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어깨가 으쓱했으나 부승원은 난처해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반우희면 몰라도 어느새 이승우마저 한술 더 떠서 뭘 할 거냐고 재촉했다.부승원의 얼굴은 아주 싸늘했다.“뭐 재판하는 거라도 보여줄까?”“좋아.”이승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네가 재판장 해. 내가 희생해서 피의자 역 할게.”부승희가 이승우를 슬쩍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성추행범?”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다른 여자들에게 물었다.“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할까요?”여자들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내 마음에 불을 지른 방화죄?”“그렇죠.”부승희가 입을 삐죽였다.반우희는 행여나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기라도 할까 봐 부승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부승원은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안시연은 반우희가 정말 눈치가 무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좋은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부승원 변호사님은 서예를 잘하시니 부승희 씨에게 따로 서예 액자를 만들어 선물하시면 어떨까요? 오늘 이 자리도 부승희 씨의 축하 파티니까요.”부승희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오빠가 서예 하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안시연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전에 변호사님 사무실 한번 다녀왔는데 액자에 작게 부승원 씨 이름이 새겨져 있었어요.”“아, 난 또.”이승우는 연정훈의 눈치를 보다가 일부러 안시연을 놀리듯 말했다.“엄청 세심한 스타일인가 봐요.”“우연히 봤을 뿐이에요.”“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세심한 건가요? 아니면 부승원 변호사한테만 세심한 건가요?”안시연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이게 대체 무슨 질문인 건가?’이승우가 계속해서 물었다.“저랑 부승원 두 사람 중에서 누구랑 더 친해요?”안시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그러나 이승우가 먼저 대답했다.“당연히 나, 맞죠?”안시연은 또 부인할 수가 없었다.“그럼 내 장기가 뭔지는 알아요?”“...”이승우는 불 난 집에 계속 부채질을 했다.“아님 나 말고 연 대표님 장기 하나
안시연이 대답했다.“슈베르트의 ‘세레나데’입니다.”“대학교 때 배운 거야?”안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답했다.“초등학교 때 이웃에 음악 선생님이셨던 오빠가 있었어요. 그 오빠께서 조금 가르쳐주셨죠.”“참 좋은 이웃이었네.”연정훈이 웃으며 물었다.“지금도 그걸 할 수 있어?”안시연은 고개를 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물론이죠.”그리고 약간 자랑스럽게 덧붙였다.“그 오빠가 저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해 줬어요.”“평소에는 잘 몰랐어.”안시연은 연정훈이 걱정하는 줄 알고 자신 있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 곡은 잘할 수 있어요.”안시연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연정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책임질게요.'연정훈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연정훈은 담담하게 말했다.“너무 자만하지 마. 상에는 몇명 없기에 무조건 내 차례가 곧 올 거야.”“알고 있어요.”안시연은 말하면서 살짝 하모니카를 테스트해 봤다.위쪽에서는 부승원은 글씨를 완성했다.[재물이 넘쳐흐르길.]부승희는 매우 만족하며 크게 칭찬했다.여자들은 매우 흡족해하며 부승원에게 한 폭 더 써 달라고 졸랐다. 집에 가서 액자로 만들겠다고 했다.안시연은 반우희를 힐끔 보았다.반우희는 닭발을 열심히 뜯고 있었다.안시연의 눈에 비친 반우희는 부승원의 글씨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부승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이승우는 사람들에게 술을 한 잔 더 권한 후 다시 룰렛을 돌렸다.안시연은 하모니카를 손에 쥐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그러나 이번에도 룰렛의 화살표는 연정훈이 아닌 이승우에게 멈춰 섰다.이승우는 대범하게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내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를 한 곡 부르기 시작했다.이승우는 타고난 목소리 덕분에 평소 말을 할 때조차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을 정도였다.진지하게 노래를 부르자 그 완성도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높았다.안시연은 박수를 칠 뻔했고 다른 여자들은 이미 감탄하며 이승우에게 몰두하고 있었다.부승희
맑고 청명한 샘물 같은 음악이 흐르자, 밤이 깃든 푸른 자연 속에 우아함이 감돌았다.플루트를 연주하는 남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보석과도 같았다.많은 여자가 마음을 빼앗긴 채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러움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안시연은 그 시선에 개의치 않고 오롯이 음악에 집중하며 자연스럽게 손에 든 하모니카를 들어 연정훈의 플루트 소리에 맞추어 연주를 시작했다.연정훈은 잠시 멈추고 느린 속도로 안시연에게 주도권을 넘기며 의도적으로 호흡을 맞추었다.두 악기의 소리가 섞이자, 예상 밖의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부승희는 손으로 턱을 괴고 완전히 음악에 빠져들었다.세속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던 모임이 한순간에 품격 있는 자리가 되었다.연주가 끝날 무렵에 허 대표가 말했다.“하모니가 아름답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군요.”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안시연은 연주를 마쳤음에도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이렇게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허 대표님의 말을 듣고 안시연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제가 잘 못 불어서 연 대표님께 폐를 끼쳤어요.”“무슨 그런 말씀하세요.”부승희가 안시연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시연 씨와 연정훈은 완벽한 호흡이었어요!”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뻤다.연정훈은 플루트를 간단히 닦아 상자에 넣었다.안시연은 고개를 돌려 플루트를 한 번 더 보았다. 안시연은 그 플루트를 가져가고 싶었다.모두가 골고루 공연을 마쳤고 남녀 모두 빠짐없이 참여했다.부승희는 흡족하게 술잔을 들어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식사는 마침내 끝을 향해 갔고 식은 음식이 치워진 자리에 따뜻한 새 요리가 다시 상에 올랐다. 남자들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여자들은 그 곁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안시연은 잠시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집사를 불러 세운 그녀는 조용히 부탁을 전했다.“무엇이 필요하십니까?”집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시연은 조용히 자신의 부탁을
안시연이 그 플루트를 갖고 싶어 했던 이유에는 은밀하고 애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플루트 소리가 좋은 건 분명했지만, 연정훈이 불었던 플루트 그들과 함께 연주했던 악기라는 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연정훈이 그 점을 콕 집어 말하자 안시연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안시연은 시선을 떨구고 상자를 꼭 끌어안으며 억지로 변명했다. “다른 의미는 없어요. 그냥 플루트 소리가 좋아서 그랬어요.”“불 줄 알아?”“...아니요.”“그러면 플루트는 어떻게 소리가 나지?”안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표정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의도적으로 손을 상자 쪽으로 뻗었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상자를 보호하려고 몸을 움직였다.연정훈이 가볍게 웃었다.그 웃음소리는 아주 미세했지만, 안시연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마치 그가 안시연을 비웃는 것 같아서 안시연의 얼굴은 더 빨갛게 물들었다.차라리 플루트를 가져오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다.‘연정훈이 불었다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닌데...’못났다.그녀는 속으로 자신을 타박했다.마침 화가 나려던 찰나, 연정훈이 안시연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불 줄 몰라도 괜찮아.”안시연은 잠시 멍해져 연정훈을 올려다보았다.연정훈이 말했다.“경인시에 돌아가면 내가 가르쳐 줄게.”안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연정훈의 눈을 마주치자, 진지한 눈빛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안시연은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때도 연정훈은 이렇게 깊이 안시연을 바라보았었다.“이미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시간이 없어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서 경인시에 돌아가면 집에 제시간에 들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이상한 사람 만나지 마.”안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마...양혁수일 것이다.왠지 모르게 안시연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연정훈이 질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안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다른 사람이 했으면 별거 아니었을 말이지만, 진중하고 성숙한 이미지의 연정훈이 이런 말을 하니 너무 웃기게 들렸다.게다가 연정훈은 나비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나비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을 삐죽거리며 침을 뱉으려 했다.연정훈은 재빠르게 손을 뻗어 나비의 입을 막았다.안시연은 어이없었다.“?”그리고 이번엔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웃었다.나비는 성인 알파카답게 발버둥을 치며 연정훈에게 들이받으려 했다.안시연은 급히 말리며 연정훈에게 웃으며 말했다. “정훈 씨가 영준이를 너무 잘 챙기니까, 얘가 질투하는 걸지도 몰라요.”연정훈은 나비를 힐끔 쳐다보았다.나비는 두 번이나 침을 뱉으려 했으나 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뱉게 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이승우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한가롭게 말했다. “누가 질투하는 건지는 모르는 일이지.”안시연이 이승우를 흘낏 쳐다보며 물었다.“뭐라고요?”이승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 성이 양 씨라고 들었어요.”안시연은 부승희가 말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가 부승희에게 잠깐 언급했던 일이었다.이승우가 혀를 차며 말했다.“양아버지가 되는 건 쉽지 않겠어요.”안시연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말없이 영준이를 계속 돌보고 있었다.연정훈이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분명했고 나비는 일부러 연정훈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시연은 둘이 평화롭게 지내길 기대하지 않았고 나비를 데리고 나가 사료를 먹이기로 했다.중간에 허 대표가 연정훈과 대화를 나누러 왔고 부승희는 안시연에게 야경을 보자고 불렀다.반 시간 뒤, 안시연이 돌아오니 나비가 연정훈 앞에서 비틀거리다 쿵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연정훈의 다리 위에 떨궜다.안시연은 당황했다.이승우가 말했다.“오호. 양아버지한테 큰절을 올리네?”안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급히 앞으로 다가갔다.연정훈은 얼굴을 찡그리며 나비의 머리를 들어 올리고 물었다. “
안시연이 손으로 가볍게 톡 건드리자, 단추는 쉽게 풀렸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안 걸려 있었어요.”연정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아까는 걸려 있었어.”안시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실밥이 있는지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려 했다. 혹시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안시연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바람에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그 순간, 연정훈은 안시연이 불편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손을 들어 안시연의 허리 아래, 정확히는 가슴 옆 부분을 살짝 받쳐 주었다.안시연도 얇은 셔츠를 입고 있었기에 연정훈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안시연은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한 번 핥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목깃을 만지며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 끝으로 실밥을 찾아냈다.“정말 있네요.”안시연은 연정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한테 거짓말하겠어?”안시연은 잠시 생각하다 실밥을 바로 끊으려 했다.처음엔 한 손으로는 잘되지 않아 두 손을 사용했지만,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다.그때 연정훈이 안시연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됐어. 내가 옷을 벗을 테니까, 그때 해. 실밥 하나 끊으려고 얼굴이 이렇게 붉어질 필요는 없잖아.”“모르는 사람은 마라톤이라도 한 줄 알겠어.”안시연은 연정훈의 농담에 얼굴이 더 붉어졌고 조용히 말했다.“그럼, 옷을 벗어요. 가위로 바로 잘라드릴게요.”“이 옷은 드라이해서 내일 입어야 해. 망치지 마.”“실밥만 자르면 돼요.”안시연은 말하며 일어섰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에 맞춰 셔츠를 벗어 주었다.방 안에 큰불이 켜져 있었고 비록 둘이 함께한 시간은 많았지만, 안시연은 연정훈의 근육질 가슴을 보고 살짝 얼굴을 돌렸다.안시연을 연정훈의 셔츠를 들고 가위를 찾으면서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연정훈은 순간, 안시연의 모습에서 아내 같은 따뜻함을 느꼈다.공기 속에는 부드러운 온기와 함께
나비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단순히 취해서 토한 것이었다.안시연은 나비를 안전하게 동물병원에 맡기고 다음 날 다시 데리러 가기로 했다.소란을 피우느라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어 있었다.병원 밖으로 나오고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찻집으로 돌아오니, 차향이 가득한 상쾌한 분위기였다.안시연은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찻집 안을 걸으면서 냄새를 없애는 게 좋겠어요.”“차라리 빨리 돌아가서 씻는 게 좋겠어.”연정훈은 그렇게 말했지만, 안시연의 제안대로 찻집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밤이 깊어 정원사들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다.가로등이 켜져 있었지만, 모든 구석을 비추지는 못했다.가장 어두운 구간에서는 손전등이 필요했다.안시연은 걷다 보니 어느새 연정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차나무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뒤를 돌아보니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안시연은 약간 무서워졌다.고개를 돌려보니 연정훈이 멀리 있는 것 같아 안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따라갔다.그러다가 실수로 연정훈의 뒤꿈치를 밟고 말았다.연정훈은 방비할 틈도 없이 안시연에게 밟혀 신발이 벗겨졌고, 맨발로 진흙을 밟으며 미끄러운 땅에 휘청거렸다. 결국 연정훈은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뒤따르던 안시연도 피하지 못했다넓은 차밭에서 두 번의 쾅 소리만 들렸다.작은 찻잎들이 흔들리며 흙 속으로 떨어졌고, 풀숲의 새들이 놀라 날아갔다....긴 정적이 흘렀다.안시연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섰다.안시연의 시야는 캄캄했고 연정훈을 부축하려고 어리둥절하게 손을 뻗었다.“그만둬.”차분하면서도 무기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안시연은 대답하며 손을 거두었다.연정훈은 풀밭에 누워 머리 위의 달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편안히 누웠다.안시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여기 깨끗하지 않아요.”연정훈이 대답했다.“그냥 좀 쉬자.” 안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안시연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휴대폰을
안시연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연정훈에게 다가가 입술을 맞추었다. 두 손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감은 채 안시연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입술이 닿는 순간, 연정훈은 자연스럽게 안시연의 뒷머리에 손을 얹고 안시연을 감싸 안으며 주도권을 잡았다.안시연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 세상이 연정훈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에 떠 있던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연정훈은 조심스럽게 외투를 안시연의 머리 뒤에 놓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 입맞춤을 했다.“음...”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의 부드러움을 받아들이며 숨결을 맞췄다. 주변을 둘러싼 차나무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열정은 마치 풀밭 위로 끝없이 번져 나갔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뜨겁게 키스했다.입술이 스치고 코끝이 닿으며 두 사람의 숨결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안시연은 몸속 깊은 곳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연정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안시연은 자연스럽게 몸을 밀착시키며 연정훈의 다리를 따라 움직임이 전해졌다.연정훈의 손길이 점점 더 대담해지며 안시연의 옷 아래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자유롭게 탐색했다.안시연은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한 숨소리를 내었고 고양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연정훈은 안시연이 흥분한 것을 알아차렸다.연정훈은 장난스럽게 멈추며 손에 힘을 주고 겁을 주듯 말했다.“누군가 와서 보면 어떡해요?”안시연은 눈을 겨우 뜨고 그 말에 놀란 듯 연정훈의 품에 파고들었다. 연정훈의 목을 감싼 손이 더욱 강하게 조여졌고 안시연은 다시 키스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도발에 이끌리며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외투로 그녀를 감싼 채 일어섰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살짝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신발은 찾을 수 있을까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은 그가 맨발로 돌아갈까 봐 걱정하며 입술을 적시고 신발을 찾아주겠다고 말하려 했다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