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민수희를 만나 비로소 말로 사람을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단 두 마디의 간단한 말만으로 안시연의 자존심은 무너졌다. 아이, 신분 얘기들.표면적으로 관대하게 들렸지만, 실제로는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도 연정훈의 정식 연인으로서 존재하는 안시연에게 그런 말은 더욱 황당하게 느껴졌다.안시연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을 본 민수희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라고 확신했다.안시연은 자존심이 강하고 연정훈의 재산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민수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시연이 가진 것은 아름다운 외모 외에는 별로 없으며 그것마저도 민수희의 눈에는 무모한 야망으로 보였다.“사실 네가 이 집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연정훈이 널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를 설득해서 너를 내보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다면 그냥 여기 계속 있어라.”“나중에 연정훈이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때 우리는 신혼집을 따로 마련해 줄 계획이니, 그때는 준비하렴.”안시연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약혼이요?”“연정훈이 네게 말하지 않았니?”민수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안시연은 말이 목에 걸려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민수희는 더욱 평온하게 말을 이어갔다. “양민아는 알고 있지?”“우리와 양씨 가문과 대대로 인연이 깊은 집안이야. 그만큼 적합한 혼사가 또 있을까?”민수희의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처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필연처럼 들렸다.“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넌 연정훈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비우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너에게도 너의 아이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 테니까.”안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안시연은 더 이상 민수희를 보지 않았고 창백한 얼굴로 일어섰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아직 제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 같습니다.”“그래, 괜찮아. 네 방으로 가서 쉬어.
“네가 이제는 다 커서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거 다 알고 있다.”“생신 잔치 날, 넌 오지 않아도 돼. 하지만 발표 일정은 바뀌지 않을 거야.”“그때는 모든 사람이 이 할머니를 비웃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이지.”할머니가 나가면서 차분한 어조로 남긴 마지막 말이 연정훈을 충격에 빠져들게 하였다.민수희는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할머니가 말해 줄게. 오늘 같은 계획은 원래 네 것이 아니었어. 혼인 계획을 하더라도 내 아들에게 돌아갔겠지. 그런데 누가 막내아들을 위해 계획할 기회를 가로챘을까? 바로 너야.”“너의 작은아버지는 너 때문에 죽은 거야. 잊지 마라.”오래도록 봉인된 기억이 마치 누군가의 손으로 연정훈의 목을 조이는 듯, 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했다.연정훈은 감정을 억누르며 침실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안시연이 캐리어의 비밀번호를 맞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연정훈은 캐리어를 보며 눈빛이 어두워지며 물었다.“어디 가려는 거야?”안시연은 태연하게 일어섰다.“정훈 씨 할머니께 들었어요. 약혼한다면서요?”“그런 일 없어.”연정훈은 단호하게 부정했지만, 안시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저는 우선 나비와 영준이를 데리고 벚꽃동으로 갈 거예요. 며칠 뒤에 집을 구하면 그때 나갈게요.”그렇게 말하고 안시연은 두 마리 양에게 목줄을 차 주었다.연정훈은 관자놀이가 심하게 뛰고 마음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했다.“안시연, 나는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어.”연정훈은 다시 강조했다.안시연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네. 알겠어요.”연정훈은 침묵했다.“...”“정훈 씨가 약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아무 문제 없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연정훈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혼인에 끼어들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안시연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들으며 고통스러웠다. 안시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연정훈의 예민한 신경을 더 괴롭히
연정훈이 너무 강하게 안아서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그의 거친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떠나보내기 싫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안시연은 눈을 감고 목구멍에 맺힌 씁쓸함을 삼키며 연정훈을 밀어내려 했다.“정훈 씨, 놓아줘요.”하지만 남녀의 힘 차이는 너무 컸고 안시연의 힘으로는 연정훈을 전혀 밀어낼 수 없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아래층에서 이 광경을 본 아주머니는 얼른 주방으로 돌아갔다.양 두 마리는 양쪽에 서서 고개를 들고 구경하고 있었다.연정훈은 한참 뒤에야 진정하며 안시연을 놓아주었지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안시연을 서재로 끌고 갔다.안시연은 계속해서 몸부림쳤다.“뭐 하는 거예요?”서재 문 앞까지 오자 나비도 따라가려 했다.연정훈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나비는 침을 뱉었다.서재 안에서 안시연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도망칠 수 없었다.연정훈은 화를 억누르며 안시연의 얼굴을 쓰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나랑 헤어지고 싶은 거야?”안시연의 마음이 아파졌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헤어지다니요. 우리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냥 제가 교수님한테 약간의 이득을 봤고 일을 안 하고 돈을 받은 것뿐이었죠.”안시연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교수님이 신경 쓰인다면 시급으로 계산해서 제 월급에서 빼도 돼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좋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더 아프게 하였다.“양주에서 내가 한 말은 전부 흘려들은 거야?”안시연은 대답했다.“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다행이네요. 안 그랬으면 교수님 정말 곤란하셨을 거예요. 앞에서는 저한테 같이 있자고 하시더니, 뒤에서는 약혼을 준비하고 계셨다니요.”연정훈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난 누구와도 약혼할 생각이 없다고.”안시연은 고개를 떨구고 깊은 숨을 내
연정훈은 거칠게 안시연의 입술을 탐했고 안시연은 호흡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아까부터 자꾸 머리가 어지러웠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다.그러자 연정훈은 빠르게 안시연의 허리를 잡고 자기 몸에 기대게 했다.그는 제 멋대로 입술을 탐했으며 안시연이 지금 본인의 기분을 직접 느끼게 하고 싶었다.‘모르겠다면 알 때까지 하면 되지.’“음...”연정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자신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각도를 조정했다.안시연은 심장이 쿵쿵 뛰었으며 머릿속으로 전류가 파고드는 것처럼 온몸이 짜릿짜릿했다.연정훈이 자신을 가두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되자 안시연은 그를 깨물기로 했다.하지만 이미 여러 번 물린 경험이 있었던 연정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빠르게 그녀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읍!”안시연이 고개를 쳐들었다.입을 다물 수 없게 되자 입가로 무언가 길게 늘어져 나왔다.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찾아왔으나 그녀는 저항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안시연은 연정훈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고 점점 무게가 연정훈에게 실렸다. 그는 안시연의 자세가 불편하다고 생각되어 살짝 뒤로 물러섰다.키스를 마치고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안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두 눈을 다시 꼭 감고 인상을 찌푸렸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가 숨을 세게 들이쉬는 그녀를 보며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어디 불편해?”안시연은 머리만 괜찮았다면 그에게 박치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불편하냐고 물을 수 있는 걸까?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안시연은 연정훈을 세게 밀어내려 했다.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연정훈이 표정을 구기고 그녀를 부축했다.안시연은 그의 품에 기댔고 머리가 윙윙 울리더니 눈앞의 사물이 중첩되어 보였다.그의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아 안시연은 또 몸을 뒤로 뺐다.그러나 연정훈은 그녀가 걱정되어 다시 한
안시연은 너무 심장이 쿵쾅거려 연정훈이 없는 곳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어 고집을 피웠었다.그런데 연정훈은 바로 안시연에게 입을 맞춰 도망갈 수 없게 했다.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안시연은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당겼다.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연정훈도 얌전히 누워있는 안시연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연정훈은 손을 뻗어 안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의사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려. 그동안 좀 쉬고 있어.”안시연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잠이 오지 않았다.연정훈은 아무 말도 없는 안시연의 옆으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시간이 지나고 안시연은 누워있던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싶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리면 연정훈과 마주 보아야만 했다.이제 허리가 점점 시큰거리는데 옆의 연정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나비가 밖에서 작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내가 나가 볼게.”연정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안시연이 드디어 작게 대답했다.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에 연정훈이 방문을 나섰다.그가 방을 나서고 안시연은 침대 위에서 찌뿌둥하던 몸을 한참 뒤척였다. 그리고 연정훈이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를 등지고 누웠다.민수희가 직접 명령을 내렸으니 연정훈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안시연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오직 그녀만이 그에게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줬다.어지럽던 머리가 진정되고 안시연은 잠이 솔솔 밀려왔다.“큰 문제는 없습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외상 스트레스의 가장 좋은 해결법입니다.”의사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복용해야 할 약을 확인했다. 이어 주방으로 가 도우미들에게 안시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지시한 뒤 방으로 돌아갔다.안시연은 어느새 잠에 들었다.연정훈은 가만히 잠에 든 그녀를 지켜보다가 모든 고민을 뒤로 하고 같이 잠에 들기로 했다.두 사람의 핸드폰에는 불이 날 정도로 부재중 전화가 찍혔으나 두 사람은 전혀 관심이
양씨 가문.양혁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해 착잡한 기분이었다.그가 자꾸 병실 안을 왔다 갔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자 양지원도 인상을 팍 찌푸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양지원은 국그릇을 밥상 위로 탁 올렸다.“빨리 먹어.”“...”그는 상처 난 부위를 움켜쥐고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양지원에게 다가갔다.“또 어느 눈치 없는 녀석이 우리 양지원 씨 심기를 거슬리게 했을까요?”양지원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쭉 밀었다.“말만 하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어.”“먹고 싶지 않아요. 계속 누워있었더니 입맛이 싹 사라졌다고요. 많이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더부룩해요.”“...”양지원이 팔짱을 척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넌 민아와 연정훈이 약혼하길 바라고 있었잖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아들의 고민을 읽은 양지원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계약 약혼에 있어 양지원은 그동안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약혼은 순리대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르신이 갑자기 돌아와 직접 가입할 줄은 몰랐다.양지원은 막아서려 했지만 며칠 전 안시연과 소현정의 일로 기분이 상했고 막아설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쳐버렸다.두 가문 사람들이 모두 허락했으나 오직 연정훈만이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이 약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좋은 결말이 없었다.양혁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온 건 누가 입김을 불어서 그래요.”양지원도 모를 리가 없었다.“민아는 네 누나야.”양혁수가 쳇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양민아가 움직일 거라 양혁수는 미리 예상을 했었다.명예와 권력을 위해 낳아준 부모의 성도 버린 사람이 고마움이라는 걸 알 리가 없었다.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더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그런 소리 마세요. 난 외동아들이고 그 누구와도 재산을 나눠 가질 생각 없어요.”“그리고 이번에 결정된 혼사를 어머니는 절대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뱉은 말인지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부승희는 양씨 어르신이 보내온 모바일 초대장을 안시연에게 보냈다.[이 기세를 보아하니 두 가문이 큰 소식을 공개할 예정인 것 같은데요.][네. 연정훈 씨와 양민아 씨의 약혼 소식이겠죠.]???[안시연 씨, 그걸 지금 그냥 넘어간다고요?]안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날 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강남 시티를 한발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지냈지만 대화는 적은 편이었다.더구나 안시연은 아직도 연정훈에게 삐진 상태였다. 그리고 연정훈은 아주 느긋하게 그녀와 연장전을 이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내일 밤이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아주 당당하게 그녀를 집에 가뒀다.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던 안시연은 갑자기 걸려 온 연락을 받았다.외할머니가 병원에서 크게 넘어졌다는 소식이었다.외할머니가 다쳤다는 소식에 모든 고민이 다 2순위로 넘어가 버렸다.안시연이 급하게 집을 나서려고 했으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훈이 전화를 늦게 받자 안시연은 바로 큰소리로 화를 냈다.“외할머니가 다쳤어요! 지금 병원으로 가야 해요!”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연정훈은 바로 회의를 중지하고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회의실을 벗어났다.“외할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아니야. 일단 경호원을 시켜 병원으로 바래다줄게. 가는 길에...”“당장 날 내보내 줘요!”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외할머니를 많이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바로 경호원에게 그녀를 병원으로 바래다주라고 지시했다.“절대 안시연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세요.”“네, 걱정하지 마세요.”연정훈의 허락을 받은 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경호원과 함께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다행히 외할머니는 큰 부상이 아닌 팔목에 작은 멍이 들었을 뿐이었다.
안시연은 양지원이 그녀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차에 오르고 마주한 양지원은 말없이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창밖을 내다보니 일렬로 줄을 선 직원들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주변 환경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보니 경인시 국회의원 사무실까지 온 모양이었다.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석진의 주거지로 온 것이었다.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차에서 내리며 양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양지원은 안시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어떻게 연정훈의 옆에 붙어있는 건지.”“...”“양 대표님...”“따라와요.”양지원은 안시연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높은 하이힐로 녹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걸었다. 고풍스러운 별장 앞으로 예쁜 돌길이 있었으며 양편으로는 잘 정돈된 화단이 보였다. 하늘에는 빨간 노을이 졌고 별장 분위기가 신비롭게 느껴졌다.안시연은 어리둥절해서 그 뒤를 따랐다.양지원은 키로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왠지 이 정원으로 들어선 후부터 양지원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중년 보스의 부담을 덜고 조금 편해 보였다.그녀는 문을 열고 전등을 켜더니 안시연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편하게 앉아 있어요.”안시연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양지원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얌전히 창가 자리에 잡았다.양지원은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한가득 간식을 들고 내려왔다.그중에는 땅콩 치즈 쿠키도 있었는데 양지원은 박스 채로 완벽하게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얼굴을 굳혔다.“이걸 밥이라 생각하고 먼저 먹고 있어요. 물은 주방에 있어요.”그리고 양지원은 다시 가방을 고쳐 맸다.“저만 남겨두시는 거예요?”양지원이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날개가 달렸다고 해도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양 대표님!”“다 그쪽을 위한 거예요.”양지원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보탰다.“그쪽과 그쪽 엄마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해 데리고 들어온 거예요.”“하지만...”안시연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