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주는 이곳에 갇힌 채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병은 반은 실제였고 반은 그녀가 만들어 낸 망상이었으며 때때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누군가 그녀에게 연정훈과 양시연이 결혼했다는 말을 전한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그것이 소현주의 악몽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일지도 몰랐다.양시연의 얼굴이 몇 년 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그녀의 또렷이 커진 배를 보자 소현주는 온몸을 떨며 그 아이가 분명히 연정훈의 아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나는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연정훈은 밖에서 양시연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며 아이까지 가졌구나.’잠시 침묵하던 소현주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달려들며 그녀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소현주를 제압하며 쉽게 저지했다.“당신이 감히 여길 어딜 들어와요? 감히 여길 오다니. 죽여버릴 거예요.”양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아 경호원들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눈짓한 후 담담히 말했다.“내가 누군지 기억하는군요. 지난 몇 년 동안 저를 꽤 미워하셨나 보네요.”소현주는 독이 서린 눈빛으로 양시연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서늘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소현주 씨가 이렇게까지 몰락한 게 전부 제 탓이라고 하시려는 건가요?”“당연히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만 없었더라면 연정훈이 나를 이렇게 버리지는 않았을 거예요.”‘역시 현실을 부정하며 여전히 환상 속에서 살고 있군.’“제가 없었다고 해도 소현주 씨가 연정훈 씨에게 숨겼던 진실이 영원히 묻힐 거로 생각하셨나요?”양시연의 말에 소현주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굳어졌다.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높였다.“내가 뭘 숨겼다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요. 연정훈이 마음을 바꾼 건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그 말을 하면서 소현주는 마치 자신이 말한 것을 믿는 듯했다. 소현주의 눈에 핏
“무슨 뜻이에요?”소현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양시연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지금 옆에 휴대폰 있어요?”소현주는 그녀의 차분한 얼굴을 보며 점점 더 당황했고 얼굴에 일부러 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부추겨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죽지도 못하게 했잖아요. 당연히 내게 휴대폰이 없죠.”“그렇다면 그 사진들은 소현주 씨가 유출한 게 아닌 거네요?”양시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소현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감정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되어서 경호원에게 놓아달라고 소리쳤다.여기는 연정훈이 마련한 곳이 아니었다. 지난번 소현주를 데려간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고 양시연은 오늘 밤 이미 충분히 위험을 감수하고 왔다. 그녀는 당연히 소현주가 어떤 일도 생기지 않게 해야 했고 사람들에게 빌미를 줄 수 없었다.“나는 당신을 놓아주고 휴대폰도 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차분해지고 이성적으로 되었을 때 해줄 거예요.”양시연이 차분하게 말했다.소현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고 그녀는 양시연을 증오하는 눈빛으로 째려봤다.양시연은 경호원에게 소현주를 풀어주라고 지시하였다.“양시연 씨, 도대체 뭐 하려고 그러는 거죠?”소현주가 침대 옆에 의지해 간신히 일어나면서 물었지만 양시연은 설명하지 않았고 대신 경호원에게 말했다.“소현주 씨에게 휴대폰을 주세요.”‘휴대폰이라니.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거야.’소현주는 더 이상 고민할 겨를도 없이 휴대폰을 덥석 잡았고 마치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은 듯했다.“메일을 한 번 열어봐요.”양시연이 그녀에게 말하자 소현주는 그녀를 힐끔 보았고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양시연은 여유롭게 소현주에게 물었다.“그동안 당신과 통신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또 누가 당신 대신 연정훈 씨의 질문에 답했는지.”이 말을 듣자 소현주는 이미 양시연이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손에 든
소현주는 이메일을 열자마자 두 장의 사진을 확인했고 양시연은 연이어 몇 장의 사진을 더 보냈다.사진을 찍는 양시연의 동작이 반복될 때마다 소현주의 온몸은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말도 안 돼.”소현주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양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이 이메일 양시연 씨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다른 사람한테서 얻은 거죠?”소현주는 자신과 대화를 나눈 사람 그리고 연정훈의 질문에 답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절대 양시연일 리 없었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소현주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던 듯 잔잔히 웃으며 손으로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소현주 씨뿐만 아니라 나도 믿기 어려운 일이에요.”“가식 떨지 마요.”소현주는 그녀의 말을 끊고 억눌린 감정을 더는 참지 못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양시연 씨일 리가 없어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그녀의 단호한 부정 속에는 절망과 무너진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양시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연정훈 씨는 아직 몰라요.”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시연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곧 알게 될 거예요.”양시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연정훈 씨와 진심으로 소통했던 사람은 나였고 결국 정훈 씨가 사랑하고 곁에 남길 선택한 사람도 나예요. 소현주 씨의 의심은 틀리지 않았어요. 사실 나에겐 이메일을 살 능력도 있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말하면 연정훈 씨는 무조건 믿을 테니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훈 씨는 나라는 걸 알았을 때 기꺼이 믿으려고 할 거예요. 정훈 씨가 얼마나 놀라고 기뻐할지 전 이미 상상이 가거든요.”“닥쳐!”소현주는 비명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냈고 행동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방 안을 서성이며 옷과 머리를 마구잡이로 잡아 뜯던 소현주는 기진맥진한 끝에 침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소란이 커지자 간호사가 문을 두드렸다.양시연은
‘불가능해.’양시연은 연정훈과 수없이 얽혀 있었던 소현주를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었고 소현주의 절박한 부탁도 양시연은 그냥 무시했다.양시연은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소현주가 살고 싶다면 알아서 처신하는 게 소현주에게도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병원을 나오자마자 양시연은 임성원에게 모든 절차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지시했다.차에 올라타자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불룩해진 배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아기야. 이제 집에 가자. 바보 같은 아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차가 출발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 연정훈은 이미 집에 있었다.그는 방금 접대를 마치고 돌아온 듯 약간 술에 취한 상태로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양시연을 기다렸다.양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연정훈의 뒤로 다가가 귀를 살짝 꼬집었다.연정훈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성숙하고 근엄한 표정 사이로 미묘한 놀라움이 흘러나왔다.그가 오후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양시연은 차갑게 굴었는데 돌아왔을 때 그녀의 태도가 달라져 있어 그는 의아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순수하고 어리숙한 눈빛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연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두 걸음 빠르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안았다.“어디 갔다 왔어?”양시연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임성원 씨가 말 안 했어요?”연정훈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물어봤는데 아주 단호하게 알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말도 안 돼요. 당신 부하가 감히 당신한테 그렇게 말해요?”“예전엔 내 부하였지. 지금은 당신 사람이 되었으니 나한테도 눈치 주는 게 당연한 거지.”연정훈은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고 양시연은 콧소리를 내며 식탁에 앉아 오렌지 하나를 들어 그의 손에 쥐여줬다.“빨리 까줘요. 우리 아가가 먹고 싶대요
연정훈은 어리둥절하며 양시연에게 말했다.“난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도 내게 바보라고 한 적이 없었어.”양시연은 가볍게 대답했다.“그럼 오늘부터 생긴 거네요.”연정훈은 어이없어했다.“...”연정훈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한 후 양시연에게 다가가서 진지하게 말했다.“힌트 좀 줄래?”양시연은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스스로 생각해요.”연정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도 생각할 방향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없어요.”양시연의 막무가내 태도에 연정훈은 잠시 멈칫한 후 웃음을 참지 못했다.연정훈은 팔꿈치를 지탱하며 옆으로 누워 그녀를 바라보고는 허리를 감쌌다.“내가 계속 못 맞추면 계속 만지지 못하는 거야?”“당신이 알아서 해요.”양시연은 교만하게 말한 후 연정훈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췄다.그녀는 작은 신음을 내며 눈을 뜨고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다시 해봐요.’연정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알았어. 안 할게.’연정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이 항복을 의미했다.양시연은 흡족하게 입을 굳히며 돌아서서 그를 보지 않았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며 입술을 대고 말했다.양시연은 그만하라는 듯이 손으로 귀를 가렸지만 연정훈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임산부는 마음이 편안해야 한다고. 내가 계속 못 맞추면 아마 네가 더 기분이 안 좋을 거잖아.”양시연은 눈을 뜨며 물었다.“내가 뭐가 기분이 안 좋을 게 있어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그의 굳은 손가락이 그녀의 섬세한 피부와 마찰하면서 기분 좋은 간질거림을 느끼게 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무언의 암시를 즉시 느끼고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손목을 뻗어 그를 밀쳐냈다.연정훈은 상황을 보고 더욱 버릇없이 굴며 가슴을 그녀의 등 뒤에 대고 고개를 숙여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콤한 말로 달래며 말했다.“내가 바보여서 못 맞춘 건 내 잘못이야. 제발 너 자신
“정말 못 맞추겠어.”연정훈은 3초 동안 불을 켜고 고민하다 결국 또다시 항복하자 양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한껏 비웃었다.“뭐든 시간제한은 있어야지. 퀴즈를 내면 답도 공개해야 하는 법 아니야?”연정훈이 항의하듯 말하자 양시연은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네.’이 문제의 복잡함으로 봐서 양시연이 먼저 말해주지 않는 이상 그는 아마 평생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혹여 가능성이 있다면 언젠가 그가 소현주를 떠올리며 과거를 다시 되짚어보고 그녀와의 기억 속 단서를 양시연의 성격과 겹쳐 보며 답을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연정훈이 소현주를 떠올릴지는 알 수 없었고 설령 떠올린다 해도 결혼 이후 양시연은 연정훈과 문학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과거의 유치한 발언들을 다시 끄집어내기는 더욱 어려워 보였다.결론적으로 연정훈은 혼자서 이 문제를 풀 수 없었다. 결국 양시연이 입을 열었다.“딱히 시간제한은 없어요. 대신 날 기쁘게 해봐요. 내가 기분 좋아지면 힌트를 줄게요.”“진짜지?”“네.”‘좋아.’연정훈은 딸깍하고 불을 껐다. 양시연은 그가 곧 달콤한 말을 할 줄 알고 기대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이 이어졌다.어두운 공간에서 연정훈은 그녀 쪽으로 다가오더니 부드럽게 그녀 위로 몸을 기울였다. 익숙한 가까움이 느껴지자 그녀는 깜짝 놀라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뭐 하는 거예요...”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머리맡에 눌러두며 배는 조심히 피했고 그의 입술이 천천히 양시연의 입술을 지나 귀끝에 닿았을 때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네가 말했잖아. 널 기쁘게 해달라고.”양시연은 침묵했다.“...”‘아. 변태.’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연정훈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손이 그녀의 잠옷을 살며시 올리며 피부를 스칠 때 저도 모르게 얕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결국 연정훈의 방식은 여전히 정확하고 효과적이었다.조용히 밤이 깊어졌고 두
양시연이 임신한 후 양지원은 경인에 없을 때도 자주 전화를 걸었으나 이번에는 시간이 좀 지나갔다.양시연이 먼저 전화를 걸자 양지원은 말했다.“한강시가 더워져서 요즘 기운이 없네.”“언제 돌아올 거예요? 아빠랑 둘 다 한강시에 오래 있었잖아요.”“곧 돌아갈 거야. 경인에 며칠 지내고 시원한 곳을 찾아야겠어.”양지원이 말했다.모녀는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양시연은 전화를 끊었고 그때 양시연은 양석진이 한강시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니면 양석진이 경인에 있을 때처럼 자주 오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그녀는 이 의문을 품고 점심때 연정훈에게 물어봤는데 그가 말했다.“부모님 사이가 좋은 거지. 비록 계속 오가더라도 아버님께서 즐기고 계신 거야.”“당신은 잘 아네요.”“같은 남자니까 당연히 알지.”양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연정훈은 계속해서 밥을 먹으라며 그녀를 달랬다. 그러면서 수수께끼의 답을 다시 꺼내었고 양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조금만 힌트를 줄게요.”연정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말해 봐.”양시연은 하나씩 나열했다.“태양계 주요 행성들의 비교 분석, 행성이 되지 못한 태양계 천체들, 태양계 외 행성 탐사 진행 상황.”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기댔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최근 천문학에 관심이 생겼어?”양시연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나는 항상 관심 있었어요.”‘바보.’연정훈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그럼 최근에 중요한 연구 발견이 있었어? 갑자기 내가 바보라고 말하는 거 보니 내가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됐어요. 말하면 말할수록 당신이 더 바보 같아요.”연정훈은 무안해하며 한숨을 쉬었는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잠시 전화를 내려놓고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주지혁이 들어왔다.“연 대표님, 이 두 가지 신청서에 서명해 주세요.”
양시연은 양석진이 한강시에 머무는 이유가 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상황을 확인하러 가자.”연정훈은 곧 양시연의 사무실에 도착해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보통 아버님께서 고의로 정보를 차단하려면 내게까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야 하는데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야. 이건 아버님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일 수 있어.”연정훈의 말은 그럴듯했지만 양시연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그때 진수빈이 들어와 짐을 모두 챙겼다고 말하자 양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 혼자 갈게요.”연정훈은 즉시 반대했다.“난 너랑 함께 갈 거야.”“괜찮아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우리는 아직 상황을 모르잖아요. 당신과 내가 갔다가 왔다 갔다 하면 며칠이나 걸릴지 몰라요. 당신은 일을 열심히 해요.”“너의 일에 비하면 업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연정훈은 말했다.양시연은 마음속으로 감동했지만 이성은 여전히 우위를 차지했고 그녀는 패드를 정리하며 말했다.“인생은 길어요. 언제든지 일이 생길 수 있는데 당신이 항상 나 때문에 일을 내려놓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혼자 가도 괜찮아요. 게다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도 많고 당신이 일을 놓고 나랑 가는 게 오히려 부담될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옆에서 연정훈을 안으며 말했다.“됐어요. 정훈 씨는 여기서 잘 있어요. 난 아빠를 보러 갈게요. 어쩌면 별일 없을 수도 있겠죠.”그녀는 이 말을 하며 자신을 위로하고 긴장을 풀려 했다.연정훈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양시연을 안은 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양시연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가 경인에 남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나 안 갈게. 대신 약속해 어떻게 되든 꼭 자신을 잘 지키겠다고.”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두 사람은 정인에서 저녁을 먹고 연정훈은 임성원에게 양시연을 한강시로 안전하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연정훈은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