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태양이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지려 한다며 투덜거렸지만 부씨 가문은 온 가족이 꼬마 악당에게 휘둘려 진이 빠진 상태였다.새벽부터 온 가족이 예지를 둘러싸고 유치원 갈 옷을 입히려 분주했다.이승우의 아들 라온도 곧 돌을 맞이했고 예지는 세 살이 되었다. 채애정은 예지가 또래 친구들과 더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최고의 사립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유치원은 주 4일 운영되며 매일 오전 9시에 등교해 오후 2시에 하원하는 시스템이었다.그런데도 예지는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고 아침마다 울음을 터뜨렸다.“예지야 착하지? 할머니 들어봐. 유치원 정말 재미있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은서 선생님도 계시잖아.”“싫어요. 싫어요.”예지는 치마를 입으려 하지 않고 바지를 입은 채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기회만 있으면 아빠 품에 안겼다.“예지는 유치원 안 갈래요. 할머니가 가요.”채애정은 머리가 아팠다.부승원이 예지를 안아 올리며 달래는 모습을 보니 유치원에 가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채애정은 부승원에게 눈짓을 보내며 겨우 깨웠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아빠.”예지는 부승원의 목을 꼭 껴안고 훌쩍이며 울었다.“예지를 유치원에 보내지 마세요.”“유치원이 싫어?”“싫어요. 싫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소파로 데려갔다.채애정은 굳이 맞힐 필요도 없이 그의 말을 미리 짐작했다.“그러면 오늘은 가지 말자.”채애정은 먼저 말했다“이번 주에 이미 두 번이나 결석했어.”일주일은 7일인데 2일만 다니고 5일은 쉬는 셈이었고 이건 도저히 안 되는 일이었다.부승원은 채애정을 흘끗 보며 다른 손으로 예지를 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예지가 다섯 살에 유치원 가도 괜찮다고 생각했고 뭘 배우고 싶으면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하면 된다고 여겼다.하지만 부모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고 그는 아이의 성장을 놓치는 게 두려웠다.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부승원이 ‘안 간다’는 말을 하지 않자 예지는 불안해하며 부승원
반우희는 이불 속에 누워 게으름을 피우며 즐거워하고 있었다.문밖에서는 예지가 할머니와 화해하고 채애정이 예지를 치마를 입혀 줄 때 얌전하게 있으면 방과 후의 일정을 짜고 있었다.“태양 오빠랑 놀러 가요.”“알았어. 태양 오빠랑 놀자.”반우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태양이랑 같이 놀러 간다니. 그건 진짜 놀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태양을 괴롭히겠다는 거잖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한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목을 쥐었다.“안 일어날 거야?”반우희는 콧방귀를 뀌고 문밖을 힐끗 살펴보았다. 채애정이 예지를 안고 내려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침대에 앉아 있던 부승원에게 달라붙었다.“안 일어날 거예요. 당신도 날 달래줄 수 있어요?”그녀는 예지에게 질투하는 일상이었지만 부승원은 재미있어하며 입꼬리를 올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달래주면 네가 어린이집 갈 때 데려다줄까?”“좋아요.”반우희는 잠시 눈을 돌려 생각한 후 그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나 선생님 할 거예요. 우희 선생님.”그녀는 그의 뒤쪽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 특유의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말 안 들으면 벌주겠어요.”부승원은 즉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그녀의 역할 놀이를 떠올렸다.역시 반우희는 이어서 그를 불렀다.“어린이?”아침 일찍 모든 것이 자라기 쉬운 시간 부승원은 아무렇지 않게 숨을 고르고 얼굴을 옆으로 돌려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일부러 그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갔다.부승원은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었고 이제 막 옷을 입고 일을 보러 갈 시간이었기에 그녀를 다루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는 그저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볼을 살짝 쥐었다.“다시 말해 볼래?”반우희는 그의 꾸짖음에도 이미 익숙해져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를 품에 파고들었다.부승원은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점점 이끌려 가고 싶었지만 다행히 아래층에서 꼬마 악마의 하이톤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예지는 어릴 때 우유를 먹으며 하얗고 통통하게 자랐다. 반우희가 걱정하자 채애정은 우유를 끊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그리고 이유식을 시작하고 나서도 예지는 여전히 하얗고 통통한 모습이었다. 그때도 채애정은 이제 밥을 먹기 시작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결국 이 아이는 정말 편식을 하지 않았다. 밥을 먹기 시작한 후로는 음식에 가리지 않고 흰쌀밥이나 잡곡밥도 잘 먹었다. 다른 아이들은 밥을 먹이려고 애를 쓰거나 간식과 보조식을 먹여야 하는데 예지는 기분이 좋을 때만 먹고 싶어 했다. 보통은 혼자서 밥을 들고 앉아 한참 동안 조용히 먹었다.부씨 가문은 아침이 풍성했지만 작은 아이는 아무거나 먹지 않았다. 매일 아침은 꼭 죽을 먹었고 죽의 종류와 반찬만 달랐다.그렇게 계속 먹다 보니 작은 얼굴이 점점 둥글어졌다.지금은 어리니까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반우희는 몇 년 후 예지가 더 자라면 비만이 될지 걱정했다. 그래서 드물게 제대로 부승원에게 예지의 식사를 너무 방치하지 말고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예지는 식탁에서 아빠와 엄마가 한 속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지가 반우희에게 양보할 기미가 없자 울지 않고 고개를 돌려 작은 통통한 손으로 만두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부승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채애정과 부형석은 즐겁게 웃었다.다행히도 예지는 작은 만두 하나만 먹고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여러 일이 끝난 후 드디어 출발할 준비가 되었고 차에 오르기 전에 사람들에게 한 바퀴 인사를 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채애정은 할 일이 있어 나가야 했고 반우희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나서 한숨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다시 자야지.’...태양의 생일이 다가오고 양시연은 오후 일찍 집에 돌아와 이웃을 초대했다. 마침 부승희와 이승우도 시간이 나서 미소를 데리고 왔다.물론 제일 먼저 온 건 예지였고 예지는 방금 학교가 끝나자마자 부승원과 함께 집에 왔다.부승원은 정말 인내
주방에서 태양은 앞치마를 두르고 모자를 쓴 채 바리스타의 도움을 받아 작은 쿠키를 굽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그 옆에는 한 살 위인 우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우주는 늘 형처럼 굴고 싶어 하며 팔짱을 낀 채 태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너 올해도 생일 소원으로 여동생을 갖고 싶다고 했어?”“응.”“내가 충고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좋아.”우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조언했다.태양은 의문스러웠다.‘?’“왜?”“나중에 진짜 여동생이 생기면 그때 알게 될 거야.”우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태양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멀리서 양시연은 거실의 디저트 테이블을 정리하며 바리스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아이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때 미야가 방으로 달려와 문가에 서서 부끄럽게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았다.미야는 엄마를 닮아 눈부신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피부는 하얗게 빛났으며 크고 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오빠.”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치 꿀 속에 빠진 듯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태양은 손에 쥐고 있던 도구를 내려놓고 문가로 향했다.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려던 순간 미야의 뒤에 또 다른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태양의 마음속이 따뜻하게 물들었다.민주는 우주의 친여동생으로 세 살이었고 미야보다 조금 어렸다. 작은 두 아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인형 같았고, 태양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너희 뭐 하러 왔어?”뒤에서 우주는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뭐 하러 왔어? 그 상냥한 말투는 또 뭐야? 엄청 과장하네.’양시연은 우주의 반응을 보고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다.문 앞에 선 두 꼬마는 작은 손으로 큼지막한 자두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손이 작다 보니 원래 작은 자두조차 커다랗게 보였다.미야가 먼저 자두를 내밀며 말했다.“오빠 이거...”태양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나한테 주는 거야?”“네.”그는 기쁘면 가득한 표정으로 자두를 받아
태양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민주가 착하고 말을 잘 들을 거라 생각하며 작은 토끼 모양 쿠키를 그녀에게 내밀었다.“민주야, 작은 토끼 쿠키도 정말 귀엽지?”민주는 태양을 바라보다가 미야가 들고 있는 고양이 모양 쿠키로 시선을 옮긴 뒤 조용히 응시했다.태양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한번 토끼 쿠키를 민주 앞에 내밀었다.아기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민주가 망설이다가 토끼 쿠키를 받아서 들었다.태양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마침내 그는 예지에게 쿠키를 주러 갔다. 익숙한 듯 판다 모양 쿠키를 꺼내며 말했다.“이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판다야.”‘얌전히 있어야 해.’예지는 정말 기뻐하며 쿠키를 받아 들고 고개를 흔들며 맛있게 먹었다.그 옆에서 민주가 ‘판다’라는 말을 듣고 살짝 태양을 쳐다보다가 다시 예지를 바라보았다. 이어서 미야가 들고 있는 고양이 모양 쿠키를 보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에 쥔 토끼 쿠키를 응시했다.입술을 삐죽인 민주는 조용히 엄마에게로 달려갔다.한편 태양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지가 쿠키 하나로는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닫고, 그는 큰 접시를 들고 더 많은 쿠키를 가져다주려 했다. 그리고 꼬마 악당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잠시 그녀의 하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모두가 작은 쿠키를 먹고 있었지만 민주만이 말없이 쿠키를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점점 억울함이 차오른 민주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려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태양은 당황했다.???예지는 쿠키를 입에 문 채 손을 멈추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또 다른 쿠키를 집어 들고 평온하게 말했다.“민주가 울어요.”‘엄마는 민주가 울지 않는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야. 민주는 예지보다 훨씬 더 자주 운다고.’어른들은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다가와 민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민주는 작은 손에 쿠키를 꼭 쥔 채 서럽게 울고 있었지만 아무리 말하려 해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
연정훈은 예지를 품에 안고 물속으로 내려놓았다. 그 순간 루카스가 달려와서 자기도 품에 안고 물속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알았어. 이리 와.”연정훈은 루카스도 품에 안고 물속에 내려놓았다.마치 알 수없는 신비로운 자연의 법칙처럼 두 명 이상의 친구가 함께하면 아이들은 꼭 그것을 따라 하게 된다. 심지어 부모가 바로 옆에 있어도 연정훈에게 안겨 물속에 들어가려고 했다.다행히 이번 일은 그저 아이들을 품에 안고 물속에 내려놓는 일일 뿐이었다.연정훈은 떡을 삶듯 작은 아이들을 하나씩 품에 안고 물속에 내려놓았다.태양은 그 모습을 보며 아무도 울지 않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예지는 구명조끼를 입고 작은 발을 펄럭이며 마치 작은 오리처럼 태양 옆으로 헤엄쳐 지나갔다.그녀는 수영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듯 한 번 왕복한 후 개구리처럼 물속을 튕기며 다시 지나갔다.태양은 웃으며 말했다.“예지, 수영 정말 잘한다.”꼬마 악당은 기뻐하며 부승원을 아랑곳하지 않고 물총을 들고 태양 앞에 멈췄다.“오빠, 예지랑 물총놀이 해요.”“좋아.”태양은 그녀의 제안에 기꺼이 응했지만 물총이 없어 대신 손으로 물을 퍼 예지의 머리에 물을 부었다.예지는 화내지 않고 깔깔거리며 웃으면서 물총으로 반격했다.그사이 한줄기의 물이 끼어들었고 태양이 옆을 보니 미야가 물을 뿌리고 있었다.태양은 미야에게도 물을 뿌리며 1대1의 전투를 2대1로 바꿨다.점점 더 재미있어진 태양은 아빠에게 큰 물총을 가져오라고 부탁하며 수영장 바닥에 앉아 동생들과 싸우기 시작했다.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마치 쿠키를 나눠줄 때처럼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왜냐하면 태양은 예지와 더 친밀했기 때문이다. 예지의 장난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지와의 관계가 더 가까운 것도 사실이었다.그가 반격할 때 예지를 향해 물을 조금 더 뿌린 것을 미야는 눈치챘고 계속 태양을 불렀다. 그가 듣지 못한 사이 미야는 갑자기 화를 내며 크게 외쳤다.예지는 미야에게 ‘시끄럽지 말라’고
수영을 마친 양승윤은 조금 피곤한 기운이 있었지만 연정훈과 함께 샤워를 마치고 동생들과 파티에 참석했다.양시연은 아주 커다란 케이크를 준비했고 양승윤은 의자 위로 올라가 천천히 케이크 커팅을 했다.전에 있었던 오해를 피하고자 양승윤은 아주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나눴고 최대한 똑같은 크기로 배분했다.다행히 과거의 일은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그런데 케이크 커팅을 하기 전에 반우희가 양승윤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이번 해 소원도 여동생 생기게 해달라는 거야?”양시연은 양승윤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거로 생각했고 저도 모르게 배를 움켜쥐며 연정훈의 눈치를 살폈다.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의 어깨를 잡았다.그리고 케이크 앞에 선 양승윤은 애어른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그렇죠. 뭐.”‘그렇죠... 뭐?’양시연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양승윤은 소원이 이뤄질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해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그래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진심으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뤄질지도 몰라.”양승윤은 주변을 빙 둘러보며 다른 동생들을 살펴보다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그때, 심정우가 몰래 양승윤의 등 뒤로 다가왔고 양승윤은 어른들의 시선을 피해 이렇게 속삭였다.“뻔한 대사 말고 다른 건 없어?”심정우는 크게 케이크 한 입을 먹더니 잠시 고민에 잠겼고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슬쩍 자리를 피했다.“...”생일 파티는 아주 평화롭게 흘러갔다. 어른들은 서로 모여 얘기를 주고받았고 아이들은 도우미들과 함께 위층으로 자리를 옮겼다.가장 어린 이유하는 겨우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양승윤은 이유하를 품에 안고 카펫 위로 자리를 잡았고 함께 블록 쌓기를 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루카스는 퍼즐을 했고, 부예지와 미야는 슈퍼마켓 소꿉놀이를 했다. 심정우는 심민주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도우미들이 함께하고 있었기에 걱정할 필요 없었다.양승윤은 속으로 곧 동생들도 집으로 돌아갈 테
늦여름, 거리에는 이름 모를 꽃잎이 흩날리고 달빛과 도시의 네온 등이 반짝였다. 밤에는 그래도 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반짝이는 이 도시에서도 가장 화려한 이곳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한강시에서 제일 큰 지엔 카지노는 로맨틱한 해안가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건 낭만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었다.누군가는 평생 가진 걸 모두 걸어 겨우 입장권 하나를 얻었지만 누군가는 출발선부터 달라 가장 위층에서 그들이 돈을 벌고 또 잃는 장면을 내려다봤다.그때, 가장 꼭대기에서 빛이 반짝였고 누군가 1번 방에 입장을 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 방의 입장 비용은 시작부터 20억이었다.모두가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봤고 대체 어느 유명 인사가 찾아왔는지 수군거렸다.그러나 다들 알지 못했던 사실은... 그 상대는 사실 이곳 카지노 주인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빌고 빌어 초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은 이곳에는 관심이 없는 듯 따분해 보이기도 했다.결국 주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양 대표님, 일단 게임부터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양혁수는 나른하게 자리에 기대앉아 눈가를 꾹꾹 눌렀고 자신을 향해 말하는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나이로 보면 아버지뻘로 보이는 카지노 주인이 굽신거리며 아부를 맞추고 있었다.양혁수는 말 대신 손을 뻗어 담배를 손에 쥐었다.그러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빠르게 담뱃불을 붙여줬다.빨간 불빛이 일렁이고 양혁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예상과는 달리 익숙한 얼굴이었다.양혁수는 불필요한 친절이라 생각했지만 아무 말 없이 다시 자리에 기대앉았다.“장 회장님, 장사가 점점 커지더니 간도 점점 커지나 봐요?”장형철은 양혁수가 입장한 순간부터 불법 프로젝트를 일곱 개 정도 나열했고 그 내용은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그리고 양혁수가 말을 자르자 장형철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양혁수는 더 이상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헛수고라고 생각해 절반 피운 담배를 끄고 사람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장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