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어쩌면 부처님이 정말 오빠 천벌 주시려다가 한번 봐주신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몸 좀 사리는 게 좋을 거야. 이게 마지막 경고일지도 몰라.”이승우는 마음이 급해 입을 열었다.“그건 안돼.”그리고 상처가 땅겨져 또 앓는 소리를 냈고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부승희가 재빠르게 이승우의 손을 낚아채 상처에 닿지 못하게 했다.이승우는 고개를 들어 부승희와 눈을 마주했다.부승희는 바로 이승우에게 뺨을 날리려 했으나 지금 얼굴 어딜 건드려도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허공에서 멈칫하다가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아직 덜 아픈 거지?”이승우는 감히 크게 움직이지 못하고 조심스레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입술을 최소한도로 열어 말했으며 목소리도 아주 낮았다.“아파. 엄청 아파.”부승희는 이승우의 작은 숨결이 입가 주변에 떨어지는 게 느껴졌고 이승우에게서 병원 소독수 향이 느껴지자 손의 힘이 점점 줄어들었다.“아프면 가만히 좀 있어. 다 먹었으면 빨리 잠이나 자든지. 나랑 실랑이를 벌이는 걸 보면 아직도 힘이 넘치는 것 같아.”이승우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부승희의 옆으로 조금 더 붙었다.‘너랑 좀 더 있고 싶어서 그러지.’“...”부승희는 이승우의 오른쪽 귀를 더 세게 잡아당기려 했으나 힘을 주기도 전에 이승우는 상처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척 보아도 연기인 게 보여 부승희는 이를 악물고 귀를 꽉 잡아당기며 등이라도 내리치려 했다.이승우는 본능에 따라 몸을 작게 말았다.‘뭐야. 진짜 때리게?’부승희는 겁에 질린 이승우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다시 꾀병 부리기만 해봐? 오빠 나이가 서른이 넘어. 아직도 어린 아이인 줄 알아?”‘세상에. 나이 공격이라니.’이승우는 문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휘휘 저었다.‘그만해.’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렸다.“이건 듣고 싶지 않아? 그럼 빨리 얌전히 침대로 가.”‘가라고 하면 못 갈 줄 알고?’
이승우는 배여진이 하루빨리 경인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지금 배여진의 상태를 보아 앞으로 또 언제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배씨 가문과 선씨 가문 부모님께서 전주를 찾았다. 선기혁의 마음을 돌려세우고 배여진을 위로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였다. 두 가문 모두 배여진을 재촉하는 대신 전주의 병원에서 배여진의 옆을 지켰다.그 소식에 이승우는 어이가 없어졌다.“전주가 뭐가 좋다고 여기 죽치고 있는 거래?”이승우는 부승희에게 투덜거렸다.부승희는 문서를 뒤척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비꼬듯 말했다.“오빠 구사일생의 아홉 번 채워야 하잖아. 두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회도 많아지고 얼마나 좋아. 기회가 없어지면 오빤 손톱 작게 갈라진 것도 한 번으로 쳐달라고 하며 어영부영 넘어갈 사람이야.”이승우의 논리대로면 며칠 안으로 아홉 번을 다 채울 기세였다.이승우는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말했다.“그거 약지 손톱이었어.”“오빠 동맥은 약지 손톱에 있나 봐?”“우리 앞으로 결혼하면 결혼반지 약지에 껴야 하는 건데 손톱이 갈라지는 건 큰일이잖아.”“...”‘멍청하긴.’두 사람은 별 같지도 않은 일로 한참 티격태격했고, 그러다가 요즘 거래 유도 중인 업체에서 연락이 와 빠르게 회의실로 향했다.열심히 일하는 이승우의 모습은 꽤 봐줄 만 했다.점심 기간이 되고 부승희는 아래층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부승희의 테이블을 작게 두드렸다.“부승희 씨?”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고 부승희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하얗고 청순하게 생긴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부승희는 그제야 누구인지 알아봤다.‘아, 하루빨리 씨네.’바로 지은설이었다.“무슨 일이시죠?”지은설은 부승희의 맞은 편 자리를 살펴보더니 예의를 차려 물었다.“자리에 좀 앉아도 될까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부승희는 지은설이 자신을 찾아온 의도가 뭔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이마에 땀이 맺힌 지은설을 보며 며칠 전 이승우가 지은설의 아이가
지은설이 말했다.“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 급하게 끊는 걸 보며 나와 엮이는 게 곤란한 상황인 걸 눈치챘어요. 아마도... 두 사람은 아직 만나는 건 아닌가 보네요.”“그게 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인다면 그냥 제가 넋두리한다고 생각하고 들어주세요.”부승희는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지은설은 향 주머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건 아마도 승희 씨가 승우 씨에게 선물한 거겠죠? 그때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하고 승우 씨 차량을 우연히 운전하게 됐는데 장식된 구슬이 너무 특이해 보여 손에 쥐고 보다가 실수로 구슬을 다 떨어뜨리게 됐어요.”“그 안에 든 구슬을 확인하고 너무 마음이 불편해서 제가 따로 가져가 버렸죠.”“그리고 승우 씨한테 차량을 돌려줬는데 승우 씨는 한참이 지나서 나한테 차량 장식품을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물어보더라고요.”“그래서 그냥 세차하던 직원이 실수로 망가뜨렸고 버렸다고 말했었죠.”여기까지 말하던 지은설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는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게 느껴졌어요.”부승희는 기분이 착잡해졌다.“승우 오빠가 은설 씨한테는 많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나 보네요.”지은설은 부승희의 말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그게 아니라...”지은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의 승우 씨는 늘 기분이 저기압이었어요. 나와 대화하는 것조차 지쳐 했죠.”부승희는 묵묵히 얘기를 들었다.상황인 부승희가 화를 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말을 계속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한테 헤어짐을 고했어요.”‘그렇게 빨리?’부승희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상황인 쓴웃음을 지었다.“사실, 승우 씨는 소문처럼 저를 많이 좋아했던 게 아니에요.”“결혼까지 생각했었는데 좋아한 게 아니라니요.”“결혼하고 싶다는 말만 했지,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요.”상황인 말을 고쳤다.부승희는 입
지은설은 잠시 고민하다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건... 좋은 일을 베풀면 그만큼의 보답을 받는다고 하잖아요.”부승희는 본인도 이승우에게 같은 말을 했던 게 떠올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생각할수록 왠지 분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졌다.이승우는 대체 전생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기에 주변에 이렇게 많은 좋은 사람이 있는 걸까?이곳저곳 마음을 준 바람둥이를 위해 전 애인이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몇 있겠는가?무엇보다도 지은설은 이승우가 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찾아온 게 분명했다.아이가 아픈데도 이렇게 찾아올 정도면 이승우를 많이 소중하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부승희는 지은설을 슬쩍 보다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다고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지은설은 미소를 지었다.“돌려줄 물건이 있고, 앞으로 다시 승우 씨한테 부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니 직접 이곳까지 바래다줬어요.”남편 얘기를 꺼낸 지은설은 방금까지 이승우 얘기를 하며 쓸쓸한 표정을 짓던 것과는 딴판이었다.부승희가 말했다.“남편분이 참 좋은 사람인가 봐요.”“네. 착하고 온순한 사람이에요.”부승희와 지은설은 처음부터 친구가 아니었고 이승우 때문에 엮기에 된 사이다 보니 더는 할 얘기가 없었다.지은설은 자신이 제대로 말을 전하게 맞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어떤 일은 설명을 한다고 해서 다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이승우가 부승희를 향한 마음은 아마 본인도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겨우 방관자에 불과한 지은설은 이 정도밖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승희 씨, 제가 괜한 소리를 건넨 건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부승희는 창밖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지은설은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가방을 챙겨 떠났다.부승희는 한참 그 자리에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그런데 회의실 입구에서 바로 이승우를 마주쳐 버렸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무시하고 걸었고 이
자신을 찾은 부승희에 양시연은 바로 눈치를 챘다.[지금 승우 씨가 너무 좋아서 나더러 대신 설득해 달라는 거죠?][난 시연 씨를 오답 노트처럼 쓰려고 찾아온 건데요!][그래요?]양시연은 바보 같은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내가 좀 오답 노트 같긴 하죠. 사랑에 눈이 멀어 정훈 씨가 조금 잘해주니 바로 덥석 결혼해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승희 씨는 절대 나처럼 쉽게 승우 씨를 허락해주지 마요.]부승희는 어이가 없다는 이모티콘을 전송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은 장난꾸러기 같은 이모티콘으로 답장했다.‘어휴. 말을 말자.’아무런 조언도 얻지 못한 부승희가 대화창을 나가려는데 양시연이 문자를 보내왔다.[사람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봐야 해요.]그 문자에 부승희는 한참 침묵했다.[곁에 있으면 좋고 멀어지면 서운하니 그냥 곁에 두면 되는 거죠.]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부승희는 자신이 미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찾아도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일주일 뒤, 배여진은 퇴원을 할 수 있었고 부승희와 이승우도 병원을 찾았다.선기현은 며칠 전보다 많이 진중해진 것 같았고 퇴원 절차를 밟기 위해 이곳저곳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도 함께하고 있었으니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그러나 부승희의 눈엔 배여진과 선기현 두 사람이 일부러 대화를 피하는 게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눈치를 보던 부승희가 이승우에게 문자로 물었다.[기현 오빠 정말 믿어도 돼? 두 사람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기현이 말로는 이혼은 물 건너갔대. 여진이가 정말 잘못되면 두 가문이 철천지원수가 되는 거니까.]부승희는 문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배여진의 각도에 서서 생각하니 이게 더 마음이 아팠다.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고작 가문 때문에 자신의 곁을 지키는 것이었다.부승희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배여진의 어머니와 함께 배여진을 부축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언니,
차가운 병원 로비 의자에 앉은 부승희는 정신을 차린 배여진 어머니가 선기현을 향해 질타하는 걸 듣고 있었다. 그러나 눈만 감으면 다시 온통 피범벅이던 그 사고 현장이 눈에 보였었다.배여진은 피를 많이 흘렸다. 사고 현장에는 덩어리로 보이는 무언가도 있었는데 그게 아이일 수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떻게 이럴 수가.’불과 30분 전만 해도, 부승희는 배여진을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가 몸조리를 잘하라는 말을 했었다.그러나 현재...배여진은 여전히 수술실에 있었지만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이승우는 부승희의 옆자리에 앉아 낮은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이에 고개를 든 부승희는 손발이 차게 느껴졌다.“어떻게 됐어? 여진 언니 살 수 있는 거지?”부승희는 무턱대고 질문을 쏟아냈고 이승우는 의사가 아니었으니 경과를 알지 못했다.대신 이승우는 옆자리에 앉아 부승희를 위로했다.“바로 병원 부근에서 생긴 사고라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도 의식이 있었어. 그러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부승희는 말없이 이승우를 바라봤다.그리고 한참 뒤에 겨우 입을 열었다.“대체... 왜?”이승우도 어렵게 입을 열었다.“여진이가 우울증이래...”부승희는 두 눈을 질끔 감고 말했다.“기현 오빠도 그것 때문에 당분간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거지?”“아마도 그렇겠지.”부승희는 찬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해 두 사람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선기현의 맹세는 그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으나 이제 칼날이 되어 다시 배여진을 찔렀다.그토록 사랑했던 사이인데 배여진은 어떻게 감정 없는 결혼 생활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배여진이 원했던 건 혼인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기다리는 건 아주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배씨 가문과 선씨 가문은 한시도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으며 부승희와 이승우도 묵묵히 그들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배여진의 수술이 끝이 났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배여진은 아직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배여진의 어머니는 울다가 지쳐 쓰러지기를
이승우는 주방을 나서고 말없이 부승희를 꼭 껴안았다.“승희야, 참지 말고 울어도 돼. 다 괜찮을 거야.”부승희는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펑하고 터져버렸다.이승우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으나 눈물이 먼저 흘렀고 어쩔 수 없이 이승우의 셔츠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버렸다.“오늘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었는데 내가 먼저... 내가...”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부승희는 뒷말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이승우는 이런 부승희가 너무 마음 아파 말없이 등을 토닥였고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부승희를 위로했다.“여진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렇게 좋은 사람을 하느님이 벌써 데려가실 리가 없잖아.”“하느님은 아무것도 몰라!”부승희는 엉엉 소리 내 울었다.“선기현 그 개자식을 혼내야지. 왜 여진 언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야!”“정말... 여진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그럴 일 없을 거야.”이승우가 부승희의 말을 잘랐다.“승희야, 우린 그냥 기다리자. 그러면 좋은 소식이 올 거야.”배여진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다는 생각만 하면 부승희는 너무 마음이 아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부승희는 크게 눈물을 흘렸던 적이 없다 보니 큰 소리도 몇 번 내지 못하고 숨죽여 눈물만 흘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우가 부승희를 안아 들고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고 등을 토닥였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부승희가 지쳐 잠이 들자 이승우는 부승희를 안아 들고 방에 눕혔다.부승희는 깊은 잠이 들 수 없었고 새벽에 또 잠에서 깨어났다.어느새 해가 뜨는 새벽이 되었고 사방은 온통 조용했다. 그런데 배여진이 트럭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장면이 자꾸 떠올라 부승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는데 옅은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그리고 불어온 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베란다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이승우였다.부승희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인기척을 느낀 이승우가 빠르게 담배를 짓눌
부승희는 차 사고로 피를 흘리던 배여진의 끔찍한 모습이 떠올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이승우는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배여진의 마지막을 되새기며 밤새 뒤척였다.부승희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배여진 역시 그럴 리 없다고 믿었지만 결국 그녀는 선을 넘어버렸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이 조용히 가슴을 조여 왔다.배여진의 행동은 마치 거울처럼 그가 부승희에게 준 상처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만약 부승희가 강하지 않았다면 혹시...’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승우는 더 이상 눈을 감을 수 없었다.“이승우, 제발 좀 가만히 누워. 귀신처럼 앉아 있으니까 나까지 잠을 못 자겠어.”침실에서 부승희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승우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며 낮게 말했다.“승희야, 자.”“응.”그녀가 조용히 대답하자 이승우는 속삭였다.“내가 네 옆에 있을게. 내일 다시 배여진을 보러 가자.”“알았어.”배여진이 저지른 광기 어린 행동 이후 부승희와 이승우 사이의 평온함은 반년 만에 깨졌고 그들은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배여진의 상태를 지켜보았다.마침내 4일 후 배여진이 깨어났다.목숨은 건졌지만 그녀의 장기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회복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게다가 그중 상당수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다.병상에서 그녀는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힘겹게 이혼을 요구했다.마치 감정의 실타래가 끊어진 듯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그녀는 얼어붙은 눈빛으로 선기헌을 바라보았다.부승희는 이혼 절차를 지켜보러 병원에 가지 않았다. 대신 이승우가 다녀왔고 그의 말에 따르면 선기헌은 끝까지 이혼을 거부했다고 했다. 뒤늦게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 배여진을 평생 곁에서 지키겠다고 했다.배여진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뗐고 겨우 내뱉은 말은 단 한 마디였다.“필요 없어.”배여진의 부모는 한때 화해를 권유했지만 딸의 이혼 의사가 확고하다는 걸 알게 되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오히려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