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벤틀리는 안시연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상향등을 하향등으로 조절했다.이어 뒷좌석에서 내린 연정훈은 안시연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몰래 뒤를 돌아보았고 다행히 출구에 양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생각에 긴 한숨이 나갔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은 어느새 눈앞까지 걸어왔고 안시연을 침을 꿀꺽 삼켰다.“왜 또 온 거에요?”연정훈의 얼굴은 너무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은 편도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차에 타.”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을 지나쳐 차로 향하는데, 어깨에 걸친 가방이 흘러내렸고 연정훈이 자연스레 잡아챘다.안시연이 다시 가방을 고쳐 매려는데 연정훈은 이미 가방을 가져가 버렸다.안시연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연정훈은 덤덤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차에 타.”“네.”안시연은 계속 연정훈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연정훈에게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 뒷좌석에 올라탄 뒤로 창문 쪽에 몸을 딱 붙여 연정훈과 거리를 유지했다.차 문이 닫히고 연정훈은 안시연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둘 사이 침묵이 이어졌다.“운전해.”차는 천천히 빌딩을 벗어났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피곤했던 터라 잠이 솔솔 몰려왔다.연정훈은 차 미러로 그녀를 훔쳐보며 생각했다.‘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피곤해하는 거야?’차는 침묵 속에서 달려 벚꽃동에 도착했다.안시연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안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안시연은 눈을 비비더니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온몸이 나른한 상태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연정훈은 차에 앉아 옆에 놓인 케이크를 가만히 쳐다봤다.‘차 타고 가는 동안 발견하지 못한 건가?’안시연은 너무 졸려 빨리 씻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곧장 욕실로 들어간 안시연은 혹시나 해서 문도 잠갔다.연정훈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욕실에서
연정훈의 버릇은 모두 안시연에 길들여진게 맞았다.안시연은 마음이 약했고 연정훈을 좋아했다.그래서 침대 위 연정훈의 모든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그러니 연속으로 두 번씩이나 거절당한 연정훈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아침이 되고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아침은 진수빈이 가져다줬는데 안시연은 입맛에 아주 맞았다. 며칠 동안 천문 전시회 일로 너무 바빠 입맛이 없었는데, 이제 바쁜 고비를 모두 넘겼고 또 운전 연습하러 가야 하니 밥을 더 든든히 먹어야 했다.그녀는 밥 한 그릇에 구운 고등어를 깨끗이 발라 먹었다.집을 떠난 안시연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연정훈은 차에 앉아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안시연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지하철에 오른 안시연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몸이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연정훈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그 전날 밤 아플 정도로 무리시킨 연정훈이 미웠다.연정훈은 이제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하지도 않았으며, 안시연은 자신이 침대 위의 장난감처럼 느껴졌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떨쳐낼 수 없었으며 연정훈에게서 반항하고 싶은 싹이 자라났다.연정훈은 아직 안시연이 질리지 않아 당분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시연은 진작 “헤어짐”을 고했을 것이다.그러니 좀 더 버텨볼 생각이었다.안시연은 회사에 도착했지만 양혁수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오후 두 시가 넘어서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양혁수가 보였는데 알콜 향을 물씬 풍기는 모습이 출근이 아니라 휴가온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안시연은 양혁수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찌근거렸다.“선배.”양혁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안시연은 자신이 마법이라도 부려 단숨에 양혁수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양혁수에게 한 소리하려는데 양혁수가 무언가를 척 내밀었다.다이아몬드 목걸이.연정훈이 선물했던 목걸이였다.알아본 안시연이 잠시 멈칫했다.“선배 목걸이 돌려줄 테니 내 것도
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은 침묵으로 답했다.안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으나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잠시 눈이 마주치고, 연정훈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그래, 자.”짧은 말을 남겨두고 연정훈은 몸을 돌려 다시 안시연을 쳐다보지 않았다.힘이 풀린 안시연은 화장대에서 내려와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그리고 얼마 뒤, 등 뒤의 이불이 들리고 연정훈이 옆자리에 누웠다.동상이몽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시가니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등 뒤로는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았다.‘그래 빨리 자자!’안시연은 마음이 약한 사람인지라, 연정훈을 거절했다는 죄책감에 날밤을 새웠다.이튿날, 안시연이 아침을 차렸고 계란 프라이는 여전히 하나였다.연정훈은 안시연 앞접시에 놓인 계란 프라이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어제 계란이 마지막 하나였어요.”“오늘 이건?”“이건 구석에서 찾아낸 거예요.”“...”‘그래.’‘아주 좋아.’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배불리 먹은 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연속 세 번의 거절과 혼자여도 잘산다는 뉘앙스의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외출하는 길에 연정훈은 어제 사 온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콱 처박았다.진수빈이 놀라 움찔거렸다.오전 10시.안시연은 시험장에 도착했다.성실하게 준비했으니, 필기시험은 꽤 높은 점수로 통과할 수 있었다. 이어 기능 시험 준비를 했다.건물 밖으로 향하니 강사가 기능 시험 연습장으로 데려갔다. 연정훈이 찾아준 학원은 뭐든지 최고급이었고 뭐든지 술술 잘 풀렸다.연습장을 한번 빙 둘러보고 있는데 양혁수가 전화를 걸어왔다.“시험은 잘 봤어?”“네. 도착한 거예요? 목걸이 돌려줄게요.”“난 옆 서킷 관중석에 있어.”상대는 그 말만 남기고 쿨하게 통화를 종료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직접 그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목걸이에는 양씨 가문을 대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절대
안시연은 멍하니 자리에 굳었다.“뭐라고요?”양혁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내 목걸이가 탐난다고 다른 거랑 바꾼 거 아니야?”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안시연이 다급하게 해명하려고 하자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렇게 순진해?”?양혁수는 “순진한” 얼굴의 안시연을 보며 목걸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장난이야.”안시연은 어이가 없었으나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물건을 돌려줬으니 이만 가볼게요.”양혁수는 당연히 안시연을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안시연을 잡으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혁수야, 이 알파카 당장 출산할 것 같은데 데려가 키우려고?”양혁수가 고개를 돌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키우고 싶은 사람 아무나 줘버려.”‘말이 되는 소리를 해.’‘알파카 엄마 아빠가 헤어졌다고 아이를 내가 키운다는 게 말이나 돼?’주변의 여러 도련님 모두 알파카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몇 번 만지다가 바로 가버렸다.알파카는 배가 볼록했고 이 더운 날 두꺼운 털을 뒤집어쓴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안시연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주인이 버린 거예요?”“못 봤어? 두 사람이 헤어지고 알파카만 남기고 떠났어.”양혁수의 대답에 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너무 무책임했다.“출산이 임박한 것 같은데 동물 병원으로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누가...”양혁수가 찬물을 끼얹으려는데 슬퍼 보이는 안시연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선배가 키울래?”안시연이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난 키울 데가 없어요.”연정훈도 알파카를 받아줄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그럼, 그쪽이 키울래요?”안시연이 양혁수를 힐긋 바라봤다.양혁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싫어. 귀찮아.”“다들 버리면 저 아이는 어떡해요?”“알아서 어떻게든 되겠지.”안시연이 한참 침묵했다.양혁수가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선배가 갖고 싶다면 동물 병원으로 대신 데려다줄 수는 있어.”“아이를 낳
연정훈의 질문에 부승원과 한우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승우도 눈을 반짝였다.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건지, 연정훈이 여자에 관한 질문을 했다.이승우가 연정훈에게 바짝 붙으며 물었다.“안시연?”연정훈은 입을 꾹 다물고 반박하지 않았다.마른기침을 몇 번 하던 이승우는 두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네 말을 들어보면 대충 두 가지 답이 있다고 볼 수 있어.”연정훈은 간만에 이승우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그러자 이승우는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첫 번째, 큰 다툼을 벌이고 여자가 일방적으로 삐진 거야.”연정훈은 침묵했다.최근 안시연과 크게 다퉜다고 할만한 일은 없었다.강남 시티 그 일이 지나고 두 사람은 말다툼 한번 하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이 자신을 이해한 거로 생각했다. 강남 시티에서 한 말이 두 사람의 사이에 문제가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만약 안시연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결혼이라는 비현실적인 일은 다시 꺼내지 않을 것이다.“두 번째는?”이승우가 눈썹을 치켜세웠다.“두 번째 경우라면 상황이 좀 더 심각한 거야.”연정훈이 이승우를 힐긋 노렸다.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향해 물었다.“네 생각은 어때?”부승원은 늘 얼굴을 굳히고 말을 아꼈는데 입을 한번 열면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어릴 때 부승희가 밥때가 돼도 배고프지 않다고 하면, 엄마는 승희가 간식을 훔쳐먹은 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었어.”한우빈이 웃음을 터뜨렸다.“안시연이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던데?”“왜 아니라고 생각해?”이승우가 반박했다.“그렇게 예쁘고 젊은 여자가 다른 마음 품을 수도 있지.”“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해도,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시를 했겠어.”“그래!”이승우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잘생기고 어린 남자가 주변에 쫙 널렸는데, 집에 돌아오면 서른이 되는 남자가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별로겠어?”“...”연정훈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을 구한 자신이 우스워졌다.정말 돈 주고 고생을 사서
저녁 다섯 시가 되고, 연정훈은 자동차 구매 매장에서 나와 시내로 운전했다.뒷좌석에는 자동차 구매 계약서가 놓여있었다.충동적으로 구매한 거라 아직도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불과 두 달 안으로 안시연은 연정훈 삶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안시연이 아무리 얼굴을 찡그리고 가시돋힌 말을 해도 그녀를 달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해가 지고 건조한 열기가 점점 가시고 있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이따금 두통이 찾아왔다. 최근 며칠 동안 업무량이 많았던데다 쉬는 날 수영하고 매장까지 다니며 찬 바람을 쐬었으니, 몸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연정훈은 차를 나무 그늘에 대고 창문을 연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니코틴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예민했던 신경이 가라앉았다.그렇게 차에 앉아 조용한 산책길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시연을 향한 관용은 자연스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소현주는 임신 진단서를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 우리 헤어져요.”“에릭이 프러포즈했거든요.”“당신은 내가 바라는 결혼 생활을 줄 수 없지만 그 사람은 해줄 수 있다고요!”그때의 연정훈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이상적인 일상을 보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연정훈에게는 자신의 인륜대사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할아버지는 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연정훈에게 이렇게 말했다.“그 아이와 결혼하고 싶거늘 그렇게 하거라.”“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란다. 20년이 지나고 나한테 당차게 말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이 상황에서 소현주는 연정훈에게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 난 당신을 기다려야 할 의무가 없어요.”기다려야 할 의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정훈이 그녀의 유일한 선택이지도 않았다.그렇다면 안시연은...소현주는 기다리지 못했지만, 안시연은 과연 기다릴 수 있을까?자신의 멍청한 생각에 연정훈은 헛웃음이 나왔다.고작 두 달을 같이 보내놓고 기다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소현주와 함께했을 때에는 너무 어려 막연하게 결혼하고 싶었
알파카의 출산에 주인이 곁을 지켜야 한다니.안시연은 당황한 얼굴이었다.“난 새벽에 절대 일어나지 못해.”양혁수는 입구에서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상태로 말했다.“날 찾지 마.”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연정훈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어떻게 한밤중에 나올 수가 있겠는가?의사는 고민하는 두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두 분 다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정말 새벽 출산을 한다면 저희가 알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안시연은 알파카가 새벽에 출산하지 않길 기도했다.수속을 마치고 알파카는 병원에 입원했으며 안시연은 알파카를 측은한 눈길로 살폈다.“안심해. 난 널 버리지 않을 테니까.”알파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그 얌전한 모습이 더 마음이 아팠다.안시연이 손을 뻗어 복슬복슬한 머리를 매만졌다.양혁수가 가까이 다가가 옆에 놓인 이름표를 읽었다.“조나비?”안시연이 그 소리에 코를 찡그렸다.“알파카 목에 걸려있던 이름표예요.”양혁수가 코웃음을 쳤다.“정말 구린 이름이네.”양혁수는 데스크로 돌아가 이름을 바꿨다.“내가 병원비를 부담하니까 당분간은 내 소유야. 그러니까 내 성을 따라야지.”안시연은 양혁수가 어떤 이름을 지을지 궁금했다.양혁수는 흰 종이에 펜을 갈기며 이렇게 말했다.“양나비!”“...”안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왜? 이름이 별로야?”안시연은 양혁수가 처음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이름이 아주 훌륭해요.”양혁수가 턱을 치켜세웠다.“가자, 집으로 데려다줄게.”안시연이 그 말에 미소를 빠르게 지웠다.벌써 저녁이 되고 또 연정훈을 마주해야 했다.돌아가는 길, 안시연은 양혁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정말 고마우면 오늘 저녁 연정훈이랑 같이 잘 때 좀 편한 옷차림으로 자.”???양혁수는 한숨을 내쉬었다.“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선배는 또 연정훈이랑 지내야 되잖아. 그러면 이것저것 할 수도 있고, 내 속이 정말 말이 아니야.”안시연은 얼굴이 뜨거워졌다.양
연정훈이 먼저 화해 요청을 건넨 게 맞았다.자신의 앞접시에 올려진 반찬을 보며 안시연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반찬은 주문한 거예요?”안시연이 애써 대화 주제를 찾았고,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입맛엔 맞아?”“네, 맛있어요...”안시연이 낮은 소리로 대답하자, 연정훈이 예쁘게 바른 고등어를 밥 위로 얹어줬다.“그러면 많이 먹어.”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식탁은 또 침묵이 찾아왔다.드디어 식사를 마치고, 안시연이 그릇을 치웠다.설거지를 마치고 안시연은 방으로 돌아가 샤워 준비를 했다. 오늘도 욕실 문을 잠갔으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연정훈은 안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안시연이 침대에 앉기까지 서재에서 기다렸다가 방으로 돌아왔다.두 사람은 말없이 침대 끝자락에 앉았고 분위기는 애매하게 어색했다.안시연이 두 다리를 오므려 템플릿을 무릎 위로 올리고 문제를 읽었다. 보기에는 집중한 듯 보여도 사실 마음은 딴 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연정훈이 템플릿을 흘깃 살피다가 물었다.“회계사 시험 준비하는 거야?”안시연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네, 맞아요!”“이번 기에 시험 볼 생각이야?”“다음이요.”물어본 질문에 대답만 이어지는 딱딱한 대화가 오갔다.안시연은 좌불안석이 되어 몰래 심호흡했다.안시연은 매일 입는 슬립에 얇은 숄더를 걸쳤는데 그동안 대부분 모든 날이 이러한 옷차림이었다.그때, 안시연의 움직임에 숄더가 흘러내려 어깨 반쪽이 드러났다.연정훈이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샤워를 마치고 계속 몸이 찌뿌둥했는데, 안시연이 이러한 옷차림으로 옆에 있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안시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나 조용히 자리에 누운 연정훈을 의아하다는 눈길로 바라봤다.몰래 연정훈을 살펴보자, 얼굴에 평소와는 다른 홍조가 보였다.이불 안으로 안시연이 다리를 가볍게 움직이자 조금 열기가 느껴졌다.이틀 동안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으니, 연정훈이 욕망을 억제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몸이 불편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청년기]“내일 돌아오는 거예요?”대운산으로 향하던 길 양지원은 집에 있는 양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였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고 그나마 양혁수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가능하면 돌아가려고 해.”몇몇 선생님들의 불만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에서는 좀 얌전히 지낼 수 없을까? 너 때문에 맨날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창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양혁수는 이제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몇몇 선생님이 함께 교육을 맡으면 그는 종종 머리를 치켜들고 반항했다.“저 정도면 엄청 얌전한 편 아닌가요? 같이 농구도 하잖아요.”양지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무더운 여름날 예민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누가 그런 말썽꾸러기와 농구장에 나가고 싶겠는지 의문스러웠다.“알겠어. 어쨌든 조금만 얌전히 있어 줘.”“알겠어요. 엄마는 밖에서 몸조심하고 집에 오시면 제가 생일 챙겨드릴게요.”양지원은 말끝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통화가 끝나자 차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비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양 대표님, 먼저 접대소에서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용 국장 쪽 점검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대운산 관광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쪽에서 이 지역을 외교 관련 주요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행궁’을 조성하려면 결국 관계자들의 사전 점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양지원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일주일 전 이곳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최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있는 곳과 뜨거운 태양 아래를 오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지쳐갔다.비서는 그녀의 얼굴 색
양지원은 화려한 의상에 휩싸인 채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오빠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당연히 멋져요.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걸요.”진병수는 이마를 짚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양석진은 길을 걸으며 양지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두 세트를 함께 찍기로 했다.예복을 입고 양지원과 함께 거울 앞에 서자 주위에서 감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그는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거리자 양창수의 애매한 미소를 피하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결혼사진을 찍는 자리였지만 양지원에게는 가족사진을 남기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고 중간에 진병수에게도 함께 찍자며 부탁했다.“자,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해 주면 좋겠네요.”사진사가 말하자 양석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이분은 제 오빠예요.”사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양창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키스하는 게 뭐 어때? 얼굴에 하는 거면 괜찮아.”진병수도 거들었다.“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안 돼. 그건 너무 이상해.”양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손명우가 조용히 제안했다.“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찍으면 돼.”양지원과 양석진은 동시에 외쳤다.“안돼.”순간 현장은 조용해졌다.“...”양지원은 웃으며 옆에 앉은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우리 둘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팔을 감싸며 바르게 자세를 고쳤다.“오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처음 오빠를 만났을 때도 가족사진 찍느라 소파에 나란히 앉았잖아요.”양석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고정되었다.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은 양지원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
배가 콕콕 쑤시는 걸 제외하면 양지원은 꽤 신나게 놀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가 가득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양석진이 양창수를 뒤뜰로 불렀고 늦여름이라 뒤뜰에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양창수는 계단에 뚝 멈춰 섰다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뒤뜰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지원이 이제 어리지 않으니 지원이 앞에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지 말았으면 해.”“내가 뭘 또 아무 말이나 했다고 그래요?”양석진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자꾸 까불면 바로 입대시켜 버린다?”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마음대로 하세요.”양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위층을 슬쩍 보다가 양석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내가 헛소리했다 치죠.”그리고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떠났다.양석진은 뒤뜰에 홀로 남아 사라지는 양창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의미심장한 양창수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전등처럼 깜빡깜빡하며 양석진의 마음을 괴롭혔다.양석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가 위층에서 양지원이 저를 부르자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석진은 그날 밤 또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양석진에게 있어 흔한 일이 되었다.어느 날부터인지, 양석진은 감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감정이 생겼고 아무리 억눌러도 아무도 없는 새벽이 되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양석진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본인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그저 양지원만 떠오를 뿐이었다.어쩌면 양지원도 나이가 좀 더 들고, 각자 연인이 생기면 이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를 양석진은 늘 기도했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날 뒤로, 양석진은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양지원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양석진은 바로 진병수의 연락을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