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흔살 아줌마 황미영, 눈 떠보니 하이틴 영화 속 퀸카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내가 들어온 몸이 재벌 남주와 계약연애 끝에 해피엔딩을 맞는 여자라는 것. 원작대로만 가면 된다. 예쁘게 웃고, 사랑받고, 화려한 결말을 받으면 된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남주는 생각보다 더 재수 없고, 학교는 생각보다 더 시끄럽고, 해피엔딩은 생각보다 더 찝찝했다. 학생회장 선거 시즌, 학교를 뒤흔드는 스캔들, 계약연애 상대 에이든과 안전한 선택지처럼 보이는 이안, 그리고 어머니의 사고 뒤에 숨겨진 상류층의 비밀까지. 모두가 브리아나 로즈가 누구를 고를지 지켜보는 동안, 황미영은 점점 알게 된다. 정해진 해피엔딩은 정말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View More박수가 채 잦아들기도 전에, 바네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주 자연스럽게 프로그램 북을 접어 무릎 위에 올리고, 허리를 곧게 편 채 객석 사이를 빠져나왔다. 누가 봐도 단정하고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다만 걸음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빨랐다. 힐 끝이 바닥을 찍는 소리도 유난히 날카로웠다.강당 바깥 복도는 무대 안보다 훨씬 어두웠다. 다음 후보 발표가 이어지고 있었는지, 안쪽에선 희미하게 마이크 울림이 새어 나왔다. 바네사는 운영 부스 뒤편 좁은 복도로 몸을 틀었다.올리버는 이미 거기 나와 있었다.헤드셋을 목에 건 채, 서류철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 서 있었다. 얼굴은 벌써 하얗게 질려 있었고, 안경 너머 눈빛은 바닥만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실수한 사람의 얼굴이었다.바네사는 그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아주 낮게 물었다.“뭐 한 거야?”올리버 어깨가 움찔했다.“바, 바네사…”“내가 지금 이름 부르라고 했어?”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해서 더 무서웠다.올리버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미안해. 나… 나는…”“미안?”바네사가 짧게 웃었다.그 웃음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넌 그게 지금 미안하다고 끝날 일로 보여?”올리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바네사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에게선 달콤한 향수가 났고,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눈빛만큼은 전혀 아니었다.“내가 뭐라고 했지?”“……”“실수처럼만 보이면 된다고 했잖아.”올리버 목젖이 천천히 움직였다.“근데 넌 그것도 못 했어.”“나… 못 하겠더라.”올리버가 겨우 말했다.“그냥… 화면에 뜨는 순간… 너무…”“너무?”바네사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불쌍해 보였어?”올리버 얼굴이 굳었다.바네사는 그 반응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올리버.”그녀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게 오히려 더 잔인했다.“착각하지 마.”바네사는 손끝으로 올리버 서류철 끝을 톡 건드렸다.“너 지금 나한테 실수한 거야
첫 번째 후보가 무대에 올랐다. 박수 소리가 잔잔하게 번졌다. 교장은 앞줄에서 프로그램 북을 정리했고, 재단 관계자들은 다리를 꼬고 앉아 후보자 이름 옆에 작은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선 학생은 목소리를 한 번 떨었지만, 곧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브리는 무대 계단 옆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숨을 골랐다. 원고 첫 장은 이미 손에 땀이 배어 조금 눅눅해져 있었다. 종이 끝이 손가락에 달라붙는 감각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강당 안은 시원했는데, 브리 손바닥만 자꾸 뜨거워졌다. 두 번째 후보, 세 번째 후보. 줄리안은 예상보다 잘했고, 에밀리는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케빈은 중간에 한 번 원고를 놓쳤지만 웃으며 넘겼다. 학생들은 그때마다 예의 바르게 박수쳤다. 브리는 무대 뒤 검은 커튼 틈으로 객석을 힐끗 봤다. 바네사는 후보석 끝에 앉아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채 손끝으로 프로그램 북 귀퉁이를 넘기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였다. 너무 여유로워서 오히려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운영 부스. 유리창 너머로 올리버가 보였다.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등을 잔뜩 굽힌 채 양손을 키보드 가까이에 두고,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누르지 못하는 사람처럼 멈춰 있었다. 브리는 미간을 좁혔다. ‘왜 저래.’ 그 순간, 객석 쪽에서 누군가 낮게 휘파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브리는 시선을 돌렸다. 오스틴이었다. 그는 에이든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프로그램 북보다 후보석 쪽을 더 열심히 보고 있었다. 보기 좋은 정장 대신 교복 셔츠 위에 재킷만 대충 걸친 차림이라 혼자 약간 둥글둥글한 불량 모범생 같았다. 볼살이 웃을 때마다 먼저 들썩였고, 표정은 사람을 놀리기 직전인 얼굴이었다. 오스틴은 옆자리 에이든에게 아주 작게 몸을 기울였다. “야.” 에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 지금 브리아나 차례 기다리는 거 티난다.” “닥쳐.” “아니, 진짜로.”
다음 날, 대회 당일. 학교 강당은 아침부터 축제 분위기였다. 무대 위엔 푸른색 커튼이 반듯하게 걷혀 있었고, 천장에는 스피치 대회 현수막이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계단식 객석 아래로는 후보자 이름이 적힌 좌석 표지가 줄지어 놓여 있었고, 재단 관계자들이 앉을 앞줄엔 작은 생수병과 프로그램 북까지 가지런히 준비돼 있었다. 브리는 강당 입구 앞에 서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손엔 원고가 들려 있었지만, 그 종이는 아침부터 한 번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어젯밤 분명 문장들이 잘 흘렀는데, 막상 무대가 눈앞에 오자 단어들은 전부 낯설어진 것 같았다. 하얀 종이 위 활자들이 남의 얘기처럼 보여서 더 이상했다. “브리.” 뒤에서 로버트가 불렀다. 브리는 퍼뜩 돌아봤다. 로버트는 늘 그렇듯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안경 너머 눈빛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긴장되나?” 브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조금 같지는 않군.” 그 말에 브리는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나와서 다행이었다. 입이 마르도록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로버트는 브리 손에 들린 원고를 한 번 보고, 다시 얼굴을 봤다. “무대에 올라가면 다 잊어버릴 수도 있어. 순서도, 문장도, 준비한 표정도.” 브리는 침을 삼켰다. “그럼 어쩌죠?” “그럴 땐 기억하게.” 로버트가 낮게 말했다. “왜 이 글을 쓰고 싶었는지.” 그 한마디에 브리 손끝이 아주 조금 풀렸다. 로버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른 후보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한 위로도, 노골적인 격려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더 힘이 됐다. 브리는 원고를 가슴 쪽으로 붙여 안았다. 무대 아래 후보자 대기석엔 이미 몇몇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줄리안은 넥타이를 세 번째 고쳐 매는 중이었고, 에밀리는 입 모양으로 원고를 외우고 있었다. 케빈은 겉으론 여유로운 척했지만, 무릎을 떠는 걸 보면 긴장한 게 분명했다.
차가 멈춘 곳은 학교 근처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일식집 앞이었다.문이 열리자 안에서 우렁찬 구호가 터져 나왔다.“이랏샤이마세!”브리는 그대로 멈칫했다.안쪽 바 테이블 너머로 셰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열댓 명쯤 되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조명은 은은했고, 실내엔 진한 육수 냄새가 감돌았다.브리는 에이든을 돌아봤다.“야.”“왜.”“이건 컵라면이 아니잖아.”“비슷해.”“어디가.”에이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면이잖아.”브리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직원이 정중하게 둘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좁고 긴 바 자리였다. 셰프들이 바로 앞에서 면을 삶고, 육수를 따르고, 토핑을 올리는 게 다 보였다.브리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렇게 좁아터진 의자 말고 한강공원에서 라면이나 땡기고 싶다고.’하지만 막상 첫 그릇이 나오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얇은 면부터 두꺼운 면, 맑은 육수부터 진한 미소 베이스까지, 조그맣게 나뉜 여러 종류의 라면이 차례대로 나왔다. 진짜로, 말도 안 되는 라멘 오마카세였다.브리는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렸다.“이건 또 뭐야…”“먹어봐.”브리는 조심스럽게 한입 먹었다.그리고 잠깐 눈을 크게 떴다.“…맛있네.”에이든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그러니까.”브리는 그다음 그릇도 먹고, 그다음 것도 먹었다. 마지막엔 후식처럼 작은 말차라떼까지 나왔다. 위에 얇은 꽃잎 모양 장식이 얹혀 있었다.브리는 컵을 내려놓고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고마운데.”“응.”“난 다음엔 그냥 분식집 가서 라면 먹고 싶어.”에이든이 그대로 멈췄다.브리는 턱을 괸 채 솔직하게 덧붙였다.“이렇게 좁은 의자 말고, 한강공원 같은 데서. 김밥이랑 같이.”에이든은 몇 초쯤 브리를 빤히 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야야. 됐어. 또 뭘 해.”브리가 손을 내밀었지만 에이든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기 코리아타운 분식집, 내일 저녁 예약 가능한 데 전부 알아봐.”브리는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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