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의 외할머니는 매 해마다 사주를 적은 부적을 부처 앞에 두고 기도를 했었다.하지만 올해는 외할머니의 몸이 안 좋아져 중단되고 말았다.친모가 거론되자 안시연은 마음이 착잡해졌으며 비아냥대는 말투로 물었다.“외할머니, 그 사람 내 생일은 기억한대요?”“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어?”외할머니는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너를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주지혁을 위한 기도도 했단다.”갑작스레 주지혁의 이름이 들려오자, 안시연은 멍해졌다.“관음사는 평안을 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운, 사업 운도 빌 수 있단다. 네 엄마한테 이걸 전해줬더니 아들이 없으니, 사위를 위해 기도를 하고 왔다네.”안시연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며 되려 의심스럽기까지 했다.외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넋이 나간 채로 통화를 종료했다.오후도 흐리멍덩하게 지났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 서재에서 회계사 문제지를 뒤적였다.그때, 전화가 울렸고 안시연은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안시연 씨 맞나요?”진수빈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린 안시연이 바로 긴장해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시죠?”“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네.”“그럼 ‘홍천 식당’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대표님께서 술자리를 마치고 조금 불편해하세요.”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술 마신 건가요?”“조금 마신 것 같아요.”마음이 급해진 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열이 나서 새벽에 해열제까지 먹였는데 술을 먹게 냅둬요?”“...”진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나도 지어낸 거란 말이야.”진수빈은 조금 버벅대다가 이렇게 말했다.“조금만 드신 것 같으니 빨리 여기로 와주세요.”그리고 통화는 종료되었다.안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무슨 약을 먹였던지 기억을 떠올렸다.다행히 항생제는 먹이지 않았었다.급하게 밖으로 달려 나간 안시연은 남산 저택으로 곧장 향했다.홍천 식당은 남산 저택의 소유로 근처 유
이승우는 이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홍천 식당에서 공짜로 먹고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연정훈이 술자리에서 취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가던 길에 마침 연정훈 대신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진수빈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돌아가는 길에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안시연이 양민아에게 뼈 때리는 말하는 것을 들었다.오호라. 대단하다.양처럼 순한 사람이 변했다.이승우는 갑자기 진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연 대표, 정말 술 때문에 쓰러진 건가요?”이승우는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 같았다.진수빈은 코끝을 만지작거렸다.앞쪽에서 양민아는 안시연의 질문에 얼굴이 굳어졌고 이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안시연, 혹시 술을 너무 많이 마여서 취한 거야?”안시연은 양민아의 태도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저 아주 멀쩡해요.”“오히려 민아 씨가 더 우스워요. 이 문 하나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양민아는 안시연이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갑자기 말이 매끄러워지자 의심이 들었다.안시연은 양민아와 더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진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연정훈을 한 번 확인해 보고 만약 그가 양민아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그 이후로는 연정훈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복도에서 벨소리가 울렸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양민아와 함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진수빈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발걸음은 가벼웠다가 갑자기 서둘러 뛰어오며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었다. “시연 씨,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했다.양민아는 얼굴을 굳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승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걸어왔다.“무슨 일이죠? 우리 연 대표님께서 술을 마시는데 두 명의 선녀가 옆에서 지켜주는 건가요?”안시연과 양민아는 어이없었다.“…”진수빈은 웃으며 다가가 문을 열었다.양민아는 진수빈의 행동을 보고 미
연정훈은 시야가 또렷해지는 순간에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혼미했지만, 곧바로 안시연을 알아볼 수 있었다.안시연…안시연은 콩국을 사주겠다고 나갔는데 양혁수의 차에서 내렸다.연정훈은 주변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했다.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그렇게 질문하는 것을 보니 안시연은 자신감이 넘치는 듯했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사실 안시연은 자신에게 그리 확신이 없었다. 그저 자신과의 내기일 뿐이었다.연정훈의 대답에 따라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결정될 것이다.만약 연정훈이 양민아를 선택한다면 안시연은 깨어난 연정훈에게 이별을 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련 없이 관계를 끝낼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의 질문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긴장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양민아는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연정훈,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의사가 곧 도착할 거야.”진수빈이 덧붙였다. “맞아요. 양민아 씨가 한 시간 전에 의사를 부르셨어요.”양민아는 침묵했다.“…”이승우가 웃었다.“한 시간 전에 불렀다고요?”안시연은 사람들을 등지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에 온 지 겨우 30분밖에 안 됐어요.”그런 다음 진수빈을 바라보았다.“연 대표님의 외투를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진수빈이 옷을 가지러 간 사이에 안시연은 연정훈의 깊은 시선과 마주쳤다. 안시연은 억지로 다가가 연정훈을 부축했다.연정훈은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였다.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뒤에 앉혔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듯 보였지만, 안시연은 연정훈이 넘어지지 않도록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상황을 지켜보았다.양민아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안시연의 이런 하찮은 행동이 못마땅해 얼굴을 돌렸다.방 안의 모든 사람은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안시연이 연정훈을 감싸 안는 것이 놀라웠다.침대 위에서 안시
연정훈의 키는 1미터90센티미터가 넘었고 안시연이 연정훈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연정훈을 방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다행히도 진수빈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안시연이 비명을 지르자 진수빈은 급히 달려와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연정훈을 방으로 옮겼고 진수빈이 미리 연락해 놓은 의사도 마침 도착했다.안시연은 즉시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의사가 작은 의료 장비를 들고 연정훈에게 혈액 검사를 하는 모습을 보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의사가 물었다.“오늘 연 대표님께서 식사하셨나요?”진수빈은 잘 모르겠다고 하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안 드셨어요.”전화를 끊고 난 후 진수빈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커피만 서너 잔 마셨습니다.”안시연은 이 말을 듣고 놀랐다.연정훈이 이렇게 아픈데도 커피로만 버텼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의사는 거실에서 진수빈과 소통하며 약 처방 준비를 마친 후, 연정훈에게 수액을 투여하기로 했다.안시연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조용히 물었다.“심각한가요?”의사는 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먼저 수액을 투여하고 환자가 깨어난 후에 다시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안시연은 침묵했다.의사는 신속하게 연정훈에게 주사를 놓았다.연정훈은 식은땀을 흘리며 평소에 청결을 중요시하던 연정훈은 의식이 돌아오자 일어나려 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를 눌러가며 말했다. “제가 닦아줄게요. 움직이지 마세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 안시연이 따뜻한 수건을 연정훈의 목에 대자 비로소 얼굴을 찡그리며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진수빈은 문틈으로 상황을 엿보다가 안시연이 연정훈의 셔츠 단추를 풀며 세심하게 몸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안시연은 겨우 연정훈의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혔다.그 후, 밖으로 나가 죽을 끓이고 다시 돌아와 연정훈의 상태를 지켜보았다.밤 11시가 되어서야 의사가 수액 바늘을 뽑았고 그제야 연정훈도
연정훈은 안시연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연정훈의 얼굴은 표정 변화 없이 굳어 있었지만, 머리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문가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안시연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안시연은 침대에 이불을 펴 두고 눕기도 전에 진수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연 씨, 연 대표님께 약을 챙겨 드리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부탁드려요.”안시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진수빈조차도 안시연과 연정훈의 관계가 위태로울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진수빈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안시연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연정훈이 바로 옆방에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의사가 처방한 약을 준비한 후 안시연은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정훈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아직 죽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안시연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억누르며 약을 연정훈에게 건넸다. “약을 드세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안시연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안시연은 시선을 거두고 약을 침대 옆에 두려고 했다.안시연이 돌아서서 나가려 할 때 연정훈은 몸을 일으키며 안시연의 손을 정확히 잡았다.안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연정훈의 팔에서 전해지는 비정상적인 온기에 깜짝 놀랐다.안시연이 말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힘껏 안시연을 끌어당겼다.시연은 창가에 떨어져 앉았고 두 팔을 연정훈에게 잡힌 채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연정훈의 거친 호흡이 안시연에게 선명히 느껴졌다.안시연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연정훈은 더욱 강하게 안시연을 붙잡았다. “나와 헤어지자고?”연정훈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연정훈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들렸다. 안시연이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하니 안시연의 마음도 바늘로 찔린 듯 아팠다. 안시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연정훈은 입술을 비틀며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왜?”“내가 너와 결혼하지 않을
연정훈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마치 귓가에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연정훈은 지금껏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아본 적이 없었다.시간이든 돈이든 아낌없이 안시연에게 바쳤다.하지만 안시연은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어느 집에서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나올 수 있었을까.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격렬하게 뛰는 심장은 연정훈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안시연은 속에 있던 말을 모두 쏟아내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강남 사건 이후, 그들은 한 번도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안시연은 진심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그들이 이미 끝났음을 깨닫고 있었다.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했다.“약을 드세요. 제가 정훈 씨가 정말로 약을 먹는지 확인하겠다고 진수빈 씨에게 약속했어요.”연정훈의 표정이 굳어졌다.결국 연정훈에게 마음을 털어놓게 된 것도 진수빈 덕분이란 말인가? “벌써 새 남자를 찾으려고 하는데 전 남자의 생사가 아직 너와 상관있어?”연정훈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었다.약을 먹든 말든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연정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안방으로 돌아와서 자.”“괜찮아요.”“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안시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시연이 침대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동안에 연정훈은 이미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방 안은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잠시 숨을 고른 안시연은 이불을 챙겨오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자자.이 상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다.이 상태의 연정훈이 무슨 해코지를 할 것도 아니었다.안시연은 이불을 무심하게 침대 위에 던졌다.연정훈은 그 거친 움직임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침대가 다시 한번 무겁게 들썩였다. 안시연이 그 옆에 누운 것
남자들은 소유욕과 정복욕이라는 본능이 있다. 그 모든 것이 뼛속 깊이 숨겨져 있다가 때가 되면 겉으로 드러나며 날뛴다.연정훈은 병약한 상태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양혁수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제압한 후에 안시연 베개 옆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보았다. 메시지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그 보낸 사람은 바로 양혁수였다. 아무리 너그럽고 품위 있는 사람이라도 이 상황을 참아낼 수는 없었다.연정훈은 손바닥으로 안시연의 얼굴을 가리며 안시연이 휴대폰 화면을 보지 못하게 했다. 강하게 밀어붙여 안시연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더니 갑자기 키스했다.입술과 이가 부딪쳤다.안시연은 놀란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안시연은 몸부림치려 했지만, 손은 이미 눌려 있었고 몸을 비틀자 오히려 연정훈의 욕망을 더욱 자극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저항을 억누르며 강제로 안시연의 입술을 벌려 키스를 했다.결국 달콤한 맛을 느꼈다.작은 사탕 한 조각이 전신의 세포를 깨우듯 강한 자극을 주었다.연정훈은 점점 더 강하게 안시연의 부드러운 입술과 혀를 거칠게 다루며 키스했다.안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의 입술에서 목으로 옮겨갔다.귀와 머리카락이 스치는 순간, 안시연의 얼굴은 터질 듯 붉어졌고 동시에 안시연은 연정훈의 얼굴과 가슴에서 빠르게 배어 나오는 땀을 느낄 수 있었다.연정훈은 미친 것 같았다. “정훈 씨! 그만 해요!”안시연은 소리쳤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연정훈의 손에 강하게 붙잡혔다. 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냈다.연정훈은 이미 오래전 이성을 잃었고 안시연의 소리를 들을수록 연정훈의 온몸에 피가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안시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연정훈은 안시연의 옷을 모두 벗겨버렸다.안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동시에 연정훈의 급박한 심장박동이 더욱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연정훈이 안시연의 곁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연정훈은 처음으로 안시연이 자신을 이를 악물고 욕하는 모습을 보았다.안시연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은 더욱 격렬한 감정에 휩싸였고 안시연의 허리를 꽉 움켜쥐며 멈추지 않았다.안시연은 입을 벌리고 헐떡이면서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연정훈이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첫 번째를 제외하고 그들은 매번 안전 조치를 취했었다.안시연은 반복해서 머리를 흔들며 연정훈에게 그만두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만 해요…”하지만 이미 늦었다.몇 초 동안 안시연의 시야가 흐려졌고 연정훈의 거친 숨소리가 안시연의 귀에 선명하게 들리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안시연은 참아왔던 눈물이 자극 때문에 흘러내렸다.침대 머리맡의 불빛이 약간 밝아지고 안시연은 시각을 되찾았지만,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멈추고 두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안시연의 볼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짠맛이 났다. 연정훈은 짠맛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선을 넘었다는 걸 느꼈다.몸을 지탱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눈앞이 어두워졌다. 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질책했다.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다니 나이를 헛먹은 셈이다.안시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이마에 머리를 대어 잠시 진정시킨 후,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수건을 적셔와 안시연의 몸을 부드럽게 닦아주려고 했다.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사지에 다시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고 통화 시간이 몇 초에 불과한 것을 보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그와 동시에 안시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연정훈을 심하게 질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짐승남.안시연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꽉 잡았다. 몸이 진정되자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이 안시연을 짜증 나게 했다. 남긴 흔적은 안시연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나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짓궂다.’최근 1년 동안 양시연 덕분에 그녀를 예전보다 자주 마주쳤지만 그럴 때마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고 그는 그녀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늘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그가 수면제를 다 마시자 양지원은 자리를 뜰지 아니면 이제야말로 양시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그 아이는 더 이상 그녀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었고 양석진에게도 반드시 알아야 할 권리가 있었다.양석진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바빠?”‘응?’양지원은 의아해했다.양석진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등을 그녀에게 내보였다.“온몸이 뻣뻣해서 불편해.”양지원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의 말 하나하나를 곱씹듯 마음속에서 되새겼다.“내가 마사지를 해줄까요?”“응.”양석진은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내 방 침대 오른쪽 탁자 위에 오일이 있어.”양지원은 어이없었다.“...”‘정말 적극적이네.’그녀는 그가 이렇게 '격의 없이' 대해주는 것이 기뻤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간 들뜬 기분이었다. 그의 금고 속 물건들을 떠올리며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며 세찬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더운 느낌이 들었고 숄을 벗어버리고 싶었다.그녀는 결국 숄을 벗었다. 거울 앞에 서서 그 숄을 바라보니 잠옷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역시 이전에 입었던 긴 코트가 더 잘 어울렸다.객실로 돌아오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그가 이미 목욕가운을 벗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허리 아래는 이불로 덮여 있었다.그녀는 잠시 시선을 돌린 후 침대 옆에 앉아 평소처럼 말했다.“척추가 좋지 않은 것 같네요. 병원에 가본 적 있어요?”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떴다.“가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어.”“푹 쉬지 않으
양석진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나 2층에 올라가서 샤워하고 옷 좀 갈아입을게. 넌 잠깐 여기 앉아 있어.”“아...네.”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가2층으로 올라간 뒤에야 자신이 그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을 때 아래층 거실에 서 있는 양석진의 뒷모습이 보였다.양지원의 캐리어는 침실 문 옆에 놓여 있었고 하이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벗어져 있었다. 갈아입은 드레스는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양지원은 이마를 살짝 두드리며 설명했다.“나은설 씨가 여기서 자라고 했어요. 다른 방들은 전부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고요.”짐을 다시 옮기기 귀찮았던 그녀는 몸을 돌리며 마치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오빠는 객실 방에서 자요. 내일 내가 떠나면 그때 다시 방으로 오면 되죠.”양석진은 그녀의 말투에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소매 단추를 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알았어.”그가 조용히 손님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양지원은 문틀에 기대선 채 미소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곧장 침실로 달려가 금고 근처의 장식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특히 눈에 띄는 지문 자국은 꼼꼼히 닦았다.그때 아래층에서 다시 양창수가 그녀를 불렀다.양지원은 눈을 굴리며 긴 숄을 걸치고 아래로 내려가 무심한 듯 물었다.“또 뭐에요?”양창수는 웃으며 그릇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옆에 놓인 한약을 가리켰다.“의원님의 수면을 돕는 한약이에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나은설이 2층에 올라갈 수가 없대요. 큰아씨 미안하지만 나중에 좀 올려줄래요?”그와 양석진의 관계를 생각하면 굳이 '의원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양창수는 줄곧 ' 큰아씨'라는 호칭으로 은근히 비꼬는 태도를 드러냈다.양지원은 속으로‘나이 들어도 입은 여전하네’ 하고 생각하며 대꾸했다.“저한테 주세요.”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툭툭 풀며 문을 열고 나가면서 투덜댔다.“이 늙은이는 체력이 안 좋아요.
이 잡지들은 새것이 아니었고 분명 양석진이 이미 본 적이 있는 잡지들이었다.양지원의 머릿속에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진지하게 읽던 양석진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장면에 웃음이 터져 침대 위로 쓰러졌다.그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잡지에서 두 장의 사진이 살며시 흘러내렸다.‘응?’그녀는 사진을 집어 들다가 말고 잠깐 멈칫했다.오래된 색감을 고스란히 품은 결혼사진이었다.그녀는 양석진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정장을 차려입었고 그녀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양지원은 유난히 행복해 보였다.마치 시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간 듯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그 시절로 돌아갔고 사진 뒷면을 뒤집자 예상대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눈가가 뜨거워졌고 그녀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살며시 눈을 감았다.그해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고 양석진은 물론 양창수와 그 무리의 모습까지도 생생했다.양지원은 코끝을 훌쩍이며 잡지를 내려놓고 떨어진 다른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사진 속 그녀는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고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다른 손으로 사진을 찍은 듯했다.생각할 필요도 없이 분명 양석진일 것이다.그는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찍게 두지 않을 사람이다.사진 뒤를 넘기자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대운산 기지 공사 당시였던 것 같았다.‘쿵쿵쿵.’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그녀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잡지를 재빨리 가방에 넣고 외투를 걸치며 급히 문 쪽으로 달려갔다.문을 열자 밖에는 나은설이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나은설은 웃으며 말했다.“양석진 씨가 돌아오셨어요.”“네?”“바로 아래층에 계세요.”나은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양창수가 양지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큰아씨?”그녀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거실에 있던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양석진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양지원이 내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조용히 비웃었다.‘왜 자꾸 사람을 그렇게 추하게 몰아가지? 양창수가 양석진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건 아니잖아?’양석진은 지금의 나이와 위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사생활이 문득 궁금해졌다.양지원은 문득 눈을 뜨더니 몸을 반쯤 일으켜 무심결에 그의 침대 옆 탁자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노트북과 시계 옷깃 단추 같은 작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서로 섞이지 않았고 생활감이 느껴지는 남성용 물품은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중얼거렸다.‘역시나 따분하군. 변한 게 하나도 없어.’그녀는 서랍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이제야 잠이 올 것 같았다. 양을 세기 시작한 지 세 번째쯤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원래는 낮잠 정도만 자려던 참이었지만 최근의 피로와 익숙한 그의 방 때문이었을까 눈을 떴을 땐 이미 오후 4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창밖으론 해가 지기 시작했지만 기온은 여전히 후텁지근했다.그 나은설이라는 똑똑한 소녀는 아침부터 더위를 식힐 간식을 준비해 두었고 저녁 식사 역시 놀랄 만큼 정성스럽게 차려져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작은 디저트를 손에 쥔 채 아래층 거실에 앉아 영화 한 편을 틀었다.시계는 어느새 저녁 7시를 가리켰지만 양석진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다시 침실로 올라온 그녀는 지루함을 달래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양지원은 이번 방문을 양석진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오직 양창수에게만 조용히 귀띔해 두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석진에게서는 단 한 통의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양창수라면 입이 가볍지 않으니 분명 전했겠지.’그녀는 그렇게 혼잣말처럼 생각했지만 이 모든 생각들이 그다지 의미 없다는 걸 알았다.‘어차피 나는 왔고 양석진이 알든 모르든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그녀는 할 일이
나은설은 현장에서 들켜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양지원은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쳐다보는 거지?’나은설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당신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잡지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눈부셔요.”양지원은 침묵했다.“...”그녀는 칭찬에 말문이 막혀 그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과찬이세요.”“아니에요. 정말 예쁘세요. 저도 이 헤어스타일 시도해봤지만 양지원 씨처럼 잘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드레스도 아주 정교하고 우아해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양지원은 순간 당황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나은설은 적당한 선에서 칭찬을 멈추고 양지원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큰아씨, 잠시 휴식하시겠어요? 방을 준비해 두었어요.”그 제안은 양지원 마음에 들었다.길에서 양석진을 어떻게 마주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가 부재중이라면 굳이 마음을 소모할 이유는 없었다.밤에 한 번 더 마주칠 수 있다면 그때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아침에 편안히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그럼 안내해 주세요.”“네. 이쪽으로 오세요.”방은 2층 가장 안쪽에 있었다. 양지원이 나은설을 따라 들어서자 문틈 사이로 은은한 나무 향이 스며들었다.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눈 부신 빛은 조용히 차단되어 있었다.그녀는 작은 거실의 소파 앞에 서서 조선 시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고풍스러운 장식을 둘러보았다.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은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여기 괜찮으신가요?”나은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양지원은 침실도 살펴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나은설 씨는 가서 일 보세요.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그 말에 나은설은 활짝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나갔다.방 안에 조용히 혼자 남은 양지원은 시계를 풀어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신발을 벗은 뒤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맨발로 침실 안으로 들어서며 불을 켜지 않고 곧장 침대에 몸을 눕혔다.나은설은 정말 준비를
[중년기]양지원은 화서시를 떠나 세운으로 향했다.이혼 서류를 막 받아 든 그녀는 비로소 오성호와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그동안 그녀는 오직 딸만을 생각하며 살아왔고 곧장 시연을 만나러 가려던 순간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양석진을 먼저 찾아가라는 단호한 말씀이었다.“지금 한가하잖아. 오빠한테 한번 다녀와. 그리고 시연이 일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해? 양석진이랑 이야기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정리해.”할아버지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고 양지원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입술을 꼭 다물고 침묵했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이지. 설마 양석진에게 양육비라도 요구하라는 건가? 내가 시연을 키울 수 없는 것도 아닌데.’게다가 그 짧은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은 어딘가 이상하고 낯설게만 느껴졌다.이전에는 잇따른 문제들로 마음 둘 곳조차 없었지만 이제 모든 것이 잠잠해진 지금 오히려 그를 만나도 할 말이 사라져 버린 듯했다.그녀는 점점 짜증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차가 양석진이 머무는 저택 근처에 다다르자 무심결에 거울 속 자기 얼굴을 올려다보았다.오늘 입은 연회색 드레스는 새로 맞춘 것이었고 세심한 디테일이 마음에 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그녀는 해마다 드레스에 대한 애정을 더해갔다.긴 머리는 옆으로 넘기고 끝을 큼직하게 웨이브로 말아 올렸는데 드레스와 잘 어우러져 지나치게 단조롭지도 않았다.생각에 잠긴 사이 차는 속도를 늦췄고 그녀는 귀 옆에 꽂은 보석 클립에 시선을 두었다.집에서도 자주 착용하던 것이지만 오늘따라 조금 과하게 반짝이는 듯했다.차가 멈추기 직전 그녀는 망설임 없이 클립을 떼어내 가방 안에 넣었다.바로 그때 창밖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고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문을 내렸다.밖에는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이 서 있었고 나이는 서른쯤으로 보였다.양지원은 무심히 상대를 훑어보다가 그녀가 미소를 띠며 몸을 숙여 인사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여성이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타셨어요. 의원님이 바쁘셔서 저희는 먼저 출발해야 해요.”양지원이 어깨를 떨구자 양창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며칠 뒤 이곳에서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 아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그래?’양지원은 고개를 들었다.양창수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주얼리 상자를 조심스레 그녀에게 내밀었다.“그때는 일정이 너무 많아서 직접 뵙지 못할 수도 있어요. 이건 의원님이 큰아씨께 드리는 생일 선물이래요. 미리 생일 축하도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양지원은 상자를 멍하니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섬세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상자 안에는 작은 종이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지원아, 생일 축하해.]양지원은 오늘뿐 아니라 이틀 뒤 그가 다시 오더라도 아마 그를 만날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최대한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알겠어요.”양창수는 그녀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말을 건넸다.“의원님에게 쿠키 구워주기로 했잖아요?”양지원이 잠깐 멈칫하자 양창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큰아씨가 이렇게 손재주가 좋은 줄은 몰랐네요. 다음엔 더 많이 구워서 의원님 드릴 때 저도 한두 개 나눠주세요.”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마무리하며 카드 한 장을 건넸다.“무슨 일 생기면 사람 시켜서 우리에게 연락해요.”양지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그러면 이만 갈게요.”양창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손을 흔들고는 돌아섰다.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양지원은 양석진과의 인연이 겨우 닿았다가 다시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사실 주차장까지 배웅할 수 있었지만 마음을 다잡을 용기가 부족했고 감정이 넘쳐흘러 억누를 자신이 없었다. 만나더라도 결국 아무 의미 없었다.복도에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보석 상자를 꼭 쥔 채 땀에 젖은 채로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밖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하지만 양지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가까워질수록 그녀에게는 짐이 될 뿐이었다. 양석진은 승승장구했지만 그만큼 그의 위험도 커졌다. 몇 년 후에는 그녀를 잊고 집안과 어울리는 명문가의 딸과 결혼해 그의 출세에 도움이 될 것이다.그녀는 심혜설을 떠올리며 그들이 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는지 궁금해했다.양지원은 심혜설을 싫어했지만 심혜설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며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을 것이다.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거실 소파에서 잘게. 필요하면 날 불러.”양지원은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조용히 누워 그의 깊은 눈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정신을 차리고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며 다시 기뻐했다.밖은 조용했고 그녀는 그가 소파에서 자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소파가 너무 작으니 오빠가 침대에서 자고 내가 소파에서 잘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침대와 소파라는 말이 다소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석진은 정리를 마치고 잠이 든 듯했고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문이 닫혀 있었고 그녀는 그 문을 응시하며 문 너머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몸이 뻐근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새벽이 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거실에는 미세한 달빛만이 비치고 있었다.그는 소파에서 자고 있었고 옆으로 누워 몸을 살짝 웅크리고 있었다.양지원은 숨을 죽이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소파 옆으로 갔다.양석진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양지원은 소파 옆에 쭈그리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턱에 모기에게 물린 듯한 붉은 자국이 있었다.양지원은 살짝 한숨을 쉬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 특수한 구슬 형태의 약통을 가지고 다시 쭈그리고 앉아 그의 턱에 조심스럽게 발랐다.오래 머무를 수 없었기에 양지원은 양석
맞은편에 앉은 양혁수는 그녀의 긴 침묵에 점점 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또 내 말 안 듣고 밤늦게까지 일한 거죠?”“아니야.”대화가 시작되자 그녀는 자연스레 양혁수의 말에 휘말렸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그 존재를 숨기려 했다.“몇몇 어른들과 프로젝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너무 오래 얘기하게 돼서 널 깜빡했어.”“근데 목소리가 이상한 것 같은데요?”양지원은 그에게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코가 막혔어.”“약 먹었어요?”“먹었어.”“믿을 수 없어요. 나중에 조 비서한테 직접 확인해 볼 거예요.”‘녀석, 예의가 없네. 내가 비서를 조 비서라 부르는 걸 흉내 내다니.’“아팠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급하게 오지 마요. 괜찮아지면 차 타고 오세요.”양지원은 그의 말에 감동하여 말했다.“난 괜찮아. 내일은 안 돌아가고 모레 돌아갈게. 너 내 생일 케이크 만든다고 했지? 내가 돌아가면 같이 만들자.”“흥.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알겠어, 알겠어. 너 대단해”양혁수와의 통화를 마치자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양지원은 전화를 끊고 나서 양석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양석진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말했다.“케이크 만들 줄 알아?”양지원은 그가 그 부분에 집중하는 것에 조금 놀랐다. 사실 그녀는 케이크를 만들 줄 몰랐고 양혁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겨우 케이크 반죽에 크림을 바를 정도였다.“방금 배웠어요.”그녀는 체면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양석진은 약간 관심 있는 표정으로 등을 기대며 물었다.“혁수를 위해 배운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가끔 혁수에게 간단한 쿠키나 타르트를 만들어줘요.”‘어차피 거짓말을 했으니 좀 더 과장해서 말해야지.’양석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쿠키?”“네. 틀로 찍어내기만 하면 돼요. 아주 간단해요.”양지원이 말했다.양석진은 고개를 숙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