데 노민우가 곧바로 몸을 뒤집어 그녀를 자신의 밑에 짓눌렀다.“또 날 발로 차려고?”손연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고 노민우를 밀어냈다.“비켜!”노민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짓궂게 웃었다.“어젯밤 어땠어, 나쁘지 않았지?”손연지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가서 자기 옷을 들쳤다.“그냥 그랬어!”그녀는 노민우 말고는 다른 남자와 경험을 한 적이 없었기에 단순히 느낌으로만 말한다면 나쁘지 않았다.“허!” 노민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시 한번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만족하지 못했어? 네가 내 몸 할퀸 자국을 봐, 좋아서 그런 거 아니었어?”손연지는 그의 어깨에 난 긁힌 자국과 이빨 자국을 흘끗 쳐다보았다.“자기도 즐겼으면서.”노민우는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나도 좋았어, 아주 좋았지. 앞으로 자주 할래?”손연지는 그를 발로 차버리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꺼져!”노민우가 등 뒤에서 혀를 차며 말했다.“좋은데 왜 안 해?”손연지는 그대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사실 그녀
손연지가 짧게 대꾸하자 강하리는 할 말을 잃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젯밤에 또 술 많이 마셨어?”“아니, 제정신이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근데 왜 또 노민우랑 잤어, 소 교수님은 어쩌고?”손연지는 잠시 침묵했다.“하리야,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난 소영준이 그래도 나한테 조금은 호감이 있는 줄 알았어.”강하리는 당황했다.“무슨 일 있었어?”손연지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길가의 작은 돌멩이를 내려다보았다.소영준은 작년에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 왔고 당시 강하리가 유산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녀가 진료기록을 멋대로 바꾼 것에 대해 구승훈은 따지고 들지 않았지만 결국엔 누군가에 의해 그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당시 해고 위기에 처했던 그녀는 소영준이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준 덕분에 계속 병원에 남을 수 있었다.그 후에도 소영준은 여러 번 그녀를 도와줬고 왠지 모르게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소영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그래서 줄곧 소영준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때쯤 그가 연수 신청까지 도와주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적어도 어젯밤 전까지는 말이다.데이트라고 해서 나갔는데 방 안에는 남자들이 한 무리 있었고 그들 옆에는 여자가 한 명씩이 앉아 있었다.수위를 가리지 않는 농담들이 마구 오갔지만 소영준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고 그런 그의 모습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괜찮아.” 손연지는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쪽 일은 끝났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괜찮아? 소영준이라는 사람...”“하리야, 네 말대로 미리 주변에 알아볼 걸 그랬어.”강하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소영준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니야, 그 얘기는 네가 돌아와서 하자. 나 가서 쉬고 싶어. 노민우 그 멍청이가 밤새 날 괴롭혔어.”“...”원래는 손연지에게 노민우와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손연지가 얘기하길 꺼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승낙했다.한편 연미숙은 차에 앉아 정양철이 강하리에게 접근한 시점부터 강하리가 구승훈의 보호를 받을 때까지의 전 과정이 담긴 감시카메라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그동안 그녀는 줄곧 강하리에 대해 뒷조사했고 의심이란 게 한번 싹이 트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법이었다.심씨 가문 생일잔치가 끝난 그날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런 의심의 씨앗이 뿌리를 내렸다.왠지 모르게 정양철이 강하리만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이 하는 행동에서는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특히 얼마 전 강하리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 때도 정양철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괜한 의심인가 싶었는데 며칠 전에 아들 정주현으로부터 정양철이 강하리에 대한 마음을 접으라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의심의 불길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래서 오늘 떠보려고 했는데 그 물을 구승훈이 고스란히 막아낼 줄은 몰랐다.연미숙이 얼굴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정주현의 전화가 걸려 왔다.강하리가 옷에 관해 물었다는 것을 듣자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주현아, 강하리 씨랑 식사 약속 한번 잡아.”레스토랑에 도착한 강하리는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정주현뿐만이 아니라 연미숙까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뒤 계속해서 걸어왔다.“안녕하세요, 사모님.”연미숙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강하리 씨 얼굴 보기 참 힘드네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주현은 혀를 찼다.“엄마, 하리 씨 엄청 바빠. 그리고 엄마가 왜 하리 씨를 만나? 두 사람 말도 안 통할 텐데. 만나도 내가 하리 씨랑 만나야지.”연미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으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의 시선이 연미숙의 옷으로 향했다.“사모님께서도 오늘 행사장에 오셨어요?”연미숙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강하리 씨 똑똑하네요.”정주현은 두 사람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연미숙은 곧바로 웨이터
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이쯤 되니 정양철에 대한 의심이 좀 더 확실해졌다.정양철은 처음부터 그녀를 겨냥하고 접근한 거다.컵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표정만은 태연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조금 의아해요, 사모님. 정 회장님은 왜 굳이 저를 대양에 데려가신 걸까요? 저와 정 회장님이 불륜 사이라고 의심하는 거면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전 구승훈도 있는데 정 회장님이 눈에 들어올 리가요. 사모님께서 정 의심이 간다면 본인 남편분에 대해 알아보세요. 왜 하필 연성에 가야 했는지, 왜 저를 끌어들였는지도요.”연미숙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강하리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상대의 표정을 살펴보던 강하리는 손을 들어 연미숙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사모님께서는 혹시 저의 어머니에 대해 아시나요?”연미숙은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 어머님이요?”“네, 저희 어머니도 정 씨거든요, 정서원.”연미숙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에 대해 이미 뒷조사했기에 당연히 강하리 어머니의 사진도 본 적이 있었다.아주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삶은 엉망이었다.혼전임신으로 송씨 가문의 아이를 뱄다가 알코올 중독자 도박꾼과 결혼하고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누워 있었다.정양철이 연성에 와서도 그녀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가 이렇게 말하자 문득 조바심이 들었다.연미숙은 한참을 찡그리다가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강하리 씨는 설마 우리 그이가 잘해주는 게 그쪽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강하리가 웃었다.“저도 추측일 뿐이에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연미숙을 바라보았고 상대도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몇 마디 더하려고 할 때 정주현이 밖에서 돌아왔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식사는 계속됐다. 정주현만 계속해서 강하리에게 안부를 묻고 강하리가 일일이 대답하는 식이었다.연미숙
정주현도 일이 바빠 자리에 더 머물지 않았고 심준호는 떠나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구승훈을 돌아봤다.“그때 널 도와서 하리 씨를 붙잡은 게 살짝 후회되네.”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참 후 피식 웃었다.“솔직히 나도 후회해.”그때 그렇게 그녀를 놓아줬더라면 지금쯤 그녀와 아이가 무사히 잘 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심준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래도 이미 이렇게 됐는데 후회해봤자 소용없잖아. 현실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게 답이야. 솔직히 나도 하리 씨가 위험해지는 건 싫어. 하지만 지금 하리 씨는 복수에 혈안이 돼 있고 네가 나서서 한 번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막는 건 불가능해.”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한 번이라도 막으면 최소한 그 한번은 위험을 피해 갈 수 있잖아.”심준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둘 중 대체 누구를 말렸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따라 호텔로 돌아왔고 강하리가 문을 열고 있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연미숙 만나러 갔어?”그의 말을 무시한 채 강하리는 곧바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려는 것을 본 구승훈은 곧장 달려가 문을 손으로 잡았다.“강하리, 정씨 집안 사람들이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아무도 몰라. 앞으로 따로 혼자서 만나지 마.”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구승훈 씨, 오늘 행사장에서 끓는 물 부으라고 시킨 게 그 여자야. 내가 안 만난다고 그 여자가 날 안 찾아올까? 문제는 무작정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그리고 난 이미 충분히 숨고 피해 다녔잖아. 그렇게 피해 다녔어도 우리 엄마, 내 아이까지 결국엔...”그녀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아예 화제를 돌렸다.“정양철에 대해선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하지만 내가 풀려고 하지 않으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문제야. 내 복수에는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도 있어.”구승훈이 미간을 확 찌푸렸
구승재가 다시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어 소영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형, 강하리 씨 정말 소영준이랑 뭐 있는 건 아니겠지?”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니야.”그는 손연지가 소영준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강하리가 절대 소영준과 이러저러한 일로 엮일 리 없다는 걸 잘 알았다.말을 마친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조금 전 강하리가 단지 소영준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요즘 구정우 쪽에선 움직임 없어?”“구정우랑 문원진이 만났어, 둘이 손잡으려나 봐. 구정우는 똑똑해. 처음부터 문원진 찾아갈 수 있었는데 형이 문연진을 다치게 하고 나서야 찾아가잖아.”구승재가 말하며 백미러를 통해 구승훈을 바라보았다.“형, 형도 요즘 조심해. 구정우한테는 형이 타깃 1순위야. 지금 구정우는 서둘러 가주 자리를 이어받길 원하지만 할아버지와 집안 어르신들이 동의하지 않고 다들 형이 돌아오길 바라. 그러니까 구정우는 형한테 손을 쓰겠지.”짧게 대꾸한 구승훈은 손가락으로 손목에 차고 있는 염주를 만지작거렸다.“구정우가 가주 자리를 원한다면 실컷 앉으라고 해. 그리고 함께 부숴버리면 돼.”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형, 정말 구씨 가문을 무너뜨릴 생각이야?”그는 줄곧 구승훈이 구씨 가문에서 나온 건 그저 할아버지를 위협해서 강하리를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것이지 실제로 구씨 가문을 망치려 할 줄은 몰랐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난 처음부터 진심이었어.”“하지만...”“새로운 구씨 가문을 세울 거야. 구승재, 난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고 아무도 괴롭힐 수 없는 집을 만들어주고 싶어.”구승재는 목구멍이 꽉 막힌 느낌에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손연지는 막 잠에서 깨어났다.“하리야, 왔어?” 그녀는 무기력한 상태로 강하리 앞에 앉았다.“어땠어
손연지도 더 이상 말을 할 기분이 아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뭐 먹고 싶어, 내가 만들어 줄게.”강하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선배?”주해찬의 목소리가 다소 무겁게 들렸다.“하리야, 너희 회사 입찰 실격된 거 알고 있었어?” 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웃었다.“역시.”주해찬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알고 있었어?”강하리가 답했다.구승훈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다.“구승훈은 내가 이 일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았어요.”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하자 주해찬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하리야, 사실 나도...”“알아요, 다들 내가 위험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알지만 선배, 아무것도 안 하고는 편히 먹고 잘 수가 없어요. 엄마한테 일이 생겼을 때 난 능력도 없고 임신 중이어서 무척 조심했는데 이젠 아이마저 없으니 더는 조심할 필요가 없잖아요. 선배, 난 평생 숨어 지내기 싫어요. 그 사람들이 뭔데 날 멋대로 괴롭혀요?”주해찬은 문득 가슴이 아팠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선배.”주해찬은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하리야, 네가 조금이라도 괜찮아진다면 뭐가 됐든 난 기꺼이 도울 거야. 하지만 네가 행복해야 해. 이런 일을 할수록 너만 더 괴롭다면 그땐 나도 안 도와줄 거니까 나 원망하지 마.”강하리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웃으면서 답했다.“그럼 이번 일은 어떻게 할 거야?”“걱정하지 마요, 다른 대안이 있으니까.”“알았어, 그럼 소식 기다릴게.”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들어갔다.나왔을 때 그녀에게 영상 하나가 와 있었다.[오늘 그 연구소의 감시 시스템을 해킹했어요. 노진우 아이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가져왔으니까 이걸로 일단 호기심 해소하라고요.]강하리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가 잠시
구승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을 바라보았다.물 흐르는 소리가 막 멈춘 참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살균 티슈로 손을 닦는 강하리의 모습이 차가운 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싫어하는 이유가.. 조시욱 때문이야?”구승훈은 무릎을 꿇고 강하리 앞에 앉아 그녀의 턱을 잡아올렸다.“대답해 봐, 조시욱을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거냐고?”강하리는 고개를 쳐들며 비웃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묻는 건데요?”구승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휠체어를 돌려 화장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에서 구승훈은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구승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병실 문이 열리고 심준호와 백아영, 조시욱이 들어와서였다.구승훈을 본 심준호와 백아영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든 심준호가 먼저 구승훈에게 상황을 묻고 강하리와 화해할 수 있도록 조율하려 했다.하지만 이번 일 이후 심준호는 단 한 번도 구승훈을 찾지 않았다.그건 구승훈에 대한 더 말할 나위 없는 실망을 의미했다.백아영은 당장이라도 구승훈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수십 년간 유지해 온 품격과 매너로 화를 억눌렀다.세 사람이 강하리와 함께 연정이 주위에 둘러앉자, 병실 한구석에 있던 구승훈은 마치 외부인 같이 느껴져 굳은 표정으로 병실을 나와 유리 창가에 서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뒤늦게 찾아온 심준호가 말을 꺼냈다.“일은 다 정리됐어?”구승훈은 낮게 대답했다. “거의.”비록 여초연의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진 않았지만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이상 큰문제는 없었다.“하리랑 조시욱 일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승훈아, 너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 그만 하리 인생에서 나가줘.”구승훈은 멈칫하다 이내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강하리 인생을 방해한다고? 준호야,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넌 알잖아, 어떻게 된 일인지.”“알면 뭐 하냐? 구승훈, 우리 하리가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심
강하리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무의식적으로 구승훈을 밀쳐내려 했지만 연정이의 웃음소리에 잠시 망설였다.아직 열이 가시지 않은 구연정은 강하리와 구승훈을 보고 흥분했던 것도 잠시, 곧 다시 기운이 빠졌다.구연정은 힘없이 구승훈 어깨에 기댄 채 한 손은 구승훈의 옷자락을, 다른 한 손은 강하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강하리를 바라봤지만 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그가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왔다.“강 대표님, 아가씨는 현재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입니다. 며칠 입원이 필요할 것 같아 이미 병실은 준비해두었습니다. 곧 간호사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수고 많으셨습니다.”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연정이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강하리는 침대 곁에 앉아 연정의 손을 꼭 잡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은 다른 한쪽에서 의사와 연정이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의사가 떠난 뒤에야 그는 강하리 옆으로 돌아왔다.“의사 말로는 보기보다 심각하진 않대. 너무 걱정하지 마.”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연정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으려 하자 강하리는 황급히 그 손을 빼냈다.“이제 돌아가요. 나랑 아주머니가 있으면 돼요.”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조시욱이 오기 편하게 나더러 가라는 거야?”강하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구승훈을 노려보다가 이내 비웃듯 말했다.“여기 남아 있으면 임 선생님이 화내지 않을까?”구승훈은 끝내는 강하리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임 선생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 정말 나 못 믿는 거야?”그의 목소리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강하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빼내려 하자 구승훈이 낮게 말했다.“움직이지 마. 연정이 깼어.”강하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급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연정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었다.분노에 찬 강하리를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