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안시연이 이제 연정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렸다.가만히 누워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달래려 몸을 일으킨 연정훈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너무 흥분한 그녀는 속에 담아둔 모든 걸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안시연은 호흡이 가빠지고 안색도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연정훈은 일단 침착하게 침대에서 내렸다.그리고 티슈를 챙겨 안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안시연은 고개를 돌렸고 울음을 삼키며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연정훈은 오늘을 이렇게 넘겨 보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안시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그러나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연정훈은 그녀를 더 꽉 안았다.두 사람의 체격 차이에 안시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안시연은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어깨며 등이며 내리쳤다.연정훈은 묵묵히 그녀의 분노를 받아주며 안시연이 진이 빠지자 말없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다 내 잘못이야. 널 두고 가는 게 아니었어.”안시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연정훈의 셔츠는 벌써 안시연의 눈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또 눈물이 쏟아졌다.‘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기나 할까?’‘또 연정훈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는 알까?”안시연은 너무 무서웠다. 연정훈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까 무서웠고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까 두려웠다.“나쁜 자식.”“나쁜 놈.”“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어느새 안시연은 입 밖으로 욕을 꺼냈다. 한바탕 화를 내고 나니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또 연정훈을 꽉 껴안았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또 연정훈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인 것처럼 꽉 껴안았다.연정훈은 자신을 의지하는 안시연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고개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안시연은 흐느끼며 그의 품에 기댔다.병실 안은 어느
이승우가 부승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눈치 없긴. 안시연 씨 마음속엔 연정훈밖에 없거든.”“그게 뭐? 정훈 오빠 마음속에 안시연 씨는 있고?”“그래. 그게 문제이긴 하지.”이승우는 연정훈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어쩔 수 없이 네가 양보해야겠다. 두 사람이 죽고 못 사는데 네가 놔줘야지.”연정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무섭게 이승우를 노려보았다.이승우는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며 안시연을 보러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가 떠나고 이승우가 바로 진지한 얼굴로 연정훈에게 물었다.“지금은 무슨 상황인 거야?”“시간이 필요하대.”“아니. 너랑 안시연 씨가 무슨 상황이냐고!”이승우는 어이가 없어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연정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러자 이승우가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지금 내가 보기엔 안시연 씨와 양혁수 사이 언젠가 불이 붙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상황이야.”연정훈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리고 안시연이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날 밤이 다시 떠올랐다.과거 소현주의 배신에 연정훈은 역겨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안시연이 자신을 떠나고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부승희 말도 틀린 건 아니야.”이승우가 다시 말을 돌렸다.“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니야? 네가 뭐 안시연 씨를 좋아하거나 그러진 않았잖아.”연정훈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누가 그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이승우는 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반짝이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자! 방금 한 말 다시 해봐.”“...”이승우는 카메라를 켜고 그의 얼굴을 촬영했다.“안시연 씨가 얼마나 좋은지 말해봐. 소현주랑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있어?”연정훈이 핸드폰을 퍽 밀치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소현주랑 비교하지도 마.”이승우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안시연이 소현주랑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야. 아니면 소현주가 안시연이랑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야?”“...”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
저녁에.연정훈은 안시연을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양씨 가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양석진의 오른팔인 양창수만 병원에 있었다. 양창수는 안시연을 막지 않았고 대신 시간만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큰아씨께서 곧 저녁을 가져오실 겁니다.”안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이미 양혁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 나 배고파 죽겠어.”안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혁수 씨, 점심 안 먹었어요?”“먹기는 뭘 먹어. 오늘은 내가 새 삶을 살며 처음 먹는 식사잖아.”그제야 안시연은 양혁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안시연이 준비한 만두는 속이 거의 없고 반죽도 흐물거려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양혁수는 만두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네가 직접 만든 거야?”안시연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맞아요.”양혁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안시연을 바라봤다. “사실은 배달 음식이에요.”안시연이 결국 고백했다.양혁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배달 음식이면 어때.”양혁수는 입을 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 입만 먹여줘.”안시연은 뒤돌아 밥상을 찾으며 양혁수 혼자 먹기를 바랬다.“내 손에 힘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어!”양혁수가 투덜댔다.“제가 그릇을 들고 있을게요. 혁수 씨는 숟가락으로 드시기만 하면 돼요.”“그럼 안 먹어.”안시연은 어이없었다.“...”병실 밖.양창수는 유리창 넘어 병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안시연 씨께서 먹여 줄까요?”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병실 안을 보지 않았다.하지만 양창수는 연정훈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네. 먹여 주네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양창수의 이런 태도는 이제 익숙해진 연정훈에게 더 이상 놀라운 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연정훈은 양석진의 짓궂은 유머 감각까지 알게 될 정도였다.안시연 때문에 양혁수가 칼을 맞았으니, 당연히 양지원이 안시연을 탐탁지 않게 여길 줄 알았지만
안시연이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연정훈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바로 추궁하지 않고 사람을 조용히 뒤따라가게 했다.양혁수의 병실 근처는 이미 철저하게 경비가 서 있었다.안시연은 소현정이 갑자기 찾아와 꼭 지금 만나야 한다고 고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시연이 계단 쪽으로 가니, 그곳에 소현정이 엄숙하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왜 여기까지 오셨어요?”소현정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안시연을 때릴 뻔했다.오성호가 급히 귀국하자, 소현정은 양혁수가 안시연이라는 여자 때문에 세 번이나 칼에 찔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소현정의 귀한 아들이었다.목숨을 잃을 뻔한 것도 모자라서 상대가 하필 양지원의 딸이라니 더욱더 충격이었다.소현정은 속이 타들어 갔고 밤을 새워 양혁수를 보려고 양주로 달려왔지만, 오성호에게 거절당했다.소현정은 안시연을 통해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너에 대해 조금 들었어. 그래서 특별히 널 보러 온 거야.”안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어디서 그런 소식을 들었어요?”소현정의 눈빛이 흔들리며 답했다.“너의...오성호 삼촌이 말해줬어.”안시연은 최근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져 있었고 이 말을 듣고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소현정은 다급히 다가와 안시연의 손을 잡고 앞뒤로 살피며 말했다.“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전 괜찮으니, 이제 돌아가세요.”안시연이 말했다.소현정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정은 안시연이 양혁수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안시연 역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안시연을 통해 양혁수를 몰래 만나보려 한 것이다.“시연아, 넌 몇 호 병실에 있니? 엄마가 저녁에 먹을 걸 챙겨다 줄게.”안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는 입원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넌...”“저는 혁수 씨를 보러 온 거예요.”소현정은 그 말을 듣고 내심 기뻤다.“네가 양혁수를 만날 수 있어?”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소현정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
양지원은 막 원장에게서 양혁수의 상태를 듣고는 가까운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위층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양지원의 귀에 들어왔다.소현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엄마'라는 단어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양지원은 차가운 눈빛으로 안시연을 바라보며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안시연은 당황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으로 무의식적으로 소현정 앞을 막아섰다.“양 대표님...”양지원은 천천히 다가가며 차갑게 물었다.“안시연 씨, 혹시 혁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요?”“아니에요!”안시연은 즉시 부인했다.양지원과 많은 교류는 없었지만, 양지원은 김세연처럼 안시연을 깔보지 않았다. 그래서 양지원 같은 당당한 어른 앞에서 비굴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안시연 씨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면, 둘이 왜 몰래 만나는 거죠?”양민아는 끼어들어 말했다.양민아의 말이 끝나고 양지원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양지원에게는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결코 드러낼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였다.양혁수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양지원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했고 안시연에 대한 적대감은 한없이 커졌다.안시연은 급히 해명했다.“어머니는 제가 여기 입원한 줄 알고 저를 보러 오신 거예요.”당황스러웠던 소현정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소현정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양지원을 향해 도전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이 병원이 양 씨 소유도 아니고 네가 올 수 있으면 나도 당연히 올 수 있는 거 아니야?”이 말에 양지원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인데 자신은 보지도 못하고 이 여자는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원망과 질투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소현정은 양지원과 안시연이 마주한 상황의 위험성을 잠시 잊었다.양지원은 이런 여자와 말싸움하는 것조차 가치 없다고 느꼈다. 양지원은 안시연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전에는 안시연 씨를 불쌍한
연정훈과 오성호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욱 수습하기 어려워졌다.소현정은 크게 울며 소리쳤다.“난 그저 내 딸을 보러 온 것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오성호는 양혁수 때문에 급히 돌아와 구체적인 상황은 잘 몰랐지만, 연정훈이 안시연을 보호하는 모습과 안시연의 얼굴이 양지원을 닮은 것을 보자마자,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그 순간, 차가운 기운이 발끝부터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갔다.오성호는 재빠르게 소현정을 노려보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소현정은 그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자존심에 물러서지 않았다.그녀는 연정훈이 안시연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연정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연 대표님, 공정하게 말씀 좀 해주세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했나요? 그저 딸을 보러 온 것뿐인데, 양 대표님이 저를 쫓아내려 하시네요.”이 명백하고도 저열한 이간질에 안시연은 더욱 어지러움을 느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소현정 씨, 불쌍한 척할 필요 없어요.”양민아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아까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해요. 당신과 당신 딸이 이긴 사람들이라고 하셨죠. 당신은 제 엄마의 남편을 빼앗았고 당신 딸은 연 대표님을 사로잡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정말 대단하네요, 당신네 모녀.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능력이죠. 그렇죠?”“난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명분만 차지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제삼자인 거 모르시나요?”“그만둬!”오성호가 묵직하게 소현정의 말을 끊었다.“아직도 창피한 것을 모르겠어?”소현정은 바로 입을 닫았다.소현정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채 연정훈을 쏘아봤다.양민아가 더 말을 던지려 했지만, 그때 연정훈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당신이 안시연의 어머니인가요?”연정훈이 소현정에게 물었다.소현정은 원래 오성호를 두려워했지만, 연정훈은 젊고 고귀해 보여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연정훈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소현정은 갑자기 겁이 났다.“네...”“안시연에게서 들
시립 병원에서.양지원의 기분은 극도로 나빴고 결국 양혁수를 보러 가지 않았다.사건 담당자가 양혁수가 사고 당일 현장에 남긴 물건을 전달하러 왔을 때, 양지원은 심한 두통으로 양민아를 대신 보내기로 했다.양민아가 막 떠나자마자 양창수가 도착했다.“큰아씨.”양지원은 양창수를 보자마자 양석진이 떠올랐다.순간적으로 양지원의 눈빛이 흔들렸다.“왜 왔어요?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아닙니다.”양창수는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석진 씨께서 급히 돌아가셔야 해서요. 그곳에서 석진 씨가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요.”“이렇게 빨리 떠나신다고요?”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양혁수가 사고를 당했을 때, 양석진은 밤새 달려왔고 양지원은 그가 오성호보다 먼저 와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양혁수를 돌보느라 양석진과 제대로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요즘 석진 씨가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양창수가 말을 이었다.양지원은 실망했지만,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감정을 억눌렀다.“오빠에게 건강 잘 챙기라고 전해주세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으며 나무로 만든 보석 상자를 건넸다.“아씨께서 건강하시면, 석진 씨의 걱정도 덜어지고 석진 씨도 건강해지실 겁니다.”양지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말이 불편하게 들렸다.이제는 더 이상 어릴 때처럼 그에게 말썽을 부리지도 않는데 무슨 걱정을 하게 한다는 말인가.그래도 참자.양창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양지원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양지원이 좋아하는 자색 진주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진주의 품질은 부드럽고 뛰어났지만, 최고급은 아니었다.“오빠가 사준 거예요?”“네. 석진 씨께서 우연히 보시고 아씨에게 어울릴 거로 생각하셔서 사신 겁니다.”양지원은 마음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침착했다.“오빠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부러 양지원의 얼굴을 두어 번 더 살폈다.양지원은 자신이 품은 감정이 들킨 듯한 느낌에 살짝 눈살을 찌푸
양민아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마침내 결과를 받았다.안시연의 신분증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생일은 9월 4일이었고 아버지는 그해 1월에 사고로 사망했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안시연은 유복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만약 안시연이 10월에 태어났다면 그 시간대는 전혀 맞지 않았다.안시연은 오성호의 아이일 가능성이 더욱 커 보였다!양민아는 불안감에 휩싸인 채, 계속해서 조사를 지시했고 오성호와 소현정이 처음 연결된 시점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명령했다.그리고...“어떻게든 안시연의 유전자 검사 샘플을 구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양민아는 생각해 보니, 유전자 검사만이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오성호의 샘플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양혁수의 샘플은 구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오성호의 아들이니, 그와 안시연의 유전적 관계만 확인하면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만약 안시연이 오성호의 딸이라면 양민아에게는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오성호는 이미 양씨 그룹에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고, 그의 딸 또한 충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양민아는 깊은 고민 끝에 또 하나의 보험을 들기로 결심했다.양씨 가문의 양녀라는 신분만으로는 결국 너무 불안정했다. 정민아는 반드시 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어야만 했다!그렇게 결심한 양민아는 해외에서 휴가 중인 양홍두에게 전화를 걸었다.“할아버지, 저 민아예요...”...연정훈의 ‘결혼은 안 한다’라는 말에 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연정훈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연정훈은 자기 말을 이미 고백이라고 생각하며 안시연이 자신의 진심을 이해하리라 믿었다.“네 고백은 잘 들었어, 하지만 다음번에는 그런 고백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부승희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이승우도 비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안시연 씨가 네 말을 이해한다면 안시연 씨는 보통 사람이 아닐 거야.”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연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