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만둣국을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웠다.배를 두드리면 통통 소리도 날 것 같았다.시간은 많이 늦었지만 야식을 먹었으니 조금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그래서 몸에 걸쳐진 이불을 보며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으려 했다.이불로 온몸을 두른 안시연이 몸을 일으키자 연정훈이 바로 잡아당겨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버렸고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연정훈을 쳐다봤다.연정훈은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밥 먹고 바로 눕게?”“옷 갈아입고 산책 좀 하려고요.”연정훈은 아무 말없이 휴지를 꺼내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다.안시연은 그제야 입가도 닦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손을 뻗어 직접 닦으려는데 연정훈은 고집을 피우며 안시연이 어린아이인 듯 직접 닦아줬다.입가를 닦은 휴지를 버리고 연정훈은 그녀의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옷 입고 와.”안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그의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안방은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으며 방금까지 입고 있던 원피스는 당연하게도 더럽혀졌다.안시연은 안전하게 긴 소매와 긴 바지로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왔다. 맨발로 거실의 카펫을 밟는 기분이 좋았다.연정훈은 가만히 앉아 안시연을 지켜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안시연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생각해 보니 배가 그렇게 부른 것도 아닌 듯싶어 안시연은 안방으로 돌아가 씻고 누웠다.“먼저 잘게요.”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이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고 누운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을 품에 가뒀다.편히 자고 싶었던 안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전에 기사를 하나 봤는데요. 어느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밤새 팔베개를 해주다가 이튿날에 팔에 감각이 없어졌다는 거예요.”연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그 후에는 어떻게 됐는데?”“병원에서 가서 검사를 해보니 신경이 괴사되어서 팔을 잘랐대요.”그리고 그의 팔로 시선을 슬쩍 돌리며 말했다.“지금 우리 이 자세가 바로 그래요.”“.
연정훈이 이철수를 폭행한 사건은 알 만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건이었지만 소문이 크게 퍼지지 않았다.재벌가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로 둘째라면 서러운 사람들이었고 모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안시연은 부승희한테서 이철수가 아직 입원 중이고 연정훈은 병문안 한번을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병문안을 가지 않은 건 그렇다고 해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니까요. 그래도 이철수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승우를 통해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부탁하기도 했어요.”안시연은 묵묵히 주먹밥을 먹었다.그녀는 이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창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주임 사무실에서 호출이 왔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다름 아닌 연명걸이었다.연명걸은 아주 친절한 말투로 그녀더러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연 대표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시연 씨가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해요.”안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연명걸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이철수 씨의 사건은 저도 따로 알아봤는데 그날 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먼저 결례를 범한 것 같네요.”안시연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연명걸은 사무실 책상에 몸을 기댄 채로 마치 일상 대화를 하듯 말을 이어갔다.“연정훈이 폭행을 했다더라도 잘못은 이철수 쪽에 있으니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면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에요.”연명걸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연정훈도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러니 옆에 원수를 많이 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에요.”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하고 싶은 말씀 하세요.”연명걸이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솔직하게 말할게요. 연정훈 씨에게 대신 부탁드려주세요.”“부탁이요?”“네. 이제 그만 이씨 가문에 대한 억압을 멈추어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안시연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연정훈이 먼저 주먹
연명걸은 계획이 틀어지지 않도록 먼저 안시연에게 USB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USB는 암호로 잠겨 있었지만 전문 인력이 손만 보면 해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연명걸은 호텔 담당자를 지시해 안시연에게 전화하게 했다.“안시연 씨, 갑자기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젯밤 연회에 참석한 고객 중 한 분이 회사 USB를 유실하셨는데 카메라 확인 결과 안시연 씨가 무심결에 챙겨가신 걸 확인했습니다.”안시연은 전화를 받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연명걸이 이철수를 밀어내고 안시연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담았으며 특별한 물건은 기억나지 않았다.“지금은 회사에 있어 확인이 불가능하고 확인 후 저한테 소지품이 있으면 바로 퀵으로 보내드릴게요.”호텔 담당자는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안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통화를 종료했다.재고 조사 업무도 거의 막바지에 달하고 이제 경인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주임은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다.“함풍목재 경영은 그럭저럭해도 장부는 정말 아무 문제도 찾을 수가 없네요.”안시연도 동감이었다. 정말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여러 선배도 말을 보탰다.“이렇게 문제가 티끌 하나도 없는 장부는 처음이에요.”안시연은 선배를 바라보다가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그때 주임이 말했다.“아무 문제가 없는 건 좋은 일이지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어요. 어쩌면 내일이면 경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사무실은 환호성이 이어졌다.출장에 몸이 힘들었지만 수고비와 이어질 휴가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안시연도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오전 소현정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대충 뜻은 연정훈과의 관계가 부적절하니 빨리 끝내라는 것이었다.외할머니도 자주 전화를 걸어와 그녀가 보고 싶다고 전했다.안시연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일에 몰두했다.드디어 퇴근 시간 전으로 모든 업무를 끝마쳤다.주임이 휴가라고 외치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다.안시연은 바로 부승희의 연락을 받았는데 교외
의도와는 다르게 부승원의 비밀을 듣게 된 안시연은 빠르게 걸음을 멈춰 섰다.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부승희는 드롱의 전국 입점권을 따내고 기쁜 마음에 찻집에서 한턱을 내기로 했다.부승원과 한우빈을 제외하고 몇몇 낯선 얼굴도 보였다.찻집은 규모가 꽤 컸으며 저녁 식사는 그중 한 방으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작은 별장 같은 공간에서 커튼만 열면 전체 차밭이 보였다.저녁노을이 진 차밭은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안시연이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사람이 자리에 착석했고 연정훈의 왼쪽 자리만 비어 있었다.부승희가 그녀를 그쪽으로 밀었다.“빨리 앉아요. 안시연 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고요.”안시연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오늘이 축하 파티인 줄도 모르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다음번에 보충해도 될까요?”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편한 대로 해요.”이어 웨이터가 요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웨이터들은 모두 선명한 이목구비에 완벽한 비율을 자랑했는데 안시연은 속으로 평범한 웨이터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이 웨이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옆에 앉은 여자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그 여자는 바로 아까 부승원과 함께 있었던 소녀였는데 안시연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활짝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귀여운 송곳니가 톡 튀어나왔다.“...”역시 19살의 소녀는 달랐다.이런 생각에 안시연은 또 몰래 부승원을 살폈다.안시연은 부승원이 연정훈의 친구 중에서 가장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사람을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앞접시에 고기 한 점이 놓였다.“얼굴에 금이라도 붙었어?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불만이라는 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시연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려 연정훈에게 말했다.“귀엽잖아요.”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부승원이 귀여워?’“저 아이는 부승원 변호사님 여자 친구인
안시연은 심장이 덜컹했다.하지만 우 대표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고 술잔을 들어 짠을 요청했다.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안시연도 예의를 갖춰 응했다.술잔을 내려 두고 안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연정훈은 이런 그녀의 모습에 두 사람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도 노래 부르라고 시키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먹어.”안시연이 깜짝 놀라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는 가끔 안시연은 왜 이렇게 눈치가 무딜까, 라는 생각을 했다. 연정훈이 직접 음식을 앞접시에 덜어주며 챙기는데 감히 누가 그녀에게 장기 자랑을 시킬 수 있겠는가?평소 생각은 많아 보이는데 이런 쪽으로는 참 무딘 모양이었다.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식사 자리에 꼭 장기 자랑을 해야 해요?”“그건... 다른 사람들의 룰이야.”“멈춰 달라고 할 수 없어요?”“안돼.”안시연은 조금 실망했다.“난 내 사람만 지키지 다른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그래도 연정훈 씨가 말하면 다 들을 텐데요?”연정훈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누가 그래?”“꼭 말해줘야 알아요? 이철수 씨를 폭행하고 사과도 안 하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오히려 이철수 쪽에서 사과하고 싶다고 난리던데.”연정훈은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물었다.“지금 폭행한 사건을 비꼬는 건가?”안시연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아니요. 그냥 연 대표님은 전지전능하고 못 하는 게 없다는 소리네요.”세상에 어떤 남자가 제 애인이 자신을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걸 싫어할 리가 있겠는가?당연히 연정훈도 예외는 아니었다.물을 한 모금 들이켠 연정훈은 계속해서 수육을 앞접시로 옮겼다.벌써 세 앞접시에 가득 찬 수육을 보며 안시연은 어이가 없어졌다.연정훈이 낮은 소리로 푸념했다.“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왜 넌 꼭 내가 빌런이라는 것처럼 말하지?”안시연은 심장이 찌르르했다.‘정말 모두 날 위해서 그런 거라고?’안시연이 고개를 들었다.“그럼 이씨 가문을 억압한 것도 모두 어젯밤 이철수가... 날 괴롭
소녀가 입을 여는 순간 모든 사람이 동작을 멈췄다.마침, 국을 입에 넣으려던 안시연도 멈춰 섰다.“요로레이디오레이디오로우디오로우디오레이디오레이우디리...”최고조에 달하고 안시연은 참지 못하고 입에 넣은 국을 뿜었다.풉...하지만 다행히 손 빠르게 냅킨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식사 자리에도 웃음소리가 터졌다.이 업계에서 꽤 입지를 다진 사람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부승희도 깔깔 웃더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그쪽은 이름이 뭐예요?”소녀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반우희입니다.”“어느 희를 써요?”“기쁠 희예요.”부승희는 눈을 반짝이더니 잔을 번쩍 들었다.“우리 완전 자매 같네요. 저도 기쁠 희 돌림이거든요.”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아쉽게도 안시연 씨는 저희랑 같은 돌림이 아니네요.”“그러게요. 아니면 세 자매라고 해도 믿겠어요.”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이승우는 요들송이 아직도 웃긴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특히 요로레이디 이 부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부승원에게 물었다.“대체 어디에서 만난 천재 소녀야?”반우희는 칭찬인 줄만 알고 바보같이 웃었다.“에이 아니에요.”“...’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웃음을 터뜨렸다.부승원은 굳은 얼굴로 설명했다.“내 피고인이야.”안시연도 다른 사람들처럼 두 사람의 사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피고인이기에 약속 자리에도 동행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옆에 앉은 연정훈은 다른 사람들 과는 달리 아주 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정말 인내심도 좋아.’방금 부승원도 눈썹을 찡그리며 겨우 표정을 숨겼으나 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에 미소를 살짝 올릴 뿐이었다.“안 웃겨요?”안시연이 몰래 물었다.“웃겨.”“...”‘그런데 왜 웃지 않는 걸까?’안시연이 눈을 깜빡이며 연정훈을 가만히 쳐다보자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체 지금은 또 뭐가 웃긴 거야?’연정훈은 아주 잠깐 웃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연정훈이 안시연의 앞접시에 수육을 덜어주던 순간부터 이승우는 안시연을 주시하고 있었다.연정훈의 시선을 받은 이승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수습했다.“우희 동생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으니 우리도 한번 제대로 보여줘야죠.”부승희가 힐끗 노려보며 물었다.“장기가 있긴 하고?”“난 늘 장기 자랑의 피날레를 장식했지.”부승희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오바 하긴.”“자자.”이승우가 박수를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술병을 하나 들어 테이블 중간 빈 공간에 올리며 말했다.“자 이제 이 술병이 돌아가다가 멈추는 순간 당첨된 사람이 장기 자랑을 하는 겁니다.”반우희가 손을 들었다.“여성이면 제외요.”“좋아요!”이승우는 통쾌하게 대답했다.“남성분들만 당첨하겠습니다.”옆에 앉아 있던 다른 여자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오늘 정말 귀한 장면 보겠어.”허 대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무덤덤한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이 연정훈을 슬쩍 바라보다가 몰래 물었다.“장기 있어요?”연정훈은 물로 목을 축였추렸고 대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은 행여나 연정훈이 당첨돼 장기를 강요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연정훈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장단에 맞춰줄 리가 없었다.그리고 연정훈이 난처해지면 그의 주변 사람들만 더 힘들어졌다. 예를 들면 안시연이랄까.그래서 안시연은 아까보다 더 긴장해졌다.이승우는 벌써 술병을 돌리려고 했고 여자들은 그의 주변에 둘러싸여 당첨될 사람을 기대했다.그렇게 현장은 어수선해졌다.안시연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연정훈을 몰래 살폈다.‘진짜 괜찮은 게 맞나?’조급해 보이는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신을 비웃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되었다.연정훈이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난 장기가 없어.”안시연이 소란스러운 중간 테이블을 보며 물었다.“그럼 어떡해요?”연정훈은 여전히 침착하게 대답했다.“네가 바라던 상황이잖아.”
연정훈은 어깨가 으쓱했으나 부승원은 난처해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반우희면 몰라도 어느새 이승우마저 한술 더 떠서 뭘 할 거냐고 재촉했다.부승원의 얼굴은 아주 싸늘했다.“뭐 재판하는 거라도 보여줄까?”“좋아.”이승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네가 재판장 해. 내가 희생해서 피의자 역 할게.”부승희가 이승우를 슬쩍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성추행범?”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다른 여자들에게 물었다.“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할까요?”여자들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내 마음에 불을 지른 방화죄?”“그렇죠.”부승희가 입을 삐죽였다.반우희는 행여나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기라도 할까 봐 부승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부승원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은 반우희가 정말 눈치가 무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좋은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부승원 변호사님은 서예를 잘하시니 부승희 씨에게 따로 서예 액자를 만들어 선물하시면 어떨까요? 오늘 이 자리도 부승희 씨의 축하 파티니까요.”부승희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오빠가 서예 하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안시연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전에 변호사님 사무실 한번 다녀왔는데 액자에 작게 부승원 씨 이름이 새겨져 있었어요.”“아, 난 또.”이승우는 연정훈의 눈치를 보다가 일부러 안시연을 놀리듯 말했다.“엄청 세심한 스타일인가 봐요.”“우연히 봤을 뿐이에요.”“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세심한 건가요? 아니면 부승원 변호사한테만 세심한 건가요?”안시연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이게 대체 무슨 질문인 건가?’이승우가 계속해서 물었다.“저랑 부승원 두 사람 중에서 누구랑 더 친해요?”안시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그러나 이승우가 먼저 대답했다.“당연히 나, 맞죠?”안시연은 또 부인할 수가 없었다.“그럼 내 장기가 뭔지는 알아요?”“...”이승우는 불 난 집에 계속 부채질을 했다.“아님 나 말고 연 대표님 장기 하나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