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 가문이 대대로 쌓아온 부와 권세는 양지원 세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양홍두의 와이프는 탄탄한 집안 배경과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그들은 꽤 금실이 좋았지만,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소중한 딸만 두었다. 그 딸이 바로 양지원이었다.양지원이 처음 양석진을 만난 건 겨우 여섯 살 때였다.양홍두가 여러 소년을 데리고 와서 양지원에게 오빠로 삼을 아이를 고르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이유 없이 한눈에 양석진을 선택했다. 그저 잘생겼다는 이유였다.시간이 흐르면서 양지원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양석진은 단지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매우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양씨 가문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양씨 가문의 진짜 아들보다 더 친아들 같았다.“우리 오빠는 제일 똑똑하고 제일 멋져요!”어린 양지원은 늘 오빠 자랑을 입에 달고 살았다.왜냐하면 양석진은 똑똑하고 능력 있을 뿐 아니라 양지원을 누구보다 아껴주었기 때문이다.양석진이 가진 것이든 상으로 받은 것이든 밖에서 산 것이든 양지원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결국 모두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당시 양지원과 함께 놀던 친구들은 그런 똑똑하고 능력 있는 오빠가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양지원은 오빠 자랑을 중학교에 가서도 멈추지 못했다.양석진이 주는 사랑은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빠, 나중에 결혼은 천천히 하세요. 결혼하면 나한테 신경 안 써줄 거잖아요.”어릴 적 양지원은 이런 걱정을 자주 했다.양석진은 항상 차분하게 대답했다.“나는 결혼 안 해.”“정말이에요?”“응. 난 결혼하는 거 안 좋아해.”양석진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양지원은 웃으며 뒤에서 양석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지금은 그렇게 말해도,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생각이 바뀔걸요.”“안 그럴 거야.”양석진은 차분히 책장을 넘기며 반듯한 자세로 앉아 양지원의 팔을 살며시 떼어내고는 책을 내밀었다.“중요한 부분을 표시해 놓았어. 오늘 다 읽어.”“
양지원은 그날을 아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한참을 울었고 양석진은 평소처럼 그녀를 달래지 않았다. 양석진은 양지원 옆에 서서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고 그녀가 지칠 대로 지쳐 흐느끼자 마침내 양지원을 품에 안았다.“생일 선물은 이미 너한테 보냈잖아. 언제 내가 너한테 못 해준 적 있어?”“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양석진에게 억울하게 말했다.“방학 때 집에 안 들어오잖아요!”양석진은 변명했다.“너무 바빴어.”“아빠만큼 바빠요?”양지원은 양석진의 변명을 단번에 꿰뚫었다.양석진은 할 말이 없었다.양지원은 그의 항복을 눈치채자 바로 잡고 명령조로 말했다.“앞으로 방학 때마다 집에 와야 해요. 그리고 내 전화도 무조건 받아야 해요!”양석진은 고개를 숙여 양지원을 바라보며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다가, 나중에 남자친구 생기면 남자친구가 질투하면 어떡하려고?”양지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늘 양석진에게 여자친구가 생길까 봐 걱정했고 자신이 남자친구를 사귈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 곁에 있던 남자애들은 모두 양석진만큼 훌륭하지 않았기에 눈에 차지 않았다.“남자친구는 남자친구고 오빠는 오빠예요. 오빠와는 상관없어요!”“남자친구가 질투하면?”“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오빠를 질투하면 그냥 그런 남자친구는 안 만나면 돼요!”양지원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렇게 말하면서 울다 웃다 하더니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양석진의 팔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오빠,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요. 무슨 남자친구 타령이에요.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더라도 오빠랑 비교할 수 없어요.”양석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곧 시선을 피하며 평온하게 대답했다.양지원은 그의 반응에 활짝 웃으며 더 다정하게 양석진에게 매달렸다.“생일은 집에서 보내지 말고 여기서 보내요. 우리 둘이서만, 어릴 때 오빠가 나 데리고 놀러 다녔던 것처럼요.”“아빠가 집에서 널 기다리시잖아.”양지원은 콧방귀를 뀌었다. 엄마가
그날 밤, 달빛은 너무 아름다웠고 술은 너무 달콤해서 양석진의 방어와 감정의 억제가 서서히 풀려갔다.양지원은 양석진의 허리를 안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나 머리가 좀 어지러워요...”그녀는 말하면서 양석진의 턱에 머리를 비볐다.그들은 바닥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주위에는 먹을 것과 놀 것들이 흩어져 있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양석진은 한 손으로 양지원의 머리를 받쳐주며 그녀를 천천히 눕혔다.양지원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감고, 양석진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오빠도 어지러워요?”양지원은 나른하게 물었다.“잘 모르겠어.”양석진은 조용히 답했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으며 양석진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오빠, 바보예요? 어지러운지 안 어지러운지는 스스로 느껴지는 거잖아요.”양지원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저는 졸려요…오빠, 나 좀 안고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어요?”어릴 적부터 늘 그랬기에 양지원은 자연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양석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석진은 양지원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양지원은 볼을 부풀리며 양석진 손바닥의 시원한 감촉을 즐기다가 고개를 돌려 양석진과 눈을 마주쳤다.비몽사몽한 상태였지만, 양석진이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잠시 정신이 들었다.“오빠...”입술이 맞닿는 순간 양지원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양석진의 숨결이 몰아치며 그녀의 입 안으로 파고드는 순간이었다.“으읏!”독한 술과 과일 향 그리고 성숙한 남성의 체취가 뒤섞여 있었다.양지원의 머릿속은 폭발할 듯 어지러웠고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양석진이...그녀에게 키스하고 있었다.그 이후의 기억은 고통스럽고 씁쓸했다. 마치 무딘 칼날이 상처를 다시 후벼파는 듯 아팠다.그날 양지원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 사건 뒤에 그녀는 양석진에게 매정하게 말했다.“오빠, 미쳤어요!”“난...난 오빠의 여동생이
양지원이 평생 단 한 번 질투를 느낀 여자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바로 심혜설이었다.그들 둘은 모두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우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심혜설은 양석진을 자신만의 사람으로 당당히 만들 수 있는 여인이었다.심혜설을 처음 만났던 날, 양지원의 마음은 질투로 가득 찼다.그러나 그 당시 양지원은 자신의 감정 변화를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양석진은 3년 동안 자취를 감추더니 돌아오자마자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 그러니 양석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양지원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원할 때는 따뜻하게 대해주고 원할 때는 키스하며 또 원할 때는 양지원을 떠나버렸다. 그들의 관계를 망치고 먼저 떠난 건 모두 양석진이었다!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유치하더라도 그보다 더 떳떳하고 잘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마침 그때, 오성호는 양지원에게 정성을 다해 잘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양지원은 오성호가 다른 여자와 장거리 연애 중이었고 자신을 얻기 위해 그 여자를 떠났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양석진은 오성호의 허점을 알아채고 경고했지만, 양지원은 예민한 신경이 건드려진 듯 즉각적으로 반발했다.“내 남자친구에게는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있더라도 우리끼리 해결할 거예요!”“문제는 오빠예요. 빨리 결혼하세요. 언니를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요!”양석진은 양지원의 말에 충격을 받아 얼굴이 굳었다.“네가 내가 심혜설과 결혼하길 바라는 거야?”“당연하죠. 둘은 정말 잘 어울려요!”그때 양지원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무런 생각 없이 쏟아냈다. 오직 양석진을 자극하려는 것뿐이었다.그날 쏟아지는 폭우 속, 양석진은 재회 후 처음으로 집에 머물기로 했으나 양지원의 말에 화가 나 밤중에 다시 떠났다. 양석진은 바람과 빗속을 뚫고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져갔다.양지원은 창가에 앉아 자신의 태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눈물이 쏟아져 나와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그녀는 왜 그러는지 정말 알 수 없
“무엇이든 할게요.”양지원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의도를 품고 있는 남자에게 얼마나 큰 암시가 되는지 전혀 몰랐다.양석진도 남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고 이제 양지원이 그런 부탁을 하러 온 상황에서 그는 질투로 미쳐가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대체 그런 쓰레기가 어떻게 양지원의 눈에 들었는지 의문이 들었다.양지원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았더라면 양석진은 이토록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양석진은 술을 마셨고 양지원도 저항하지 않았다.그렇게 그들은 양석진의 침실에서 관계를 가졌다.둘 다 처음이었기에 그 과정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결국 양지원은 자신이 오성호를 구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인지 아니면 양석진과의 관계를 갈망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양지원은 오성호를 구하기 위해 갔던 것인지 아니면 양석진을 유혹하기 위해 갔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다.그 일이 끝난 후 양석진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양지원은 그의 뒤에 누워있었다. 둘 사이에는 오랜 침묵이 흘렀다.양지원은 이미 결심했다. 오성호가 풀려나면 그와 이혼하고 충분한 위자료를 지급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갚아야 할 것이 많았다.폭풍이 오기 전에는 언제나 고요한 법이다.다음 날 아침,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양석진은 급히 돌아가야 했다.양지원은 문가에 기대어 말했다.“오빠, 일이 끝나면 집에 와서 밥 먹어요.”“그래.”양석진은 오랫동안 양지원을 바라보다가 뒤돌아 떠났다.다음 날, 오성호는 풀려났다.양지원은 모든 것을 정리했고 그날 밤 오성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처음에 오성호는 양지원의 마음을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양지원의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식사 중 양지원은 차 한 잔을 마시고 이내 정신이 흐려졌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양지원은 양석진을 본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여 ‘오빠’라고
와장창!머그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양지원은 오랜 악몽에서 갑작스레 깨어나 희미한 스탠드 조명을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양민아가 뭔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전자 검사를 두 번이나 했던 게 분명했다.안시연과 양혁수.양혁수와 양지원.양지원과 양혁수 사이에는 친자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양지원의 아이는 누구인지 의문이다. 만약 안시연이 양지원의 딸이라면 안시연과 양혁수 사이에 혈연이 있어야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전혀 혈연이 없었다.그렇다면 안시연은 양지원과...양지원은 눈을 질끈 감고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양지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모든 일이 사실이라면 그 배후에는 분명 오성호가 있다고 확신했다. 오성호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옆에 놓인 휴대폰은 여전히 최근 통화 목록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양지원은 희미한 희망을 안고 다시 휴대폰을 잡았다.“손문병 씨.”“큰, 큰아씨!”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손문병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치 죽다 살아난 듯 큰 위안을 느꼈다.“무엇이든 하실 말씀이 있으면 지시해 주세요.”양지원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문병이 먼저 입을 열었다.양지원은 눈을 감고 어지러운 느낌을 진정시키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세 가지만 부탁할게요”“말씀하십시오.”“첫째, 민아 주변 사람들을 모두 처리하세요. 그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일이 더 커지지 않도록 막아야 해요. 필요하다면 민아까지도 제어하세요.”“둘째, 안시연 씨의 유전자 샘플을 확보할 방법을 찾아요. 최대한 빨리 저와 혁수의 검사를 진행해야 해요.”“알겠습니다.”양지원은 이미 지쳐 있었지만, 힘을 내어 계속 말을 이었다.“마지막으로 내 오빠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세요. 수년간 양창수 씨가 남긴 사람 중에 손문병 씨만이 내 곁에 남아 있잖아요. 그 이유를 손문병 씨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네.”입이 무겁기 때문이었다.양지원은 몇 번 숨을
양혁수는 몇 차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예전에 양지원이 샤워 중에 기절한 적이 있었던 기억에 불안해하며 문을 부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그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양지원은 창백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양혁수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양지원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잠시 멈칫한 양혁수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양지원에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에요? 삐쳤어요?”양지원은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차라리 양혁수가 못된 아이였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양지원이 키워낸 그녀를 꼭 닮은 아이로 오성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어떻게 혁수가 내 아이가 아닐 수 있을까?’양지원은 떨리는 손을 억누르지 못한 채 양혁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겨우 억눌렀던 감정이 그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이명 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결국, 양지원은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양혁수는 깜짝 놀라 재빨리 양지원을 안고 크게 외쳤다.“집사!”저택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새해 다음 날 아침 안시연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연정훈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며칠 만에 연정훈을 본 안시연은 그를 피하려 돌아섰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안시연이 편의점으로 향하자 연정훈이 뒤따라오며 태연하게 말했다.“며칠 후면 설날인데 진짜 나랑 같이 안 갈 거야?”안시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설인데 집에 안 가나요?”“네가 강남으로 돌아가면 나도 집에 안 가.”“참 영광이네요.”안시연의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가득했다.최근 연정훈이 안시연에게 값비싼 선물을 보낼 때마다 안시연은 이렇게 반응하곤 했다.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연정훈도 이제는 익숙해져 오히려 그런 반응이 귀엽게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최근에 소현주 만나지 않았어. 이미 선물도 보내서 고르기만 하면 끝난 거야.”안시연은
“아니에요. 차라리 내가 정리한 내용을 보여줄게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상대방의 원본 이메일을 보고 그 사람의 상황을 분석해 보고 싶었다.“원본을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필요 없어요. 시간 낭비예요. 어차피 조금 후 점심 먹어야 하잖아요.”“나와 점심 한 끼 먹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안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흘끗 쳐다보았다. 안시연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연정훈이 이렇게 질질 끌지 않았다면 둘은 이미 헤어졌을 것이다.연정훈은 어이없었다.“정리한 내용이나 보여줘.”안시연은 짧게 대답하고 휴대폰을 연정훈에게 건넸다.그녀는 아주 자세하게 정리해 두었고 안시연의 질문과 상대방 이메일의 캡처 내용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질문은 간단했고 그 캡처된 내용은 연정훈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스크린 너머에서 연정훈은 묘한 익숙함을 느끼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질문하는 방식이 자신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상대방이 남성일 것이라고 연정훈은 거의 확신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질문이 너무 어려워 연정훈을 난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정훈 씨, 메모장에 적어둘게요. 돌아가서 정리해서 확인해 보세요.”연정훈이 말했다.“알았어.”그제야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평화로워졌고 마치 오랜 시간 전에 서로 잘 알지 못했던 예의 바른 관계로 돌아간 듯했다.연정훈은 운전석에 앉아서 최신 유행 휴대폰 케이스를 씌운 안시연의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며 안시연은 조수석에서 초콜릿 모찌 한 상자를 열었다.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다시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블루투스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안시연은 화면을 힐끗 보았고 ‘엄마’라는 이름이 나타났다.연정훈도 그 화면을 보았다.연정훈이 소현주 일에 대해 따져 묻고 난 뒤, 그는 아직 김세연을 만나지 않았으며 이번이 김세연이 연정훈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안 받아요?”안시연이 그에게 물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