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를 꽉 쥐며 심호흡하고는 바로 화제를 바꿨다.“무슨 일 있었어?”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구승재가 전화했어?”강하리는 부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손에 들고 있던 블레이저를 옆으로 던져버리고는 느긋하게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복부에 몇 군데 멍이 들어 있었고 그는 상처들을 흘끗 내려다보았다.“무시해. 별일도 아닌데 괜히 그러는 거야. 연정이는? 잘 적응하고 있어?”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대답했다.“정말 괜찮아?”구승훈은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렇게 걱정돼?”“말하기 싫으면 됐어.”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는 것을 본 구승훈은 서둘러 말했다.“일이 좀 있긴 해.”강하리가 멈칫했다.“뭔데?”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네 생각에 몸이 반응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괜히 전화를 걸었다.구승훈은 순식간에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다소 무력한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래도 전화 한 통으로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강하리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거실에 돌아왔고 백아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승훈이야?”강하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백아영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하리야, 할머니한테 네 진짜 마음을 말해줄 수 있어? 주씨 가문 일은 어떻게 할 거니? 승훈이한테는 아직 마음이 있는 거지? 너희한테는 연정이도 있잖아.”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보냈다. “주씨 가문과 약속했으니까 그건 지킬 거예요.”구승훈은...아직 그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한순간에 바로 지워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사랑도, 증오도 평생의 모든 감정을 그 남자에게 줬다.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이번에는 연정이가 무사히 고비를 넘겼지만 다음번에는?엄마처럼 되지는 않을까. 그녀의 고집과 감정 때문에 또다시 누군가의 손에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감히 모험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구승훈이 준 상처와 속임수, 숨겼던 진실과 저버린 믿음도 전부 없었던 일로 치부
녹음을 들은 정양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변했지만 그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심준호는 다른 녹음 파일을 클릭했다.[강찬수, 당신이 도박으로 생긴 빚 1억은 내가 대신 해결해 줄게. 하지만 너도 날 위해 뭔가를 해줘야지. 일이 끝나면 크게 한몫 더 챙겨줄게.]그러자 강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뭔데?][교통사고를 조작해서 네 아내를 죽여.]강찬수의 형이 강찬수로부터 빼앗은 휴대전화에서 나온 녹음 파일이었다.구승훈은 강찬수도 정양철이 손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문득 이 휴대폰이 떠올랐다.뜻밖에도 그 휴대폰에서 실제로 녹취록이 발견될 줄이야.정양철은 갑자기 숨이 가빠왔다.마지막에 이런 일로 상황이 뒤집힐 줄은 몰랐다.심준호의 눈에서 매서운 기색이 번뜩이며 다가와 정양철의 옷깃을 잡았다.“정양철,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누나랑 같이 자랐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한테 잘해줬는데 왜 우리 누나를 해쳤어!”정양철의 얼굴은 잿빛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서글픈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이유는 없어. 그냥 해치고 싶었어. 안 되나?”그러자 심준호는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순식간에 정양철의 잿빛 얼굴이 반쯤 부풀어 올랐다.평소 자주 화를 내지 않는 심준호였지만 그렇다고 힘이 약하지 않았다.그의 주먹을 맞은 정양철은 머릿속이 윙윙 울리기까지 했다.이윽고 심준호가 한 방을 더 날렸다.“이유를 말해!”하지만 정양철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가 피식 웃었다.“내 누나를 해치고 강하리를 해치고, 심지어 자기 아내와 아들을 이용하기까지 했어. 정양철,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정양철은 아내와 아들 얘기에 그제야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내가 한 짓이고 그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 없어.”심준호가 그를 놓아주자 의자에서 미끄러진 정양철의 두 눈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네 누나는 좋은 사람이지. 예쁘고 눈부셔서 나도 몰래 오랫동안 좋아하면서 해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난... 선
강하리는 구승훈을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심문석이 입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그래도 양심은 있네. 마중까지 다 나오고.”그렇게 말한 후 어르신은 앞으로 걸어갔다.그 순간 주변 사람들도 모두 구승훈 쪽으로 다가갔다.강하리는 가만히 서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심호흡하고 저쪽으로 걸어갔다.구승훈은 사람들을 챙긴 뒤 강하리에게 다가갔다.“우리가 올 줄 어떻게 알았어?” 강하리는 그를 보자마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구승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알려주는 사람이 있지.”그렇게 말하며 그는 연정이를 안았다.연정이도 구승훈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고 구승훈의 품에 안기자 더욱 들떠 있었다.강하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그는 연정이 아빠였다.“엄마 일은 고마워.”구승훈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날 원망만 하지 마.”강하리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치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가자.”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심씨 가문 사람들과 걸음을 맞추며 걸어 나갔다.구승훈은 연정이를 품에 안고 뒤따르면서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네 엄마 아직 화난 것 같네.”연정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옹알이했고 구승훈의 눈가에 머금은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괜찮아, 엄마 화 풀어줄 방법을 찾아보자, 알았지?”몇 대의 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외곽에 있는 묘지를 향해 곧장 달렸다.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번에 온 건 심미현 때문이었다.강하리의 엄마가 심미현이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백아영은 꼭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와서 보든 심미현의 묫자리를 B시로 옮기든 홀로 이곳에 남겨두는 것보다 나았다.그런데 정양철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늦어진 것이다.오더라도 심미현에게 할 말이 있어야 했다.그래서 가족들은 정양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성으로 온 거다.묘지에서 백아영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의 딸이 이곳에 묻
구승훈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다.“어머님, 죄송합니다.”구승훈이 나지막이 말하자 강하리의 눈에 눈물이 다시 흘렀다.내내 구승훈을 바라보지 않는 그녀는 마음이 저리도록 아팠다.그녀는 지금도 구승훈을 데리고 심미현을 만나러 갔을 때 구승훈이 심미현 앞에서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까지 기억하고 있었다.그때는 정말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강하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고 구승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훔치듯 닦아주었다.하지만 강하리는 그의 손을 피해버렸다.구승훈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그녀의 턱을 잡고 고개를 돌린 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조금씩 닦아주었다.“미안해.”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한번, 또 한 번...마치 분풀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미워서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이 개자식이 뭐라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거듭 그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다시 찾아와 괴롭히는 건지!대체 왜 자꾸만 이러는 걸까.이미 준 상처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구승훈은 그대로 맞고만 있었다.강하리가 그동안 참아왔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었다.연정이가 사라진 이후로 그녀는 마음속에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연정이가 돌아왔으니 이제 속에 쌓인 서러움을 표출해야 했다.구승훈은 그녀가 다 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품에 끌어안았다.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자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마치 과거의 사건들이 한 장면 한 장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유산을 했던 순간, 절벽에서 떨어졌던 순간, 엄마가 사고를 당했던 순간, 폭발이 일어났던 순간, 그리고 연정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을 들었던 순간.그 고통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강하리는 그를 홱 밀어냈다.뒤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도망치듯 빠르고 다급했다.원하지도
강하리의 몸이 굳어졌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았다.“선배가 회복할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기로 주씨 가문과 약속했어.”구승훈이 웃었다.“진짜 못 만나는 거야, 아니면 핑계가 필요한 거야?”강하리의 입꼬리가 움찔하며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구승훈의 말이 다시 들렸다.“하리야, 너와 나 사이엔 헤어지더라도 이유는 딱 하나, 네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야. 주씨 가문이든 주해찬이든 우리 사이에 방해가 될 건 없어.”강하리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해찬의 일로 핑계를 댄 건 맞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그녀를 구하기 위해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마음 편히 다른 사람과 사랑놀이나 하겠나.더군다나 그 사랑과 애정이 가져다준 씁쓸함 때문에 다시는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차는 도시 외곽의 한 별장까지 달렸다.구승훈은 먹고 지내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강하리는 별장으로 돌아와 연정이에게 분유를 먹인 뒤 방으로 안고 갔다.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막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준봉이 갑자기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어르신께서 오셔서 심씨 가문 어르신을 뵙고 싶답니다.”준봉의 말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고 심문석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해지며 콧방귀를 뀌었다.“날 만날 낯짝은 있고?”심금천, 백아영, 심지어 심준호의 표정도 일그러졌다.이곳으로 온 이유 중에 심미현을 보는 것 외에 구동근에게 찾아가 따지는 것도 있었다.그런데 찾아가기도 전에 상대가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할아버님, 만나고 싶지 않으면 돌려보내면 됩니다.”구승훈이 심문석을 바라보며 말하자 심문석은 그를 노려보았다.“개자식, 네가 연기하는 거 모를 줄 알아?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아?”구승훈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제가 알려준 게 맞아요. 따질 건 확실히 따져야죠.”심문석은 더 말하지 않았다.
구동근은 할 말이 없었다.“그땐 나도 몰랐잖아.”심금천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마. 넌 문씨 가문을 좋아하잖아. 그럼 문씨 가문에서 며느리 데려오길 기다려. 우리 심씨 가문은 감당 못 하겠으니까!”심금천이 갑자기 문씨 가문 얘기를 꺼내자 구동근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자신이 직접 고른 며느리가 감옥에 갔다.문씨 가문이 무너지면서 그의 체면도 한껏 깎여버렸다.“문씨 가문 얘기는 꺼내지 마. 나도 애초에 그놈들한테 속은 거야.”그렇게 말한 뒤 그는 백아영을 바라보았지만 백아영은 그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백아영 씨, 그간 우리가 알고 지낸 정을 생각해서...”그런데 백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갑자기 다가와서 구동근의 뺨을 때렸다.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백아영은 때린 후에도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이제 와서 정을 운운해? 우리 딸 해칠 때는 왜 망설이지 않았는데!”구동근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누군가에게 맞아본 것은 처음이라 두 눈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힘겹게 감정을 억눌렀다.지금 구씨 가문은 구승훈이 지배하고 있었고 정안그룹이 문씨 가문을 접수한 뒤로 구씨 가문보다 더 잘나가고 있었다.지금 심씨 가문 사람들과 얼굴을 붉히면 개자식 구승훈이 돌아가서 그를 어떻게 상대할지 몰랐다.그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내가 그쪽 딸을 해쳤다고 말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네요.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건 본인이 제일 잘 알잖아요.”하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받아쳤다.“구동근 씨, 이만 돌아가세요. 본인 잘못을 깨달았을 때 내 딸 무덤 앞에 가서 머리 조아리면 그때 다시 얘기하죠.”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내쫓았다.구동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감히 화를 내지 못했다.구승훈을 돌아봐도 그는 이미 일어나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할아버지, 돌아가세요. 다음번에 오실 땐 잘못을 뉘우치길 바라요.”구동근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
강하리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발을 뻗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나 다 씻었으니까 이제 가.”반면 구승훈은 완전히 잠이 든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연기겠지?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다가가 그의 허리를 꼬집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이번엔 그의 배를 꽉 잡자 구승훈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는 곧바로 강하리의 손을 낚아채 품에 끌어당기더니 몸을 뒤집어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눈치챘어?”“쓸데없는 소리, 당신 그렇게 안 자잖아.”구승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럼 난 잘 때 어떤 모습인데?”다소 야릇한 말이었다.강하리는 그의 질문에 문득 지금 두 사람의 자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그녀는 구승훈의 어깨를 두 번이나 세게 밀었다. “일어나.”가운만 입은 상태라 움직이지 않으면 모를까, 계속 움직이니 안쪽의 속살이 언뜻 드러났다.위에서 이 모습을 내려다보던 구승훈은 자신도 모르게 목울대가 움찔하며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구승훈... 꺼져. 여기서 이상한 짓 하지 마!”강하리의 얼굴은 어색한 홍조로 뒤덮였다.이 개자식이 진짜로 반응할 줄이야!구승훈이 낮은 웃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어깨 움푹 들어간 곳에 고개를 파묻었다.“내 몸이 반응하는 건 내가 여전히 강 대표님을 열렬히 사모한다는 뜻이지. 그리웠어, 몸도 마음도.”“열렬히 사모는 무슨, 딸이 있는데 말 좀 가려서 할 수 없어?”구승훈은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조심할게. 앞으로는 이런 말은 딸이 없을 때 할게.”강하리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노려보았다.‘이 개자식이 대체 어디까지 뻔뻔해지려고 이러는 건지!’“일어나!”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했고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구승훈!”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구승훈이 손목을 단단히 잡은 채 머리 위로 포박하고 있어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움직이지 마, 그냥 키
어찌 되었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강하리는 다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연정이 옆에 누웠다.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 누워도 잠을 잘 수 없었다.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던 강하리는 어깨에 숄을 두르고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날씨가 서서히 따뜻해지고 아래층 정원의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강하리는 발코니에 서서 정원의 커다란 리시안셔스 꽃밭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구승훈이 작은 어촌 마을에 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나중에 엄청 많은 리시안셔스 심어줄게.”강하리는 순간 가슴과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지나간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돌리는데 어딘가를 보고 순간 멈칫했다.깊은 밤 정원의 불빛 속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였다.구승훈은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손에 들고 정원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강하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둘렀던 옷을 꽉 움켜쥐었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이쪽을 바라보자 강하리는 재빨리 뒤돌아 방으로 돌아갔다.들어온 후 그녀는 이미 어느 순간부터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구승훈은 휙 사라지는 강하리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쓴웃음을 내뱉었다.‘그렇게 보기 싫은가.’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며 일어나 꽃다발을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강하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잠에 들었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베개 옆에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강하리가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연정이가 몸을 뒤척이며 눈앞에 놓인 꽃다발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강하리는 깜짝 놀라다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연정이에게 꽃을 건넸다.“아빠가 준 거야.”그녀가 속삭이자 연정이가 꽃을 껴안고는 놓지 않았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 연정이를 바라보다가 아이를 안아주었다.“아가, 아빠 보고 싶어?”연정이는 여전히 손에 꽃을 들고 있다가 강하리를 잠시 쳐다보더니 달려들어 그녀를 안아주었다.
구승훈은 강하리의 턱을 쥔 채 엄지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입술이 붉게 충혈되자 강하리는 구승훈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구승훈 씨, 그만해요. 연정이 보러 가는 길에 추태 부리고 싶지 않아요.”구승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럼 조시욱은 안아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조시욱은 널 만져도 되고 난 안되는 거냐고!”“그래요!”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앞으로 누구든 가능할 수 있어도 구승훈 씨 당신만은 절대 안 돼요!”그녀는 이 말을 하면 구승훈이 분노하며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 사실 그걸 바라기도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구승훈은 몸을 낮춰 무릎을 꿇었다. 강하리는 아직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발목에는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털실 슬리퍼 하나만 신은 채 다녔다.아까 구승훈이 강하리를 안고 차에 태울 때 슬리퍼 한 짝이 옆으로 벗겨졌었다. 구승훈은 몸을 낮춰 그 슬리퍼를 주워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에 신겨 주었다.그의 큰 손이 그녀의 발목을 감싸며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조금만 세게 다뤄도 그녀가 아플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순간 그 손끝에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그런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우스워 웃음이 난 강하리 발을 움츠렸다.그럼에도 구승훈은 손을 놓지 않고 슬리퍼를 신긴 뒤 다시 강하리를 안아 휠체어에 앉혔다.“말도 안 되는 부탁인거 아는데...”구승훈이 그녀를 휠체어에 앉히고 나서 속삭였다.“제발 나한테 너무 차갑게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전혀 마음을 열 기색이 없었다.“그럼 적어도 다시 쟁취할 기회라도 줘, 응? 강 대표?”“구승훈 씨,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이렇게 헤어졌다 만났다, 당신은 안 질려도 나는 질렸어요. 그만 좀 해요. 내가 부탁할게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스스로 휠체어를 밀어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 옆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대신
구승훈의 동작이 너무 빨라 강하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차 안에 앉아 있었다.“구승훈 씨!”강하리가 소리쳤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구승훈이 비웃으며 말했다.“어떻게 가? 조시욱이 데려다준대? 다른 남자랑 내 딸 보러 가겠다는 거야?”강하리는 말문이 막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구승훈은 그녀의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조시욱은 막무가내인 구승훈을 막으려다 아까 전화 받던 강하리의 불안한 표정이 떠올라 막지 않았다.“연정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나도 같이 갈게.”구승훈이 동작을 멈추고는 싸늘하게 웃었다.“조 도련님은 매일 이렇게 한가한가 보지?”말을 마친 구승훈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던져 넣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출발했다.달리는 차 안에서 강하리는 창밖만 응시한 채 구승훈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구승훈은 조용히 운전하면서 가끔 백미러로 강하리를 살펴보았다.“아까... 아프지 않았어?”강하리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은 공허하게 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구승훈은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의사 말로는 이제 재활 치료 들어가야 한다던데, 치료사는 예약했어?”“했어요.”강하리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딸을 보러 가는 길에 더 이상 구승훈과의 그 어떠한 불필요한 갈등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것도 그녀에겐 너무 힘들었다.“이 차에 임 선생은 태운 적 없어.”구승훈의 뜬금없는 한마디에 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신경 안 써요.”그 한마디에 구승훈의 하려던 말들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그는 깊게 숨을 쉬며 말했다.“임 선생과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단지 여초연의 시선을 흐리려고 잠깐 곁에 뒀을 뿐이야.”강하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녀는 구승훈이 이런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설령 지금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변명이라도 좋았다. 그랬더라면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
구승훈과 헤어진 후로 그녀는 두번 다시 그곳에 가지 않았다.“왜 갑자기 거기에 가고 싶어진 거야?”조시욱이 무심한 듯 물었다.강하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해찬 선배가 뭐라고 말했어요?”조시욱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사실은 별말 없었어. 그냥 국내에 며칠밖에 머물지 못하니까 내게 틈틈이 널 돌봐 달라고 했지.”강하리의 눈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선배는 항상 걱정이 많아.”“하리야, 사실 나는...”“시욱 선배.”강하리가 말을 끊었다.“그만해요.”조시욱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강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왜? 구승훈 때문이야? 정말 구승훈에게 다시 기회를 주려는 거야?”강하리는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그 사람과는 상관없어요.”조시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럼 왜 자신에게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강하리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시욱 선배, 나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예요.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갈 다시 좋아하거나 새 감정을 쌓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미안해요, 일찍 말했어야 했는데... 장 회장님께도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조시욱은 말하고 싶었다.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도 결국 삼켜야 했다. 어떤 말은, 그냥 그녀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알겠어. 할아버진 걱정 마, 내가 설명할게. 그럼 다른 감정은 일단 치워두고 우리 친구는 될 수 있잖아?”강하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조시욱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주해찬이 부탁했다는 건 모두 거짓이었다.처음 임무를 함께 할 때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협상장에서 여유롭고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을 접어야 했다.강하리가 어르신 생신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머니의 생신 파티에 나
구승훈은 순간 말이 막혔다.“하리야, 제발...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어?”그의 목소리엔 분명한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하지만 강하리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가요.”그녀는 다시 한번 담담하게 말했고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너무 무리하지 마. 에비뉴 쪽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고 조시욱은 그대로 그녀를 밀고 자리를 떠났다.구승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려 진료실로 들어갔다.“강하리 씨의 상태를 좀 알고 싶습니다.”의사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했다.병원 안에선 이미 구승훈과 강하리에 관한 얘기가 돌 만큼 돌았다.사랑스러웠던 커플이 순식간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는 말들이었다.강하리가 수술할 때 구승훈은 오지도 않았고 입원하는 내내 찾아온 건 한 번뿐이었으며 오늘 깁스 푸는 날에도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다른 남자였다.그래서 의사는 솔직히 말해 구승훈이 강하리를 완전히 내쳐버린 줄 알았다.‘이런 여자를 놓친 건 눈이 먼 건가... 양심이 없는 건가...’의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구승훈이 직접 찾아와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는 게 당황스러웠다.“상처 회복은 꽤 잘 되고 있어요. 다만 완전 회복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재활 치료가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반쯤은 형식적인 설명이 끝난 뒤 구승훈은 반 시간쯤 지나서야 진료실에서 나왔다.그는 2층 복도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1층 로비에서 강하리는 조시욱과 함께 웃으며 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원을 나서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한구석은 시리도록 쓰렸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바로 그 순간 강하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 살짝 멈춰 섰다.고개를 돌려 위층을 올려다보았지만 보이는 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그 시선을 따라 조시욱도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진료실 문이 안에서 열렸고 강하리가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나왔다.구승훈과 마주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한 그녀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그저 조시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가요. 오늘 조 회장님께서 건강검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가봐요.” 그러자 조시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분명 오늘 밤 내내 그 얘기만 하실걸.”강하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늘진 표정 속 그 웃음은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하리야.”구승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조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둘이 잠깐 이야기할래?”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고는 방금 깁스를 푼 그녀의 팔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아직도 아파?”단 한 마디였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그러나 강하리의 마음속엔 이 말이 오히려 조롱처럼 다가왔고 그동안 꾹 눌러왔던 분노와 상처가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그녀는 눈가가 시큰해지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턱 막혔다.‘아프냐고? 정말 이젠 웃기지도 않네. 사고가 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이 자식은 이제 와서 상처가 다 아물어갈 무렵에야 묻네. 아프냐고?’구승훈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감싸진 붕대를 살짝 만지려 했으나 강하리는 재빨리 팔을 빼냈다.“손대지 마요.”강하리의 붉어졌던 눈가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역겨워요.”구승훈의 손은 허공에 멈춰 선 채 얼어붙었고 그는 마치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그때 내가 몇 초 망설였다는 이유로 그래? 하리야, 설마 진심으로 내가 임희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해?”강하리는 눈을 내리깔며 감정을 숨겼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 통증도 억눌렀다.그러고는 쓴웃
구승훈의 시선은 줄곧 조시욱과 강하리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두 사람이 병원 진료동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야 그는 마침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석 여사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석미연은 여전히 온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휘감은 채 늘 그렇듯 강하리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승훈 씨,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 필요 없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깊은 앙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전에 좀 불편했던 일도 다 그 여우 같은 강하리 때문이잖아. 안 그래?”석연란의 비아냥 섞인 말투에 구승훈의 눈빛이 즉시 어두워졌다.“석 여사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친했었나요? 감히 승훈 씨라고 부를 정도로요?” 그는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강하리는 분명히 심씨 가문의 당당한 맏딸입니다. 그런 사람을 여우니 뭐니 부르는 석 여사님은 남의 가정 깨고 들어온 입장인데... 여사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여우가 아닌가요? 주제 파악은 하셔야죠.”그 말은 단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날카롭고 무례했다.원래 석미연은 구승훈과 적당히 말 섞으며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조시욱이 강하리 곁에 있는 건 그냥 잠시 눈먼 남자의 실수라 여겼다.하지만 만약 자신이 심연청을 구승훈에게 시집보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하리가 갖지 못한 남자, 강하리를 버린 남자가 결국은 심연청과 결혼하는 거라면 그보다 통쾌한 복수는 없을 터였다.그런데 뜻밖에도 구승훈은 말을 시작하자마자 그녀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심한 말을 뱉었다.“구승훈,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리치자 구승훈은 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냉정한 눈빛을 드러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석 여사님이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건가요? 제가 다시 기억나게 해드릴까요? 과거에 당신들과 당신 동생들이 벌인 짓들... 제 손에는 아직도 증거들이 수두룩하죠.”그렇게 말하고 그는 더는 미련 없이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석연란은 그
천아름은 강하리의 휠체어를 밀며 복도를 따라나섰다.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승훈과 준봉을 마주쳤다.이번엔 강하리도 굳이 피하려 들진 않았다.에비뉴 대표실이 이곳에 있는 이상 앞으로 구승훈과는 자주 마주치게 될 터였다.자꾸 피하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했고 기계 소리만이 낮게 울릴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강하리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조시욱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구승훈은 묵묵히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핸드폰 화면 안, 조시욱과의 채팅창은 대화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그걸 보는 순간 구승훈은 입안부터 가슴까지 다 쓰려왔다.‘매일 같이 이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걸까?’그는 참다못해 먼저 입을 열었다.“속은 좀 괜찮아졌어?”강하리는 문자를 입력하던 손끝을 멈칫하더니 대꾸하지 않았다.구승훈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조시욱이랑 있으면... 토할 일은 없나 보네?”그 말에 강하리는 피식 웃었다.“구승훈 씨, 원하는 대답이 뭔데요? 말해봐요. 제가 맞춰줄게요.”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천아름이 먼저 휠체어를 밀고 나섰고 밖에서는 이미 조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봉은 구승훈을 흘끗 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그러자 구승훈이 문득 입을 열었다.“점심 약속 취소해.”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시욱의 차를 따라나섰다.차 안.조시욱은 조심스럽게 달콤한 디저트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좀 먹어. 깁스 풀고 나서 맛있는 거 사줄게.”디저트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시욱 선배, 난... 나 오늘 오후에 F 국으로 출장 가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사 올게요.”그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웃으며 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디저트도 받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 하려는지 알겠죠.”조시욱은 웃
천아름은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웃었고 그 반응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인정한 셈이었다.하지만 곧 그녀는 덧붙였다.“먼저 말해두지만 나도 미리 알았던 건 아니야. 그 사진들은 우리가 올라온 직후에 구승훈이 보낸 거야.”강하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천아름을 바라봤다.그 시선에 살짝 기가 죽으려던 찰나 강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왜 미리 말 안 했어?”천아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말했으면... 네가 그 사진들을 제대로 썼을까?”강하리는 천천히 창밖을 바라봤다.이 각도에서 에비뉴와 정안 타워를 잇는 공중 회랑을 보는 건 그녀도 처음이었다.다섯 개의 회랑은 같은 위치에 놓인 게 아니라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그 불규칙한 배치가 위에서 보면 iw라는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이미 회랑에 심어졌던 꽃들은 시들어 있었지만 강하리는 그곳에 자란 꽃들이 전부 리시안셔스였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강하리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이젠 더 이상 구승훈과 어떤 연결고리도 남기고 싶지 않아.”서로의 감정이 남아 있는 듯 없는 듯 얽히고설킨 관계... 그녀는 그런 관계를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휠체어를 돌려 자료를 보러 이동했다.천아름은 커피잔을 들고 그녀 옆으로 와 책상에 걸터앉았고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솔직히 너희 둘 일에 내가 뭐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일은 구승훈 잘못이 맞고... 난 내 친구가 또 상처받는 꼴 못 보니까 절대 너한테 구승훈의 편을 들 생각 없어. 근데 말이야...”그녀는 말을 잠시 멈췄다.“이번처럼 구승훈이 뭔가 너한테 건넸다면... 넌 받을 건 받아. 그건 걔가 너한테 진짜로 빚진 거니까.”강하리는 작게 웃었다.“그 사람 도움 없이도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왜 굳이 기대야 해?”이야기를 끝낸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근데 이것 말고도 있지? 송지은이 회의에서 그렇게 된 것도... 구승훈이 일부러 남겨둔 거지? 내가 송지은을 이용해서 회사에서 위신을 올
에비뉴 그룹이 결국 강하리 손에 들어가자 송지은의 속엔 쌓여 있던 불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는 몇몇 임원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이번 회의 자리에서 강하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강하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봤다.“송 부장님, 진심으로 의견을 내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직권 남용하고 싶은 건가요?”그러자 송지은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강 대표님, 지금 무슨 뜻이죠?”강하리는 옆에 앉아 있던 비서실장에게 눈빛을 보냈다.비서실장은 곧바로 자료를 띄웠고 화면에 나타난 건 한 프라이빗 레스토랑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송지은이 막 추천했다던 신인 여배우와 다정하게 식사하고 있는 장면이었다.그 여배우는 거의 그의 무릎 위에 앉을 듯 그에게 바짝 기대 있었다.송지은은 이마에 핏대가 서며 말했다.“업무 미팅하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무슨 문제죠?”강하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다음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사진 속 송지은은 그 신인 여배우의 허리를 감싸안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식사 후엔 호텔 코스로 이어지셨군요. 송 부장님?”강하리의 그 한마디에 누군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천아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회의실 전면을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웃음소리가 송지은에게 더없이 굴욕적이었다.강하리는 더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회의실 안의 다른 인물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시선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또 누구였죠? 추천한 연예인들 리스트... 누구 누구있었죠”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안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흘렀고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이내 입을 닫았다.오늘 강하리는 확실히 준비하고 왔다.이번 판에서 잘 되면 본때 보여주는 걸로 끝이지만 잘못 건드리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게 될 게 뻔했다.방금 송지은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가 생생히 봤으니 더 이상 나설 사람은 없었다.회의실은 고요했다.강하리는 시선을 천천히 회의실을 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